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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오면 당신은 설 것이다.

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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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2
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작성
23.02.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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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DUMMY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뭐가 어쩌고 어쨌다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죽인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런데 나에 대한 언급은 일체 없이, 대규모 내빈객 학살 사건이 황제를 향한 국가들의 배신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고?


황제가 살아 있었다는 언급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본체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황제가 나를 수배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나를 감쌌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금 같은 사람 떠올리고 있는 거 맞아?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서 말이고 생각이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게,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네. 충격적인 이야기죠? 저희쪽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그 과정에서 여명 묵시록의 간부들이 대거 숙청을 당했다고 합니다."


"······?"


"황제 폐하께서도 여러 가지 조사를 하셨다고 하더군요. 여명 묵시록이라는 조직이 특이한 방식으로 사람을 포교하고 마족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하지만 별다른 실마리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전쟁을 선포한 과정에서 각국에 은거하던 간부들을 잡아들였고 숙청을 하셨다는 얘기죠. 전화위복의 귀감이군요."


아니.


아니야.


그건 농담조로 희미하게 웃으면서 얘기할 게 아니었다.


심지어 아즈엘카 당신이 그렇게 얘기할 건 더욱이 아니었다.


황제는 교장에게 있어 최대, 최악의 적이고 대륙을 멸하려는 동시에 아카데미를 박살내려고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황제는 선을 행하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 있고.

어째서 아즈엘카는 그를 옹호하며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이 모든 게 황제의 계략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거지?


"어째서."


이쯤 되니 내가 이상한 건 아닐까 나조차 의심된다.


만약 그 때 내게 했던 게 다 연기였다면?


내 배를 갤러거에게 찌르라고 했던 것도 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였다면?


실은 여명 묵시록을 근절하기 위해 내부에서 잠입한 이중 스파이였다면?


온갖 의문, 의혹들이 내 머릿속을 거칠게 휘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국왕들이 죽은 것은 제국의 입장에서 추문을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오히려 국왕들의 죽음을 그들의 배신으로 공표하고 역으로 빌미를 잡아 전쟁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토의 절반씩을 먹었다.


다시 말해 나는 보기 좋게 제국의 대륙 진출 발판으로 이용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간악한 노인네가 선인이라고?


이건 수배자로 낙인 찍히는 것보다 더 엿 같은 기분이다.


다만 의문인 건 내가 올 걸 미리 알았는지에 대해서다.


아니면 이렇게 상황을 이용할 정도로 임기응변에 뛰어난 남자란 말인가?


그 정도의 남자라는 말인가? 알칸타라 제국의 황제라는 남자가?


"그 얘기, 누구한테 들은 거야?"


"아까 얘기 했죠. 제국의 원조를 받아서 재건하고 있다고."


그녀는 이쯤 말하면 내가 알아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지금 혼란스러워서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다.


지금 이 얘기가 사실인지, 누구에게 전해들었는지 확실히 들어야 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자 직접 답을 바라는 내 의도를 깨달았는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이곳에 방문해주셨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쾌유를 기원한다고 하셨죠."


잠시 다물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그 사람이 튀어 나왔다.


분명히 답을 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뒤에 머릿속의 큐브가 헛돌아갔다.


여명 묵시록의 흑막이었던 황제가 대륙의 인구 절반을 마족으로 만들었고 그 마족으로 군단을 일으켜 아카데미의 모든 것을 부수려고 했고.


그런데 그런 황제가 직접 아카데미에 찾아와 자초지종을 설명한 것도 모자라 재건하는데 조력을 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도 나를 살려뒀다?


지금 내가 생각을 꺼내고도 이해가 안 됐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안 되겠다.'


혼자서 생각을 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아즈엘카와 얘기를 나누자니 이야기가 미궁 속으로 빠졌다.


내게 해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을 이렇게 주작질을 한 장본인.


"황제, 지금 어딨어?"


"아카데미에 물자와 인력을 지원해주시고는 돌아가셨죠. 제국도 지금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아직 여러 가지 공작질이나 뒷수습 하기 바쁠 것이다.


이렇게 나를 엿먹이고 그냥 튀었단 말이지?


"아, 한 가지."


아즈엘카가 허공을 눈으로 훑으며 뭔가 떠오른 것처럼 검지를 들어올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가락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실마리가 될 만한 걸 남길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안았다.


나는 그녀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뭔데."


"당신에게 전언을 하셨죠."


"그니까 그게 뭐냐고."


아즈엘카는 잠깐 입을 다물고 나를 내려다봤다.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삭이던 화를 그녀에게 푸는 것처럼 낮은 어조로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탓일 거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난 그냥 지금 머리가 혼란해서 미치기 직전이었으니까.


한 시라도 빠르게 답이나 내뱉으라고 소리 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딸을 잘 부탁한다, 그런 안부 인사였습니다."


"그 새끼다."


생각으로만 내뱉으려던 걸 말로 내뱉었다.


그 새끼야.


그리고 속으로 한 번 더 내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즈엘카가 언급한 살아있는 황제란 일전에 내가 봤듯이 연금술 같은 기술로 만들어낸 더미일 것이다.


노쇠한 몸으로 직접 이 용암길을 뚫고 방문한 까닭에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함일 것이다.


자기가 살아서 아카데미에 왔다가 다시 되돌아간다는 알리바이를.


왜냐하면 황제가 말했다.


"내가 너를 찾아가겠노라."


내게 볼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나를 수배하지 않았고 감쌌다.


볼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미라고는 해도 목숨을 앗아간 나를 용서하는 관대함마저 보였다.


나는 일전에, 평야에서 모든 마족들을 죽인 뒤 지쳐 쓰러졌을 때.


내 앞에 멈춘 하얀 귀족의 마차를 떠올렸다.


"우와. 피바다로구나. 온통 검은 피 투성이야."


그 안에서 내려 꺼져가던 정신을 억지로 붙잡은 여자 귀족이 있었다.


내 볼을 찌르던 그녀가 내뱉은 말을 이제야 떠올렸다.


"말했지 않느냐. 내쪽에서 찾아가겠노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황제가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녀석은 이미 아카데미 안에 있다.


'왜 이제야 그걸 떠올린 거지?'


잊을 게 따로 있지, 죽다 살아났다고 해도 그걸 잊어서는 안 되었다고 나는 계속 되뇌었다.


"이런 개같은 새끼."


욕지거리를 하면서 등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깐! 어딜 그렇게 급하게······!"


아즈엘카의 목소리가 내 뒷목을 잡아 끌었지만 이내 발걸음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아졌다.


그녀에게 황제의 딸이라는 여자의 행방을 묻는 게 순번에 맞을 것이다.


그녀라면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알 테니까.


하지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지금의 나한테 그녀가 순순히 말해줄까?


아니. 왜 갑자기 이성을 잃었는지 물어볼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이런 상태의 나와 만나게 해줄 수는 없다고 때를 미룰 것이다.


그게 교육자로서 타당한 대처지만.


나는 그걸 곧이곧대로 존중해줄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한 녀석인지라.


솔직히 그 녀석의 얼굴도 기억 안 난다. 거의 죽기 직전에 목소리만 메아리쳐서 어지럽게 들렸으니까.


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놈의 면상과 마주하는 즉시 내 몸이 본능적으로 주먹을 날릴 거라고.


"용사님?"


눈앞에서 헤이즈가 어리둥절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바로 섰다.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나는 참인데 어딜 그렇게 바쁜 걸음으로 가냐고 물어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꾸도 안 하고 지나쳤다.


헤이즈는 내 뒤통수를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방금 내가 생각한 질문을 입 안에 삼키고 있을 테지만.


그걸 신경 쓸 때인가.


폐허가 되었다고 해도 이렇게 넓은 공간을 방방곡곡 쏘다닐 생각은 없었다.


황제의 성향은 첫 만남에 뼈저리게 느낄 정도였으니까.


사람의 머리 꼭대기에 서는 것을 좋아하고.


절대 외진 곳에 홀로 있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한 곳밖에 없다.


나는 아카데미의 귀빈실 문을 벌컥 열었다.


본래 아카데미를 후원하는 고위 관계자들이 머무는 장소.


아카데미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온갖 최정상급 훈장과 상패가 유리장에 전시되어 있고.


안락한 소파와 최고급 다과와 차를 언제든지,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티세트까지.


아카데미의 자랑이었던 검을 들고 있는 초대 용사 석상이 장식된 거대한 분수와 주변의 조경용 호수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게 제작된 창가에.


하물며 후원자들이 캐스팅해갈 인재들의 목록과 현재 수준을 기록한 리스트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다용도실.


그러나 아이리스의 마법으로 인해 천장의 반이 날아가 구멍이 뚫렸고.


용암의 열기가 깨진 유리장 안의 상징들을 녹여 없앴다.


커튼은 찢어졌고 소파 또한 반이 날아가는 등, 멀쩡한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찾던 사람.


그 곳에 내가 알던 희끗한 머리의 노인네는 없었다.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그 날 그 때 봤던 여자의 얼굴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제국의 황족이 입는 고급스러운 소재의 달린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입구 맞은 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안쪽에서 다리를 꼬고 있었고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양말인지 스타킹인지 뭔지도 순백.


"호록."


그녀의 가늘고 긴 손 역시 하얀 장갑이 보호하고 있었고 대신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하물며 그녀의 짙지만 길게 자란 속눈썹, 눈썹.


어깨 아래로 흘러 내리는 머리카락 마저 하양.


오롯이 그녀 홀로 순정임을 과시하듯 방 안에 그녀만이 고고한 흰 빛을 띄고 있었다.


또한 하양은 알칸타라 제국의 상징적인 색이기도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던 황제의 성 또한 하양이었다.


이러한 그녀의 외양은 고고했지만 그렇기에 범접할 수 없는 무형의 아우라가 풍겼다.


하물며 뚫린 벽 안쪽에서 살벌하게 열기를 뿜는 마그마조차 그녀에게 닿을 수 없었다.


하얗기에 폐허가 된 방 안에 그녀 혼자 튀었다.


끝을 모르는 냉철함과 티 없는 오만함, 그러나 높이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미형의 여자는.


"왔구나."


찻잔을 입에서 떼고 사파이어 같이 푸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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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4. 살풍경 23.03.09 22 0 11쪽
43 43. 나름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한 23.03.08 36 0 12쪽
42 42. 1교시 대환장 파티 (2) 23.03.07 29 0 13쪽
41 41. 1교시 대환장 파티 23.03.06 17 0 11쪽
40 40. 기습 23.03.05 20 0 14쪽
39 39. 용암 근처에서 노숙 23.03.04 22 0 13쪽
38 38.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3) 23.03.03 20 0 12쪽
37 37.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23.03.02 28 0 10쪽
36 36. 종 쳐 (2) 23.03.01 34 0 10쪽
35 35. 종 쳐 23.02.28 31 0 10쪽
34 34. 정신교육과정 불나방 23.02.27 18 0 9쪽
33 33. 망나니 테스트 (2) 23.02.26 27 0 10쪽
32 32. 망나니 테스트 23.02.25 20 0 10쪽
31 30. 참교육 23.02.24 20 0 14쪽
30 30. 짹짹 23.02.23 22 0 14쪽
29 29. 할 일 투성이 23.02.22 18 0 16쪽
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0 0 11쪽
25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3 0 11쪽
24 24. 결산 보고 23.02.17 24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4 0 12쪽
22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3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5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3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18 18. 배로 갚는다 23.02.11 25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16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8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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