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15)
" 이 무엄한 것들! 내가 벨지크 왕국의 왕세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내 신분에 걸맞는 대우를 해줘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대체 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재밌게도 제국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비루먹은 강아지 같았던 왕세자가 어디서 기운이 났는지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포승줄에 묶인 채 기병들에 의해 끌려가고 있던 악셀시오르가 악다구니를 부리자, 왕세자를 포로로 잡아 몽스로 향하고 있던 뮐러 폰 다르케멘 중령이 잠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옆에 있던 파벨을 바라봤다.
" 이봐, 바펠. 저 왕세자라는 작자... 정말 왕세자 맞아?"
" 뭐... 프란츠 남작님의 기병이 확인한 것이니 왕세자가 맞긴 하겠지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 왕세자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자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쟤는 그런 것도 모르는지 저처럼 발악을 하고 있잖아?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너무 꽥꽥거리고 있는데?"
그렇게 눈치 없는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며 파벨은 재차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비다르 대령의 실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듯한 뮐러 중령이 내심 한심스러워진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 신세가 맞습니다, 뮐러 님... 왕세자는 용병들에게 끌려가 '쓱싹'되는 신세가 되고 말 거라구요...
이처럼 눈치 빠른 파벨은 이미 비다르 대령에게 붙잡힌 벨지크 왕국의 귀족들이 어떤 신세가 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저 왕세자 역시 마찬가지 신세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왕세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뮐러 님. 모름지기 이런 일엔 아무것도 모른 척 뒤로 빠져있는 것이 상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파벨 네가 그렇게 말하니깐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느껴지잖아?"
그렇게 뮐러 중령이 투덜거리자 파벨이 저도 모르게 그만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마르몽 남작이 신속하게 찔러들어간 대검을 버클러로 살짝 빗겨낸 프란츠가 재빨리 자신의 검으로 마르몽 남작의 옆구리를 베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이내 검을 교묘히 놀려 프란츠의 검을 바깥쪽으로 밀어낸 마르몽 남작이 이번엔 프란츠의 노출된 몸통을 노리며 철갑 건틀릿을 낀 주먹을 거침없이 휘둘러댔다.
텅!
이내 마르몽 남작의 일격이 프란츠의 갑주에 충격을 주자, 프란츠가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마르몽 남작이 대검을 일직선으로 내리치려 했다.
...맞받아쳐서는 안돼...
프란츠는 자신의 호리호리한 신체와는 달리 기사다운 강건한 육체를 지닌 마르몽 남작과는 힘으로 대결해선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한쪽으로 몸을 뒹굴며 마르몽 남작이 내려친 검의 궤적을 가까스로 피해낼 수 있었다.
" 이거 원... 한 마리 날다람쥐처럼 날렵하기가 그지없군, 프란츠 남작! 하지만 계속 그렇게 피해 다니기만 하면 먼저 지치는 쪽은 바로 그대가 될 것이오."
그렇게 짐짓 한 수 가르쳐 준다는 태도로 마르몽 남작이 대검을 휭휭 휘두르며 프란츠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프란츠 역시 짐짓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일어서더니 다시 검을 들어 보이며 마르몽 남작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 모름지기 싸움이란 상대의 이점을 배제하고 나의 이점을 활용해야 이길 수 있는 법이지요. 제가 귀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니 저만의 방식대로 귀하를 상대해야 마땅한 일 아니겠습니까?"
" 하핫, 그대의 입담만큼이나 그 검 또한 예리하길 바라겠소."
이내 마르몽 남작의 눈빛이 다시금 사나워지더니 번뜩이는 검날을 치켜세우며 프란츠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부터 이 숲 속의 아름드리나무들을 주목하고 있던 프란츠는 재빨리 발걸음을 놀리며 어느 나무 기둥 뒤편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려는 것인가... 얄팍한 수작이로군...
하지만 마르몽 남작 역시 발걸음을 더욱 빨리 놀리며 프란츠를 뒤쫓아 그를 검의 반경 안에 가둬놓으려 했다. 그렇게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두 사람의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던 찰나, 어느 두툼한 나무를 사이로 두고 한쪽으로 몸을 쏠리는 척 하던 프란츠가 이내 방향을 틀어 그 반대쪽으로 뛰어올라 검으로 마르몽 남작의 빈틈을 재빨리 찔러 들어갔다.
순간 프란츠의 속임 동작에 넘어갈 뻔했던 마르몽 남작이 가까스로 프란츠의 검을 피해내며 도리어 프란츠의 노출된 몸통을 노려 검으로 베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프란츠 역시 살짝 뒤로 물러서며 마르몽 남작의 검을 피해낸 뒤, 다시금 거리를 벌려 다른 나무들 틈 사이로 몸을 숨기려 했다.
" 발터 경... 아무래도 우리가 나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느샌가 두 사람의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기병들을 헤집고 나온 라예르베크가 발터 경에게 가까이 다가와 싸움에 개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향을 넌지시 물어왔다. 하지만 그런 라예르베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두 사람의 결투를 주시하고 있던 발터 경이 고개를 살짝 내저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우리가 개입을 하려 한다면 도리어 프란츠 남작님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일이 될 수도 있소, 라예르베크 경."
하지만 발터 경은 아군으로 둘러싸인 결투 현장 속에서 결국엔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마르몽 남작이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프란츠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마르몽 남작의 검을 잘도 피해내고 있으니, 적어도 프란츠가 크게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발터 경이었다.
하지만 마르몽 남작과 검을 겨루고 있던 프란츠는 빈틈이 보이지 않는 상대로 인해 내심 죽을 맛이었다. 지난 란데스후트에서 결투를 치렀던 수많은 귀족 청년들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 '빈틈'이 유독 마르몽 남작에게서는 보이지 않았기에, 지금 자신과 검을 겨루고 있는 상대가 꽤나 출중한 실력을 가진 기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프란츠였다.
어쩐지 벨지크 왕국 최고의 기사들 중 하나라더니... 어쩌면 페렌바흐 자작님께 버금가는 기사일지도...
하지만 상대에게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빈틈을 만들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프란츠가 곁눈질로 주변을 훑어보더니 이내 가까운 곳에 위치한 거북이 형상의 바위를 발견해냈다.
나무... 바위... 이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기병들...
그 짧은 순간에 주변의 모든 정황들을 머릿속에 담은 프란츠가 이내 몸을 날려 마르몽 남작을 향해 검을 내리치려 했다. 하지만 뻔히 보이는 검의 궤적을 확인한 마르몽 남작이 손쉽게 프란츠의 검을 자신의 대검으로 튕겨 내더니, 이내 대검을 횡으로 베어내며 프란츠의 몸통을 가르려 했다.
하지만 교묘한 동작으로 마르몽 남작의 검을 피해낸 프란츠가 슬쩍 겁을 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엉거주춤 뒤로 물러서며 버클러로 마르몽 남작의 검을 방어하려 했다.
아직 경험이 미숙한 애송이였단 말인가... 하지만 저 나이에 이 정도까지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보낼만한 일이겠지...
그런 프란츠를 노려보며 마르몽 남작이 대검을 치켜세우더니, 거리를 슬슬 좁히며 프란츠가 빠져나갈만한 사각지대를 차지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르몽 남작의 기세에 억눌린 듯 뒤로 슬슬 물러서던 프란츠의 발 뒤꿈치에 조금 전에 봐왔던 거북이 바위가 맞닿자, 프란츠가 다시 한번 더 검끝을 마르몽 남작을 향해 보이며 마지막 일격에 대비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으니... 이젠 더 이상 피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지금 이 자리에서 프란츠 남작을 쓰러뜨린다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던 마르몽 남작은 프란츠를 사로잡으려는 생각을 한 끝에, 검을 들어 프란츠의 측면 부분을 교묘히 베어버리려 했다. 그 검날을 프란츠가 피하려는 순간 프란츠의 몸통을 무릎으로 가격해 인질로 삼으려는 생각에서 살짝 엇나가게끔 검을 베어 들어가던 마르몽 남작은, 순간 프란츠가 도리어 뒤로 뛰어올라 작은 바위 위에 올라선 것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프란츠의 두 다리에 가려져 마르몽 남작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던 작은 바위 위로 프란츠가 올라서자, 마르몽 남작의 검날이 프란츠의 갑주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바위 위를 박차고 뛰어오른 프란츠가 마르몽 남작의 노출된 몸통을 향해 검을 힘껏 내리치려 했다.
순간 바위 위에서 뛰어오른 프란츠가 내려친 검을 방어할 새가 없었던 마르몽 남작이 자신의 왼팔을 보호하는 완갑으로 검을 막아내려 했다.
텅!
곧 검날에 맞아 움푹 파인 완갑 부분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마르몽 남작이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며 검을 들어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프란츠가 그럴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둘러 마르몽 남작을 사정없이 몰아붙였고, 곧이어 결정적인 한방이 마르몽 남작에게 전해지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전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심코 들어 보인 마르몽 남작의 대검을 프란츠가 자신의 검으로 교묘히 휘감아 날려버리는 것으로 결국 두 사람의 결투가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결국 마르몽 남작의 검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승부가 결정되자, 프란츠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르몽 남작에게 말했다.
" 이 주변엔 모두 제 부하들 뿐이니 제가 유리한 상황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무승부로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프란츠가 검을 검집에 넣으며 애초에 공평하지 못한 상황 속에 치러진 승부를 무효로 하려는 듯하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마르몽 남작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프란츠에게 두 손을 들어 보였다.
" 아니, 오히려 귀하의 그런 배려가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오. 잠시 내가 방심한 것도 크지만, 이 싸움은 주변의 정황을 떠나 공정한 승부라 할 수 있었소. 그러니 이 싸움은 귀하의 승리요, 프란츠 남작."
" 단지 제가 좀 더 운이 좋았을 뿐이니, 다음번엔 이런 고약한 상황에서 만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럼 제가 직접 귀하를 몽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지요."
이내 프란츠의 명령을 받은 기병 하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르몽 남작의 대검을 가져와 프란츠에게 건네주었다.
" 이 검은 귀하께서 포로 서약을 마치시는 대로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 이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봐야 할 것 같소. 나야 그대들에게 배상금이라도 내어주고 풀려나면 그만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발루아 왕국의 병사들이 심히 걱정이로군..."
프란츠의 기병들이 푸른 십자성 기사단을 요격하고 왕세자를 포로로 붙잡은 와중에, 슈타이너 대령의 11연대에게 돌파당했던 발루아 왕국군의 고드프루아 남작이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력을 이끌고 대거 남서쪽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부와 강변을 수색하던 기병들이 숲 속에서 푸른 십자성 기사단과 싸움을 벌이고 있던 와중이었기에, 고드프루아가 이끌던 발루아 왕국군은 꽤 먼 거리를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기병들의 탐색에 걸리지 않은 채 드디어 '라-롱그빌르' 부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제야 그들의 출현을 알아챈 제국의 기병 수백여 기가 이들을 향해 돌격해 들어오자, 고드프루아가 입고 있던 갑주를 벗어던지며 휘하의 병사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쳐 탈출을 지시하려 했다.
" 강을 건너야 하니 무거운 장비는 버려두고, 지금부터 강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라! 부디 살아남아 강 건너에서 만나도록 하자, 제군들!"
그렇게 각자도생하여 강을 건너라는 고드프루아의 명령에 병사들이 제각기 갑주와 창, 방패 등을 내던지며 오부와 강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뒤를 바싹 쫓아온 제국의 기병들이 병사들을 추격하며 하나둘씩 쓰러뜨리는 바람에, 평화로웠던 오부와 강변은 순식간에 비참한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 악!"
마침 뒤를 쫓아오던 기병의 기병창에 몸을 관통당한 병사 하나가 단말마의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곧 여기저기에서 그들을 추격해온 기병들의 공격을 받아 병사들이 하나둘씩 대지 위의 시체로 변해가고 있던 가운데, 맨 앞열의 병사들이 어느새 오부와 강가에 도달해 허겁지겁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고드프루아의 기억대로 이 '라-롱그빌르' 마을 부근의 강물은 그 깊이가 그리 깊지 않은 지역이었기에, 강물을 건너던 병사들은 가까스로 무사히 발루아 왕국의 영역 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강을 건너려는 병사들과 이를 추격하려는 제국의 기병들이 여기저기에서 뒤엉킨 채 혈투를 벌이고 있던 그 시각,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넌 고드프루아가 거친 숨을 내쉬며 핏발이 서린 눈빛으로 강 건너를 뚫어지게 노려봤다. 아직 강 건너편에서는 강을 건너려던 병사들을 기병들이 쫓아가 도륙하는 한 편의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던 중이었다.
과연 그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며 고드프루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그가 전쟁 기간 내내 비관적이면서도 과격한 성향으로 변했다는 것을 봤을 때, 그가 발루아 왕국으로 돌아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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