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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객 님의 서재입니다.

한스의 그림자에 리치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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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객
작품등록일 :
2024.08.27 07:33
최근연재일 :
2024.09.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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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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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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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1화. 던전1

DUMMY

서문

모든 우주는 수학적인 정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중우주는 우주들의 가설상 집합이다.




1화. 던전



습기로 번들거리는 지하 동공의 벽이 원형을 그리며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기는 무거웠고 유황과 기름 냄새가 났다. 어둠을 밀어내는 횃불의 불꽃이 불안정하게 일렁이며 벽에 기괴한 그림자를 만드는 가운데 십여 명의 기사와 수백 명의 병사가 사방을 경계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사가 바짝 조여진 것처럼 긴장된 상황, 축축한 벽을 타고 흘러내리다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 긴장된 침묵을 깨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음울하게 만들고 불쾌하게 만드는 던전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기사와 병사들은 흔들림 없이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그 가운데 모두의 시선은 커다란 공동의 한쪽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엔 투명한 수정 덮개의 관이 있었다. 그 수정관은 짐승의 내장같이 축축한 공동의 벽에서 돌출된 몇 개의 관 중 하나였다. 언뜻 그것은 내장에 돌출한 종양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금속흉갑을 입은 건장한 기사가 그 침묵을 깼다.


“다음은 너다. 너 들어가.”


모든 이의 시선이 금속흉갑을 입은 기사가 지목한 병사에게로 향했다.

지목당한 병사의 눈은 어느새 공포로 크게 떠져 있었다. 가쁘고 옅은 숨결, 빠르게 흔들리는 눈동자.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만 벙긋거릴 뿐 소리가 목구멍에 잠겨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금속흉갑을 입은 기사가 못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그 병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써걱.


금속 빛이 번뜩였고 어느새 핏물이 튀며 병사의 팔이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병사는 두 눈을 부릅뜨고 바닥에 떨어진 자기 팔을 본 후에야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크아악, 허어억.”


하지만 검을 휘두른 기사는 아무런 감정 없이 말할 뿐이었다.


“들어가라고 했다. 바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번엔 목을 잘라 주지.”


비명을 질러대던 병사의 목소리보다 분명 더 작은 목소리인데도 기사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또렷하게 들렸다.


“으으. 아, 알겠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로 피가 뿜어지는 팔을 부여잡고서 허겁지겁 수정관 쪽으로 이동하는 병사였다. 수정관에 다가간 그가 곧바로 수정관의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수정관의 문이 서서히 닫힌다.

잘린 팔을 움켜잡은 병사가 수정관 안에서 동공을 향해 돌아섰다. 공포와 절망에 질린 병사의 얼굴이 투명한 수정 뚜껑 너머로 보였다. 곧 수정관이 하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수정관에서 빛이 뿜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빛 속에 기묘한 문양들이 섞여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것은 룬문자로 이루어진 마법의 문양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어느 순간 잘린 팔을 움켜잡고 고통스러워하던 병사의 표정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수정관에 빛은 강해졌는데 놀랍게도 잘린 팔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병사의 표정이 황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랬다. 분명 쾌락으로 물든 표정이었다. 마치 절정에 이르러 사정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의 그 표정 말이다.

한동안 절정의 시간이 계속되다가 수정관의 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데 그때부터는 병사의 표정이 쾌락이 아니라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강렬했던 쾌락만큼이나 고통도 큰지 급기야 비명을 질러댄다. 수정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밖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병사의 일그러진 얼굴과 벌어진 입과 눈동자로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더 공포스러웠다.

어느 순간 병사는 비명으로도 모자라는지 온몸을 비틀며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런다고 고통이 줄어드는 모습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부릅떠진 눈과 벌어진 입, 확장된 콧구멍으로 더러운 체액들이 마구 흘러내렸다. 미친 듯 몸부림치던 병사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잘게 떨었다. 그러기를 얼마. 놀랍게도 잘게 몸을 떨던 병사의 몸이 갑자기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치 생기가 빨린 미라처럼. 병사가 완전히 말라버리자, 그 순간 수정관의 빛이 사그라들었고 마법 문양도 사라졌다.


치익.


수정관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미라가 된 병사가 토해지듯 튕겨 나와 바닥에 부딪혔다.


퍼석.


병사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끔찍한 광경을 수정관 가까이에 붙어 서서 자세히 지켜보는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코작크 왕국의 왕실 새벽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었다. 그중 나이가 지긋한 마법사가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일레인 님. 마법진의 패턴과 내용을 일부 해독했습니다.”


일레인이라 불린 자는 화려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중앙에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던 금색 로브의 두건을 젖혔다. 드러난 얼굴은 뜻밖에도 여인이었다.

피부는 백옥처럼 매끄럽고 투명했으며, 눈은 깊고 푸른 바다와 같았다.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깊은 지혜로 별처럼 반짝거렸고, 실크처럼 부드러운 긴 금발은 우아하게 흘러내려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벌어진 로브 사이로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날씬하면서도 곡선미가 돋보였는데 덧입은 화려한 금색 로브 곳곳은 정교한 문양과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녀의 신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권위와 우아함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습으로 마치 태어날 때부터 지배자로 태어난 듯한 카리스마를 뿜고 있었다.

일레인 공녀.

그녀는 남 대륙의 7 왕국 중 강국인 코작크 왕국의 공작 가문의 공녀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왕족의 피가 이어진 신분이었으며 코작크의 왕이 그녀를 끔찍이 아낀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수정관 안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일레인 공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빛이었다. 무심하고 차분한 눈빛엔 언뜻 지독할 정도로 차가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오직 수정관의 변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수정관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수정관이 미라를 토해내자, 앞에 선 중년의 마법사를 향해 말했다.


“확인된 게 있으면 설명하도록.”


중년의 마법사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이 수정관의 빛은 대상의 몸에 마법진을 새기고 있습니다.”

“마법진이라? 몸 어디에 새긴다는 거지?”

“내부 장기와 뼈에 주로 마나 회로를 새겨서 육체를 강화하거나 변이시키는 것 같습니다.”

“수정관은 일종의 육체 강화 장치로군. 그렇다면 강한 병사가 튀어나와야 거잖아? 어째서 자꾸 미라가 되는 거지?”

“인간의 육체로는 새겨지는 마나 회로를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인간용이 아니라는 거야?”

“아무래도 몬스터나 마물이 대상인 것 같습니다.”

“자꾸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건 확실하게 알아낸 게 아니라는 것이겠군?”


마법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합니다. 분명 마법진을 새기는 장치입니다.”

“장담할 수 있어?”

“며, 몇 번만 더 반복하면 장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 해.”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대답한 마법사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허릴 펴더니 일레인의 옆에서 그녀를 호위하듯 서 있는 중후한 기사를 바라보았다. 톰슨 남작이었다. 그가 마법사의 눈길을 접한 후 근엄한 모습으로 조금 전 병사의 팔을 잘랐던 기사 린네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 린네만이 다시 늘어선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덩치의 린네만이 돌아보자, 숨을 죽이는 병사들이었다. 곧 한 병사를 가리켰다. 지목당한 병사가 숨넘어갈 듯 딸꾹질을 하며 뒷걸음쳤다. 그 순간 뒤쪽에 서 있던 기사 하나가 그 병사의 목을 잡더니 수정관으로 끌고 가서 강제로 집어넣었다. 다시 하얗게 빛을 뿜어내는 수정관이었다. 얼마 후 그 병사 역시 미라가 되고 말았다. 그사이 마법사들은 수정관에서 떠오른 마법진을 해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미흡한 표정이었다. 기사 린네만이 다시 늘어선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미치겠네···.’


린네만의 코앞에 서 있던 한스는 내심 한탄하고 있었다. 아무리 머릴 굴려도 더는 살아남을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절망스러웠다.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해. 그래,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생각하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나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으니까.

한스는 억지로라도 눈을 부릅뜨고 숨을 길게 들여 마셨다.


한스는 죄수병으로 15년 형을 선고받은 후 최악의 변방인 이곳 드래고니아고원의 장벽에서 무려 15년째 버티고 있었다. 수많은 죄수병이 죽어 나간 이번의 던전 발굴에서도 기어이 살아남아서 던전의 중심부인 이곳에 도착했었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 죽을 처지에 처한 것이다.


던전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드래고니아고원의 장벽 너머를 수색하던 수색조가 오크 부대의 공격을 받고 도망치던 중 이름 모를 동굴로 피신해서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그곳이 바로 이 던전이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로는 고대 마도 시대의 흑마법사가 만든 던전이라고 했다.


고대의 유적이나 던전이 발견되면 국가적인 규모로 발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만큼 고대의 마법적인 유물은 가치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벽을 지키는 한스와 같은 죄수병들에겐 오히려 재앙이었다. 죄수병들의 목숨 따위 파리 목숨 보다 가볍게 여기는 귀족이나 기사들이니 말이다.

이번 발굴도 무식할 정도로 서둘렀다. 이해는 했다. 혹시라도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여타 왕국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었으니까.

덕분에 정말 많은 죄수병이 죽었다. 천장이 해머처럼 떨어지고 바닥이 꺼지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가 하면, 지독한 독이 뿜어지거나 용암이 흐르는 곳들이 숱하게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죄수병들이 몸으로 해체하며 모두 뚫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던전의 심장부에 도착했고 살아남은 죄수병들은 비로소 안도 했었다. 그러나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오히려 더 최악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던전 중심부 벽에 박혀 있는 수정관이 원인이었다. 발견된 수정관을 조사하던 마법사들이 죄수병들을 하나씩 집어넣었고 그 후 어김없이 미라가 되어서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한스는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고 죄수들이 지목당하는 순간 기사 린네만의 코앞에서 당당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피하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으면 오히려 잘 지목하지 않는 린네만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린네만은 중간이나 뒤쪽의 죄수들만 지목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방법도 통하지 않을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근본적으로 남은 죄수가 몇 없었으니까.

기사 린네만은 두려운 표정으로 서 있는 대여섯 명의 죄수병들을 다시 훑어보았다.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죄수병들이 움찔거린다. 린네만의 눈에 묘한 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곧 자기 눈길을 피하려는 죄수병 하나를 가리킨 후 소리쳤다.


“너, 들어간다.”

“컥, 사, 살려줘.”


지적당한 죄수병은 패닉에 빠져서 비명을 내지르다가 던전의 입구를 향해 도망쳤다. 그 순간 동공을 둘러싸듯 지키고 있던 일반 병사들이 석궁을 발사했다. 순식간에 십여 발의 화살에 꿰인 죄수병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린네만이 중얼거렸다.


“멍청한 놈. 들어갔으면 그나마 살 확률이 조금은 있었을 텐데···.”


린네만이 다시 새로운 죄수를 지목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죄수가 죽어 나갔다. 수정관이 죄수병을 토해내자마자, 린네만은 다시 죄수병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끝내 그의 눈은 바로 앞에선 한스에게로 향했다.

한스는 린네만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피하는 순간 무조건 자신을 지목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린네만의 눈은 한스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스는 린네만이 마음을 굳혔다는 걸 알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마치 아껴두었던 음식을 바라보는 듯했으니까.


‘젠장할, 더는 방법이 없는 건가?’


이를 악물었다. 린네만이 그런 한스의 눈앞에 자기의 큰 얼굴을 들이민 후 말했다.


“마침내 네 차례가 온 것 같군. 큭큭, 한 달 후면 복역이 만기인데 아쉽게 되었구나.”


위로하듯 말하는 린네만이었지만 비웃고 있다는 걸 모를 한스가 아니었다.


‘개새끼. 목숨을 가지고 놀리다니.’


욕을 퍼부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한 달 후면 합법적으로 이 지긋지긋한 드래고니아고원의 장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이를 악문 한스의 표정을 가까이서 살피던 린네만이 고개를 뒤로 빼면서 말했다.


“한스, 그만 내려놔라. 일반 병사조차 살아 돌아가기 어려운 장벽 생활이다. 양심이 있다면 너 같은 죄수병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다.”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자기를 자극해서 직접 죽이고 싶어 하는 린네만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스가 아무리 빨리 주먹을 꽂아 넣어도 놈의 얼굴 근처에 주먹이 닿지 못할 것이었다. 마나의 힘을 쓸 수 있는 기사에게 한스 같은 건 허수아비와 별 차이 없었으니까.


‘시발. 가문에서 도망치기 전 어떻게든 마나 심법을 배웠어야 했는데···.’


위험하긴 해도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시 생각해도 늘 후회가 되는 일이었는데 지금의 이 순간 더욱더 후회스럽다.

곧 죽을 것으로 생각하니 과거의 일들이 주르륵 떠오른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생각난다. 침대 위에서 소중하게 자신을 껴안고 전설이나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어머니. 그때가 정말 그립다. 길지는 않았지만, 한스가 유일하게 행복했던 유년 시절이었다.

한스의 어머니는 아름다웠지만 몸이 약했다. 무엇보다 신분이 하녀였다. 한스를 낳고 남작가의 후처가 되었지만, 오히려 불행을 잉태한 것이었다. 남작의 다른 부인들에게 시달리다가 시든 풀처럼 돌아가셨으니까.


‘그때의 난 너무 착하고 어려서 아무런 힘도 없었어. 젠장할 아니지. 지금도 힘이 없는 건 마찬가지니까.’


어머니를 떠올리니 새삼 이를 악물게 된다. 한스는 잠시 행복했던 기억을 지우고 고민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최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해.’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형님들이 있는 한, 어머니의 유언을 들어주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적어도 떠나왔던 고향엔 한번 돌아가 보고 싶었으니까.

린네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한스의 얼굴을 살피다가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말했다.


“후후, 잔머리 그만 굴려라. 네가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아직 한 달 이상 형기가 남았다. 내가 있는데 과연 그 기간을 채울 수 있을까?”


기사 린네만의 눈빛엔 확신이 차 있었다. 면상에 주먹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마음일 뿐이다. 내심 이빨을 갈며 머릴 굴리는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일부러 눈을 크게 부릅뜨고 크게 웃은 후 고함쳤다.


“크하하. 들어가겠다. 못 들어갈 게 뭐야. 그런데 내가 죽고 죄수병이 다 죽으면? 그땐 일반 병사들을 수정관에 집어넣을 거냐?”

“......?”

“아니지. 일반 병사까지 다 죽고 나면? 그다음엔 기사인 너희라고 무사할까? 너흰 수정관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거냐?”

“이, 이놈이.”


뻑.


린네만이 한스의 복부를 걷어찼다.


꾸에엑 꾸엑.


마나의 힘이 실린 기사의 발길질은 엄청났다. 복부를 감싸고 주저앉은 한스는 폐부가 뒤집듯 구역질을 해댔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 고통스러웠지만 한스는 오히려 통쾌했다. 당황해하는 린네만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일부러 일반 병사들을 운운했다.

현재 한스를 포함해서 남은 죄수병은 다섯 명이었다. 다섯 번으로 수정관의 마법진이 해석되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일반 병사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린 것이었다. 물론 일반 병사들까지 수정관에 넣는 건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 일레인 공녀가 결정한 일을 생각하면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왕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일레인 공녀가 얼마나 사악한지.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지는 남 대륙의 7 왕국 전체가 다 알 정도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에 지금 한스의 의도가 먹히고 있었다.

톰슨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반 병사들이 동요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린네만이 당황한 표정으로 재빨리 한 죄수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그래. 너 먼저 들어간다.”

“사, 살려줘.”


지목당한 죄수가 사색이 된 채 비명을 지르자, 린네만이 소리쳤다.


“집어넣어.”


죄수병들 뒤쪽에 서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그 죄수를 잡아끌어서 수정관에 집어넣었다.

한스는 헛구역질하면서 곁눈질로 상황을 살폈다.


‘시발, 어쨌든 내 차례는 면했구나.’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일단 조금은 더 살아남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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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4화. 강요된 정사3 +6 24.09.11 332 21 19쪽
15 4화. 강요된 정사2 +5 24.09.10 342 18 13쪽
14 4화. 강요된 정사1 +2 24.09.09 368 20 12쪽
13 3화. 진짜 유물5 +6 24.09.07 387 26 16쪽
12 3화. 진짜 유물4 +1 24.09.06 386 27 15쪽
11 3화. 진짜 유물3 +2 24.09.05 400 32 16쪽
10 3화. 진짜 유물2 +3 24.09.04 422 28 17쪽
9 3화. 진짜 유물1 +2 24.09.03 484 29 16쪽
8 2화. 어떤 복수4 +3 24.09.02 497 32 13쪽
7 2화. 어떤 복수3 +1 24.08.31 505 33 12쪽
6 2화. 어떤 복수2 +2 24.08.30 539 32 12쪽
5 2화. 어떤 복수1 +3 24.08.29 603 37 14쪽
4 1화. 던전4 +2 24.08.28 594 39 12쪽
3 1화. 던전3 +2 24.08.27 605 43 12쪽
2 1화. 던전2 +4 24.08.27 635 41 12쪽
» 1화. 던전1 +10 24.08.27 812 45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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