비헬르 공방전(3)
비헬르 성채의 북쪽 구릉지대를 넘어서면 숲으로 둘러싸인 '보샹'이라는 곳이 나왔는데 바로 이곳에 제국의 231동원연대가 매복해 있었다. 이들 역시 남쪽의 모흐몽에 매복하고 있던 232동원연대와 더불어 아라곤 왕국군의 배후를 포위할 두 개의 부대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는데, 불행히도 이들 역시 비다르의 계략으로 인해 그 위치가 발각되어 전투를 치르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은, 아라곤 왕국군이 보샹으로 들이닥치던 바로 그 순간 부대의 매복 구역을 시찰하던 연대장과 대대장들이 전투에 휩쓸린 나머지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이 어이없는 상황으로 인해 231동원연대의 1대대장으로 있던 중령 하나만이 연대 수뇌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연대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고, 그들이 치르고 있던 전투 역시 점차 밀리는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엿 같은 상황이라니...
마침 단정한 외모의 중령 하나가 마음속으로 재차 욕설을 내뱉으며 연대의 후미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세 에르난 데 레예스 남작이 이끌던 3천의 아라곤 왕국군이 노도와 같은 움직임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231연대 병력은 점차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숲과 구릉지가 많은 지형이라서 중령은 포위를 당할 염려 없이 연대 병력을 조금씩 뒤로 움직이며 적 병력이 아군 대형 깊숙이 들어와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사실 대대급 지휘관에 불과한 중령으로서는 연대급 부대의 지휘가 처음이었기에 초반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지만, 점차 전투의 흐름이 힘겨루기 양상으로 흘러가는 듯하자 침착함을 되찾고서 전투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제야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할 수 있게 되었군... 처음엔 마구잡이식 싸움이었는데...
초반엔 확연히 밀리는 듯이 보였지만, 지금 와서 보니 아라곤 왕국군 역시 아군과 맞닥뜨리기 전까지 이곳에 아군이 배치되어 있는 줄은 확실히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처음엔 적들 역시 당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공격을 가해와 아군의 급조된 대형이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는 양쪽 모두 침착함을 되찾은 끝에 전투의 양상이 잠시 소강상태로 흐르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적을 아군 대형 깊숙이 유인한 다음 양익을 움직여 포위망을 형성한다면 좋았을 텐데 이 지랄 맞은 지형 때문에...
중령은 울창한 숲과 자잘한 언덕들이 도처에 깔려있는 이곳의 지형을 맘속으로 저주하며 그나마 포위 대형을 갖출 수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숲 앞 개활지까지 적을 유인하기 위해 연대 병력을 서서히 뒤로 물리려 했다.
하지만 진격하는 것보다도 후퇴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지휘하던 231연대 병력들은 상당수가 징집병인 관계로 중령의 의도대로 유기적으로 움직여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게 일종의 '개싸움'이 되어버린 전장 지역에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병력들이 측면의 숲 속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장 아라곤 왕국군의 측면을 돌파해 들어갔고, 이 정체불명의 병력으로부터 갑작스러운 기습을 당하게 된 왕국군의 대형이 무너지면서 전투의 양상도 점차 반전되어 가는 듯했다. 마침 그 흐트러진 대형을 기병들이 돌파해 들어가며 아라곤 왕국군을 짓밟기 시작하자, 왕국군 병사들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 퇴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 늑대 깃발입니다! 7군단 병력입니다, 대대장님!"
그때 용케도 살아남은 연대장의 전속부관이 그쪽을 가리키며 중령에게 외쳤다.
" 7군단이라면... 비헬르 성채에 주둔하고 있을 73연대 병력을 말하는 것인가! 그럼... 비헬르 성채는 지금 누가 지키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중령이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전투의 양상을 지켜봤다.
이처럼 한동안 전투가 계속되는 듯했지만 7군단 병력이 갑자기 나타나 그 측면을 강타해 아라곤 왕국군의 병력을 양분해버리는 바람에, 그 전의를 상실한 아라곤 왕국군이 지리멸렬한 모습으로 퇴각하면서 이내 전투가 종료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패주하는 적병력을 뮐러 중령의 기병대가 쫓아가 도륙하는 것을 지켜보던 중령 앞으로 7군단을 지휘하는 것으로 보이던 존재가 호위 병력을 이끈 채 그에게 다가왔다. 갑주에 달린 은빛 휘장에 은빛 자수가 새겨진 망토를 두르고 있던 존재는 바로 비다르 폰 트롬스 대령이었다.
마침 이 새파란 나이에 보기 드문 검은 머리를 하고 있던 비다르를 보고선 중령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외의 존재가 의외의 시간에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그를 찾아온 것이다.
" 231연대가 공격받고 있다는 첨병의 보고를 받고 이렇게 달려오는 길이다. 그런데 231연대 지휘관은..."
연대장의 행방을 묻고 있던 비다르가 냉랭한 시선으로 중령의 갑주에 달린 붉은 휘장을 쏘아보자, 중령이 난처한 시선으로 정중히 군례를 취하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유감스럽게도... 연대장님께서는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전사하셨습니다."
이 기막힌 보고에도 불구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던 비다르가 중령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물었다.
" 그렇군. 그럼 현재 231연대를 이끌고 있는 최고 지휘관이 바로 귀관인 것인가?"
" 그... 그렇습니다."
비헬르에 주둔하고 있어야 할 73연대의 최고 지휘관이 귀족 신분의 사관이라는 소문을 얼핏 들었던 중령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제야 비다르의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새파란 나이에 벌써부터 연대급 부대를 지휘하던 비다르를 보고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이 잘 어울리는 모습에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던 중령에게 비다르가 전투 현장이 정리되고 있는 현장을 가리키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아직 적의 본대가 남아있으니 기존의 작전대로 포위망을 구축해야 한다, 중령. 그러니 이제부터 231연대의 통제는 내가 맡도록 하겠다."
" 아니, 그게 무슨..."
다짜고짜 231연대의 지휘권을 인수하겠다는 비다르의 통보에 중령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비다르를 바라봤다.
"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라곤 왕국군을 포위하는 일이다. 만약 귀관이 231연대를 책임지고 통솔할 자신이 있다면 내 그대의 연대장 권한대행을 기꺼이 인정하도록 하겠다."
" ...... "
내심 4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 운용에 욕심이 났던 중령이었지만, 자칫 잘못하다가 실수라도 저지르는 날엔 그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비다르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일 수밖에 없었다.
" 제가 아직 연대 병력을 운용할 능력이 되지 않기에... 연대장님께 231연대의 지휘권을 이양하도록 하겠습니다."
" 그럼 잘 부탁하지, 중령. 그럼 곧장 연대 병력을 재정비하고 비헬르 가도로 향할 준비를 마치길 바란다. 시간이 급박한 상황이니 다른 것은 제쳐두고 아라곤 왕국군의 배후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간략하게 명령을 내린 비다르가 몸을 돌리려던 찰나, 중령이 뭔가 어색한 기분을 느끼다가 문득 그것이 뭔지를 알아채고는 황급히 비다르를 멈춰 세웠다.
"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직 연대장님의 성명을..."
그제야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비다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 나는 73연대장 비다르 폰 트롬스 대령이라고 한다. 귀관은...?"
" 저는 231연대 1대대장 필리프 슈나이더 중령이라고 합니다..."
훗날 슈타이너, 레바테인과 더불어 비다르를 지지해줄 소장파 장교 중 하나인 슈나이더 중령과의 첫 만남이었다.
남쪽의 모흐몽 지역을 수색하던 중 매복해 있던 제국군을 발견하고서 곧장 격렬한 교전을 치러야 했던 아라곤 왕국군은 또 다른 제국군의 출현으로 인해 그 지역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바로 비다르가 보낸 카리우스 중령과 슈만 중령의 병력이었는데, 교전 중 갑작스레 측면을 공격받게 되자 아라곤의 이글레시아스 남작은 무리한 전투에 휩쓸리기보다는 본대에 합류하여 바잔 백작에게 이를 보고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퇴각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그 시각, 바잔 백작이 거느린 아라곤 왕국군의 본대가 지금 한창 비헬르 성채를 공략하고 있던 중이었다. 한시바삐 알루에뜨로 향해야 했던 그들은 비헬르 성채 앞까지 도달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곧장 성채를 공격하기에 나섰고, 이내 성채를 수비하고 있던 제국군 43연대 병력과 격렬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 정말 모흐몽에 제국군이 있었단 말인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본대로 돌아온 이글레시아스 남작의 보고를 받고 바잔 백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되물었다.
" 그렇습니다. 적과 접촉을 한 순간부터 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우리 쪽 측면으로 또 다른 제국군 부대가 출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백작님."
" 좋은 판단이었네, 남작. 애초에 불확실한 정보를 기반으로 찔러본 것뿐인데 쓸데없는 전투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
그러자 그 곁에 있던 상급기사 에스테반 페레스 경이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잔 백작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닥거렸다.
" 모흐몽에 제국군이 매복해 있었다면 필시 보샹에도 제국군이 배치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마치..."
" 우리가 지금 이렇게 비헬르를 공략하고 있는 동안 우리 배후를 포위하겠다는 속셈일 테지."
바잔 백작이 지금 한창 공성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비헬르 성채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보였다. 그것은 바로 용병대장 탄크레디가 비다르의 명을 받들어 아라곤 왕국군 진영에 쏘아 보낸 화살에 꿰여있던 서신이었다.
" 이 정보를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우리가 크게 말려든 것 같다는 기분이 드는군..."
"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백작님? 매복한 적과 아군이 전투를 치르는 동안 적의 새로운 부대가 반격을 가해왔다는 사실을 봤을 때, 뭔가 저들의 의도대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대로 비헬르 성채를 공략해 알루에뜨로 가기보다는 차라리 회군을 하시는 것이...."
그 말에 바잔 백작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비헬르 성채에서 눈을 떼더니 페레스 경을 바라봤다.
" 물러서야 한다면 확실하게 물러서야겠지. 마침 이 주변을 제국군들이 에워싸고 있다고 하니, 우리가 비헬르 성채를 통과한다 해도 분명 알루에뜨는 적에게 넘어갔을 공산이 크네. 결국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지..."
" 그럼 지금 당장 병력을 뒤로 물리도록 하겠습니다. 적의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이 오우거 소굴 같은 곳을 당장 빠져나가야만 합니다, 백작님."
" 일단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리고 병력을 뒤로 물리고 보샹으로 갔던 레예스 남작의 병력이 합류하는 즉시 서쪽으로 갈 것이네. 필시 제국군의 목표가 '몽스'를 점령하여 벨지크 왕실의 탈출 경로를 막으려 들 것이 분명하니만큼, 우리가 그곳으로 달려가 책임지고 사수를 해야 할 것이야."
이미 바잔 백작은 전쟁의 패전과 벨지크 왕실의 망명까지도 예견하고 있는 듯했다. 그 말을 듣고 페레스 경이 금세 우울한 눈빛으로 비헬르 성채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있던 왕국군 병사들을 허무하게 지켜봤다.
졸지에 비다르의 73연대를 대신해 비헬르 성채를 사수하게 된 페터 레바테인 대령의 43연대가 아라곤 왕국군의 노도와도 같은 공격을 막아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비헬르는 그 높이가 다소 완만한 성채라서 성을 공략하기에는 별다른 공성 병기가 필요하지 않았던지라, 이런 점을 이용한 아라곤 왕국군 병사들이 긴 사다리를 이용해 성벽을 올라서는 것으로 성채 공략에 나서고 있었다.
그렇게 성벽에 올라서려던 왕국군 병사들에게 맞서 43연대 군단병들이 격렬한 수성전을 치르고 있었지만 왕국군 병력의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군단병들의 피해도 점차 누적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광경을 성채의 제일 높은 망루에서 지켜보고 있던 '외눈박이' 레바테인 대령이 갑자기 아라곤 왕국군 진영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발견하고선 곁에 있던 부관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 자네도 보고 있나? 지금 적들이 물러나고 있네!"
" 그렇습니다, 연대장님! 적들이 갑자기 물러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저렇게 물러나는 것인지..."
순간 뭔가 퍼뜩 생각났다는 듯 레바테인 대령이 자신의 검은 안대를 쓰다듬더니 아라곤 왕국군 진영 너머 비헬르 회랑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적이 아군의 매복 지점을 발견했다고 하니 아무래도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이지. 부디 그 비다르 대령이란 자가 신속하게 움직여줬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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