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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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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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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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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89화

DUMMY

펠릭스가 방으로 올라가 준비를 하는 동안, 실비아는 식당 테이블에 앉아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올리버는 실비아의 맞은편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실비아. 괜찮아?”


“뭐가요? 참고로 말하자면, 전 그 어느때보다도 괜찮아요 올리버.”


“그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네 약이라든가, 아무것도 말 안 한거 아냐? 걱정하는 눈치던데. 이렇게 먼 타지에서 널 만날지도 전혀 몰랐을테고······.”


“신경꺼요 올리버.”


실비아는 조금 심술이 난 얼굴로 올리버에게 대답했다.


“이건 우리 가족사에요. 당신이 참견할 구석은 없어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해산물 스튜 한 접시가 가게 주인의 손에 들려 실비아의 앞에 놓였다.


“고마워요.”


실비아는 그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조용히 스튜를 한 술 떴다.


“그래. 그러면, 네 가족사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으마. 일단은.”


“앞으로도 안 물어봤으면 좋겠네요 올리버.”


실비아는 스튜에 풍덩 빠져있는 새우 한 마리를 스푼으로 건져올려 잠시 말없이 쳐다봤다.


“그나저나, 네 아버지는 왜 여기 있는걸까, 실비아? 동쪽 왕국의 사람이 이 먼 서쪽의 땅에 와 있을만한 이유가······.”


“사업차 온 거겠죠.”


실비아는 손을 더럽혀가며 새우를 뜯는 대신, 조용히 새우를 스튜에 퐁당 빠뜨렸다.


“사업?”


“네. 사업이요.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사업 때문에 바빴거든요. 유모나 하인들이 수군대던걸 아직도 기억해요. 내가 태어난 바로 이튿날, 옥수수 무역 때문에 바다를 건너갔다든가 하는 이야기요. 그 뒤로도 집에서 아빠를 본 적은 거의 없죠. 항상 사업 때문에 바빴으니까.”


“그랬군.” 올리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도 많이 힘드셨겠어.”


올리버의 말을 들은 실비아는 멈칫했다.


“가족 이야기는 그만하죠 올리버.”


“알았어.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실비아.”


실비아는 다시 스튜를 한 술 떠서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나저나, 그래서 말인데. 네 아버지. 무슨 사업 때문에 여기 와 있는걸까?”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아빠가 하는 사업이 잘 되는지 안 되는지도 저한테는 한 번 알려준 적도 없거든요.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건지, 가족도 팽개쳐두고 대체 어딜 그리 싸돌아다니는건지.”


실비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창 밖을 내다보다가, 입맛이 달아났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스튜를 떴다.




펠릭스와 실비아, 그리고 올리버는 산호항구에서 마차를 빌려 탔다. 그러나, 마차 안에는 한 명이 더 타게 되었는데, 그는 바로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이었다.


네 명의 사람을 태운 마차는 서쪽 관문을 통과해 사막을 향해 느긋하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왜, 당신이 우리랑 같은 마차를 타는거죠, 준남작?”


펠릭스가 실바누스를 힐끗 보며 말했다.


“달리 마차가 없어서 그렇다. 다른 마차를 빌릴 수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좁은 마차에 끼어 가지는 않았을거다.”


준남작도 펠릭스와 올리버를 힐끗 보며 말했다.


“아, 덩치가 커서 미안합니다, 준남작.”


실바누스 옆에 앉은 올리버가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실바누스는 올리버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실비아. 외간남자와 나란히 앉아 마차를 타는 것이 네 평판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고는 있나?”


실바누스는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실비아와 펠릭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내 나이에 아빠랑 같이 다니는것도 별로 좋은 이야기는 못 듣거든?”


실비아는 가볍게 대꾸했다.


“그리고, 이사람하고 아무 관계도 아니란 말야. 이 사람은······.”


“꼭, 항상, 사람들의 변명은 똑같구나. 입으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하는데, 내가 저놈을 지하 고문실로 끌고가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준남작이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 좀, 적당히 좀 해!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러자 실비아가 넌더리를 냈다.


“전에도, 그 음유시인.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하실에 열흘 넘게 처박아뒀잖아. 나중에 재판소에 경위서까지 써 내지 않았어?”


“그런 일이 있었나?”


올리버가 조금 놀란 목소리로 실비아에게 말하자, 실비아는 뒤늦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놈은.” 그리고 준남작이 말했다. “빌어먹을 사기꾼이었어. 경위서가 아니라, 내가 구금되는 한이 있었어도, 나는 똑같이 했을거다, 실비아.”


“그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나한테 편지 쓴거? 내 방 창문 밑에서 기다린거? 내가 감기에 걸려서 집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에 가만히 있었는데, 한 밤중에 조그만 돌을 창문에 던져 나를 불러낸 다음 세레나데를 불러준거? 아빤 그때 집에 있지도 않았잖아!”


“뭐? 그이? 실비아. 너······.”


로즈베리 준남작은 다시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저기요. 죄송한데. 저는 당신네들 구구절절한 가족사를 별로 알고싶지 않거든요?”


펠릭스는 품위없이 얼굴을 붉히고 있는 두 귀족 사이에 느긋하게 끼어들었다.


“귀족이라면, 무릇 자기 품위는 알아서 지키는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실바누스와 실비아는 펠릭스의 말을 듣더니 동시에 서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실비아는 뾰루퉁한 얼굴로 마차의 오른쪽 차창 밖을 내다보았고, 실바누스 준남작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마차의 왼쪽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한동안, 마차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네 명의 서로다른 사람들은 서로다른 생각과 꿈을 품고, 저마다 다른 소리와 리듬의 숨소리만을 내었다. 실비아와 실바누스는 가족인데도 그 두 사람의 숨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차라리, 펠릭스와 올리버의 숨소리가 더 비슷하게 들릴 정도로.


“왜 여기있는거야?”


조용히 창문 밖을 내다보던 실비아가 그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사업차 방문했다, 실비아.”


준남작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무슨 사업? 산호항구에서 산호라도 캐다 팔려고?”


“산호는 이미 한물 간 사업이다. 그리고 초기 자금이 많이 들어. 웨일 가문쯤 되는 수전노 공작가라면 모를까, 로즈베리 가문이 손 대기는 무리다.”


실비아의 비아냥에, 뜻밖에 실바누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럼?”


“흑살구.”


남작이 말하자, 세 사람이 동시에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사막에서 자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새까맣고, 동시에 달콤한 과실. 그것을 동쪽으로 무사히 옮길 수만 있다면. 우아하고 고상한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요리사들도 새로운 재료를 반기겠지. 그 우매한 귀족 놈들도 산맥과 바다를 건너 온 신비로운 서쪽의 과실을 좋아 마다하지 않을 테고.”


“재미없어.”


실비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재밌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다. 실비아. 너도 어른이 되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일, 절대 없거든!”


그러면서 실비아는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두 사람의 대화가 단절되자 펠릭스는 이제 자기가 말 할 차례가 왔는가보다 하며 슬슬 말을 꺼냈다.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님.”


“뭐냐.”


준남작이 펠릭스쪽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 흑살구 말입니다. 제게, 조금만 파시면 안 됩니까?”


“아까 충분히 설명했을 텐데.” 준남작이 펠릭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약을 만드는데 쓸 것인지 설명도 안 해주고, 내가 기껏 힘들여 사 모은 물건을 팔아달라고 부탁하는데, 내가 팔아줄 것 같나?”


“아, 뭐. 그건 그렇죠. 이해는 합니다. 그런데······.”


펠릭스는 준남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만큼 흑살구를 모았으면서, 이 마차에 타고 계신 이유는?”


“너와 같은 이유다. 미처 내가 파악하지 못한 흑살구 농가가 있거나, 또는 야생 군락이 있다면, 그것도 내가 사 모아야지.”


“그렇게까지?” 펠릭스가 의아한듯 물었다. “이미 충분히 사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모은 물량을 다 팔아치울지 어떨지도 불분명할텐데요. 이 정도는 제게 양보해 주지 않겠습니까?”


준남작은 펠릭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올해 흑살구의 수확량은 예년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그 메뚜기떼 때문이지. 그러니, 나로서는 물량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는 편이 좋다. 반대로 너무 빨리 물량이 동나버리면, 그것도 내 손해니까.”


“욕심스럽군요. 그 외에는 또 뭐 없습니까?”


“흑살구는 아무나 키워낼 수 있는 작물이다. 그러니,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이 서쪽 땅으로 찾아와 적당한 농부를 찾기만 하면, 내가 힘들여 길을 터놓은 시장에서 편안하게 자기 물건을 팔아치울수 있다. 난 그 꼴은 못 봐. 이 흑살구 시장은 오롯이 나 혼자서 개척할 것이고, 그 성과도 오롯이 나 혼자서 독식할 생각이다. 다른 녀석이 쥐새끼처럼 굴을 파고 도둑놈처럼 자기 물건을 팔아치우는 꼴, 나는 못 본다.”


“그러니, 사업을 독점하고 싶다 이 뜻이군요?”


준남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독점법이 만들어 진다고 하던데요.”


“멍청한 법이지. 나처럼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 힘들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면, 그걸 대귀족들이 입맛대로 슥슥 잘라 나눠먹으려고 만든 법이야. 그런데도, 이 우매한 대중들은······.”


“그 사람들이 설마 그렇게 멍청하겠습니까.” 펠릭스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흑살구를 제게 따로 팔 생각은 없다는 뜻인가요?”


“없다. 전혀.” 준남작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혹시, 제가 준남작님의 마음을 돌릴만 한 방법이 있을까요?”


“없다. 아니, 하나 있다.”


“오, 뭐죠?”


“실비아에게서 손 떼라.” 준남작이 펠릭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실비아는 내가 집으로 데려갈 테니, 네놈들은 그만······.”


“아, 아빠! 진짜, 왜 자꾸 그래?” 가만히 듣고 있던 실비아가 다시 짜증을 내며 말했다.


“난, 내 딸이, 정체도 모르는 잡배들과 어울리는 꼴 못 본다!” 준남작도 실비아에게 짜증스레 대답했다.


“정체 다 알려줬잖아! 거기서 뭘 더 설명해? 올리버는 행복의 연금술가게 채집꾼이야. 사냥도 잘 하고, 풀도 잘 캐. 숲을 돌아다니는걸 좋아하고, 매일아침 차를 마시며 왕국 소식지를 읽어.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맥주 한두 잔을 마시고. 이십년 전에 전쟁에 참전했대. 코튼이라고 이름붙인 조그만 다람쥐를 기르고. 그만큼 설명했으면 되잖아. 거기서 뭘 더 설명해? 대체, 뭘 그렇게 알고싶은건데?”


준남작은 얼굴을 붉히며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뜸 펠릭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그 연금술사라는 족속들. 못 믿는다!”


“어휴, 정말! 펠릭스는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사기꾼도 아니고, 인정머리라고는 요만큼도 없는데다가 섬세함도 눈씻고 찾아봐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무슨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 최고의 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야.”


“사람 홀리는 미약도 말이냐?” 준남작이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안 그런가, 연금술사? 네놈들의 장기 아니냐? 떠돌이 놈팽들과 패거리를 지어 수면약과 미약을 섞어 집 주인과 안주인에게 먹인 다음, 재산과 여자를 멋대로 취하고 도망치는것.”


“대단한 무례군요, 준남작.” 펠릭스는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한 것 같은데요. 제가 그런 가짜 연금술사를 우연하게라도 만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저는 그들의 둘로 나뉜 뇌를 하나로 합쳐줄 겁니다.”


“아니, 그게 무슨 징그러운 말이에요, 펠릭스?” 실비아가 기겁을 하며 말했다.


“연금술사의 이름을 먹칠한 댓가로, 놈들의 머리를 도마뱀 수준으로 되돌려 놓겠다 이 말이죠. 준남작. 나는 그런 가짜들과는 달라요. 정 의심스러우면, 내게 약을 하나 부탁해 보든가요.”


펠릭스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아주 뛰어난 연금술사거든요. 장담하죠. 이 왕국 안에서,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연금술사는 기껏해야 한 명이 전부일걸요!”


“우리 집에 찾아온 십수명 남짓한 연금술사들은 모두 네놈과 똑같은 말을 했다.”


준남작은 비정하게 대답한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더이상 논할 가치도 없는 일이야.”


“펠릭스. 일단은 그만 포기해.”


이야기를 듣고있던 올리버도 펠릭스에게 말했다.


“잘은 몰라도, 아주 단단히 데인 모양이야. 그, 가짜 연금술사들한테. 그리고 잘 찾아보면, 우리도 우리나름대로 쓸만한 흑살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올리버의 말을 들은 펠릭스는 준남작을 힐끗 돌아보더니, 그도 준남작과 마찬가지로 왼쪽 차창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마차는 사막 한 가운데 조그마한 임시 역참 같은 곳에 멈춰섰다. 거기에는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나 깊은지 두레박을 내리는데도 영겁의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후! 좀 살겠군.”


마차에서 내린 올리버는 굳은 몸을 빙빙 돌려 풀며 말했다.


“저긴 너무 좁았어.”


“미안하게 됐군.”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던 준남작이 올리버에게 말하자, 올리버는 뒤늦게 헛기침을 했다.


“어디 가십니까?”


올리버가 멋쩍게 말하자, 준남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저기, 커다란 흑살구 나무가 하나 있군.”


“아하.”


올리버가 대답했을 때는, 이미 준남작은 저만치 걸어간 뒤였다.




검게 뒤틀린 흑살구 나무 아래에, 펠릭스와 실바누스가 나란히 서서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손 닿지 않는 곳에 열린 과실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내 것이다.” 준남작이 말했다.


“주인없는 물건은 모조리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셈인가요?” 펠릭스가 말했다.


“주인을 찾아, 돈을 주고 살 것이다.”


“이건 주인없는 나무에요. 저만큼 큰걸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사람이 기르고 가꾸는 나무는 일정한 크기가 되면 더이상 자라지 못하게 막으니까요.”


“잘 아는군.”


“그런 쪽으로 능통한 사람이 있어서.”


펠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흑살구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둘 다 뭐해요?”


마침내 영겁을 기다려 우물물을 길어 마시고 온 것인지, 입가에 반짝이는 물방울을 묻힌 채 실비아가 이쪽으로 왔다.


“실비아. 입이나 닦아요.”


그러자 실비아는 황급히 얼굴을 붉히며 옷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그 모습을 본 실바누스 준남작은 불편하다는듯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여기서 뭣들 해요?”


“저 열매.” 펠릭스가 나무에 매달린 열매를 가리켰다.


“흑살구에요?”


“네. 저거죠.”


“그럼, 올라가서 따 오면 되잖아요. 여기 가만히 서 있는다고, 열매가 뚝 떨어져요? 감나무도 아니고.”


“흑살구는 나무가 약해요. 그런 점에서는 감나무와 비슷하죠. 직접 올라가서 따 보겠다고 나뭇가지를 타다가는, 바닥으로 뚝 떨어져요.”


“그럼, 어떻게 따는데요?”


실비아가 물어보자, 펠릭스는 실비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실비아는 조잡하게 만든 새총에 돌맹이를 매기고, 한쪽 눈을 감은 채 흑살구 나무의 적당한 가지를 겨냥했다.


“멋대로 집을 뛰쳐나가더니, 천민들과 같은 취미를 가지게 되었구나.”


그리고 준남작은, 아주 못마땅하다는 투로 거슬리게 중얼거렸다.


“올리버는 천민 아니거든.”


실비아는 아버지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고상한 귀족이 할 일은 아니다.”


“고상한 귀족이 할 일이 뭔데? 집안에 가만히 하루종일 쳐박혀 있기? 우수에 잠긴 얼굴로 몇 시간이나 창 밖을 내다보기? 그랬다가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릴걸.”


“실비아. 왜 그렇게 내 말을 듣지 않는거냐? 집 안에서도 얼마든지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고, 또 즐거운 일도 만들 수 있다.”


실비아는 준남작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새총의 시위를 당기던 손을 톡 놓았다. 돌멩이가 바람을 가로질러 가지에 정확하게 부딪혔다. 파삭 소리를 내며 흑살구가 주렁주렁 달린 가지 하나가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고, 열매가 바닥에 부딪혀 터지기 전에 키큰 올리버가 가지를 낚아챘다.


“잘 쏘네.”


올리버가 실비아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실비아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흑살구의 열매는 검은 진주처럼 반짝였다. 그 신기한 열매를 반짝이는 눈으로 구경하던 실비아는, 자랑이라도 하려는듯 의기양양한 얼굴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펠릭스도, 실바누스 준남작도 어딘가 영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흑살구의 열매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어때요?”


“이건 못 쓰겠어요.” 펠릭스가 바로 대답했다.


“아니, 왜요! 이렇게 큼직하고, 탱글탱글한 열매를 못 쓴다니요?”


“하나 먹어보면 알 걸요 실비아. 과일은 크기가 크다고 무조건 좋은게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너무 바싹 말랐어.” 준남작도 거들었다. “보나마나 씹어도 단맛은 나지 않고, 시고 떫은 맛이 날거다.”


“그럴리가!”


실비아는 바로 열매를 하나 따서 옷소매로 열매를 슥슥 닦은 다음 입 안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한 번 씹자마자, 들큰하고 시고 떫은 과즙이 툭 터져나와, 그녀는 품위없이 입 안에 든 것을 땅에 뱉어버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실비아.”


“에퉤퉷. 으. 끔찍해.”


실비아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하자, 펠릭스는 그녀를 보고 작게 비웃었다.


“그러게, 아빠 말좀 잘 듣지 그랬어요?”


“펠릭스! 좀, 알면 말리든가 했어야죠!”


“내가 말린다고 안 할 것처럼 말하기는. 당신이 제 말을 듣나요?”


실비아는 얼굴을 붉히다가 펠릭스를 때려줄 것처럼 팔을 들어올렸다.


“준남작! 당신 딸좀 보래요! 귀족이 사람 팬다!”


“아, 아니, 아빠. 그러니까······.”


뒤늦게 실비아가 그의 아버지를 돌아보자, 준남작은 조용히 한숨을 쉰 다음 마차가 세워진 저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그러면 어떡해요! 아빠 앞에서, 별 꼴을 다 보여주네······.”


준남작이 저만치 걸어가자 실비아가 펠릭스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면 절 때리려고 하지를 말든가요. 하여튼, 그 성격. 불같은 성격들이란.······”




준남작은 조금 화가난 얼굴로 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말을 빗질해주고 말의 땀을 닦아주고 있던 마부를 힐끗 보았다.


“언제 출발하나?”


“한, 십 분은 더 있어야 할 겁니다요.”


말은 마부의 손길이 그리 내키지 않는지, 자꾸 머리를 이리저리 피했다.


“사막에 농가가 많나?”


“뭐, 적장히 있을겁니다요.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도 하고. 그리고 마적들이 기승을 부린 뒤로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농가도 많아서. 저도 확신은 못하겠습니다요.”


“마적들이라. 그 빌어먹을 도둑놈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군.”


준남작이 이를 갈며 말하자, 애먼 마부만 겁에 질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놈들한테 원한이라도 있습니까요?”


“도둑놈들은 다 똑같아. 모조리 가두고 가능한 많이 죽여야 돼.”


“원. 무시무시하구만요.” 마부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말을 닦아주었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펠릭스의 일행도 마차로 돌아왔다.


“언제 출발하죠?”


펠릭스가 마부에게 묻자, 준남작이 먼저 대답했다.


“십 분쯤 기다려라. 말도 쉬어줘야하니까.”


펠릭스는 준남작을 힐끗 보고는 마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요. 그나저나, 마적떼들이 기승을 부린다는데 손님들은 무섭지 않나요?”


펠릭스는 올리버를 힐끗 돌아보았다.


“뭐, 정 안되면 도망쳐야죠. 어쨌든, 나는 그 도둑놈들 때문에 눈앞에 뻔히 보이는 재료를 포기할 생각은 없거든요.”


“어휴. 싸움은 잘 하시는가요?”


“적당히 하죠, 올리버?”


펠릭스가 그를 돌아보자, 올리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이 사막에는 먹을 것도 없을 텐데. 그 마적들은 어디서 뭘 먹고 살길래 기승을 부려요?”


이번에는 실비아가 물었다.


“물 나오는 땅에서 농사를 짓는가? 저도 잘 모릅니다요. 누군가는, 그래서 그 마적떼들이 죄다 유령이라는둥, 헛것이라는둥, 꾸며낸 이야기라는둥 떠들기도 합니다요.”


“모종의 후원을 받을지도 모르지.” 올리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 도둑놈들을 후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러자 실비아가 어이없다는듯 말했다.


“꽤 있어요, 실비아. 오히려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의외네요. 귀족이라면, 암투에 대해 잘 알지 않나요?”


펠릭스가 준남작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몰라요. 저는. 암투야 종종 벌인다지만, 그렇다고 도둑을 후원하는 귀족이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네요.”


“웨일 가문쯤 되는 수전노 공작가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줄곧 안들리는 척 하고 있던 준남작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하, 준남작님. 그 웨일 가문에 대단히 유감이 많나봅니다. 아까도 웨일 가문 이야기를 했던것 같은데.”


“세상에 부도덕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준남작이 펠릭스를 힐끗 보며 말했다. “웨일 가문의 놈들은, 도덕이나 윤리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들 뿐이지. 그런 놈들은 낯부끄러운줄 모르고 도둑과 강도, 범죄자들을 후원하기도 한다.”


“당해보셨습니까?”


펠릭스가 묻자, 준남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나는 당한 적 없다. 하지만 내 사업 파트너들은 당했지.”


“다행이군요.”


“그리고, 나는 그 도둑놈들의 습격보다 더한 일을 당했고.”


그 말을 내뱉은 준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펠릭스의 얼굴도 살짝 굳었다.


“그것 참. 유감이군요.”


준남작은 잠시 황량한 사막 저쪽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조용히 몸을 돌려 마차 위에 올라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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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113화 21.12.03 25 1 24쪽
112 112화 21.12.02 24 1 23쪽
111 111화 21.12.02 26 1 22쪽
110 110화 21.12.01 28 1 24쪽
109 109화 21.12.01 24 1 19쪽
108 108화 21.11.30 32 1 22쪽
107 107화 21.11.30 27 1 23쪽
106 106화 21.11.29 28 1 25쪽
105 105화 21.11.29 24 1 22쪽
104 104화 21.11.28 30 1 23쪽
103 103화 21.11.28 32 1 23쪽
102 102화 21.11.27 27 1 23쪽
101 101화 21.11.27 22 1 21쪽
100 100화 21.11.26 26 1 20쪽
99 99화 21.11.26 24 1 23쪽
98 98화 21.11.25 27 1 19쪽
97 97화 21.11.25 25 1 19쪽
96 96화 21.11.24 26 1 20쪽
95 95화 21.11.24 24 1 20쪽
94 94화 21.11.23 29 1 19쪽
93 93화 21.11.23 23 1 18쪽
92 92화 21.11.22 29 1 21쪽
91 91화 21.11.22 24 1 19쪽
90 90화 21.11.21 26 1 21쪽
» 89화 21.11.21 26 1 22쪽
88 88화 21.11.20 25 1 20쪽
87 87화 21.11.20 31 1 23쪽
86 86화 21.11.19 27 1 22쪽
85 85화 21.11.19 28 1 23쪽
84 84화 21.11.18 27 1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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