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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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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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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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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87화

DUMMY

기회의 땅이 바닥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말을 탄 경비대가 마을에 살던 사람들을 구속하고 그들의 집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던 와중, 겁에 질린 누군가가 밀고를 했다. 그들은 장물을 보관한 창고를 급습하여 이 땅 위에서 자행되어온 범죄의 증거들을 확보했다.


누군가가 밭에 불을 질렀다. 개화하지 않은 양귀비들이 불에 타며 피어올리는 봉화는 레오의 집 안에서도 보일 정도로 붉고 강렬했다.




벨룸의 주의가 잠깐 다른 곳에 쏠린 틈을 타, 레오의 단단한 주먹이 벨룸의 안면을 강타했다. 벨룸이 비틀거리는 동안 레오는 그의 얼굴을 향해 두어번 주먹을 더 휘두르고, 그의 복부를 강타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벨룸은 놀랐지만, 그 역시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다시 레오가 그를 향해 팔을 뻗자 벨룸은 그의 손목을 붙잡더니 레오를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렸다.




그들은 꽁꽁 묶인 포로들 앞에서 드잡이질을 계속 했다. 장식으로 놓아둔 꽃병이 산산히 박살나고, 은 접시는 하늘을 날아 벽에 꽂혔다. 그러던 와중, 레오는 벽에 걸어둔 금 십자가를 집어들어 벨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가 나더니 벨룸은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빌어먹을 놈이. 생명의 은인도 몰라보고. 멍청하긴.”


레오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벨룸에게 욕지기를 내뱉고 창문 밖을 슬쩍 내다보았다. 이미 마을은 포위된 뒤였다.


“젠장, 젠장, 젠장! 어떤 멍청이가 꼬리를 밟힌거야! 저걸, 저 아까운걸 팔아보지도 못하고······.”


레오는 잠시 방 안에서 욕지기를 뱉다가, 꽁꽁 묶여 구석에 처박힌 그의 식솔들을 보았다. 거기에 그레이스는 없었다.




레오는 몸을 휙 돌려 그의 방을 벗어났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벨룸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레오의 흔적을 쫓아 저택을 빠져나가, 막 말 위에 올라타는 레오를 발견했다.


벨룸은 당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현관에 장식으로 걸어둔 칼이 보여, 벨룸은 그것을 뽑아들고 이미 말을 몰기 시작한 레오를 향해 힘껏 던졌다. 칼날이 빙그르르 돌며 레오를 향해 날아갔고, 어둠 속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려왔다.




벨룸은 마굿간에 남은 말 한 마리를 끄집어내 말을 타고 레오가 달려간 방향을 쫓기 시작했다. 그는 훈련된 사냥개처럼, 바닥에 희미하게 떨어진 핏자국을 쫓아 달이 떠오른 사막을 향해 달려갔다.




벨룸은 한참동안 사막 위를 달려갔다. 어둠 속을 꿰뚫어 보고, 한 방울의 피 냄새를 놓치지 않는 그는 더이상 사람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는 중천으로 떠오른 둥근 달의 빛을 받아 황량항 사막 위를 계속해서 달려갔다.




점점 더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이 짙어졌다. 벨룸이 집어던진 칼이 제대로 맞은 것이 틀림없었다. 곧, 그는 주인 잃은 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레오가 타던 말이었다.




벨룸은 말에서 내려 바닥에 흥건하게 묻어있는 핏자국을 찾았다. 질질 끌린듯한 혈흔을 따라가자, 거기에는 조그만 폐허의 담벼락을 은신처 삼아 숨을 헐떡이는 레오가 있었다.


“레오. 설명해줘.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야? 네가 하던 일은 대체 뭐고?”


벨룸은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이는 레오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러자, 레오는 갑자기 웃기 시작하더니 발작에 가까운 웃음을 터트렸다.


“벨룸! 오히려 내가 물어야지. 넌 대체 여기서 내가 뭘 하고 있는줄 알았어?”


레오가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말했다. 보름달의 빛을 받아 그의 눈에서는 기이한 안광이 발하는 듯했다.


“뭐, 뭐야?”


“벨룸! 너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네가 나에게 인계해준 그 길 잃은 여행자들. 어디로 가는지 알아봤어? 아니, 관심이나 준 적 있어?”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사람들, 네가 말 했잖아. 조금의 돈을 받고 길잡이를 붙여줘서 사막을 빠져나가도록 도와준다고······.”


“하하하!”


레오가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믿어? 진심으로? 너 바보냐?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 마을이 뭘 가지고 먹고 사는지. 네가 일군 땅에다가 누가 뭘 심어 기르는지도 넌 관심도 없었지? 우리들이 무슨 수로 돈을 벌어 식량과 물자를 사들이는지 그동안 전혀 관심도 없었으면서, 왜 이제와서 갑자기 도덕군자 행세야? 지금까지 조용히 입 다물고 날 도와줬잖아. 벨룸. 너도 공범이야. 경비대가 마을을 이잡듯 뒤지면, 너도 나랑 똑같이 구금되고, 똑같이 교수대에 올라가 죽을 운명이라고.”


“닥쳐, 레오! 넌 날 속였어. 그런 곳인줄 줄 알았더라면······.”


“알려고 노력도 안 한 주제에, 누가 누굴 욕해? 똑바로 말해봐 벨룸. 너, 이곳에 온 뒤로 생각이라는걸 한 번이라도 해 보긴 해 봤어?”


레오가, 거품을 질질 흘리며 웃었다.


“미쳤군. 레오. 너랑 더이상 이야기하는건 의미가 없어. 그리고, 비록 내가 너의 공범이었다고 하더라도, 내 어머니는 그럼 왜 죽었어야 하는건데?”


“사고사야.”


“닥쳐! 난 무덤을 파헤쳐 확인했어. 몽둥이에 얻어맞아 부서진 뼛자국과, 칼자국이 남아있는 뼛조각을 찾았다고! 네가 죽였잖아!”


“재수없는 사고였을 뿐이야. 그년이 양귀비밭에 멋대로 쳐들어갈줄 내가 알았어? 하필이면 입구 지키던 경비병놈이 잠깐 담배피러 간 사이에 안으로 쑥 들어가버렸다고. 보자마자 길길이 뛰면서 당장 왕국에 고발을 하네마네 하는데, 내가 달리 어떡해? 겁만 주려고 한다는게 사고로 그렇게 됐어.”


“사고로 사람을 몽둥이로 두들겨패고 칼로 찔러죽여?”


벨룸은 바닥에 쓰러진 레오의 멱살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화 내 봤자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럼 그 노친네가 제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 그럼 우리 마을은 싹다 잡혀가는데? 교수대에 올라가서 교수형 당하는게 네 꿈이야? 아니잖아?”


레오를 붙잡은 벨룸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도로 레오를 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바닥에 팽개쳐진 레오는 기침을 쿨럭거렸다.


“그레이스는 어딨어?”


“아, 맞아. 그레이스.”


레오가 불길하게 킬킬거리며 웃었다.


“어딨냐고.”


“잘 모셔뒀어. 지금, 조금 병들었거든.”


“병이라니. 무슨? 너, 똑바로 말해. 레오. 그레이스 어딨어?”


레오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벨룸을 쳐다봤다.


“사막에.”


“사막 어디? 말해, 말 하라고!”


레오는 다시 거품을 질질 흘리며 불길하게 킬킬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발작적으로 웃으며 온 몸에서 경련을 일으키다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듯 그대로 축 쳐져버렸다.




벨룸은 레오를 붙들고 흔들었다. 고함을 지르며 거세게 흔들었다. 하지만 칼에 깊이 베인 그의 다리에서 피만 줄줄 흘러나올 뿐이었다. 죽은 레오를 손에서 놔버리고 벨룸은 뒤를 돌아보았다. 기회의 땅이 불에 활활 타며 밤하늘을 붉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그레이스를 찾아야 해.”


벨룸은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한 때 자신을 사막에서 구해주었던 친구가 없었다. 그저, 낯선 남자의 시체 한 구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 뒤로, 이 사막 위에는 흐느끼는 여인의 유령이 떠돌아 다닌다고 합니다.”


벨룸이 입을 다물자 올리버와 펠릭스는 크게 하품을 했다.


“뭐, 재밌는 이야기였군. 난 슬슬 자러 올라가야겠어.”


“아, 올리버! 같이가요!” 그리고 부엌을 떠나는 올리버의 뒤로 실비아가 쪼르르 따라붙었다.



“즐거우셨습니까?”


두 사람이 빠져나가자 벨룸이 펠릭스에게 물었다.


“적당히요.”


펠릭스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 남자가,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딱히요.”


펠릭스의 대답을 들은 벨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렇습니까?”


“자세한 속사정도 모르면서 함부로 왈가왈부 할 수는 없죠. 물론! 저는 남의 속사정따윈 귀찮고 번거로워서라도 묻지 않는 주의지만 말이죠.”


펠릭스는 그것이 자랑거리인양 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그 남자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을텐데. 그는 사막 위에서 그 오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단 한 번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굳이, 저를 설득하는 이유가?”


펠릭스의 말을 들은 벨룸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제가 손님들의 속사정을 묻지 않는 것은.”


펠릭스가 운을 떼자 벨룸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움직였다.


“어차피, 그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제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뻔해서 그래요. 벨룸. 당신은 누군가를, 또는 어떤 사건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나요? 그런 것이 가능한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존재할까요?


결국, 그런거죠. 나는 그 수수께끼의 남자가 처한 상황에서 흐르던 미묘한 공기나, 눈에 띄지 않도록 물 밑에서 일어나고 있던 암투, 모종의 거래, 힘의 이동.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괴담을 말해준 벨룸, 당신도 아마 모르겠죠. 결국 우리는 잘 모르는 사람이 해 주는, 잘 모르는 남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에요.”


“꽤나 생생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벨룸이 말했다.


“그래봤자 나는 이해못해요. 그리고 나는 이해하지 못한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할 생각 없어요.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인간들은 멍청이가 아니에요 벨룸. 그 수수께끼의 남자는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행동했겠죠.”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해 무관심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주지 않기로 결정한거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한거죠.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또 있었을테고. 안 그런가요?”


펠릭스가 묻자, 벨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튼, 저는 괴담 속의 남자에 대해 딱히 더 해 줄 말은 없어요. 누군가는 그가 어리석었다는둥 따위의 말을 속 편하게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그럴 생각 없습니다.”


펠릭스는 아주 단호하게, 확신에 찬 태도로 말했다. 그러자 벨룸도 더는 할 말이 없다는듯 입을 다물었다.




“한 가지.” 잠시 침묵한 뒤에, 펠릭스가 말했다. “아니, 두 가지만 더 물어보죠. 그 ‘괴담’에 대해서. 괜찮죠, 벨룸?”


“시간이 꽤 늦었습니다.”


“에이, 뭘 그정도 가지고. 금방 끝나잖아요. 아까 당신이 해준 이야기에 대해 두 가지 궁금하게 있어요. 괜찮나요, 벨룸?”


벨룸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릭스는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첫 번째로, 사막에서 여동생을 찾았나요?”


“찾았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까지 말하면, 유령의 괴담처럼 들리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뒷 이야기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펠릭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동생은 어떤 꼴이라고 하던가요?”


“새하얀 피부는 붉게 얼룩덜룩했고, 입 가에는 흉측한 돌기가 올라와 있었다고 합니다. 안색은 창백하고, 온 몸은 수척하며, 이따금 가벼운 발작을 일으키기도 했답니다.”


펠릭스는 종이를 하나 휙 꺼내 그 위에 뭔가를 빠르게 써내려갔다.


“좋군요. 또 하나 있어요, 벨룸. 그러면, 그 유령은 무슨 이유로 황무지 위를 떠돌아다닌다고 하던가요?”


펠릭스의 질문을 들은 벨룸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원망? 원한? 복수심? 그녀의 삶을 망가뜨린 남자는 죽었고, 그녀를 가두었던 마을은 불과 경비대의 습격으로 끝났죠. 그럼, 무슨 이유로 황무지를 떠돌죠? 억울하게 죽어서인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살아 있을 것 같은데요.”


벨룸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뭐, 사실 괴담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건 재미없는 일이죠. 됐어요. 대답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만둬요 벨룸. 아, 그리고 말이죠. 아까 당신이 한 말을 듣고 떠오른건데. 자요.” 펠릭스는 벨룸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처방전이죠. 만약에, 그 흐느끼는 유령을 만나면 거기 적힌 약을 줘요. 그러면 사라질지도 모르죠. 유령이.”


펠릭스는 말을 마치고 싱긋 웃었다.


“그럼, 수고해요. 재밌는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웠어요.”


펠릭스가 계단 위로 사라질 동안 벨룸은 눈동자로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그가 사라진 뒤에는, 벨룸은 처방전을 향해 눈동자를 옮겼다. 처방전을 살펴본 그는 처방전을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단단히 집어넣었다.




아침이 밝아 그들은 남서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이쪽으로 가면 뭐가 나오죠?”


“산호항구.” 올리버가 실비아에게 대답해 주었다.


“산호요? 그 주변에서 산호가 자라나요?”


“실비아. 산호는 대강 바다면 어디서든지 자라요.”


“하지만, 보석으로 쓰는 거잖아요. 산호가 그렇게 흔하다고요?”


“뭐, 보석으로 쓸 정도로 좋은 산호는 잘 안 자라기는 하네요.”


“산호라. 펠릭스. 산호는 보통 얼마쯤 하죠?”


“크기에 따라, 색깔에 따라, 재질에 따라, 그날 시세에 따라 전부 다르죠.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대충 말이에요. 대강 얼마쯤 하냐는건데······.”


그 때, 갑자기 차창이 열리더니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두콩 만한 크기의 붉은 산호석 한 개에 은화 한닢 정도입니다.”


벨룸의 목소리를 들은 실비아는 깜짝 놀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그, 고마워요. 그러니까······.”


“벨룸입니다.”


“네. 벨룸.”


“푸른 색이 섞인 산호석은 그 두배의 값을 합니다. 드물게 금색이 섞이는 산호는 금화 단위에 팔립니다. 크기에 따른 값의 차이는 그때그때 달라서, 특별한 기준은 없습니다.”


“잘 아시네요. 자주 사시나요?”


벨룸은 실비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도로 차창을 닫았다. 그래서 실비아는 어색하게 두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해 화를 내야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산호항구 도시의 관문이 다가오자, 벨룸은 마차의 속도를 서서히 늦추었다. 그리고 그는 차창을 열고 말했다.


“손님들. 죄송합니다만, 혹시 여기서 내려드려도 되겠습니까?”


“왜 그러죠? 무슨 이유라도?”


펠릭스가 묻자 벨룸은 잠시 가만히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관문을 넘어가면, 마차를 돌려 나오기가 힘듭니다.” 벨룸이 대답했다.


“뭐, 그럴싸한 이유는 아니군요. 하지만, 전 상관없어요. 까짓거, 여기서 내리지요.”


“그래? 뭐. 네가 그러겠다면야.” 펠릭스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자 올리버도 그를 따라 내렸다.


“수고해요, 벨룸.”


올리버가 실비아를 내려주는 동안, 펠릭스는 마부에게 다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 유령 이야기, 적당히 재밌었어요.”


벨룸은 잠시동안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붉은 사막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그의 얼굴을 닮은 바위 산맥을 향하여.




산호항구의 관문에는 새하얗게 칠한 갑옷을 입은 경비대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펠릭스의 일행이 다가오자, 그들을 멈춰세우고 몇 가지 질문을 하며 신원 증명을 살펴보았다.


“어디서 왔습니까?” 경비대원이 물었다.


“동쪽에서 왔죠. 저기, 바위 산맥을 넘어서.”


“이 시간에?” 경비대원이 의아하다는듯 말했다. “혹시, 사막에서 밤을 세웠습니까?”


“아, 따지고보면, 비슷할지도 모르겠군요. 역참에서 쉬었거든요.”


“역참? 그런데, 남쪽 관문이 아니라 동쪽 관문으로 온 겁니까?” 경비대원이 다시 의아하다는듯 물었다.


“이쪽에는 제대로 된 길이 없나요?” 옆에서 듣고있던 실비아가 물었다.


“아니, 그런 것은 아닌데. 대부분의 방문객들은 해안가를 따라서 남쪽 관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조금 신기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럼 동쪽 관문은 장식으로 달린건가요?”


펠릭스가 묻자, 경비대원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상단들의 마차 행렬이 주로 오갑니다. 아무래도, 저 사막에는 유령이 떠돈다는 소문이 있다보니 개인적으로 산호항구를 찾는 사람들은 잘 오지 않습니다.”


“그래요?” 펠릭스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하기야, 유령이 하나도 아니고 둘 씩이나 떠돈다고 하니 어지간히 담이 센 사람이 아니라면 혼자 사막을 가로지를 생각을 하진 않을 겁니다.”


“둘?” 올리버가 물었다. “하나가 아니고, 둘?”


“그렇습니다. 뭐, 조금 잡담이지만, 흐느끼는 여자 유령과 마차 모는 남자 유령이 사막을 떠돌아 다닌다고 하더군요. 그들에 대한 괴담도 전해오는데······.”


“아니, 잠깐만요.”


실비아가 경비대원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혹시, 그 괴담이라는게, 전쟁을 피해 사막을 건너다가 길을 잃고, 거기서 만난 친구의 도움으로 마을에서 살다가, 친구의 배신을 뒤늦게 깨닫고······.”


“오, 들으셨습니까? 하긴. 소문은 달리는 말보다도 빨리 움직이니. 아무튼, 그래서 혹시 유령을 만나거나 한 건 없습니까?”


경비대원이 웃으며 물었지만, 실비아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졌다. 그녀는 말없이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펠릭스. 그, 그거. 분명 사람이었죠?”


실비아가 힘들게 입을 열어 펠릭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유령이면 뭐 어때요?”


그 말을 들은 실비아는 잠시 휘청이며 비틀거리다가, 올리버의 부축을 받아 헛웃음을 지으며 겨우 바로섰다.


“괜찮습니까?”


“아, 뭐. 괜찮습니다. 저 아가씨에 대해 신경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연금술사거든요.”


“아, 뭐. 그렇습니까. 그래서, 산호항구에 방문하신 목적은?”


“흑살구를 구하려고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흑살구?”


“네. 근처에 많지 않습니까?”


“많습니다. 많고요 말고요. 그리고 올해는 유난히 가물어서 그런지, 그 단맛이 예년의 배는 될 정도로 달콤합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 그 흑살구는 어디서 구할 수 있습니까?”


“경매장이 항구 근처에 있습니다. 하지만, 음. 잘은 모르지만, 아마 올해 흑살구는 구하기 힘들 겁니다.”


펠릭스는 그 말을 듣고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이죠? 폭풍이라도 몰아쳤나요? 아니면 메뚜기떼가 흑살구를 모조리······.”


“아, 들으셨습니까? 사실 아주 풍년이 들었는데, 바다 건너에서 거대한 메뚜기떼가 날아온 탓에 올해 흑살구는 수확량이 예년의 반에도 못 미칩니다.”


그 말을 들은 펠릭스의 얼굴은 아주 순식간에 구겨졌다.


“좋은 정보, 고맙군요.”


“그리고, 듣자하니. 동쪽에서 온 귀족이 이미 흑살구 물량을 모두 사버렸다고 하던데요.”


펠릭스의 얼굴은 거기서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렇군요. 당신,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마워요.”


“심심하던 차라.” 경비대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요. 흑살구가, 그렇게 돼버렸단 말이지. 그래. 알았어요.”


펠릭스는 꽤 충격이 컸던듯, 조금 비틀거리면서 관문을 통과해 안으로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본 경비대원은 올리버와 실비아에게 말없이 눈빛을 보냈는데, 두 사람은 펠릭스는 괜찮다는 뜻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산호항구의 건물들은 외벽이 새하얀 색깔이었다. 지붕은 새파랗거나, 아니면 새빨간 색깔로 칠해져 있었다.


“세상에. 여기가 동화 속 나라네요?”


실비아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이국적인 건물의 모습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캐낸 산호 중에서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이나, 가공하고 남은 자투리 산호 조각을 갈아 물감으로 써서 그래요.” 펠릭스가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잘 아네요. 서쪽에 와본 적이 있어요?”


“대스승님한테 들었어요. 워낙에 발이 넓은 사람이라, 그야말로 세상 방방곡곡 온갖 곳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이죠.”


“그래요. 대단한 분이네요. 그런데, 펠릭스. 아까부터 그렇게 심술이 나서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 거에요?”


펠릭스는 걸음을 멈추고 실비아를 휙 돌아봤다.


“경매장이죠! 흑살구, 여기서 못 구하면 끝이라고요.”


“네? 흔한 재료라면서요?”


“제가 편지를 보내 답장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풍년이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내 참. 뭐하는 귀족인지, 달기만 하고 쓸데도 없는 흑살구를 모조리 사재기 한다니. 새로 장사라도 해 보려는 상인인가? 귀족 주제에, 장사치 노릇이나 하려는 꼴이라니······.”




투덜거리며 항구에 도착한 펠릭스는 곧바로 경매장을 찾아갔다. 올리버와 실비아는 그래서 항구 근처를 서성이며 펠릭스를 기다렸다.


“전에, 그 두꺼비 구할 때랑 비슷하네요.”


“그러게. 버섯두꺼비. 그 때, 그 펠릭스 친구 놈을 만났는데. 이름이 뭐랬더라?”


“해리어일걸요?” 실비아가 말했다. “처음에는 재수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연이 있는 사람이어서 조금 놀랐죠.”


“그래. 그랬던가?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 그 때 난 뭘 하고 있었더라?”


“제 기억에, 그냥 메를린에 집에 가만히 누워 코튼이랑 장난치고 있었을걸요? 마녀의 숲으로는 함부로 가는게 아니라면서.”


“그래. 잘 기억해둬, 실비아. 마녀의 손길이 닿은 숲에는, 함부로 들어가면 안 돼.”


올리버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사람이 많네요.”


“항구에는 사람이 항상 많지. 배에 타려는 사람, 배에서 내리려는 사람, 화물을 옮기고 돈을 받는 사람, 물건을 사고팔려는 사람······.”


“그러게 말이에요. 그나저나······.”


항구를 돌아보던 실비아는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녀의 두 눈은 평소보다 두 배 정도 커져 있었다.


“실비아?”


올리버는 실비아가 쳐다보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점잖은 신사 한 명이 펠릭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펠릭스로군. 그 흑살구 사간 귀족을 찾아낸 모양인데······실비아? 실비아. 왜 그래?”


실비아는 당황하여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올리버를 돌아보며 말을 하려다 말고, 뭔가를 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올리버가 시선을 슬쩍 돌려보니 펠릭스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귀족도. 그도 펠릭스의 뒤를 따라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올리버는 다시 실비아를 돌아보았고 그 귀족과 실비아의 눈이 마주친 것을 보았다.


“올리버. 실비아. 여기 있었군요. 재수없게 됐어요. 그 귀족, 정해진 용량 이하로는 단 하나도 팔수 없다고 어찌나 뻗대는지······?”


펠릭스는 말을 하다말고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방금 그가 흉을 본 그 귀족이, 조금 놀란 눈으로 실비아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요?” 펠릭스는 실비아에게 물었다.


“실비아.”


펠릭스의 말을 무시하고 귀족이 실비아에게 말했다. 펠릭스의 귀에 그 목소리가 조금 익숙하게 느껴졌다.


“아빠?”


그리고 실비아가 대답했다. 실비아의 대답을 들은 펠릭스와 올리버는 당황한 얼굴로 그 귀족을 돌아보았다.




두 부녀는 서로를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실비아의 아버지가 먼저 몸을 뒤로 휙 돌려 자리를 떠버렸고 실비아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며 두 손을 모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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