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스(5)
다음 날, 메닐 에글리스를 출발한 비다르의 73연대와 231연대, 232연대가 다음 영지라 할 수 있는 '샤또 포흐쥬'를 일제히 공략하고 나섰다. 마침 이곳 샤또 포흐쥬를 점령하게 된다면, 그 다음 목표물이라 할 수 있는 플로텐느가 '몽스'의 위성 영지라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그들의 위치가 곧 몽스를 코 앞에 두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게 해주었다.
안타깝게도 메닐 에글리스와 마찬가지로 샤또 포흐쥬 또한 여느 시골 영지와 마찬가지로 의미없을 정도의 낮은 성벽과 훈련도가 낮은 영지군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별 어려움 없이 점령될 수 있었다.
이윽고 영주의 관사까지 점령한 군단병들이 쓸만한 물자를 징발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색하고 있던 가운데, 비다르가 군단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골 영주의 집무실답지 않게 화려하고 멋들어진 장식품들이 한쪽에 위치한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것들을 훑어보던 용병대장 구스타프슨이 감탄의 휘파람을 불어대며 중얼거리게끔 만들었다.
" 샤또 포흐쥬의 통치 가문이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라더니... 수백여 년 동안 쌓아 올린 재산이 꽤나 어마어마한가 봅니다..."
" 영주의 재산을 모조리 회수해 토르스텐 상회의 콜베르크에게 넘긴다면 보급 물자를 좀 더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여 명이 넘는 군단병들이 필요로 하는 보급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이곳 영주의 재산을 압수할 생각인 비다르가 성큼 걸음으로 영주의 집무실 책상으로 다가서더니 상석에 걸쳐져 있던 화려한 문양의 녹색 망토를 들어 보였다.
" 그것은 또 무엇입니까, 비다르 님?"
마침 그의 호위 기사 시구르드손이 다가와 묻자, 비다르가 그 망토를 시구르드손에게 건네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영주의 망토인 것 같으니 이것을 나중에 뮐러 중령에게 갖다 줄 수 있도록. 몽스에서 기사단장 흉내를 내려면 이런 화려한 망토가 필요할 테니 말이다."
나바라 연합 기사단의 단장직을 연기해 '몽스'의 성문을 열게끔 하는 기만 작전의 주인공으로 뮐러 중령을 낙점한 비다르는, '몽스'의 대영주가 소유하고 있을 주류 창고를 대가로 약속하며 뮐러 중령의 승낙을 받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명예로운 제국의 귀족으로서 그런 얄팍한 속임수의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뮐러 중령은 비다르가 주류 창고 전체를 약속하는 바람에 입맛을 다시며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국 검은 수탉 깃털의 투구 역시 다시 뮐러 중령의 소유물로 되돌아오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비다르와 그의 기사가 영주의 집무실 곳곳을 살펴보고 있던 바로 그때, 그들이 있던 집무실 안으로 한 떼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인 채 군단병들에 의해 끌려 들어오게 되었다. 그 복색으로 봤을 때 그들이 바로 이곳 샤또 포흐쥬를 다스리던 영주와 그의 가족, 그리고 기사들이라는 것을 눈치챈 비다르는 이내 붉은 수염 용병대를 호출하며 그들을 냉랭한 시선으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침 전선에서 떨어진 후방의 영지에서 안락한 삶을 누렸을 것이 분명한 배불뚝이 영주가 두려운 시선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벌벌 떨고 있었고, 그 가족들로 보이는 이들 역시 겁을 먹은 표정으로 비다르에게 자비를 구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기사인지 장사치인지 모를 정도로 화려한 복색을 갖춘 기사들마저도 그 신분에 걸맞는 자긍심을 잊었는지 연신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를 보고 있던 중이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저마다의 소중한 삶이 있다라...
불현듯 어젯밤 라시드 대위가 해준 말이 잔상처럼 비다르의 머릿속을 울렸지만 내심 저들을 살려둘 수는 없다고 작심하던 비다르였다. 가뜩이나 병사 하나가 아쉬운 이 마당에 저들을 후방으로 인계할 호송 병력을 따로이 준비한다는 것은 그의 성향에도 맞지 않거니와, 나중에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저들을 살려두기에는 귀찮은 일을 극히 지양하는 비다르의 성정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 이... 이보시오...! 나... 나는 이곳 샤또 포흐쥬의 영주인 에라르 남작이라 하오! 부... 부디 고귀한 혈통으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 안위를 잘 보살펴주길 바라겠소..."
마침 땀을 뻘뻘 흘리던 배불뚝이 영주가 자신을 소개하며 귀족에 대한 예우를 바라는 듯하자, 비다르가 냉랭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어 물었다.
" 어제 메닐 에글리스가 함락되면서 우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충분히 들었을 텐데 어찌하여 도망가지 않았는가, 에라르 남작?"
귀족에 대한 예우는 커녕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하대하던 비다르를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 에라르 남작이 이내 헛기침을 하더니 간신히 입을 열어 대답했다.
" 이곳 샤또 포흐쥬는 우리 가문이 대대로 통치해왔던 지역이었소, 그런 만큼 내가 제국에 순순히 항복을 하게 된다면 영지에 관한 권리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소. 그러니 부디 내 이런 뜻을 제국 황실과 정부에 잘 전달해주길 바라는 바이오. "
끝내 벨지크 왕국의 귀족 신분을 버리고 제국에 전향하려는 듯한 에라르 남작의 태도에 비다르가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배불뚝이 영주를 쏘아봤다.
어리석은 위인 같으니라구...
무지할 정도로 안일한 인식을 보인 배불뚝이 영주에게서 시선을 돌린 비다르는 전쟁이 끝난 이후엔 이곳 벨지크 왕국 플람스 지역을 군부에서 계엄 통치를 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은 즉, 벨지크 왕국의 영지를 다스리던 귀족과 기사들이 전원 '처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뜻했기에, 이후에 황제의 직할령으로 선포될 이 지역에 여전히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던 에라르 남작을 다시금 바라보며 비다르는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붉은 수염을 치렁치렁 기른 용병대장 탄크레디가 용병들과 함께 그들이 있던 영주의 집무실로 들어오자, 비다르가 집무실 탁상에 있던 영주의 상석에 앉으며 오랜만에 나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의미 없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운이 빠지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비다르였지만, 어쨌든 저들에 관한 처분은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이들을 데리고 나가 잘 '대접'해 줄 수 있도록, 탄크레디 대장."
비다르의 짧은 '명령'을 이내 알아들은 탄크레디가 고개를 끄떡이며 용병들을 시켜 포로들을 이끌고 집무실을 나서기 시작했다. 마침 비다르의 명령을 오해한 영주 무리가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용병들을 따라나섰고, 이내 집무실 분위기가 다시 잠잠해지자 용병대장 구스타프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 마지막 길을 거친 용병들과 함께 하다니... 고귀한 혈통이라는 귀족 치고는 꽤나 불행한 최후로군요..."
비다르의 73연대와 더불어 샤또 포흐쥬를 점령한 231연대와 232연대가 근처 개활지에 대기하면서 혹시라도 출현할 적들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 이곳까지 오면서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232연대장 헬무트 하인리히 대령이 231연대의 지휘부를 방문하면서 연대를 임시로 책임지고 있던 필리프 슈나이더 중령과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 퇴역하고 나서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되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이렇게 야전에까지 끌려오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네, 슈나이더 중령."
퇴역한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시 이렇게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게 된 하인리히 대령에게 손수 직접 차를 따라준 슈나이더 중령이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어 말했다.
" 그만큼 총사령부에서 하인리히 대령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직접 저를 따로이 방문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 크흠... 사실 내 이곳까지 비다르 대령을 따라오기는 했지만, 솔직히 우리가 이래도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귀관과 전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네. 솔직히 내가 속한 23동원군단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 이렇게 일면식도 없는 귀족 대령에게 이끌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네..."
뭐에 홀린 듯이 비다르의 통제를 따르게 된 하인리히 대령은 지금의 상황이 불안스럽기 그지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대령을 유심히 살피며 슈나이더 중령이 짐짓 태연한 태도를 가장한 채 하인리히 대령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 지금 와서 그것을 생각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왕에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우리가 '몽스'를 점령해 보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귀관은 아직 혈기왕성한 장교인 듯하군. 하지만 저 비다르 대령이란 자의 통제를 따르다간 그대의 경력에 오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의외로 군부의 장성들이란 존재들은 꽤나 꽉 막힌 구석이 있는 자들이거든."
병사로 입대해 대령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르고 나서 퇴역한 하인리히 대령은 군부에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이라 할 수 있었기에, 그 조언의 의미를 신중히 새겨들은 슈나이더 중령이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 하지만 그분들께서도 언젠가는 퇴역하실 분들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쩌면 저 73연대장과 맺은 인연으로 인해 제 군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 하긴, 73연대장이 귀족 신분이니만큼 능력만 입증해 보인다면 출세가도를 달릴 것이 분명한 일일 테지... 나야 이미 퇴역한 신분이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안락한 삶을 원하던 하인리히 대령은 자신의 미래가 비다르와 함께 계속하게 될 운명이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저 후배 사관이라 할 수 있는 슈나이더 중령에게 조언을 해줄 생각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요..."
3대대 4중대 2소대를 맡고 있던 카셀 디크만 소위가 3대대의 임시 주둔지를 둘러보며 곁에 있던 피셔 중사에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곳 샤또 포흐쥬를 별 어렵지 않게 점령한 3대대 군단병들은 내일 다시 행군하기 위해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간 상태였다.
" 제가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아라곤 왕국군의 패잔병들을 뒤쫓아가는 것은 물론, 서쪽 끝에 있다는 '몽스'까지 진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소대장님."
" 몽스까지요...?"
알루에뜨 성채를 공략하려던 4군단의 예비대로 머물며 한동한 휴식을 취할 줄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비헬르 회랑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것도 모자라 벨지크 왕국의 서쪽 끝까지 진군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에, 카셀은 그만 기가 질린 듯한 눈빛으로 영주성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자신의 최고 지휘관인 비다르가 머무르고 있었기에, 내심 자신의 임관 동기라 할 수 있는 비다르 대령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시 한번 더 자신의 '악운'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카셀이었다.
그렇게 카셀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던 바로 그때, 마침 하르바르트 대위가 그들을 지나쳐 영주성 쪽으로 향하고 있는 듯하자 카셀이 군례를 취하며 하르바르트 대위를 멈춰 세우기에 이르렀다.
" 오, 카셀 소위! 아직 살아있었군 그래?"
카셀을 보자마자 그 끈질긴 생존력을 칭찬(?)한 하르바르트 대위를 향해 카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어 물었다.
" 하르바르트 대위님 덕분에 훈장까지 받은 제가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부대 내에 저희 목적지가 '몽스'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데... 하르바르트 대위님은 이를 알고 계십니까?"
제법 넉살 좋게 받아친 카셀을 넌지시 바라본 하르바르트 대위가 씨익 미소를 짓더니 카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입을 열어 말했다.
" 전쟁이 끝나면 진급도 하고 훈장도 더 받을 수 있을 테니 당분간은 시키는 대로만 하라구, 카셀. 그리고 우리 최종 목표는 말이야..."
잠시 그 옆에 있던 피셔 중사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하르바르트 대위가 카셀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이고선 그 자리를 냉큼 떠났다. 그러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카셀을 살피며 피셔 중사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카셀에게 물었다.
" 아니, 하르바르트 대위님께서 대체 뭐라고 하신 겁니까...?"
" 저기, 그것이... 우리 최종 목표가 바로 벨지크 국왕의 목을 따는 거라는데요...?"
이내 시시껄렁한 농담이라 생각한 카셀과 피셔 중사가 말이 씨가 된다는 옛 격언을 잊은 채 그들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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