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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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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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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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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02화

DUMMY

“연금술사를 왜그리 싫어하느냐고 물었지.”


가벼운 탄식과 함께 실바누스 준남작이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네 동료들을 모욕하여 화가 난 것인가?”


“설마요. 제가 인정하는 연금술사는 손에 꼽습니다. 나머지 놈들이 무슨 대우를 받든, 저는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그럼, 무슨 이유로 굳이 들으려고 하는 건가?”


“사실, 개인적인 호기심이죠.”


실바누스 준남작은 뻔뻔스레 웃는 펠릭스를 보더니 다시 가볍게 탄식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데에, 네 덕이 큰것도 사실이니까.”


“들려주실겁니까?”


“그래. 말 해주마. 하지만, 다른데서 이 비슷한 이야기가 들린다면, 그 때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네놈을 추적할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그쯤하고, 말씀이나 해 주시죠.”


펠릭스는 편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말했다.


“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 때는, 실비아가 열살 남짓 되었을 때였다.”


그렇게 말하는 실바누스의 얼굴에는, 착잡한 빛이 가득했다.


“아직 기억한다. 큰 계약을 앞둔 시기였기 때문에.”


“실비아가 아직 어릴 때였군요.”


“그래, 그렇다.”


실바누스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어렸어. 실비아도, 그리고 나도.”


“연금술사 이야기를 해 주시죠.”


“재촉하지 말거라, 연금술사.”


실바누스는 조금 짜증이 묻은 얼굴로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 연금술사들은 너무 제멋대로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래. 큰 계약을 앞두고서, 나는 불현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목 아래까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 뒷편이 따끔거리며 화끈화끈하고, 이유도 모른채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 방울 맺혔지.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무언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아주 동물적인 감각이군요?”


“때로는, 그런 동물적인 본능이 나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실바누스는 자기를 놀리듯 말하는 펠릭스에게 따끔하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나는 우선 내가 손댄 사업들을 점검했다.”


“괜찮았습니까?”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 급히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예고도 없이 ‘내’집으로 돌아갔는데······.”


준남작의 말을 가만히 듣고있던 펠릭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인들이 집 주인을 집 안으로 못 들어가게 막더군.”


준남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그 때, 그들이 잠시 미쳐버린 줄 알았다. 제 주인도 몰라보는 하인들을 물리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죠?”


“내 허락도 없이, 어린 놈의 놈팽이가, 실비아의 창문 아래에서 노래 따위를 부르고 있었어!”


준남작은 치를 떨었다.


“실비아는 아직 어렸는데도! 그놈은 적어도 스무 살은 되어 보이더군. 아직 어른도 되지 못한 소녀에게 할 짓이 아니야!”


“그런 일이 준남작의 저택 안에서 일어났다고요?”


“그래!”


준남작이 거칠게 펠릭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기억에 선해. 아무것도 모르고, 드러낸 이빨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실비아는 그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지. 그놈이 탐욕이 듬뿍 묻은 침을 이빨 사이로 뚝뚝 흘리는 줄도 모르고. 나는 당장에 상황을 이해했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잠깐, 잠깐만요. 그래도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펠릭스는 실바누스의 말을 잠시 멈춰세웠다.


“안주인은 뭘 하고 있었는데요? 초대도 못 받은 손님이 딸에게 손아귀를 드리우는 동안에?”


“아내는.”


실바누스는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죽었다.”


“네?”


“실비아를 낳고 나서 곧 죽었어.”


실바누스는 목구멍을 타고 울컥 올라오던 무언가를 힘겹게 삼키는듯했다.


“유감입니다. 혹시······.”


“아내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말지.”


준남작은 다시 원래의 위엄을 애써 되찾았다.


“그래. 그래서, 아내가 나와 결혼할 때 데려온 늙은 하녀가, 에밀리아와 실비아의 어머니 대신으로 있었다. 있었는데, 그년이 나를 배신할 줄은······.”


준남작은 다시 울컥하여, 아주 극적으로 일그러진 얼굴 표정을 지어보였다. 거기에 달군 쇠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실바누스 로즈베리는 용광로의 불 속에서 막 끄집어낸 흉기처럼 보였다.


“말씀하기 괴로우십니까?”


“그래, 괴롭다 이 연금술사 녀석아. 하지만, 나는 내가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줄 안다. 너희, 그 짐승만도 못한 연금술사 패거리와 달리!”


준남작은 다시 펠릭스를 향해 공연히 화를 내었다. 그러나 어쨌든, 실바누스 로즈베리는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금새 화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계속 해 주시지요.”


조금도 그에게서 겁을 먹지 않고, 그렇다고 긴장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펠릭스는 조곤조곤 말했다.


“그래. 그래서, 나는 당장 그놈에게 달려가 놈의 멱살을 붙잡았다. 머리위에서 실비아의 비명이 들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놈의 그 잘나빠진 얼굴에 주먹질을 하고, 저택을 지키던 경비병을 불러 그놈을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했다.”


“아주 명쾌하군요.”


“그리고 아직 어정거리고 남아 있는 경비병에게는, 저놈이 어떻게 저택 안마당까지 멋대로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그 경위를 물었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을 못 하더군. 다른 놈들을 불러도 마찬가지였다.”


“호오?”


“하인들을 불러도 그랬다. 내가 단단히 화가 나서 저택 정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가 소리를 지르자, 뒤늦게 저택 위층에서 그 늙은 하녀가 허둥지둥 내려오더군. 위층은 나와 실비아, 에밀리아, 그리고 내 아내에게밖에 허락한 적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그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오더군. 누가 보면 이 저택의 정당한 안주인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야.”


“아하······.”


펠릭스는 여전히 웃음기를 조금 머금은채, 그러나 유감이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너무 오래 비웠던거야. 다행히, 나는 우리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새 이해했다.”


“그렇군요. 저도 이해한것 같습니다.”


“에밀리아도 이해했지. 하지만, 실비아는 그 모든 일들에 대해 이해하기에는 아직 조금 어렸어.”


“그렇습니까?”


“나는 아직 믿을 만 한 하인을 찾아 실비아를 방에 가뒀다. 그리고 내 손으로, 그 추잡한 놈팽이와 그놈과 붙어먹은 하녀를 처리했지. 정말 가관이었지······.”


실바누스는 다시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만약 아내가 봤다면, 아마 크게 상심했을 거야. 그렇게 사람을 잘못보다니······.”


“연금술사는?” 펠릭스가 실바누스 준남작의 말에 참견했다. “어딨죠? 그래서, 그 연금술사는?”


“곧 나온다. 재촉하지 마라.” 실바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나를 오해하지 않도록 일부러 천천히 설명하는 중이다. 네가, 만약에라도,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은 뱉은 말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사람이라며 날 험담하지 않도록 말이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제가 설마 그러려고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실바누스 준남작님은 물건 값을 멋대로 깎으려드는 장사치와는 달라보입니다. 제가 제공한 약과 처치에 대한 값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장인데, 설마 거기에 거짓을 섞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군요.”


“그래. 난 싸구려 양조업자들과는 달라. 술에 물을 타서 팔지는 않는다.” 준남작은 잠시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 그랬지. 하지만, 실비아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어······.”


준남작의 두 눈에 후회의 빛이 서렸다.


“나는 실비아의 방으로 들어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실비아는 제 아비보다도 그 도둑놈을 걱정하더군. 화가났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비아는 도통 내 말을 듣지를 않았다. 내가 요구한 설명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내가 자초지종을 말해주어도 내 말을 믿어주질 않았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었겠나? 나는 그때, 아직 젊었고, 큰 계약을 앞두어 긴장했는데, 오래간만에 집에 들어왔더니 끔찍한 일을 목도했다. 나는 실비아를 방에 가두고 씩씩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준남작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헛웃음을 지었다.


“거긴 다행히 멀쩡하더군.”


준남작은 여전히 웃으며 펠릭스를 쳐다봤다.


“우습지 않은가? 교활한 년놈들 같으니. 집주인의 권위를 그렇게 멋대로 짓밟으면서, 꼴에 내가 무섭기는 했는지, 정작 내 방에는 손끝하나 대지 않았더군. 어찌나 우스운지.”


그러나 펠릭스는 준남작의 눈썹 위를 꿈틀거리는 분노를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실비아에게 감시를 붙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니나다를까, 내가 지하감옥에 가둬둔 두 놈이 정원을 배회하더군. 그러다가 수상한 누군가를 만나 약을 건네받고, 실비아의 창문에 작은 돌을 던져 그녀를 불러냈다.”


“그리고요?”


“사전에 말을 맞추어둔것 같더군. 실비아는 밧줄을 내렸고, 그놈은 밧줄 끝에 약병을 묶었다. 그리고······.”


“경비대를 불렀습니까?”


“······난장판이었다. 이 부분은, 차마 내 입으로 설명하고싶지 않다.”


“그러시다면야. 아무튼, 그래서. 그 연금술사?는 잡았습니까?”


“지하감옥에 처넣었지.”


“그렇게까지?”


“실비아의 방으로 들어가, 당장 놈이 만든 약을 내놓으라고 소리쳤지. 실비아는 나를 잠시 노려보더니, 보란듯이 약을 꿀꺽 삼켜버리더군.”


“거 참. 성격 더럽군요.”


실바누스가 조용해지자 펠릭스는 뒤늦게 눈치를 슬쩍 봤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실비아는 잠들었다. 불러도, 흔들어도, 무슨 수를 써도 깨어나질 않더군. 나는 패닉에 빠져서,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그 연금술사를 고문했다. 그러나,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도, 놈은 아무런 도움되는 말을 하지 않더군.”


“아마, 정말 몰랐을겁니다. 뛰어난 연금술사로서 첨언하자면, 잠에서 깨는 약은 만들기가 어렵거든요. 자는 사람에겐 물약을 먹이는 것도 위험하고······아, 딱히 제 설명을 바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펠릭스는 싱긋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준남작은 그를 잠시 흘겨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날이 밝는대로 하인들을 부러 의사든, 약사든, 뭐든 도움 될만한 사람들을 불러오게 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음유시인과 연금술사를 내 손으로 죽일지 말지 고민했지. 다행히, 어느 눈치빠른 하인이 마을 경비대를 불렀더군. 덕분에 난 내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하녀는요?”


“그녀 이야기는, 조금 이따 하겠다.” 준남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튼, 하늘이 도우신건지, 아니면 죽은 아내가 날 도운 건지. 어느 의사가 향을 피우더니 실비아는 금새 잠에서 깨더군.”


“다행이군요. 그래서, 하녀는요?”


“······잠시 실비아를 챙겨주고 나서, 나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던 하녀를 불렀다. 다행히 금방 불더군. 푼돈과 잠자리에 눈이 멀어, 정체도 모르는 떠돌이 음유시인과 수상한 연금술사를 집 안으로 들였다고. 그리고, 실비아를 그들에 팔아치우려 했다고.”


“경비대에 넘겼습니까?”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아내가 데려온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준남작은 입술이 하얗게 될 때까지, 그리고 그 위에 빨간 피가 맺힐 때까지 세게 깨물었다.


“그래서요?”


“그년이, 온 집안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외치고 나가더군.”


“뭐라고요?”


실바누스는 격정적인 목소리로 탄식했다.


“실비아가, 내 딸이 아니라고.”


준남작의 말을 들은 펠릭스는 깜짝 놀랐다. 그 메시지의 뜻 때문이 아니라, 메마르고 조금은 성마른 성격의 실바누스 로즈베리가, 그렇게까지 격정적인 감정을 토해냈다는 것이 놀라워서였다.


“대단한 망언이군요.”


“그래. 망언이야. 하지만, 실비아는 그 말을 들었고, 그 뒤로······.”


“당신을 피하던가요?”


“내가 피했다.” 준남작이 말했다. “그 뒤로, 나는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어. 더이상, 그곳은 나의 집이 아니었다. 실비아에게 제대로 설명을 했어야 하는데, 나는 도망치듯 집을 나와 미친듯이 일에 몰두했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에밀리아에게 맞는 짝을 찾아주고······.”


“그딴 망언을 믿는다고요?” 펠릭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똑똑한 아가씨가 믿을 만한 말은······.”


“실비아는 여섯 달만에 배가 불러 태어난 아이다.” 준남작이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나기 여섯달 전에, 나는 바다 건너에 있었고.”


“아하. 그런가요?”


“그래. 하지만.”


준남작은 펠릭스를 향해 단호하게 얼굴을 돌렸다.


“나는 실비아가 내 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실비아는 내 딸이다. 나는 실비아가 태어났을때,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하인들은 주인의 등 뒤에서 수군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조금 불안한 얼굴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지. 우리 저택을 둘러싼 숲 속의 요정들이 자그마한 선물을 준 거라고. 그래서, 내 이름을 따서 이름을 실비아라 지었다.”


“대단히 감동적인 이야기군요.”


그렇게 말하는 펠릭스의 두 눈은, 산호항구를 둘러싼 붉은 사막만큼이나 메말라있었다.


“그래. 그랬던 실비아가, 나를 무슨 짐승 보듯 쳐다보는것을, 나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어. 아직도 후회한다. 그 때의 일을 바로 해명하지 않은 것을.”


“뭐, 그렇군요. 그래서, 그 일 때문에 연금술사들을 그렇게 미워하게 된 겁니까?”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어. 누구든지.”


그리고 실바누스 로즈베리는, 다시 그 위협적인 눈으로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연금술사든, 음유시인이든. 누구든.”


“별로 어른스럽지 못하군요.”


“나이를 먹는다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 익숙한 문장을 들은 펠릭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래. 그래서, 들을 만큼 들었느냐, 연금술사? 이제 만족하나? 그 헛된 지식에의 욕구를 채워서, 그 알량한 흥밋거리를 채워서 만족하느냐?”


“대단히 만족합니다.”


펠릭스는 금화주머니를 받은 고리대금업자처럼 환하게 웃었다.


“좋은 이야기,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가만히 계산을 해 보니. 약값 치고는 조금 지나치게 받았더군요.”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실바누스는 펠릭스의 말을 듣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래서, 뭐 어쩔 셈이냐? 내게 거스름돈이라도 주려고?”


“좀 더 서비스를 해 드리지요. 준남작님. 아까 하셨던 말씀 말입니다만. 하나만 짚고 가죠.” 펠릭스는 앉은 자세를 조금 고쳐앉았다. “실비아가 태어나기 열 달 전에는, 집에 간 적이 있습니까?”


펠릭스의 말을 들은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은 누운채로 고개를 살짝 위로 들고, 눈을 깜빡이며 잠시 생각했다.


“집에 잠깐 들렀던가, 잘 모르겠다.”


“아홉 달 전에는?”


“계속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지. 여덟달 전 즈음에는, 잠깐 집에 들렀던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렇군요. 하나 말씀드리자면, 가끔 가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뭔가?”


“임신을 해도 배가 불러오지 않는 사람이요.” 펠릭스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심지어 아이를 낳을 때가 다 되어서도 입덧도 하지 않고, 배도 부르지 않은 사람도 있다더군요.”


“있다더라고? 그런 못 믿을 말을 날더러 믿으라고?”


“뭐, 제 대스승님이 언젠가 해준 이야깁니다. 믿든지 말든지, 그건 준남작님 자유입니다만, 저는 그 말 믿습니다.”


“네 대스승이란 작자도, 그리 믿을 만 한 사람은 아니군.” 실바누스는 다시 헛웃음을 지었다. “연금술사라는 인간이, 산파나 알만한 이야기를 떠들다니 말이야.”


“워낙에 박식하고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튼, 잘 들었습니다. 그럼 우리 사이에 더이상 빚은 없는걸로 하고, 마침 둘만 있는 김에 하나만 더 말씀드리죠.”


“말해라.”


“흑살구.” 준남작이 그를 돌아보자, 펠릭스는 다시 히죽 웃었다. “제게, 조금만 파시면 안 됩니까?”


“어림도 없다!” 준남작이 일갈했다.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거냐? 네놈은 여전히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무슨 약을 만드는데 쓰는 재료인지. 그리고, 실비아와 어째서 동행하는지!”


“아이쿠, 이런. 불똥이라도 튀겠네. 그럼 하나만 확실하게 해 주시죠. 흑살구가 바다를 건너간 뒤에는, 제가 사도 별 문제는 없겠죠?”


실바누스는 아까와 같은 자세로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시장에 나온 물건을, 왕국의 시민이 산다는데, 내가 거기에 대고 뭐라고 하겠느냐?”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그럼,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길.”


“퍽이나.”


펠릭스는 실바누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해 준 다음, 그의 방 안을 밝히던 촛불을 후 불어 끄고 조용히 방에서 걸어나갔다.




펠릭스가 방을 비우자 실바누스 로즈베리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아, 한없이 쓸쓸한 얼굴로 잠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밤의 어둠만이 비쳐보이는 창문과, 그 창문의 틈을 통해 스며드는 어둠이 반사되어 빛나는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 위에서, 실바누스 로즈베리가 무엇을 찾았는지, 또 무엇을 보았는지는, 아마 그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리라.





아무리 끔찍한 시기에도, 마침내 밤은 찾아온다. 그리고 아무리 밤이 깊어도, 언젠가 태양은 뜨기 마련이었다.


사막의 지평선 위로 불그레한 태양이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자, 펠릭스는 금새 활기찬 얼굴로 방문을 벌컥 열고 계단을 내려왔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펠릭스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있으니 곧, 올리버가 식당으로 내려왔다.


“어휴.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침 해가 뜨긴 하는군.”


올리버는 어제 그 소란을 겪고도, 태연하게 가게를 영업하는 여관 주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엄청난데. 다들, 강철같은 정신력을 가졌나봐.”


“칼든 도둑은 주먹으로 때려잡을 수라도 있지, 손님이 안 오는건 뭐 어쩔 방법도 없잖아요? 도둑보다 장사 안 되는게 무섭죠.”


펠릭스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올리버. 대스승님이 그러는데, 밤이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곳도 있다군요.”


“뭐? 그럼, 거기 사람들은 하루를 어떻게 세는데?”


펠릭스는 올리버의 질문에 뜻밖에 당황했다.


“그러게요. 저도 그것까지는 몰라요.”


“뭐야. 진짜 궁금했는데.”


올리버는 금새 시큰둥해져서는 펠릭스와 같은 아침식사 한 접시를 받아들고 돌아왔다.




펠릭스와 올리버가 거의 아침식사를 끝마칠 즈음이 되어서야 실비아는 졸린 눈을 부비며 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실비아. 늦잠꾸러기군요.”


“어젠 바빴잖아요.”


실비아는 그들이 앉은 테이블의 의자를 죽 빼내 털썩 앉았다.


“그렇게 애썼는데, 늦잠 조금은 자도 되지 않아요?”


“당신 아버지. 걱정 안 돼요?”


막 크게 하품을 하던 실비아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요?”


“아니오.”


“뭐예요!”


실비아는 다행이라는듯 한숨을 쉬다가, 숨을 반쯤 내뱉다 말고 펠릭스를 노려보았다.


“장난칠게 따로있지, 펠릭스. 놀랐잖아요!”


“준남작은 멀쩡해요. 아주, 아주 멀-쩡하죠.”


펠릭스는 일부러 놀리듯이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멀쩡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나 실비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펠릭스는 금새 흥미를 잃고 괜히 수저로 빈 접시를 두드렸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이 계단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당장 실비아가 자리를 박차고 떠나 아버지를 부축했고, 그녀의 조그만 몸으로는 부축이 안 될 것이 뻔하여 곧 올리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리버의 부축을 받으며 실바누스 준남작은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좋은 밤 보내셨습니까?”


준남작은 펠릭스를 힐끗 노려보았다.


“아빠. 괜찮아? 안 아파?”


그리고 이번에 그는 실비아를 힐끗 돌아보았다.


“실비아.”


“왜?”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라.”


“왜? 뭘?”


조금 걱정스러운 어조로 실비아가 말했다.


“연금술사 놈들은, 하나같이 못 믿을 녀석들 투성이야. 절대, 놈들을 믿지 마라!”


실바누스 준남작이 험악한 얼굴로 말하자, 당장 실비아가 아버지를 향해 대꾸했다.


“왜 또!"


“하지만.” 준남작은 금새 얼굴을 폈다. “개중에, 아주 드물고 독특하게도, 적어도 거래 상대로 쓸 만한 정도는 되는 녀석도 있더구나.”


실바누스는 펠릭스를 힐끗 보았고, 그러자 펠릭스는 히죽 웃었다.


“뭐?”


“그러니까, 실비아.” 준남작은 다시 실비아를 쳐다보았다. “그놈과 거래를 하는 것 정도는 눈 감아 주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절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맺어서는 안 된다. 알았지?”


“아, 알았어. 걱정은.” 실비아는 조금 당황하여 허둥대며 대답했다.


“그래. 실비아. 내 딸. 도와줘서 고맙구나.”


“뭘 새삼.” 실비아는 얼굴을 돌리며 대답했다. “난 아빠 딸인데.”


실바누스는 쑥스러운둣 고개를 돌린 실비아를 인자한 미소를 띄며 가만히 지켜보았고, 올리버와 펠릭스는 한없이 거북한 얼굴을 슬쩍 돌려 외면했다.





네 사람은 마차 대여소 앞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을 제외한 세 명은 마차에 올라탔다.


“같이 안 가십니까, 준남작?”


펠릭스는 마차의 차창 밖으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하던 일은 마무리짓고 가야한다.”


“아직도 마무리지을 일이 남았습니까?”


“남은 흑살구를 사야하고, 그리고······.”


준남작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 그거야 뭐. 걱정마십시오. 어차피, 단서 하나 못 찾을게 뻔하니까요. 우리를 태우고 다니던 그 마부가 흔적도 없이 내뺀것. 당신도 봤잖아요?”


“참 대단히 도움되는 충고 고맙군, 연금술사.”


“도움이 되었다니 저로서도 참 기쁩니다.”


그러자 실바누스는 어이가 없다는듯 허탈하게 웃었다.


“연금술사.”


“왜요?”


“어찌됐든, 도와줘서 고맙구나.”


“낯간지러운 말은 그쯤하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실바누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실비아에게, 안부 전해다오.”


“직접 말하면 될 걸. 아니면 편지라도 쓰시든지요.”


펠릭스는 실바누스가 웃는 것을 보더니, 그에게 웃음으로 화답하고 마차의 차창을 드륵 닫아버렸다.


“출발하죠.”


그리고 마부를 향해 펠릭스가 말하자, 곧 마차는 동쪽을 향해, 그들이 떠나온 머나먼 동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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