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의 정원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수한 세월의 흐름 속에, 영겁의 세월을 견디어온 아이젠그라트와 아펜첼 앞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겠지만, 유한의 일생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겐 소년이 성장해 청년이 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제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나타내는 이정표라 할 수 있는 산봉우리 아이젠그라트와 유유히 흐르는 강 아펜첼.
쾨니히스베르크는 독특하게도 성벽이 없는 도시였다. 자신감의 발로(發露)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성벽 없는 도시를 제국의 그 어떤 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쾨니히스베르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 영역을 외곽으로 계속해서 뻗어나가고 있었다. 제국의 모든 역량이 집중된 곳이었기에 인구의 유입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었고, 그로 인해 도시는 탐욕스럽게 주변부를 삼켜가며 그 경계를 넓혀 나아갈 수 있었다.
다만 역동적인 쾨니히스베르크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도시의 북쪽 외곽에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 아이젠그라트와 도시의 한가운데를 관통해 흐르는 강 아펜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가 기거하고 있는 황궁 ' 쇤부른'이 있었다.
한 초로(初老)의 신사가 쾨니히스베르크의 관공서 밀집 지역인 '프리드리히스 하인'에 조성된 '대공(大公)의 정원' 을 홀로 걷고 있었다. 이 거창한 이름의 도심공원은 원래 황실 소유의 정원이었지만, 제국의 선포식 이후엔 대중에게 공개되어 오늘날엔 이렇게 누구나가 공원을 거닐며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근처엔 제국의 관공서 건물이 즐비했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이면 제국의 젊은 관료들이 딱딱하고 삭막한 사무실을 빠져나와 이 곳에서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공원에 그 어떤 인기척 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공원을 걷고 있던 초로의 신사는 저 멀리 공원의 담벼락 너머에 필시 황실 근위대 병력이 공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을 거라 짐작했다.
이곳이로군...
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장미(薔薇) 회랑'에 들어서면 회랑 중간에 모종의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간 신사가 당도한 곳은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이었다. 석회암 연못 특유의 밝은 파란색을 띠고 있던 연못은 마치 에메랄드 보석처럼 황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못가에 있던 작은 나무 벤치에 앉은 신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파란빛이 출렁이는 연못을 바라봤다. 이 아름다운 연못은 튜튼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 왕실의 젊은 대공과 대공비가 즐겨 찾던 장소로 유명했는데 오늘날에는 젊은 연인들이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명소로도 인기 있었다.
저 연못의 황홀한 푸른빛이 노신사의 감성을 건드린 것일까...
연못의 신비한 파란 물결을 바라보던 노신사는 문득 얼마 전에 읽었던 보고서를 떠올렸다. 보고서의 내용은 저 연못의 신비로운 빛깔 만큼이나 이 세상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고서는 아마시아 대륙에서 저 멀리 떨어진 디아스 대륙의 제국령 '베스트 하벨란트'의 총독이 직접 작성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총독의 주요 업무는 황제를 대리해서 제국의 속주를 직접 다스리는 것이었는데, 특히 베스트 하벨란트를 다스리는 총독의 업무 중엔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정세를 관찰해서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었다.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존재는 서부 왕국 연합은 물론 튜튼 제국의 입장에서도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왕과 귀족, 그리고 평민 계급으로 구성된 신분제가 타파되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된 세계의 출현은 여전히 신분 제도를 기반으로 다져진 아마시아 대륙의 기득권층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비록 튜튼 제국이 공화국의 건국에 도움을 주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서부 왕국 연합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지 공화주의자들의 이상과 신념에 동의해서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디아스 대륙의 제국령 베스트 하벨란트를 관리하고 통치하는 총독은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정세를 관찰해서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올려 보내는 일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총독이 보내온 보고서는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정세뿐만 아니라 디아스 대륙에 존재하는 또 다른 생명체에 대해서도 알려오고 있었다. 아라곤 왕국의 어떤 정신 나간 귀족이,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했던 긴 항해 끝에 디아스 대륙에 첫 발을 내디뎠을 당시에도 그곳엔 이미 선주민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프.
그것을 떠올린 노신사가 피식 웃었다. 아이들이 읽는 이야기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그 '단어'를, 제국의 속주를 통치하는 총독이 고급스러운 보고문서에 제국 행정기관의 표준 양식으로 근엄하게 적어내는 모습을 떠올리자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보고서를 작성하는 총독 역시 당혹스러웠겠지...
하지만 보고서에 담긴 내용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제국을 비롯한 아마시아 대륙의 모든 정보가 이곳 쾨니히스베르크의 최상위 권력기관에 집중되고 있었는데, 노신사에겐 그러한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대륙의 제일 서쪽 끝단에 위치한 니블헤임 산맥에 실재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에 대해서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오크'라고도 부르는 존재들이 빈번히 관찰되고 있었기에, 노신사는 디아스 대륙의 '엘프'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 공화국은 모든 시민이 법 앞에 평등함을 보장한다... "
노신사가 연못의 일렁이는 푸른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것은 베스트 하벨란트에 파견된 정보 요원으로부터 입수한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헌법 조항 제1조에 나와있는 문구였다.
디아스 연방 공화국은 아마시아 대륙에서 건나간 이주민들이 건설한 국가였다. 그리고 공화국의 건국자들은 아마도 아마시아 대륙의 불평등한 신분제에 넌덜머리라도 났던 모양이라고 노신사는 생각했다. 나라의 모든 체계를 규율하고, 심지어 국가의 통치 기관과 일반 법률까지 통제한다는 헌법이라는 가치의 첫 번째 문구가 바로 '평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공화주의자들 앞에 디아스 대륙의 선주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른바 '엘프'라 부르는 신비스러운 존재들 말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다른 문명을 접하게 되면 두 가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호기심에서 호감으로 발전해 우호 관계를 맺거나, 아니면 배타성에서 적대감으로 발전해 정복욕을 보이는 경우, 이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 노신사는 생각했다.
하지만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공화주의자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엘프 문명을 대했다. 엘프를 인간과 똑같은 지성체로 인정하고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은 평등한 존재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총독이 보내온 보고서엔 지금 한창 디아스 연방 공화국이 한 가지 논제로 떠들썩하다고 나와 있었다.
엘프의 나라, 나라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브헤임' 을 디아스 연방 공화국의 11번째 연방 가입 주체로 받아들일지에 대해 논의 중이었던 것이다.
베스트 하벨란트의 총독은 엘프들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여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이렇듯 '평등'이라는 개념이 신분제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다른 문명의 존재들을 포용하는 관용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노신사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 늦으셨군요, 폐하. "
" 고약하군. 아무리 예의범절을 모르는 친구라고는 하지만 군주에게 올리는 인사가 그게 뭔가. "
뒤늦게 도착한 또 다른 노신사가 앞서 와 있던 노신사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 그러면 제대로 인사를 드려야겠지요. 튜튼 제국을 통치하시고 주관하시는 영명하신 프리드리히 레오..."
" 어허, 그만! 이거 원, 누가 보면 내가 그대에게 예의라도 강요한 것처럼 보이겠구만. 하하! "
뒤늦게 들어온 노신사는 바로 튜튼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였다. 그리고 그런 황제와 친밀해 보이는 노신사는, 세간에는 황제의 오른팔이자 황제의 '현자'로도 불리는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이었다.
그렇게 서로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은 나란히 나무벤치에 앉게 되었다. 그들 뒤로 장년의 나이로 보이는 근위기사가 근엄한 태도로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자리에 앉기 직전에 하이드리히 남작은 그 기사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평범한 신사복 차림의 두 사람과는 달리 기사는 휘황찬란한 장식이 가득한 판금갑옷을 입고 있었다. 하이드리히 남작이 의식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그는 바로 황제를 지근거리에서 호위하는 황실 근위기사단의 부단장인 마티아스 폰 할버슈타트 백작이었다.
할버슈타트 백작은 세상이 알아주는 불세출의 검술가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시작된 수십 여 차례의 결투에서 단 한 번의 무승부를 제외하고는 져본 적이 없던 인물이었고, 제국 최고의 기사들만이 모여있다는 근위기사단 내에서도 독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제국 최강의 기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기사 경력 중에서도 최고의 백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이겐 폰 앙게르뮌데 남작과의 결투에서 승리한 일이었다.
앙게르뮌데 남작은 바르텐슈타인 주(州)를 통치하는 크로센 공작의 기사였다. 세간에는 크로센 공작의 '사냥개'로 통할 정도로 무자비하고 냉혹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검술 실력이 뛰어난 기사로서 크로센 공작의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제국 최고의 기사라는 할버슈타트 백작에게 도발적인 문장으로 가득한 결투장(決鬪狀)을 보내며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황제의 근위기사와, 그리고 그 대척점에 서있는 크로센 공작의 기사가 서로 결투를 벌인다는 사실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두 사람 모두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검술가라는 점은 둘째 치고, 그들 배후에 황제와 크로센 공작이라는 제국 최고의 권력자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들의 결투는 쾨니히스베르크 북쪽 아이젠그라트 인근 숲의 공터에서 양쪽의 참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지게 되었는데, 결투의 결과는 오늘날 앙게르뮌데 남작의 오른쪽 얼굴에 길게 나있는 상흔(傷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할버슈타트 백작의 완승이라 할 수 있었다.
검술에 문외한이었던 하이드리히 남작은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사석에서 만난 할버슈타트 백작에게 검술에 관해 질문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남작의 질문은 간단했다. 한 자루 검으로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적의 숫자는 몇 명이냐고.
" 글쎄올시다... 그런 적이 별로 없어서 내 뭐라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하지만 추정해본다면... 두세명 정도라면 동시에 상대할 수는 있을 거요. "
백작의 대답에 하이드리히 남작은 내심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실력 있는 기사라면 동시에 수십 명을 상대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하이드리히 남작의 실망한 태도에 할버슈타트 백작이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 그런 건 이야기책에서나 볼 수 있는 거라오, 남작.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 해도 등 뒤는 보이지 않는 법. 상대의 숫자가 4명을 넘어간다면 나의 배후를 상대에게 내어줄 수밖에 없기에, 그런 상황은 나조차도 되도록 피할 수밖에 없소이다. 하지만 전장에서라면 상황이 다르겠지. 내 동료에게 등 뒤를 맡길 수 있으니 말이오... "
그처럼 뛰어난 기사도 동시에 3,4명을 상대하기에는 무리라 했지만, 지금의 황제는 그보다 더 많은 적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황제의 고민은 이처럼 앞뒤의 적들을 어떻게 하면 해치울 수 있는가였고, 이런 황제의 고민을 대신 풀어줘야 할 이는 바로 하이드리히 남작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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