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실 연회(3)
" 홀슈타인의 지배자, 요제프 에른스트 폰 로트링겐 공작 전하께서 입장하시겠습니다! "
황궁 시종장이 로트링겐 공작 일행을 큰소리로 소개하며 옆에 있던 알림종을 우아한 동작으로 내리쳤다.
황실 연회가 열리는 황궁 쇤부른의 대연회장은 반듯한 대리석 바닥이 깔린 거대한 중앙 홀과, 각종 예술품으로 전시된 회랑과 연결되는 야외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다. 특히 테라스에서는 제국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었기에, 야외 연회장은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황궁을 찾은 로트링겐 공작이 가문의 일족과 일행을 이끌고 튜튼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에게 알현을 청했다.
" 튜튼 제국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영명하신 대제(大帝)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폐하께, 로트링겐 일가를 대표하는 저 요제프 에른스트 폰 로트링겐이 이렇게 충성된 마음을 전하며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 잘 와주었소, 로트링겐 공작.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구려. "
보좌에 앉은 황제가 공작의 인사를 친근하게 받아주며 옆에 있던 황족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로트링겐 공작의 맏아들이자 후계자인 베른하르트 백작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1황자 카를 루트비히는 소문대로 유약한 인상의 남자였다. 로트링겐 공작과 더불어 사람 좋기로 소문난 아스카니아 공작의 혈통을 절반쯤 물려받았기 때문인지 온순한 성정을 지니고 있어 전체적으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성난 인상의 2황자 지기스문트 빌헬름이 당당한 체구를 자랑하며 서 있었다. 얼마 전 황제가 역임하던 황실 근위기사단의 단장으로 1황자 카를 루트비히가 임명되었다는 소식에 2황자가 저리도 잔뜩 뿔이 나있는 것이라 생각한 베른하르트 백작은 곧이어 황녀 프레데리카 도로테아와 샤를로테 알베르틴을 살펴봤다. 샤를로테 황녀는 아직 나이가 어린 미성년의 소녀였고, 프레데리카 황녀는 이제 곧 혼사가 결정될 터였다.
특히 백작은 프레데리카 황녀를 주시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도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곧 에버스발데의 여주인이 되자마자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황제와의 대면이 끝나고 로트링겐 공작 일행이 자리를 찾아 이동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베른하르트 백작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왔다.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백작님. "
베른하르트 백작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 이는 바로 황실 안보수석인 슈테판 하이드리히 남작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하이드리히 남작. 공사가 다망하실 텐데 이렇게 황실 연회까지 참석하셨군요. "
베른하르트 백작 역시 미소를 지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비록 하이드리히 남작이 평민 계급 출신에 하위 등급의 작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황제와 아주 가까운 권신인데다 나이도 많았기에 베른하르트 백작은 그에게 정중한 태도로 임했다.
"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의 귀족 사회가 한동안 들썩거렸답니다. 한동안 그 귀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로트링겐 공작 전하께서 올해 황실 연회에는 이렇게 참석해 주시어 자리를 빛내주시니 말입니다. "
" 아버님께서는 영지의 일로 많이 바쁘셨답니다. 건강문제도 있고 해서 먼 거리를 이동하기엔 불편한 점이 많았지요. "
" 그래도 공작 전하께서 저리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그 옆에서 백작님이 이리도 훌륭하게 영지일을 돕고 계시니 얼마나 든든하시겠습니까! "
하이드리히 남작이 베른하르트 백작을 치켜세워주자 백작의 두 눈이 가늘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 그럴리가요! 어찌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무슨 능력이 있다고 영지일을 도울 수 있겠습니까! 그저 아버님 곁에서 조금이나마 업무를 도와드리는 것 이외에는 한가하게 시간을 때우기만 할 뿐이지요. 오히려 하이드리히 남작이야말로 황제 폐하를 옆에서 이리도 훌륭히 돕고 계시니 어찌 저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남작이 황제 폐하의 권신으로서 제국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한다는 이야기가 우리 남동부의 홀슈타인까지 자자할 정도입니다. "
" 허헛! 내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제가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
하이드리히 남작의 노회한 눈빛이 베른하르트 백작의 반짝이는 눈빛과 부딪혔다.
" 부디 홀슈타인의 '기병연대'가 제국의 영광을 위해 쓰이길 바라겠습니다, 백작님. 그것은 오롯이 황제 폐하께서 로트링겐 공작가에 드리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
"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의 '영광'과 우리 로트링겐의 '영광'이겠지요, 남작. "
하이드리히 남작과 베른하르트 백작이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제프 에른스트 폰 로트링겐 공작의 존재감은 그의 맏아들이자 후계자인 베른하르트 백작보다도 희미한 것이었다. 워낙 베른하르트 백작이 주목을 받는 것도 있었지만, 세간의 평가는 로트링겐 공작의 인간됨을 모호하고 어중간한, 하지만 사람 좋은 면모를 지닌 군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레오폴트 5세는 저 멀리 자리하고 있던 로트링겐 공작을 바라보며 세간의 평가를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언뜻 보면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없는 모습이 로트링겐 공작을 얕잡아보는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황제가 보기에 이는 대체로 시야가 좁고 통찰력이 부족한 사람들의 평가일 뿐이었다.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미치는 수밖에 없지...
권력의 최정점에 서있기에 그것을 잘 알고 있던 황제는, 그런 권력의 단맛에 취하지 않고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을 보이는 로트링겐 공작이 대단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탐하지 않고 그것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다면 결코 무리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기에, 비록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로트링겐 공작의 움직임은 제법 묵직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베른하르트 백작 같은 든든한 후계자까지 두고 있으니, 요즘 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황제의 두 눈엔 로트링겐 공작의 정중동(靜中動)하는 모습이 내심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어떤 중년의 남자가 황제의 곁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바로 황제의 충직한 신하이자 내각의 총리이며 1황자의 숙부인 율리우스 헤르만 폰 아스카니아 공작이었다.
" 이보게, 아스카니아 공작. 그대 가문의 결정은 정해졌는가...? "
" 설득할 것도 없었습니다, 폐하. 저희로서도 혼사의 상대가 훌륭하다 생각하기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지요. "
" 그래? 그거 정말 잘 되었군. 마침 저기 로트링겐 공작도 자리하고 있으니 그에게 가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당사자끼리 만나보게 하는 것도 좋고 말일세. "
황제의 조바심에 아스카니아 공작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폐하의 뜻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스카니아 공작이 자리를 뜨자마자 황실 시종장이 알림종을 치며 크로센 공작의 입장을 알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황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크로센 공작이 일행을 이끌고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남부 귀족파를 대표하는 크로센 공작 역시 한동안은 수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워낙 황제와 대립하던 사이였기에 불편한 점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 불충한 신하가 배후에서 일을 꾸미는 데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황제는 크로센 공작이 쾨니히스베르크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에 더욱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그런 크로센 공작이 이렇게 황제의 보좌 앞에 서있는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는지, 좌중의 시선이 모두 이곳으로 집중되었다.
막시밀리안 빌헬름 폰 크로센 공작이 단호한 몸짓으로 황제에게 예를 표하며 알현을 청했다.
" 크로센 공작, 그대를 이곳에서 보는 게 정말 오랜만인 듯 하오. 그동안 건강하셨소? "
" 폐하께서 마음을 써주시니 저야 항상 건강할 따름이옵니다. 폐하께서도 강녕하셨는지요...? "
서로의 건강을 챙겨주는 인사치레로도 볼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감싸고도는 분위기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제국의 서부 국경을 위태롭게 만들던 알메리아 사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 중 하나가 바로 크로센 공작이라는 사실을 이미 중앙정보국의 보고로 인해 알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서부 왕국 연합군의 총사령관 앙투안 듀도네 드 발루아 대공 역시 크로센 공작과 비밀스럽게 연계를 하고 있으리라 짐작되었기에, 황제는 아무리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지만 제국의 안정까지 어지럽히는 크로센 공작을 마음속으로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결심을 했다.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로트링겐 공작! "
주변의 귀족들과 담소를 나누던 로트링겐 공작에게 아스카니아 공작이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 오... 율리우스 공 아니시오? 정말 반갑소이다, 그런데 이거... 내각에서 경륜(經綸)을 쌓더니 더욱더 원숙해지신 것 같구려! 하하. "
" 별말씀을요! 공작께서도 신수가 훤해지셨습니다! "
두 사람 모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반겼다.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 이 두 사람은 유난히 사람 좋기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분위기는 오랜만의 만남이라 어색할 만도 했지만 밝은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 참! 여기 내 아들들을 공작께 소개하리다. 여기는 내 맏아들인 베른하르트, 그리고 이쪽은 내 둘째 아들인 프란츠라 하오. "
베른하르트 백작과 프란츠가 아스카니아 공작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 로트링겐 공작께서 이렇게 걸출한 아드님들을 두셨으니 정말 든든하시겠습니다, "
" 별말씀을! 아직은 부족한 아이들이니 아스카니아 공작께서 많이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스카니아 공작은 그렇게 로트링겐 공작과 담소를 나누면서도 간간이 로트링겐 공작의 둘째 아들인 프란츠를 훑어봤다.
비록 정통의 핏줄이 아닌 사생아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로트링겐의 성씨를 인정받은 청년의 모습은, 같은 남자인 아스카니아 공작이 보기에도 상당히 잘생긴 것이었다.
내심 자신의 질녀(姪女)인 엘레오노르와 잘 어울리는 한쌍이라 생각한 아스카니아 공작은 가까이 있던 자신의 기사에게 눈짓으로 지시를 내려 공녀를 데려오도록 했다.
" 이보게, 막스! 어딜 그리 보고 있는 건가? "
크로센 공작의 어릴 적 애칭을 부르며 다가온 이는 남부 귀족파의 일원이자 크로센 공작의 든든한 동료인 알렌슈타인 주(州)의 대영주 아우구스트 빌헬름 폰 슈트라흐비츠 공작이었다.
" 청춘이란 좋은 것이지... 안 그런가? "
크로센 공작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로트링겐 공작과 아스카니아 공작이 한창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봤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고 있던 슈트라흐비츠 공작은 크로센 공작의 뜻 모를 이야기에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 갑자기 청춘을 논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
슈트라흐비츠 공작은 뚜렷한 정치적 주관을 갖고 황제에게 대항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정국을 바라보는 시야가 어두웠고, 그저 크로센 공작과 발을 맞추는 데에만 열중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브리센 시(市)의 7군단 병력이 알메리아로 쏙쏙 빠져나가, 앓던 이가 빠진 듯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 자네... 동맹의 표식만큼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
크로센 공작의 아리송한 질문에 슈트라흐비츠 공작은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 뭐 그런 싱거운 질문이 다 있는가? 그야 당연히 혈연관계를 맺는 것이지. "
" 자네 말이 맞네. 혼인만큼 확실한 우호관계를 다짐할 수 있는 것도 없겠지. "
크로센 공작의 이야기에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은 슈트라흐비츠 공작이 입을 열어 물었다.
" 자네 혹시... 자네 조카인 프레데리카 황녀의 일을 논하고 있는 것인가? "
이 친구 정말 눈치 없기는...
크로센 공작이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슈트라흐비츠 공작에게 설명해주었다.
" 프레데리카 황녀의 혼사 문제는 어차피 우리 손에서 떠난 문제네. 게다가 북부의 에버스발데와 아이제나흐 후작은 우리의 체스판에 낄 역량도 안 되는 것들이지."
" 그래도 아이제나흐 후작은 엄연히 제국의 한 지역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이네. 나이가 다소 젊기는 하지만 자네 조카인 프레데리카 황녀와 혼인관계를 맺는다면 우리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게 아닌가? "
" 도움? 되려 우리 발목만 잡지 않으면 다행이지. 진짜 문제는 모룽겐과 홀슈타인이야... "
모룽겐과 홀슈타인...? 모룽겐과 홀슈타인이라면 아스카니아 공작령과 로트링겐 공작령을 뜻했기에, 슈트라흐비츠 공작은 그제야 크로센 공작의 시선을 따라 두 사람이 한창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크로센 공작이 멀찍이 서있던 오이겐 폰 앙게르뮌데 남작에게 모종의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크로센 공작의 '사냥개' 앙게르뮌데 남작이 자신의 얼굴에 길게 파인 흉터를 씰룩거리며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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