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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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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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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10화

DUMMY

펠릭스는 새로운 지도를 힐끗거리며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세히보니, 마침 숲에 조그만 오솔길이 있어 걸어가는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아직 길이 남아있네요?”



실비아는 다른곳 보다 잡초가 훨씬 듬성듬성 자라있는 오솔길 위를 밟으며 말했다.



“뭐 할일없는 동네 꼬마들이 폐허를 자기네 비밀기지로 쓰는가보죠.”



“아니면 할일없는 놈팽이가 간이 주점으로 이용하든가.”



“도둑놈 소굴일지도.”



“펠릭스, 올리버! 둘 다, 나쁜 말은 그쯤 해 둬요. 아직 누가 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잖아요?”



듣다 못한 실비아가 한 소리를 하자 두 남자는 저마다 못들은체 했다.






그러나 오솔길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은, 한 눈에 봐도 도저히 사람 사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 낡은 나무집이었다. 지붕과 벽이 세워져 있기는 하였으나, 색깔이 시커먼것이 꼭 썩은 목재처럼 보였다. 창문은 뒤틀렸고, 문틀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에 잡초는 발목 언저리 높이까지 자라있었는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못 견디고 그마저도 시들했다.



“사람 사는 집이라고요?”



펠릭스가 이죽거렸다. 그러자 실비아는 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뭐, 그럴 수도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에요.”



“아무튼. 그래서, 저기 들어가보자고?”



“왜요? 올리버. 달리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아니, 뭐.” 올리버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냥. 설마, 진짜 누가 살고 있는건 아니겠지?”



“설마요. 아무튼, 들어가보자고요. 뭐 그 농부가 쓰던 일기장이라든가, 뭐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저기, 펠릭스! 잠시만요.” 실비아는 막 발을 떼려던 펠릭스를 붙잡았다. “꼭 그렇게해서까지 알아봐야겠어요?”



“뭐가요?”



“그, 그러니까. 무슨 사연 있는 건물일지도 모르고······.”



“흥. 저는 이미 마음먹었어요. 알아볼 수 있는 데까지 철저하게 알아볼겁니다. 내키지 않으면, 실비아. 당신은 여기서 올리버랑 기다리든지요.”



말을 마친 펠릭스는 그 쓰러져 가는 집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펠릭스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네요.”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실비아가 말했다.



“어떨 때는 공짜로 약을 만들어주고, 또 어떨 때는 터무니없는 약값을 매기기도 하고. 사람을 놀리기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그게 사람이지 뭐. 오락가락하는거. 안 그래?”



실비아는 올리버의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끄덕했다. 그런데, 그들이 걸어온 오솔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실비아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낯선 사람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에는 기이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한 때 누군가가 살았던 그 공간에는, 더이상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 뒤에도, 그곳에 살았던 사람이 남긴 삶의 흔적이 곳곳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 깊이 배어 있곤 했다.



그래서일까, 남의 집에 가는 것은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 보다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그 주인이 사라진 지 몇 십 년이 흐른 뒤일지라도.



물론, 이 모든 것은 펠릭스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는 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코를 킁킁거렸다. 숲의 습기를 머금어서일까, 먼지 냄새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는 가볍게 집 안을 둘러보았다. 불을 켜지 않아 내부가 어둑했는데, 마침 출입문 바로 옆에 양초가 올려진 촛대 하나가 있었다. 펠릭스는 의아하다는듯 그걸 들어올려 살펴보았다. 반쯤 남은 양초는 그리 오래된 물건이 아니었다.



펠릭스는 촛대 바로 옆에서는 성냥갑을 하나 발견했다. 성냥 하나를 꺼내 가볍게 그어보자, 치익 하고 불이 붙었다.



“정말 사람 사는 집인가?”



펠릭스는 알쏭달쏭하다는듯 혼잣말을 하며 초에 불을 붙이고, 촛불에 의지하여 집 내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집 안은 낡아있었다. 의자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테이블은 목재가 뒤틀려 있었으며, 의자는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부엌에 걸려있는 솥은 차디 찼으며, 군데군데 녹까지 슬어 있어 적어도 한 몇 년은 쓰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문은 있지도 않았고, 좁은 부엌에는 햄이나 생선 따위를 줄에 엮어 말릴 공간도 없어보였다.



“대체 뭘 먹고 산 거야?”



펠릭스는 부엌에서 빠져나와 이번에는 복도 저쪽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익숙한 침실의 공기. 사람의 온기는 없어도, 침실 특유의 어딘가 아늑한 공기는 아직까지도 조금 남아있었다.



침실 안에는 낡아빠진 침대와 조그만 책상 하나, 책장 하나가 놓여있었다. 창문에 커튼은 이미 누더기가 되어있었으며, 창문도 창틀 나무가 뒤틀려 더이상 열 수도, 닫을 수도 없었다.



펠릭스는 창문에서 떨어져 책상과 책장을 살펴보았다. 책장에는 이런저런 잡다한 책들이 꽃혀 있었는데, 각각 농업, 식물학, 박물학에 대한 책이었다. 뜬금없이 약초학에 관한 책도 몇 권 있었다. 그리고 표지에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자그마한 책도.



펠릭스는 그 책을 슬쩍 뽑아냈다. 거친 가죽으로 서툴게 만든 겉표지. 펼쳐보자, 반쯤 썩어가던 종이 위에 번져서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잉크 글씨들이 잔뜩 적혀있었다. 하지만, 매 페이지 머리 부분에 날짜가 쓰인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집의 주인의 일기장인듯 했다.






일기장을 찾은 펠릭스는 드디어 쓸만한 단서를 찾았다는 생각에 슬쩍 웃으며 일기장을 파라락 넘겨보았다. 수확은 농부의 가장 큰 기쁨인만큼, 아마 일기장에 무엇을 얼마나 수확했는지 적혀있르리라 믿으면서.



그렇게 펠릭스는 어둠 속에서, 번진 잉크 글씨를 알아보기 위해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도 모른채, 그는 또 하나의 페이지를 팔랑 넘겼다. 마침 호박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첫 수확이라고 하는데, 그 호박의 크기는······.



누군가, 펠릭스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는 어둠 속을 돌아보았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과 마주쳐 기겁을 하며 놀랐다.



“으아악!”



“아이쿠, 미안하구나.”



펠릭스가 재빨리 촛불을 들이밀자, 거기에는 나이지긋한 노파가 조금 미안하다는듯 눈을 껌뻑이며 서 있었다.



“놀랐니?”



“당신, 당신 뭐예요?”



“아, 나는 베티라고 한단다.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그나저나,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는거니?”



펠릭스는 방금전까지 읽던 일기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저는, 보자. 연금술사 인데.”



“그런데?”



그리고 펠릭스는 그 베티라는 노파에게 구구절절 설명을 시작했다.



“······해서, 그 허풍을 제 손으로 깨뜨려 주려고 단서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 혹시, 여기서 살고 계신건 아니죠?”



“아니란다.”



베티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내 친구가 살던 집이지. 나도 가끔 와서 집을 봐 주고 있고.”



“그 친구는?”



“떠났단다. 벌써, 이십 년도 전에.”



펠릭스는 아리송한 얼굴로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 어쨌든 여긴 주인없는 집인거죠?”



“내가 가끔 와서 봐 주는것 말고는.”



“그렇군요. 그래요. 그러면, 보자. 제가 여길 좀 돌아다니면서 구경해도 될까요?”



베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정도라면야.”



“아, 그리고요. 이거.” 펠릭스는 아까의 그 일기장을 집어들었다. “좀 갖고 나가도 될까요?”



“그건 안되겠구나.”



“그래요?”



“그래. 그건 내 물건도 아니니까. 주인에게 직접 허락을 받아야지.”



“떠났다면서요?”



베티는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떠난 사람한테 어떻게 허락을 받아요?”



“그러면, 가지고 나갈 수는 없겠구나.”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인상을 조금 썼다.



“그럼, 뭐. 여기서 좀 보는것 정도는 괜찮겠죠?”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건, 그리 좋은 일은 아니잖니?”



펠릭스는 막 펼쳐보려던 일기장을 도로 덮었다.



“하지만, 뭐. 그이라면 허락해 줄지도 모르겠구나. 일기를 보는것 정도라면.”



펠릭스는 도로 일기장을 펼쳤다.



“보여주려고 일기를 쓰기라도 했나요?”



“비슷하지.”



페이지를 넘기던 펠릭스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앉아서 편히 보렴. 난 잠깐 청소라도 해 주려고 온 것이니까 신경쓰지 말려무나. 네 말마따나, 여긴 사는 사람도 주인도 없는 집이니까.”



그리고 베티는 느릿하게 방문을 닫으며 방에서 나가주었다. 그리고 펠릭스는 잠시 신경질적으로 손 끝을 톡톡 두드리다가, 다시 일기장에 시선을 던졌다.






실비아와 올리버는 졸지에 베티를 도와 폐가의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



더러운 걸레를 손으로 꾹 쥐어짜며 올리버가 벽을 닦았다.



“올리버.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요. 그냥 제가 하고싶어서 그런건데.”



빗자루로 바닥을 쓸며 실비아가 말했다. 그녀는 가구 아래의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빗자루를 집어넣을 때마다 벌레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잠시 긴장했다. 하지만 이 쓸쓸한 오두막에는, 살고있는 벌레조차 없는 듯했다.



“너 혼자 일 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으니까. 그리고, 나도 달리 할 일도 없고.”



“두 사람에게 미안하네.”



부엌 쪽에서 베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니에요. 제가 돕고싶어서 그런 걸요. 미안해 하실것 없어요.”



“착하구나.”



다시 베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실비아는 부엌 쪽으로 웃음을 보냈다.



“저기, 베티?”



“응? 왜그러니?”



슬금슬금 부엌쪽으로 빗자루질을 하며 실비아가 자리를 옮겼다.



“전에 여기 살던 사람이랑 친했나봐요? 아직까지도 그 집을 봐 주고 있는걸 보면 말이에요.”



“아, 그래. 친했지. 친구였어.”



베티는 부엌에서 솥을 닦다 말고 잠시 손을 멈추었다.



“불쌍한 남자였거든.”



“네?”



“로웬. 이 집 주인의 이름이야. 불쌍한 남자였지. 뭐, 사실 그 때는 다들 불쌍했어. 전쟁의 상흔이 깊이 남았거든.”



실비아는 저쪽에서 어느새 돌아온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뭐, 전쟁은 흔한 일이니까. 오히려 요즘이 잠잠한 편이지.”



실비아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베티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친구였다고요?”



“그래. 처지가 비슷했거든. 난 두 아들과 남편이 있었는데, 모두 전쟁터에 끌려간 뒤로는 소식이 없었어. 사망 통지서조차 날아오지 않았단다.”



“그, 그런 일이······.”



“로웬도 비슷했지.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 겨우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갔더니, 아내와 딸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하더구나. 가족을 찾겠다고 무일푼으로 온 왕국을 떠돌다가, 마침내 반쯤 폐인이 되어 엠버타운으로 흘러들어왔지. 그 때는, 나는 그 남자가 단 일 주일도 못 버티고 죽을 줄 알았단다.”



어느새 실비아도 베티도 손을 멈추고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 그 때도 마침 지금과 비슷한 시기였어. 한창 호박을 수확하고 있었지. 지금보다 훨씬 그 크기도 맛도 못난 호박이었지만 말이야.



그런데, 로웬은 그 호박을 보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디로 달려가더구나. 나는 그가 마침내 실성한 줄 알았단다. 그렇게 또 한 명의 불쌍한 남자가 전쟁의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빠졌구나-하며.



하지만, 로웬은 그날로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처럼, 낡은 쟁기와 날에 이가 빠진 도끼로 나무를 패고 땅을 고르더니, 자기가 살 집을 겨울이 오기 전에 맨손으로 지어올렸다. 그리고 겨울이 끝날 즈음, 그는 집 앞 마당의 땅을 갈기 시작했지. 그가 제 손으로 일군 밭에 아무런 대책없이 호박 씨앗을 뿌렸을 때는, 다들 그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단다.”



“엄청난 사람이네요.”



“그래. 대단했지. 그 때 로웬의 모습은, 마치 잘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듯 했단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 생명력과 열정을 태워올렸지. 하지만, 꼬마야. 너도 아다시피, 농사라는 것은 열정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란다.



몇 해 동안은, 로웬은 변변찮은 작물을 수확하지도 못했어. 다행히, 내가 그에게 호기심이 생겨 입에 풀칠할 먹을 거리라도 갖다줘서 겨우겨우 먹고산 형편이지.”



“그랬군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 다음에는, 로웬도 어느덧 농사가 제법 손에 익었단다. 종종 마을에서 제일가는 호박을 수확할 정도로.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어. 커다란 짐마차에 수확한 호박을 실을 때면, 그의 얼굴에서는 기쁨보다는 허무함이 더 많이 느껴졌지.



그리고 어느 날, 로웬은 책을 잔뜩 가지고 돌아왔더구나. 아마, 그 뒤였을거야. 로웬이 키워내는 호박은 점점 더 커져갔어. 처음에는 놀라기만 했던 마을 사람들은 금새 그를 질투하여, 나쁜 소문을 퍼트려댔지. 마녀의 오줌을 섞은 재를 밭에 뿌렸다는 둥, 사람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태운 재를 뿌렸다는 둥, 밤만되면 까마귀와 고양이를 잡아 죽여 그 피로 키워낸 호박이라는둥······.”



“터무니없는 모함이에요!”



실비아는 그녀가 만나본 마녀의 먼 후손 메를린을 떠올리며 가볍게 치를 떨었다.



“그래. 나도 안다. 로웬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어. 마침내, 그가 다른 마을 사람의 두 배 정도 커다란 호박을 만들어 냈을 때, 로웬은 자기가 그동안 연구한 새로운 농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짜로 알려주었단다.”



“공짜로요?”



“그래. 그리고 그 해, 촌장을 설득해서 호박 축제를 열자고 했지.”



“착한 사람이네요. 기껏 힘들여 알아낸걸 공짜로 다 알려주고.”



그러면서 실비아는 아마 펠릭스가 들어가있을 방문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그 뒤로도 항상 일등은 로웬이었지. 그의 호박은 해마다 점점 더 커져갔거든. 그의 부푼 꿈만큼이나. 나중에는 너무 커서 사람 힘으로는 들어올리지도 못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길러낸 호박은 짐마차에 들어가지도 않더구나.”



실비아는 그 노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커다란 호박이, 실존했다는 증거가 분명했다!



“그랬군요! 그 노인이 거짓말한게 아니라니까, 하여튼. 그래서, 그래서요? 그 로웬이라는 사람은 어딨어요?”



베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떠났단다.”



“떠나다니요? 어디로요?”



“그 가장 큰 호박을 수확하여 축제 무대에 올린 밤에.”



베티의 두 눈이 촉촉하게 빛났다.



“나는 무언가를 느꼈단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마을 관문 쪽으로 무작정 걸어가니, 로웬이 서 있더구나. 그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빈손이었어.



나는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했지. 그러자 그는 웃기만 하더구나.



왜 떠나냐고도 물었단다. 이번에는 짧게 한 마디 대답하더구나.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뭐라도 더 묻고 싶었단다. 그를 그대로 떠나보내면 안 될 것 같았거든. 하지만, 할 말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구나. 내가 그에 대해 알던 것이라고는, 전쟁터에 끌려가 나와비슷한 상처가 남았다는것 뿐이었는데. 새삼 전쟁의 이야기를 해서 뭣하겠니?



그래서 나는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단다. 어떻게, 그렇게 호박을 크게 만들었냐고.”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그는······.”



“알았어요!”



방문을 박차고 펠릭스가 일기장을 붕붕 휘두르며 뛰쳐나왔다.



“알아냈다고요! 내 참.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 노친네가, 허풍을 떨어도 유분수지. 이건, 순 사기구만! 연금술사의 비의를 훔쳐내 크기만 쓸데없이 키운, 먹을 수도 없는 호박을 대회에 출품한 걸 가지고······?”



펠릭스는 꼬마의 장난으로 박살이 난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처럼, 냉랭한 균열이 대기 곳곳에 쐐기처럼 박힌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베티는 조금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전부란다.”






펠릭스는 엠버타운 마을에서 커다란 솥과 호박 하나를 빌려 약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그에게 시비를 걸었던 노인이 반신반의한 눈으로 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베티와 실비아가 여전히 나란히 서 있었다.



“저기, 베티. 아깐 죄송해요. 제 일행인데, 눈치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데다가 사람 배려할 줄도 조금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아니, 난 괜찮단다. 로웬은 연금술사의 비의를 훔친 적이 없으니까.”



“그래요. 그렇겠죠. 분명, 저는 모르는 무슨 최신 농법을 이용해서······.”



“내게 사실대로 말 해 주더구나. 아무리 씨앗을 골라내고 접을 붙여도, 비료의 배합을 바꾸어도 더는 크기를 못 키우겠다고. 그래서, 연금술의 기술을 공부하고 있다고 말이다.”



“네, 네에?”



“로웬은 혼자 공부했지. 그의 텅 빈 책장에 낯선 책이 늘어갔고, 그의 호박은 나날이 덩치를 키웠단다. 비록, 더이상 먹을 수도 없게 되어버렸지만.”



“왜 그렇게까지 했대요? 그냥, 호박은 호박일 뿐이잖아요.”



실비아는 넉살좋게 웃으면서 국자로 내용물을 보란듯이 높이 떠올렸다가 솥 아래로 도로 붓고있는, 펠릭스의 조그만 공연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 사람.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랑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 호박이랬거든.”



실비아는 넋을 잃고 베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박을 좋아한다더구나. 가족 모두가.”



그녀는 베티의 얼굴 위에 쓸쓸하고 복잡한 심경이 조용히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보고, 어느새 자신의 눈에서도 눈물을 느꼈다.



“그래. 그 때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많았단다.” 베티는 눈물을 훔쳤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지. 우리들에게는, 별로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더구나. 하지만······이젠, 다 지나간 일일 뿐이지.”



실비아는 베티의 말을 듣고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로웬은 두 번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단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저 연금술사가 알려주지 않을까 싶구나.”






어느새 약을 완성한 펠릭스는 걸러낸 약을 호박에 끼얹었다. 그러자, 정말 말 그대로, 호박이 부푼 반죽처럼 점점 팽창하기 시작했다.



“보라고요! 이게 그 커다란 호박의 정체에요. 하지만, 봐요!”



그리고 펠릭스는 호박이 덩치를 어느정도 키우자, 송곳으로 호박을 푹 찔러버렸다. 그러자 풍선처럼 바람빠지는 소리가 나더니, 호박은 금새 원래의 크기로 돌아가버렸다.



“이래도 그 호박이 진짜라고 주장할 셈입니까?”



펠릭스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불쌍한 노인을 내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잠시 입을 벙긋거리다가, 되려 펠릭스에게 단호하게 호통쳤다.



“내가 본 호박은 진짜였어! 네가 틀린거다 꼬마야!”



“틀리다고요! 난 그 호박을 키워낸 농부가 직접 일기장에 쓴 그대로 만들었어요! 그는 연금술사의 비밀스러운 지식을 훔쳐내서 호박을 키워냈을 뿐이에요!”



“아니야! 아무튼, 네가 틀렸어! 난 그 호박을 직접 먹어봤다고. 정말 맛있었단 말이야! 왕국에서 제일가는 요리사라도, 그 농후하고 달콤한, 풍부한, 향이 좋은 크림같은 호박을 만들지 못할거야. 그 껍데기는 바삭바삭했고, 속은 달콤했지. 씨앗은, 씨앗은 또 얼마나 컸다고? 내 엄지손톱만했어.”



그리고 순식간에 추억에 빠져든 그 노인은 갑자기 다른 구경꾼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이렇게 외쳤다.



“안 그래? 그 때, 우리가 본 호박은 이게 아니야!”



“그래, 아니야!”



그러자 마을 주민들도 노인의 편을 들었다.



“네가 틀렸어! 그 호박은 정말 있었다고!”



그렇게 말한 사람은, 펠릭스가 처음 물었을 때 호박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말했던 노인이었다.



“맞아, 왕국에서 제일가는 호박이었어! 우리 마을의 자랑이었지. 난 마침 그 때 도시에 있었는데, 소식지에 그 호박이 실린 것도 봤어!”



“그 축제를 몇 년만 더 했어도, 우리 마을은 왕국에서 제일 가는 호박 마을이 됐을거야. 네가 만든 그런 가짜 호박따윈 낄 자리도 없었을 거라고!”



“어디서 가짜를 들이밀어? 당장 저리가, 가버려!”



“그래. 이게 다,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농사를 안 지어서 그렇다고! 어? 내가 말이야. 나이 좀 들었다고 손을 뗐더니. 어이, 이봐들! 외지인이 우리 호박을 저렇게 무시하도록 내버려 둘거야?”



졸지에, 마을 사람들은 펠릭스를 향해 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다가 도망치듯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실비아는 베티를 힐끗 돌아보았다.



“저 사람들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것 같구나.” 베티는 쓸쓸하게 그 메마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먹을 수는 없는 호박이었거든.”



“그럴까요? 저 사람들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좋겠구나. 하지만······.”



실비아는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자기 입술 위에 갖다대고는, 베티를 향해 웃어보였다.



“지나간 일일 뿐이라며요. 그럼, 좀 좋게 기억해도 괜찮지 않아요? 누가 뭐라겠어요?”



실비아는 들뜬 군중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래. 네 말도, 일리는 있구나. 하지만, 어쨌든 로웬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마을에 돌아오지 않았단다. 집도, 밭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그러자 실비아는 싱긋 웃었다.



“분명, 가족을 찾아서 그렇겠죠. 어디선가 잘 살고 있던 가족을 되찾았으니까, 더이상 엠버타운으로 갈 새가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그러자 베티는 쓸쓸하게 웃으며 실비아를 가만히 바라보아주었다.






소란 때문일까, 마차를 잡는데 조금 껄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펠릭스는 마부에게 두 배의 삯을 지불하여 겨우 마차를 잡아탔다.



“시골 사람들이란!”



그는 차창이 제대로 닫힌 것을 확인하고 한 마디 내뱉은 다음, 다시 차창이 닫힌 것을 확인했다.



“그러게, 펠릭스. 내가 말 했잖아. 까짓 호박에 뭘 그리 열을 올리냐고.”



“아니, 난 또 대스승님이 장난치고 간 줄 알았죠. 내 참. 저걸, 농부가 진짜로 혼자 독학해서 알아냈다고?”



“펠릭스. 당신, 그러고보니까. 대스승님 이야기가 나오면 꽤 흥분하네요?”



“그렇죠! 제 일생의 라이벌인데!”



“응?” 올리버는 조금 의아하다는듯한 얼굴로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네 스승님은?”



“제 스승은 저한테는 스승조차 못 돼요. 실력이 저만 못하니까.”



펠릭스는 아주 당당하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래요, 실비아. 제가 실력으로 못 이긴 연금술사는, 오직 제 대스승님 뿐이거든요! 스승님이 만드는 약과, 가지고 있는 지식은 진작 따라잡았죠.”



“그래서 그렇게 집착하는 거였어요? 어린 애도 아니고.”



“뭐 어때서요? 아무튼, 난 최고의 연금술사가 될 작정으로 연금술을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최고가 되려면 대스승님도 꺾어야죠.”



“그래서 그 붉은 가루 병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도 마음에 품고 있는거야?”



그러자 펠릭스는 올리버를 힐끔 돌아보았다.



“······뭐, 그렇죠. 대스승님도 그 병에 대해서는 변변찮은 약 하나 못 만들었으니까. 제가 막아내긴 했지만, 연금술사로서 제대로 된 약을 못 만든건 천추의 한이에요.”



“참 대단하네요. 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 자존심 때문에 그러고 있는 꼴이라니.”



“뭐 어때요? 내가 기억해 준들, 죽은 사람들이 고마워 하기나 하겠어요? 죽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펠릭스는 차창을 드륵 열고는 조금 뚱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뭐. 그래도, 요란법석을 떤 것 치고는 꽤 괜찮은 곳이었어. 안 그래, 펠릭스?”



차가운 바람에 펠릭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조각상처럼, 그것도 아주 무시무시한 조각상처럼 깎여나갔다.



“그렇죠. 나쁜 것들만 모여있는 북쪽 치고는, 꽤 따뜻하고 좋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앞으로 도착할 곳들에서는, 그렇게 훈훈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마 기대 못 할 겁니다.”



실비아는 순식간에 차디찬 바람이 열린 차창을 통해 안으로 불어들어와 마차 안의 공기를 한 순간에 얼어 붙이는 것을 느끼고, 그리고 펠릭스와 올리버의 얼굴 위에 떠오른 음울한 그림자를 느끼면서, 사뭇 악의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한기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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