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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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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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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31
추천수 :
188
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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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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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96화

DUMMY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실바누스 준남작은 조용히 칼을 뽑아들더니 칼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협박입니까?”


준남작은 칼을 도로 칼집에 집어넣었다.


“설마.”


“이 좁은데서, 굳이 칼을 꺼내야 할 다른 이유는 떠오르지 않는군요.”


“마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바로 어제, 네가 나에게 조언해주지 않았나? 마적 때문에 골치아픈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아하.”


펠릭스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듯 말했다.


“올리버. 당신도 한번 보여줘요.”


“뭘.”


“칼. 안 가져 왔어요?”


“안 가져왔는데.”


“올리버!”


펠릭스가 올리버를 휙 돌아보았다.


“당신은 제 채집꾼인 동시에, 제 호위를 겸하고 있잖아요?”


“뭐, 그렇기는 한데, 넌 네 앞가림 혼자 할 수 있잖아.”


“그래도, 칼은 챙겨왔어야죠.”


“이거라면 있는데.”


올리버는 주머니칼을 슥 뽑아들더니 손 위에서 가볍게 한 바퀴 핑그그르 돌렸다.


“내 참. 그걸로 마적하고 어떻게 싸워요?”


“새총도 있어.”


“대단하군요. 활은요?”


“그건 너무 커서 집에 두고왔지.”


그들을 지켜보던 준남작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뭔가요?”


“너희 둘. 장래에 유랑광대 라도 될 셈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만두라고 충고하고 싶군.”


“아, 그건 걱정마십시오. 광대가 될 생각따윈 전혀 없으니까.”


펠릭스는 올리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죠, 올리버?”


“그래. 그리고, 난 이 쬐끄만 칼이랑 새총으로 마적하고 싸울 자신 있거든. 굳이 좋은 칼을 들어야 훌륭한 전사가 되는 건 아니니까.”


“어련하겠어요. 말이라도 잘 해야지.”


펠릭스는 불쌍하다는 눈으로 올리버를 잠시 보더니 이내 마차의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야, 펠릭스. 너무 막말 하는거 아냐?”


“하여튼, 준남작 앞에서 체면 구겼잖아요!”


돌연 펠릭스가 올리버를 힐난하며 말했다.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


“좀, 이 기회에 당신 칼솜씨라든가, 보여줬으면 좋았을걸.”


“하여튼.”


할 말이 없어진 올리버는 혀를 내두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인없는 야생 흑살구 군락에 마차가 멈춰서자, 네 사람은 이제는 아주 익숙한 자세로 마차에서 폴짝폴짝 뛰어내렸다. 펠릭스와 실바누스 준남작은 곧바로 흑살구 나무가 튼실한지, 그 열매가 쓸만한지 확인하러 군락 안으로 들어갔다.


“휴!”


마차에서 내린 실비아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려다가 건조한 바람이 불어 기침을 했다.


“저런.”


올리버는 실비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아니, 올리버. 이럴 때는 등 두드려 주는거 아니잖아요.”


“달리 할게 없는걸.”


올리버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나도 알겠군. 여기 흑살구는 아마 못 쓸 거야.”


“그래요?”


“그래. 아마도.”


올리버는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펠릭스와 실바누스를 보았다. 그들은 흑살구 군락의 양 끝으로 가더니, 거기서부터 천천히 나무와 열매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럼, 또 오늘도 하루종일 사막을 뒤지고 다녀야 하겠네요.”


“그렇겠지.”


올리버는 기지개를 켜고 몸을 가볍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나저나 실비아.”


“왜요?”


“심심하지 않아?”


올리버는 실비아를 내려다보았다.


“너, 어제도 그렇고. 계속 가만히 마차에만 앉아있었잖아.”


“뭐,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여긴 달리 볼 거리도 없고 놀 거리도······.”


“너도 가서 흑살구 구경이라도 하는게 어때? 펠릭스한테 물건 보는법도 배우고, 아니면 뭐. 네 아버지한테 가서 그동안 뭐하고 있었는지 묻는다든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아, 뭐. 그래. 그래야지. 그냥, 아버지를 만난 뒤로 네가 영 딱딱하게 굳어 있는것 같아서······.”


“그런거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고는 실비아는 흑살구 군락을 향해 뻣뻣하게 걸어갔다.


“아니긴. 벌써부터 신경쓰고 있구만.”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올리버는 실없이 중얼거리더니 그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어디론가 걸어갔다.




올리버는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붙였다.


“준남작님. 괜찮은 흑살구가 있습니까?”


“존칭을 쓸거면 계속 쓰고, 말거면 자꾸 존칭을 섞어 쓰지 마라.”


준남작이 올리버에게 말했다.


“아, 죄송.” 올리버는 뒤통수를 가볍게 긁었다. “해서, 좀 괜찮아 보이는게 있습니까?”


“없다.”


준남작은 열매 하나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짜증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야생 흑살구는 거칠어.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쉽게 됐군요. 그나저나, 준남작님. 아까, 항구에서 있었던 일 말입니다.”


준남작은 걸음을 멈추고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제법 좋으시더군요.”


“별로 칭찬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군.”


“설마요. 칭찬입니다. 콧대높은 귀족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공연히 짜증을 내며 자리를 피해버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몸소 항구로 내려와 사람들을 지휘하고, 사고를 수습하시는 그 모습. 꽤 감명깊게 봤습니다.”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이유가 뭔가?”


올리버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펠릭스도, 꽤 애를 썼습니다. 약을 만들어 온 것 말이죠······.”


“연금술사의 약은 안 믿는다니까. 그가 가져온 약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리고, 효과가 있다 한들, 난 여전히 그는 못 믿는다.”


준남작은 손에 쥐고 살펴보던 흑살구를 놓고, 올리버를 향해 몸을 돌려 그와 마주서서 말했다.


“그가, 내게 잘 보이려고 유난을 떨었을지 어떨지 내가 어떻게 아나?”


그 말을 들은 올리버는 뜨끔하여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준남작님. 펠릭스가 만든 약은 진짜 약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공짜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고요.”


“제 주인이라고 감싸고 도는 거냐?”


“주인이라기보다는, 고용주에 가깝지만. 아무튼, 그냥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펠릭스는 그런 가짜 연금술사들과 달리, 분명한 실력을 갖추었으며,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가없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고.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말입니다.”


“잘 들었다.” 준남작이 말했다. “더 할말 없으면, 그만 가 봐라.”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야.”


그리고 올리버는 준남작의 안색을 슬슬 살피면서, 이번에는 펠릭스를 향해 흑살구 군락을 가로질러갔다.




“반가워요, 올리버.”


흑살구 하나를 뚝 따서 손에 들고 이리저리 굴려가며 살펴보던 펠릭스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잘 돼가?”


“영 별로네요.”


펠릭스는 살펴보던 흑살구를 살짝 깨물었다가, 금새 입안에 든 것을 바닥에 퉷 뱉어버렸다.


“더럽게.”


“뭐 어때요. 여기가 무슨 귀족 저택도 아니고. 흙바닥인데 뭘.”


펠릭스는 바닥에 뱉은 찌꺼기를 발로 슥슥 문질러 흙으로 덮어버렸다.


“그래서, 준남작이 뭐라던가요?”


“몰라.”


올리버는 영 아쉬운투로 말했다.


“좀 좋게 봐 달라고 했는데, 들어줄지 어떨지.”


“금화 두닢 이상의 가치를 가진 약이었다고 말 했나요?”


“아니.”


“왜요? 연금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약재와 약값을 말 해주지 않으면 눈앞에 있는게 싸구려 감기약인지 엘릭서인지 구분 못해요.”


“언제는, 엘릭서따위 없다더니.”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있기는 있죠. 그대로 만들어도 효과가 없어서 그렇지. 그 메를린이 몰래 만들어준건, 거의 진짜에 가까웠는데. 왠놈의 꼬마가 주머니를 털어가지를 않나······.”


“뭐, 어쨌든 그건 잘 해결했다면서.”


“일단은요. 그나저나, 준남작의 마음을 돌릴 만 한 건덕지가 없으려나.”


“세뇌 약이라도 만들지?” 올리버가 농담을 했다.


“만들어봤자 별 효과 못 볼지도 모르죠. 약은 만드는 사람의 마음가짐 만큼이나, 먹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게 작용하니까.”


“그래? 그렇지만, 최면 약이나 세뇌 약은······.”


“물론, 저정도 능력이라면 그깟 약 못 만들건 없죠. 하지만, 그래서는 자존심이 안 산다고요.”


펠릭스는 흑살구에서 눈을 떼고 올리버를 올려다보았다.


“약으로 쉽게쉽게 살면, 사는게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


“그렇죠! 그리고, 자존심도 안 살아요. 함부로 약을 뿌리고 다니는건 초짜들이나 할법한 발상이라고요. 약을 쓸 때 못 쓸때 구분도 못하는 초짜들. 저는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요. 그리고, 그런 제가 볼 때, 아직까지 세뇌약을 만들어야 할 정도의 상황도 아니고.”


“그렇다면야.”


올리버는 심드렁하게 펠릭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도, 뭔가 뾰족한 수가 있었으면 좋겠는걸. 준남작이 언제까지 여기 머물지도 모르고, 그가 여기 머문다고 우리도 따라 머물며 하염없이 그를 설득 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기는 하죠. 어이, 준남작!”


펠릭스는 고개를 뻣뻣이 들고 준남작을 불렀다.


“다 봤어요? 제가 볼 때, 이 군락은 영 못써먹겠는데요. 그만 가죠?”


그러자 준남작은 여전히 근엄한 목소리로, 그러나 여기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대답했다.


“포기할 셈이라면, 혼자 포기해라 연금술사. 나는 아직 더 살펴볼게 남았으니까.”


“원. 고집은. 더 봐봤자 뭐 없을게 분명하구만. 아무튼, 올리버. 슬슬 우리는 마차로 돌아가죠.”


“뭐, 그래.”


올리버는 걸음을 옮기려다가, 여전히 군락을 구경하고 있는 실비아를 힐끗 보았다.


“실비아도 데려갈까?”


“글쎄요. 어이! 준남작! 당신 따님좀 챙겨줘요!”


펠릭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소리쳤지만, 이번에는 준남작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에요?” 대신 실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뭐라 그랬어요?”


“신경꺼요 실비아. 너무 오래 구경하지는 말고요! 전 마차에 가 있을 테니까, 적당히 보고 알아서 돌아와요!”


펠릭스는 목을 가다듬고 조용조용히 올리버에게 말했다.


“이제 우린 슬슬 빠지죠.”


“왜?”


“운 좋으면, 실비아가 준남작을 좀 설득해 줄지도 모르니까.”


“뭐야. 난 또, 부녀간에 그간 못한 대화라도 좀 해보라고 자리 마련해 주는 줄 알았더니. 하여튼, 펠릭스.”


“하루이틀 보나요 뭐.”


그리고 펠릭스는 털레털레 걸음을 옮겨 마차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흉하게 뒤틀린 못생긴 흑살구 나무를 살펴보던 실비아는, 어느새 다가온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아빠.”


실바누스 준남작과 눈이 마주친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다시 흑살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건 맛없는 열매다.”


“아, 그래?”


“그래.”


준남작은 방금전까지 실비아가 살펴보던 열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껍데기가 매끄럽지 않고, 살짝 눌러봤을 때 탱글탱글하지도 않아. 그리고 색깔도 덜 검어. 이건 보나마나 신 맛이 나는 열매가 분명하다.”


“잘 아네.”


“상품을 잘 아는게 장사의 시작이니까.”


준남작은 열매를 손에서 놓고 물끄러미 실비아의 얼굴을 내려보았다.


“왜?”


“실비아. 그동안······.”


준남작은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뭐, 나름.”


실비아는 어색하게 대답하고 괜히 흑살구를 살펴보는 척했다.


“어떻게 지낸거냐? 집에 편지 한 장 남겨놓고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던데.”


“그냥 그게 다야.” 실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집 나가서도 알아서 잘 지냈고.”


“어디서 머물렀느냐?”


“여관. 여자 혼자서도 머물 만큼 경비대에 가깝고 깨끗한 곳으로. 밤에는 의자로 문을 막고, 창문도 단단히 잠갔어. 항상 품에 조그만 단검을 쥐고 잠들었고.”


실바누스 준남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불편하게 살려고 집을 나선거냐?”


“아니.”


실비아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럼, 집은 왜 나간거냐? 그러니까······.”


“몰라. 말 안할거야.”


실비아는 그러고는 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준남작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실비아를 쳐다보다가, 그녀가 마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 나서야 그 역시 터덜터덜 마차를 향해 걸어왔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펠릭스는 마부쪽으로 난 차창을 드륵 열고 그에게 말했다.


“이쪽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 사실, 제가 아는 농가는 어제 이미 다 들렀습니다.” 마부가 말했다. “이제 흑살구를 찾으려면, 야생 군락을 찾는 방법 뿐입니다.”


“아니, 어제 몇 군데 들렀다고.”


“그, 손님이 오시기 전에, 이미 준남작님이 대부분의 농가와 계약을 끝냈습니다.”


“하.” 펠릭스는 준남작을 힐끗 돌아보았다. “하여튼, 발 빠르군요. 알았어요.”


펠릭스는 차창을 닫고 영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흑살구가 그렇게 중요한 재료인가?”


준남작이 부루퉁한 얼굴의 펠릭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아니오. 사실, 까짓거 없어도 약효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습니다.”


“뭐?”


“뭐요?”


실비아와 실바누스 준남작이 동시에 펠릭스를 돌아보았다.


“그럼, 자네는, 별 쓸데도 없는 약재를 구하겠답시고 나를 이렇게 귀찮게 하고 있는건가?”


“쓸데없다뇨. 약의 맛과 향, 질감에는 큰 영향을 주니까 제가 이렇게 번거롭게 구하려고 애쓰는 겁니다. 저는 최고의 약을 만들기로 했고, 최고의 약은 비단 약효 뿐만 아니라, 그 약을 받아들었을 때부터 약을 삼킬 때, 삼킨 약의 효과가 온 몸에 퍼질 때까지, 모든 단계에서 최고여야 하니까요.”


“뜬구름잡는 소리로군.”


준남작이 말했다.


“뭐,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아직도 제게 흑살구를 팔 생각이 없으십니까?”


“없다.”


“거 참. 저는 불쌍한 항만 노동자들도 살려줬고, 뱀에 물린 어느 은둔자의 목숨도 구해줬는데요.”


“그것과 이것은 무관한 일이다.” 준남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내게서 흑살구를 사고 싶다면, 우선 내 질문에 대답해야지. 첫 번째로, 무슨 약인지. 그리고 두 번째로, 왜 실비아와 동행하고 있는지.”


“계약 내용을 당사자도 아닌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죠. 그러니, 그건 비밀입니다.”


“그럼 협상결렬이다.”


준남작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호하시군요. 하지만, 저도 한 고집 하거든요. 기대하십시오, 준남작.”


준남작은 펠릭스의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마차는 또다른 흑살구 군락에 멈춰섰다. 거기는 군락이라고 부르기엔 좀 작았는데, 기껏해야 나무가 열 그루 남짓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이것도 군락이라면 군락이긴 하죠.”


펠릭스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나무를 슬슬 살펴보았다.


“이것도, 못 써먹는다.”


“그래요. 열매가 너무 잘죠. 흑살구는 적당히 크기가 있는편이 좋죠. 통통한 포도알보다 조금 더 큰 정도로.”


“이건 너무 작아. 못쓰겠군. 더 볼 것도 없다.”


이번에는 준남작이 먼저 마차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그럴지도요.”


멀어져가는 준남작의 등에 대고 펠릭스는 중얼거린 다음,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보았다.


“왜요?”


“당신, 아버지 설득은 잘 됐나요?”


“설득은 무슨.” 실비아는 한숨을 쉬었다. “아빠랑은 말을 길게 못해요.”


“왜요?”


“왜냐니. 아빠는 자꾸 저한테 뭘 캐묻고, 뭘 시키고, 그러기만 하니까요.”


실비아가 펠릭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화를 하려면 맞장구도 쳐 주고 그래야 하는데. 아빤 그러지를 않으니.”


“당신이 쳐 주면 되죠, 맞장구.”


“왜 집을 나왔냐고 묻는데, 제가 거기대고 뭐라그래요?” 실비아가 말했다. “그리고, 아빠는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들을때까지 계속 같은것만 물어요. 당신도 감이 오지 않아요?”


“하긴. 고집스럽긴 하더군요.” 펠릭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참. 내가 아무렇게나 지어내서 지껄여도 알아채지도 못 할 텐데. 자꾸 묻기는.”


“그것도 그렇지만요. 그래도, 펠릭스. 당신, 아빠한테 거짓말은 안 하네요.”


“그게 제 자부심이죠. 쓸데없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것.”


펠릭스는 뜬금없이 가슴을 부풀리며 말했다.


“하지만, 가끔 하잖아요. 거짓말.”


“그땐 필요하니까 그런거고요.”


“지금은 필요 없어요?”


실비아가 조금 기운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를 설득하면 흑살구를 금새 살 수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도 다시 여행을 떠나고······.”


“아버지와 같이 있기 불편해요?”


실비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요. 하지만!”


펠릭스는 돌연, 과장되게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저는 그래도 준남작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도 않을게 뻔해서요.”


“그럼 어떡해요? 하염없이 여기서 아빠가 마음 돌릴 때까지 기다려요?”


“실비아.”


펠릭스는 대뜸 실비아에게 다가가,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잘 들어요. 당신 아버지 마음을 돌릴 만한 사람은 당신 뿐이에요.”


“네, 네?”


“계속 들었잖아요?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이 알고 싶은건 두 가지. 그런데, 당신은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죠. 그러니.”


펠릭스는 마차를 힐끗 돌아보았다.


“당신이 설득하든, 뭐 거짓말로 구슬리든 하는 편이 가장 좋겠죠.”


“아빤 제 말 안 믿어요.”


“아니!”


펠릭스는 그녀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짜증을 냈다.


“그럼 대체 누구 말을 믿는데요? 내 참. 정말 어지간해야지, 사람이 말이야.”


“아빤, 자기 자신밖에 안 믿어요.”


“거 참 대단한 정보군요. 올리버.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요?”


올리버는 왜 그런 것을 자기에게 묻냐는듯한 표정을 지으며 펠릭스를 쳐다봤다.


“뭐, 나야 모르지.”


“뭐 없어요? 그래도 이중에서 당신이 제일 세상 경험 풍부한 사람 아닌가요?”


“글쎄. 보통 무슨 계기가 있어야 고집을 꺾지 않나?”


“예를 들자면?”


올리버는 잠시 생각했다.


“뭐, 죽을뻔 한다든가, 그런거 아닐까.”


“실비아. 당신 아버지한테 제가 독약을 조금 먹여도 될까요?”


“절대 안 돼요!” 실비아가 외쳤다. “펠릭스! 농담으로 할 말이 따로있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올리버가 그랬잖아요. 준남작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면······.”


실비아는 펠릭스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가,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만약에라도, 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당신 탓이라고 알겠어요!”


“아이쿠, 진정해요. 진짜 먹인다는 것도 아니고. 허 참. 부녀가 성격 하고는. 아주 똑 닮았네.”


“흥!”


실비아는 마차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그나저나.”


실비아가 마차 위로 올라타는 것을 보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정말, 이제 마적 뿐인가?”


“뭐? 펠릭스. 너 설마 마적을 고용하기라도 한 거야? 준남작을 습격하라고······.”


“에이, 제가 어떻게 그래요. 나 혼자선 무리지.” 펠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해본 소리에요. 만약에 마적들이 산호항구를 휩쓸고, 그로인해 준남작이 조금만 다쳐준다면, 그리고 제가 그걸 고쳐준다면······.”


“그런소리 함부로 하지 마.” 올리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런 말도 있잖아. 입은 화를 부르는 창구라고.”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거죠. 아니, 올리버. 당신은 또 왜그렇게 긴장했어요? 긴장 풀어요. 내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해도, 설마 사막 위를 떠도는 마적들을 부리겠어요?”


펠릭스는 올리버의 등을 가볍게 툭툭 치고 마차를 향해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래. 네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짓까지 벌이지는 못하겠지.”


그리고 펠릭스가 마차 위에 올라타자, 올리버는 사막 한 가운데를 향해 혼자 중얼거린 다음 마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말은 화를 부르는데.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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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97화 21.11.25 25 1 19쪽
» 96화 21.11.24 26 1 20쪽
95 95화 21.11.24 24 1 20쪽
94 94화 21.11.23 28 1 19쪽
93 93화 21.11.23 23 1 18쪽
92 92화 21.11.22 29 1 21쪽
91 91화 21.11.22 24 1 19쪽
90 90화 21.11.21 26 1 21쪽
89 89화 21.11.21 25 1 22쪽
88 88화 21.11.20 25 1 20쪽
87 87화 21.11.20 31 1 23쪽
86 86화 21.11.19 27 1 22쪽
85 85화 21.11.19 27 1 23쪽
84 84화 21.11.18 27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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