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개
튜튼 제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는 제국의 모든 역량이 집중된 대륙 최고의 도시라 할 수 있었지만, 여느 도시와 다를 것 없이 빈민가 역시 존재했다. 도시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런 빈민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 역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런 지저분하고 추레한 빈민가의 거리를 걷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한번 보고 나서는 금세 잊힐 듯한 특색 없는 외모의 남자는 어두침침한 망토를 두른 채 거리를 걷던 도중 어느 낡은 건물 앞에 서더니 곧 그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부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듯했다. 여기저기에 잡동사니가 굴러다니고 건물 구석진 곳마다 거미줄이 처져 있어 폐건물이나 다름없어 보였지만, 남자는 그곳을 거리낌없이 들어가더니 곧 어느 작은 공간에 마련된 책상 앞에 다가설 수 있었다. 마침 책상엔 추레한 몰골의 아이가 촛불을 켠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남자는 곧 품 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더니 아이에게 던져주며 입을 열었다.
" 이야기를 팔고 싶어서 왔다. '이야기꾼'에게 안내해줄 수 있겠나...?"
'이야기꾼' 로베르트 기슬러는 오른손이 없는 사내였다. 한때 중앙정보국에서 잘 나가던 정보요원이었지만 한순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졌던 그는 현재 일종의 '정보 상인'으로 활동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돈벌이가 되겠냐며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지만 기슬러는 그런 사람들을 속으로 비웃으며 무시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질수록 가치를 가지는 것이 바로 '정보'였기 때문이다.
기슬러가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이유도 결국엔 정보를 이용해 이득을 얻으려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인데, 제 버릇 남 못준다는 말이 있듯이 기슬러는 여전히 이런 정보를 사고팔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한창 독서에 열중하던 그는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 이 어두운 곳에서 양초 하나에 의지한 채 책을 읽고 계시다니... 과연 기슬러 선배 답습니다. "
" 세상이 어둡고 혼탁할수록 아는 것이 많아야 우리 장사도 잘 되는 법이지, 팔켄하겐 군. "
기슬러의 환대(?)에 남자가 소리 없이 의자를 갖다 놓고 그 위에 앉았다. 남자는 바로 중앙정보국 대내 정보본부 소속 정보 분석과장인 고스틴 팔켄하겐이었다.
팔켄하겐이 자리에 앉더니 곧 품 안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어 기슬러에게 전해 주었다.
" 이번 건은 제법 묵직한 것이니, 물건값 역시 묵직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슬러 선배. "
" 보안등급은 어찌 되는가...? "
" '특급'입니다. "
팔켄하겐의 거침없는 대답에 기슬러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 서류봉투를 바라봤다. 안에 있는 내용물을 먼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색을 눈치챈 팔켄하겐이 기슬러에게 물건값을 재촉하고 나섰다.
" 그 안에 있는 것을 읽기 전에 먼저 '이야기'값을 주셔야겠습니다, 기슬러 선배. "
" 흐음... 할 수 없군... "
기슬러가 탁상 서랍을 열더니 곧 특급정보에 걸맞는 비용을 치르기 위해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어른 손만한 크기의 금괴였다.
" 원래는 현금으로 '이야기'값을 지불해야 하건만, 특급정보에 걸맞는 액수의 현금은 지금 내 수중에 없다네. 대신 이 정도라면 충분할 테니 자네가 직접 확인해보게나. "
기슬러가 꺼낸 금괴의 숫자는 모두 5개였다. 팔켄하겐은 금괴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 물건은 확실하군요... 그런데 선배는 여전히 수표는 다루지 않는 모양입니다? "
" 그놈의 수표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는데 그걸로 거래하라구...? 난 돈에 미친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멍청이는 아니네. "
그러면서 기슬러는 서류봉투를 개봉해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미 물건값을 받아 그것을 가방에 챙겨 넣은 팔켄하겐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그런 기슬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서류를 다 읽은 기슬러가 그것을 내려놓더니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팔켄하겐의 말대로 그것은 보안등급이 특급인 정보였다.
" 놀랍군... 남부의 공작들이 알메리아로 보낼 물자를 실은 선박을 해상에서 나포하다니... 분명 정보를 미리 입수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테니... 분명 남부의 귀족들 중 누군가가 배신을 한 모양이로군, 안 그런가...? "
" 그것까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확실한 건 남부의 공작들이 여전히 이 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
" 해상에서 벌어진 일이니 육지에 있는 공작들이 알 턱이 없겠지... 게다가 그 일을 책임진 상단의 우두머리와 선장이 자백을 했다면... "
팔켄하겐은 자신이 직접 그 상단의 우두머리와 선장을 심문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은 채, 기슬러가 뭔가를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다. 기슬러라는 인물은 확실히 돈을 밝히기는 했지만 머리 돌아가는 속도는 따라갈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 그럼... 황제는 그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공작들을 쾨니히스베르크로 소환하려 하겠군... 내전을 피하면서 남부 지역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직 공작들을 직접 체포하는 것뿐이니 말이야... 결국 황제의 소환령을 받은 공작들이 영문도 모른 채 수도로 올라오게 되면... 황제는 그들 앞에 증인과 증거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을 옭아매려 하겠지... 알메리아의 불순분자들과 내통한 남부의 반역자라는 굴레와 함께 말이야... "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기슬러를 바라보며 팔켄하겐이 자세를 바꾸더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 그럼 기슬러 선배는 이번 일이 어떻게 굴러갈 거라 생각하십니까...? 정말 황제 폐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리라 보십니까...? "
" 세상 일이 자기 맘대로만 된다면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다른 공작이라면 몰라도 크로센 공작쯤 되는 인물이라면 뭔가 낌새를 눈치챌지도 모르지... "
" 그럼 만약에 말입니다... 크로센 공작이 뭔가 낌새를 눈치챈다면... 이번 일이 어찌 돌아가리라 생각하십니까...? "
팔켄하겐의 질문이 계속되자 기슬러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보기 힘든 특급정보에 흥분했던 탓인지 혼잣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과 함께, 공짜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팔켄하겐의 속셈을 눈치챈 것이다.
" 자네 그렇게 공짜 좋아하다간 대머리 되기 십상이네..."
" 휴우... 명색이 정보요원인 제가 정보 상인에게서 정보를 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팔켄하겐이 한숨을 내쉬더니 곧 가방 안에서 금괴를 하나 꺼내 기슬러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게 금괴를 받아 든 기슬러는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 만약 크로센 공작이 황제의 수작을 눈치챈다면... 그는 자신의 또 다른 동맹 세력에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네. "
" 동맹 세력이라면...? "
" 중앙정보국에서도 이미 눈치채고 있던 것 아니었나...? "
" 아... 서부 왕국 연합 말입니까...? "
팔켄하겐의 대답에 기슬러가 고개를 끄떡였다.
" 크로센 공작이 서부 왕국 연합의 앙투안 대공과 비밀리에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은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아무튼 크로센 공작으로서는 황제와 내전을 벌이기보다는 외부의 동맹을 이용해 이 위기를 극복해나갈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네. "
" 그럼... 서부 국경에서 전쟁이라도 터진단 이야기입니까...? "
" 전쟁? 전쟁이란 건 그리 쉽게 벌어지는 게 아니야, 팔켄하겐 군. 게다가 서부 왕국 연합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발루아 왕국의 사정 또한 그리 좋지만은 않기 때문에, 전쟁을 쉽게 결심할 여유 또한 없단 말일세. 하지만 서부 왕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앙투안 대공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리만은 없을 테니... 분명 서부 국경 어딘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네, 그 규모가 크든 작든 말이야... "
" 그럼... 제국에서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겠군요... "
" 그것은 오로지 황제의 결심에 달린 문제라 할 수 있겠네. 일단 국경에서 불길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면 제국의 상비군단들이 눈앞의 국경문제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국경의 상비군단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황제가 남부의 크로센 공작을 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황도를 방비하는 2개의 근위군단과 모룽겐에 주둔 중인 제1기병군단밖에 없단 말일세. 그에 반해 크로센 공작을 비롯해 슈트라흐비츠 공작과 루돌슈타트 공작이 동원할 수 있는 동원군단의 숫자는 무려 9개, 즉 1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대병력을 소집할 수가 있지... 그것도 문서상에나 나와있는 전력일 뿐, 남부 귀족파가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하게 될지는 그 누구도 짐작할 수가 없단 말일세. 결국 국경의 상비군단을 동원할 수 없는 황제가 내전을 결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말이지...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제국에서 내전이 벌어지게 될 경우, 결국엔 서부 왕국 연합까지 개입된 대륙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일세... 내 남은 왼손 모가지를 걸어도 될 정도로 말이야... "
기슬러의 이야기에 팔켄하겐이 기슬러의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오른손이 잘린 형벌을 받은 양반이 자신의 왼손을 들먹이는 모습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기슬러의 남은 왼손에서 눈을 뗀 팔켄하겐이 자신의 생각을 기슬러에게 말했다.
" 그럼... 황제에게 남은 최상의 시나리오란 것이 결국엔 남부의 공작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수도로 불러들이는 일밖에는 없다는 이야기군요... "
" 혹시 또 모르지, 황제의 곁에 있는 하이드리히 남작이 다른 수를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야... 하지만 자네 말대로 황제가 남부의 공작들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현재로서는 그것밖에 없어보이는군... "
기슬러는 크로센 공작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 적지 않은 세작을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슬러는 만약 크로센 공작이 그들로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얻게 된다면, 그를 위해 준비한 황제의 올가미 역시 무용지물이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크로센 공작의 세작을 감시하고 체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바로 제국 보안청과 중앙정보국이라 할 수 있었는데, 기슬러는 정작 중앙정보국의 수장인 볼라우슈만 남작이 크로센 공작의 세작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남부 영지에서 파병된 4개 기병대에 관한 지휘권 조정 문제는 프란츠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처음엔 제국군 참모차장 만네르하임 장군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브라운슈타인 기병대의 지휘관인 피르몬트 남작이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결정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만네르하임 장군이 이를 적절히 해명해 주었다.
" 애초에 남부 영지의 기병대들을 하나로 통합해 일원화된 지휘권을 부여하게 된 이유는 바로 남부 기병대가 각기 거느린 병력이 대대급에 불과할 정도로 그 수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 4개의 기병대를 하나로 통합해야 제대로 된 1개의 독립 기병연대 편제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임시방편으로 정해진 편제라 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으니 굳이 일원화된 지휘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만네르하임 장군의 설명대로 홀슈타인 기병대 병력이 400여 명에서 1200여 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독자적으로 독립 기병연대의 편제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굳이 남부의 기병대를 통합해 몸체를 불릴 이유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 그러니 남부 연합 기병대의 편제를 2개의 독립 기병연대 편제로 나누어 2군 사령관인 술라 남작에게 직접 배속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만...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만네르하임 장군의 입에서 '술라'남작이라는 존재가 튀어나오자 프란츠의 몸이 움찔거렸다. 지난 황실 연회장에서 '미친개' 술라 남작이 크로센 공작의 '사냥개' 앙게르뮌데 남작을 말 그대로 개 패듯이 구타했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여전히 피르몬트 남작은 반대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기울어졌다고 판단한 오스발트 남작이 마지못해 찬성을 하면서 회의의 진행은 급속도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곧이어 남은 1개의 독립 기병연대의 통합 지휘관에 경험 많고 작위도 높은 괴를리츠 자작이 선정되면서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 프란츠의 의견대로 남부 지역 4개의 기병대는 2개의 독립 기병연대로 편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록 물리적인 힘이 오고가는 전투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회의석상에서의 싸움 역시 치열하다는 사실을 프란츠는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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