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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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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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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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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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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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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85화

DUMMY

밤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서쪽의 붉은 사막도, 동쪽의 진녹색 숲도, 북쪽의 눈 덮인 새하얀 산맥도 밤에는 모두 어두웠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어둠을 쫓아주는 벽난로의 노란 불빛 아래에 모인 세 사람은 황무지 만큼이나 음울한 얼굴을 가진 벨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곳, 황무지에는,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령에 대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벨룸이 운을 떼자,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듯이, 창문이 한번 덜컹거렸다.


“꺅!” 그 소리에 깜짝 놀랐는지, 실비아의 몸이 움츠러 들었다.


“진정해요, 실비아. 아직 이야기는 시작도 안 됐는데.” 펠릭스가 핀잔을 주듯하자 실비아는 그를 잠시 힐끗 흘겨보았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지. 어떤 전설이지?”


올리버의 말을 들은 벨룸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래, 이곳 붉은 사막은 우리 인간들에게 허락된 땅이 아니었습니다.”


벨룸이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기 시작하자, 세 사람의 주의는 완전히 그에게 쏠렸다.


“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져 있는 저 산맥은, 원래는 아무것도 없는 거친 바위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 산을 경계로, 경계 저쪽에는 인간이 살 수 없을만큼 거친 야생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벨룸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십년 전, 동쪽 왕국과 서쪽 왕국이 전쟁을 일으키던 그 때, 징집을 피해서, 또는 기회를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바위 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더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아하. 그 덕에, 서쪽이 그렇게 오래 버틴 거죠? 금광이라. 동쪽에는 금광은 잘 없으니까.”


펠릭스가 대화에 끼어들자 실비아는 그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그러자 펠릭스는 아얏 하는 소리를 내며 도로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그 사람들중 하나였습니다. 조그마한 수레에 몇 안되는 가재도구를 싣고, 우리는 밤을 틈타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동쪽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일출의 빛에 쫓기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쪽을 향해 계속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수레를 끌어줄 말, 소, 노새, 그 무엇도 없던 탓에 선두에 선 남자는 온 몸으로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를 힘겹게 끌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겁먹은 얼굴로 뒤를 힐끗힐끗 돌아보며 따라오고 있었다.


“괜찮을까?”


기다란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소녀가 말했다.


“그레이스. 괜찮겠지. 비록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고, 해를 피할 그늘이 모자라다고는 해도, 전쟁터 보다는 나을 거야.”


앞서가던 청년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또 무표정해 보였다.


“그래, 벨룸 말이 맞다. 어디든지, 사람 싸우는 곳 보다는 나을 게야.”


“엄마. 그렇지만, 서쪽 땅에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없다는데요······.”


“찾아보면 있을거야. 어디든지.”


벨룸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있어. 있을거야. 그리고 만약 없다면, 우리가 만들면 돼. 나무를 베어 울타리를 세우고, 돌을 쌓고 흙을 반죽해 바닥과 벽을 세우는거야. 지붕은 정 덮을게 없다면, 어디서 큰 천이라도 구해와 덮으면 그만일 일이지. 이곳 서쪽에는 비도, 눈도, 내리지 않으니까.”


“그럼, 오빠. 비가 안 내리면, 물은 어디서 구해?”


그레이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우물을 파야지. 전에, 서쪽을 드나들던 친구가 몇 가지 알려줬어. 가끔씩 비가 올 때, 빗물이 빠져나가는 길을 찾는 방법이라든가. 우물을 파는 방법이라든가.”


벨룸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그 친구라는 사람, 그 이상한 사업 한다는 사람 아니었어?”


“맞아. 제법 수완이 좋다고 알고 있는데.”


“난 그 사람 싫어.” 그레이스가 대뜸 말했다.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단 말야.”


“그레이스.” 벨룸은 걸음을 멈추고 그의 여동생을 돌아보았다. “걱정하지 마. 레오는 음흉해 보이기는 해도, 나쁜 놈은 아니니까.”


“오빠가 알아?”


그레이스가 묻자, 벨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난 알아. 레오는, 못 믿을 사람처럼 보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라고. 그러니, 그레이스. 계속 가자. 저 골짜기만 넘으면 이제 우리도 자유야.”


벨룸은 붉은 빛이 도는 황량한 바위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떠오르는 일출의 태양빛을 받아, 그 바위 산은 옆으로 쓰러진 거인의 얼굴처럼 보였다. 그레이스는 그 얼굴에서 위협적인 눈빛을 얼핏 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거인이 이렇게 말하는것 같았다


‘돌아가라-’


“그레이스. 왜 그러니?”


“아, 엄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레이스는 그 바위산을 힐끗거리며, 종종걸음으로 수레를 따라갔다.




서쪽에서의 첫 일 주일은 거칠고 고되었다. 산맥 너머의 서쪽 땅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이따금 이상하게 생긴 선인장이나, 또는 말라 비틀어져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알아볼 수 없는 나무. 회전초. 바닥을 기어다니는 풍뎅이나 전갈 따위가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사람이 사는 집도 보이지 않았고, 책으로 보던 오아시스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오직 붉은 바닥과, 붉은 흙먼지가 전부였다.




챙겨온 비상 식량과 물을 마시며 벨룸은 첫 이틀동안에는 살 만한 거처를 마련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암벽의 튀어나온 바위그늘 말고는 도무지 사람 살기 적합한 곳이 없었다. 가끔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말이 구름을 일으키며 사막 위를 달려가는 것을, 벨룸은 조금 부러운 눈으로 보곤 했다.


“오빠. 괜찮아?”


여동생이 걱정스레 물어도, 벨룸은 평소같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난 괜찮아, 그레이스. 넌 괜찮아? 어머니는 괜찮아요?”


그러면 다른 두 사람도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벨룸은 전혀 괜찮지 않았고, 다른 두 사람도 괜찮을 턱이 없었지만 말이다.




세 번째 날 해질녘이 될 즈음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계속 걸어가던 그레이스가 그만 탈진하여 쓰러지고 만 것이었다. 그녀가 가져온 로브는 태양의 뙤약볕을 막아주기는 적합했지만,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는걸 막아주지는 못했다.


“그레이스!”


벨룸은 어디든 도움을 구할 곳을 찾기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은 바위그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레이스! 정신차려!”


그러나 그의 여동생은 좀처럼 제정신을 찾지를 못했다. 불안한 얼굴로 기도문을 외는 어머니와, 쓰러져 의식을 잃은 여동생을 앞에 두고 벨룸은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또한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누구든지 자기를 도와달라고.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 덕분일까, 남쪽에서 조그마한 먼지 구름이 일었다. 그것을 본 벨룸은 처음에는 야생마가 달려오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보니, 말 위에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어머니! 사람이에요!” 벨룸이 외쳤다.


“그래? 하지만, 벨룸. 내가 들어 보니, 이곳 사막에는 마적단이 있다는데······.”


“어머니! 그런 걸 신경쓸 때가 아니에요! 마적이든 뭐든, 아니, 설령 지옥의 악마가 튀어나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이라도, 나는 내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들과 기꺼이 손을 잡겠어요! 이봐요! 이쪽이야 이쪽!”


벨룸은 그의 어머니의 경악한 얼굴도 무시하고, 어떻게든 그들의 눈에 띄기 위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팔짝팔짝 뛰었다. 그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방향을 틀더니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말에 탄 사람이 다가오자 벨룸은 헛웃음이 났다. 익숙한 얼굴이 말 위에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 위에 탄 사람 역시, 벨룸의 얼굴을 알아본 뒤로는 씩 웃는 얼굴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들이 충분히 가까워지자 말에 탄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


“레오!” 벨룸이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벨룸.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야?”


“레오. 도와줘! 인사는 나중에 하고. 내 여동생이 쓰러졌어. 탈진한 것 같아. 어디 가까운 곳에 쉴 만한 곳 아는데 없어?”


벨룸의 말을 들은 레오는 땅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레이스를 힐끗 보았다.


“레오? 없어?”


벨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재차 묻자, 레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 괜찮은 곳이 있지. 어때, 그리로 갈래?”


“그래. 부탁해, 레오. 정말, 정말 고마워. 넌 내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어. 아, 저기 그런데 말이야······.”


“알았어 벨룸. 어이! 그래, 거기 너. 수레를 끌고 2번 은신처로 가 있어. 그리고 거기. 저 노파를 태우고.”


레오는 그를 따라온 다섯 명의 사람들 중, 두 명에게 각각 지시를 내렸다.


“네 친구들이야?”


벨룸이 묻자, 레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사업 파트너라고 할까, 동업자라고 할까. 그래서, 벨룸. 네 여동생, 내 말 뒷편에다 올려주지 않겠어?”


“아, 그래. 잠시만 기다려줘.”


벨룸은 그레이스를 부축하여 레오의 등에 기대어 앉힌 다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아 참. 거기 너. 저 사람을 태우고 같이 가. 내 친구니까, 실수로라도 말 등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레오의 섬뜩한 농담을 듣자, 벨룸은 한 순간 당황하여 얼굴이 굳었지만, 그저 농담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스스로를 달래었다.




레오가 이끄는 다섯 명의 사람들은 한동안 사막 위를 달리다가 어느 유적지 비슷한 곳에 멈춰섰다. 그동안 해가 지기 시작하여, 어느새 붉은 석양이 붉은 황무지를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기서 쉬어가자!”


레오는 반쯤 무너져내린 돌 담 아래에 조심스레 천을 깔고, 그 위에 그레이스를 뉘였다. 벨룸과 그의 어머니도 말에서 내렸고, 레오의 동료들도 다들 말을 한데 묶은 다음 말에서 내렸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벨룸은 신기한 눈으로 폐허를 돌아보았다.


“예전에는 여기도 사람이 살던 때가 있었나보지.”


레오는 그런 벨룸을 힐끗 보고, 쓰러진 그레이스를 힐끗 보았다.


“아무튼, 레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지?”


“과장은. 벨룸. 곤경에 처한 친구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이 어딨어? 그랬다가는 천벌 받을걸. 은혜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관 둬.”


레오는 능숙하게 말에서 내려, 말 고삐를 튀어나온 돌에 단단히 묶었다.


“그렇지만, 난 빚지고는 못 살아. 너한테 어떤식으로든 갚고싶어.”


“정 그러면, 네 여동생. 나랑 결혼시켜 주던가.”


“뭐, 뭐?”


“농담이야, 벨룸. 하여튼 깜짝 놀라기는.”


레오가 웃으며 말하자, 벨룸도 뒤늦게 헛웃음을 지었다.


“아, 그래. 농담. 그래.”


“그래. 농담이야. 가서 네 어머니나 잘 돌봐드려. 밤 공기가 차가우니까. 이거라도 챙기고.”


레오는 그가 타고온 말 등에 묶인 짐 사이에서 돌돌말린 모포를 슥 꺼내어 벨룸에게 휙 던져주었다.


“정말 고맙다, 레오.”


“정 고마우면, 벨룸.” 레오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너, 나랑 같이 일해 볼 생각 없어?”


“일? 뭔데?”


“별 거 아냐. 사막을 돌아다니면서, 오늘의 너처럼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찾는 일이지. 어때? 좋지 않아?”


“그래? 좋은 일이네. 하지만, 나는 말 탈 줄은 모르는데.”


“걱정도. 내가 가르쳐줄게. 이래뵈도 나는 말 하나는 또 기가 막히게 잘 타거든. 어때, 벨룸. 나랑 손잡고 같이 일해 볼 생각 있어?”


벨룸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기, 레오. 나는, 앞으로 서쪽 땅에서 살 만한 집이 필요한데······.”


“우리들이 사는 마을이 있어. 거기 네가 살 땅을 마련해 줄게. 거긴 커다란 우물도 있고, 농사 짓는 사람도 있고, 소 치는 사람도 있어. 말 기르는 사람은 제법 많고. 심지어는, 교회도 하나 자그맣게 세웠을 정도라니까.”


레오의 말을 들은 벨룸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레오. 나도 너랑 같이 일할게.”


“좋아. 결정했어. 환영한다 벨룸.”


그 때, 벨룸은 레오의 얼굴 위에 드리운 비열한 탐욕의 그림자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이 일을 크게 후회하게 되었지만, 적어도 그 때의 벨룸은 그저 친구에게 고마웠을 뿐이었다.




“꽤 재미난 이야기로군요.”


줄곧 벨룸의 이야기를 듣던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디선가 한 번 정도는 들어본 이야기 같기도 하고요.”


“그렇겠지.” 올리버가 옆에서 말했다.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건, 다들 어느정도 엇비슷하기 마련이니까. 군에 징집되어 온갖 어중이떠중이들을 만나보면 금새 알 수 있는 사실이야.”


“어쨌든, 아직까지 유령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네요.”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실비아가 말했다.


“아하, 실비아. 마침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떤가요?”


“뭐가요, 펠릭스?”


“그러니까요. 황무지에 흘러들어간 그 사람. 그레이스의 오빠이자,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그 수수께끼의 남자의 레오라는 친구. 당신이 보기에는 어떤 사람 같나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실비아가 대꾸했다.


“그냥요. 낭만 소설을 좋아하는 당신이 보기에, 어때 보이냐는거죠. 어때요?”


“흠. 장르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요? 동화같은 이야기라면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겠죠. 그러면 그 여동생과 결혼할지도. 하지만, 좀 더 세속적이고 재미에 집중한 소설이라면, 글쎄요.”


“저기, 여기서 갑자기 토론회를 열지는 말자고. 벨룸이 당황한 기색이잖아.”


올리버의 말에 실비아와 펠릭스는 벨룸을 보았지만, 그는 아까와 같이 음울한 무표정이었다.


“아, 죄송.”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죠?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수수께끼의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죠?”


벨룸은 다시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서쪽의 돌풍이 부딪혀 창틀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낸 탓에, 그들은 벨룸의 첫 마디가 무엇이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유적지에서 보낸 하룻밤은, 솔직하게 말해서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사막의 밤은 북쪽의 산맥 못지 않게 추운 데다가, 식어버린 땅바닥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레오의 호의로, 벨룸의 가족은 두꺼운 모포를 바닥에 깐 채 모닥불 가까이에서 잠을 청할수 있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벨룸은 레오를 도와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그의 여동생도 이제는 꽤 괜찮아 진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조금 힘없이 비틀거리면서도 걸어다닐 정도는 되었다.


“그레이스. 레오에게 고마워 해. 레오가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쯤 저 사막 어딘가를 헤메고 있었을 테니까.”


벨룸의 말을 들은 그레이스는 머뭇거리며 레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낯간지럽게. 됐어 벨룸. 친구 사이에, 뭘 그런걸.”


그러나 정작 레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온 얼굴위로 웃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레오. 그래서, 그 마을은 어디있어?”


“재촉하지마, 벨룸. 데려다 줄 테니까. 어이, 두 명만 날 따라오고, 나머지는 하던대로 해.”


레오는 그의 동료들에게 재빨리 수신호를 보냈고, 그러자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각자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가자.” 그리고 레오는 벨룸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여동생은 내가 태우고 갈게. 너랑 네 어머니는 내 가장 믿을만 한 동료들이 태우고 갈 테고.”


“저기, 수레는?”


“아, 수레. 어이! 한명만 더 와!”


레오가 그의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한 명이 잽싸게 그의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그러나, 그는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레오를 향해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레오는 그를 한대 치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들어올렸다가, 눈치를 보며 도로 손을 내렸다.


“이게 더 중요한 일이라고. 알아? 넌 내 말 따르기나 해.”


그제서야 그는 조용히 자기가 타고 온 말에 수레를 매달아 레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황무지를 한 시간쯤 달린 뒤에, 정말로 붉은 땅 저편에 흙과 벽돌,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얼핏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야. 어때, 벨룸?”


레오는 그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말에 탄, 벨룸을 향해 말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곳을 다 만들었어?”


벨룸은 존경이 담긴 목소리로 레오에게 말했다.


“뭐, 사실 내가 한 건 아냐. 다 운이 따라줘서 가능한 거였으니까. 아무튼, 벨룸. 그런데 말야. 저기 사는 사람들은 바깥 손님이 찾아오는걸 그리 반기지 않거든.”


“아, 그래? 그럼, 어떡하지. 네가 곤란해 지지 않아?”


“걱정도. 그냥, 잠깐 불편해도 참으라는 뜻이었어.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해도 너무 신경쓰지 말라고. 그리고, 누구든지 너한테 귀찮게 구는 놈이 있으면 나한테 말 하고. 내가, 이래뵈도 힘 좀 쓰는 축이거든. 알지?”


벨룸은 웃으며 레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마워, 레오.”


“고맙긴.”




마을에 다다르자, 말들은 속도를 늦추어 마을 관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벨룸은 두터운 울타리에 둘러싸인 안전한 마을을 보며, 그 관문 위에 적힌 마을의 이름을 읽어보았다.


‘기회의 땅’


그 짧은 단어가 벨룸의 가슴에서 메아리쳤다. 기회의 땅. 인간과 인간의 피튀기는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 그 자체였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몇몇 노인과 여인들이 벨룸과 그의 가족들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너무 신경쓰지마.” 레오가 말했다. “그냥 신기해서 구경하는 거니까.”


“그래?” 벨룸은 어딘가 음울한 빛이 깃든 사람들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래. 아무튼, 여기서 잠시 기다려. 어이, 너는 빈집으로 가 있어. 너희 둘은 돌아가고. 나는 잠시 볼 일이 있으니까.”


레오는 교회 앞에서 말을 멈춰세우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은 벨룸과 그의 가족을 말에서 내려주고, 그가 끌고온 수레도 놔 두고 돌아갔다.




거리 한가운데서 멀뚱멀뚱 서 있던 벨룸은 근처 사람들이 계속 자기를 힐끗거리는 것을 보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그레이스를 힐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오빠. 이 사람들, 어딘가 낯빛이 안 좋아.” 그레이스가 말했다.


“황무지에서 살아서 그렇겠지. 저 광활한 땅은 사람을 쓸쓸하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아니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뭔가, 숨기고 있는 사람 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그 때, 갑자기 우물에서 물을 긷던 사람이 그레이스의 곁을 스쳐지나가며 속삭였다.


“당장 도망쳐요!”


“네?”


그러나 그레이스가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이미 저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레이스에게서 다시 그 여인에게로 조용히 옮겨갔다.


“오빠. 방금, 들었어?” 그레이스가 벨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뭘?”


“아까, 저 사람. 나보고 도망치라고 했는데.”


“저 사람이라니. 누구?” 딴데 정신이 팔려 있던 벨룸은 뒤늦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니까······아, 가 버렸나봐.”


“별 것 아니었겠지 뭐.” 벨룸이 말했다. “너무 긴장해서 잘못 들은것 아냐? 그레이스. 너는 황무지에서 의식을 한번 잃었잖아. 아직 제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서 착각한 걸지도 몰라.”


“그러면 다행인데······.”


그레이스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얼굴 위를 떠도는 유령같은 무언가를 보고 잠시 소름이 끼쳤다.




교회에서 나온 레오는 화려한 종이 한 장을 팔랑거리며 돌아왔다. 레오는 벨룸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야?” 벨룸이 종이를 받아들고 살펴보며 말했다.


“우리들의 가족으로 받아준다는 증거.” 레오가 말했다. “벨룸. 축하해. 너와 네 어머님, 여동생도 이제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레오. 정말 고맙다. 황무지에서 결국 객사하나 했는데, 이게 다 네 덕분이야.”


“뭘. 낯간지러워. 그만해. 우선, 새 집에나 가 봐.”


“그래. 그런데, 가는 길을 안내 해 줄 수 있어?”


“안 될것도 없지. 저쪽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언덕 바로 아래 커다란 집이야.” 레오가 손가락을 뻗어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커다란 집? 그런 데서 내가 살아도 돼?”


“내 친구잖아? 그리고, 아까 말 했잖아. 난 힘 깨나 쓴다니까. 벨룸, 그러니까 넌 걱정 말고 여기서 편안하게 살면 돼.”


벨룸은 레오에게 대뜸 오른손을 내밀었다.


“정말, 고맙다 레오.”


벅찬 감동이 담긴 목소리로 벨룸이 말하자, 레오는 넉살좋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원. 자식, 싱겁기는. 아무튼, 그만 가 봐. 난 또 할 일이 있어서 말야.”


“레오. 내가 짐 정리만 끝내면, 꼭 너를 도와 같이 일 할게.”


“얼마든지. 그러면 나야 좋으니까.”




벨룸이 입을 다물자,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음울한 바람이 낡고 허름한 역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죠.”


줄곧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있던 펠릭스가 말했다. 그러자 벨룸의 눈이 그를 향해 살짝 움직였다.


“그 레오라는 사람과 수수께끼의 남자는, 대체 무슨 사이인 거죠?”


“친구라잖아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요, 실비아?” 펠릭스가 실쭉 웃으며 말했다. “친구 나름이죠.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 남자는 꽤 성실한 성격의 사람처럼 보이는데, 정작 레오라는 사람은 계속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다고, 적어도 벨룸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서로 다른 두 성격의 사람이 그냥 친구라고요?”


“그럴 수도 있지.” 올리버가 끼어들었다. “왜, 그런거 있잖아. 어릴 때는 아무 생각없이 친하게 지냈는데, 나중에 자라고 보니까 한 명은 범생이가 되어 있고, 다른 한 명은 건달이 되어있고. 그런 경우 아니겠어?”


“뭐. 그럴지도요. 그냥 신경쓰여서 물어봤어요. 벨룸. 딱히 할 말 없나요?”


펠릭스가 벨룸을 집요하게 쳐다보자, 벨룸은 조용히 대답했다.


“저도, 우연하게 건너 들은 이야기기 때문에,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아쉽네요. 꼭 자기 이야기처럼 맛깔나게 중얼거려서, 혹시나 싶어서 물어봤어요.”


“펠릭스. 설마, 자기 이야기를 그렇게 주절주절 해 주겠어요?”


이번에는 실비아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뭐, 누구 이야기든 간에, 아무튼 저 음울한 서쪽의 사막과 잘 어울리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되기는 하는군.”


“그러게요. 올리버 말이 맞아요. 그래서, 벨룸.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어요?”


“그 뒤로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아주, 끔찍한, 배신의 이야기가.”


벨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 내려는 사람처럼.


벽난로의 불이 갑자기 확 하고 타오르자, 벨룸의 얼굴이 한 순간 무시무시한 악마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비아가 깜짝 놀라 눈을 비비는 그 잠깐 사이에, 벨룸은 다시 암벽에 새겨진 바위 거인과 같은 딱딱한 얼굴로 되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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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113화 21.12.03 25 1 24쪽
112 112화 21.12.02 24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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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93화 21.11.23 23 1 18쪽
92 92화 21.11.22 29 1 21쪽
91 91화 21.11.22 24 1 19쪽
90 90화 21.11.21 26 1 21쪽
89 89화 21.11.21 25 1 22쪽
88 88화 21.11.20 25 1 20쪽
87 87화 21.11.20 31 1 23쪽
86 86화 21.11.19 27 1 22쪽
» 85화 21.11.19 28 1 23쪽
84 84화 21.11.18 27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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