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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오면 당신은 설 것이다.

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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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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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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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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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DUMMY

"여기는 3지부 1팀, 아카데미로 향하던 마족 무리의 소멸을 확인."


"4년 전에 관측했던 최대 규모 출력의 마법 그 이상의 것이 아카데미에 출현한 것으로 검출되었다."


"2지부와 통째로 연락이 닿지 않는다. 마법에 말려들어 그대로 소멸한 것으로 확인된다."


"지랄하고 있네. 마법이 출현한 곳과 2지부와의 거리가 몇 km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재확인 바란다!"


"다가갈 수 없다. 마법의 출현을 확인한지 몇십 초가 지났지만 여전히 빛무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빛무리에 닿은 일원들은 모두 소멸했다."


"임무는 실패했다. 철수하라. 반복한다. 임무는 실패했다."


"음?"


황제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왕좌에서 목이 잘려 나간 그의 몸에서 무전 비슷한 게 들려왔다.


나는 그의 시체를 뒤져 이상한 기계를 발견했다.


어떤 대장장이가 발명했는지 소량의 마력 응집체가 작은 철쪼가리에 부착되어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작은 구조를 가진 기계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통신을 하는 건가.


얘기를 들어보니까 상당히 저쪽 입장에서 일이 복잡하게 틀어진 것 같은데.


보아하니 그 녀석이 일을 제대로 저질러준 모양이다.


"야. 뭔가 일이 상당히 재밌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음. 그래보이는군. 아무래도 아카데미 측에서 마물을 토벌하는데 성공한 모양이야. 수가 한둘이 아니었을 텐데, 아카데미 측에 그 정도의 마족들을 제거할 인재가 있었단 말인가?"


"있지. 내 동료."


"허어. 이 정도의 마법을 구사하는 동료가 있었다고? 분명히 정보통을 통해서 한 명도 빠짐없이 조사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했나본데 원정대에서 가장 화력이 강한 녀석은 내가 아니야."


"무어라고?"


정정하자면 화력'만' 강한 녀석이 있다.


그녀의 단점이라고 하면 한 번 마법을 쓰기 위해서 상상을 불허하는 마력이 필요하고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


그리고 초고위급 스케일의 마법만 쏴재끼기 때문에 적은 물론 아군에게까지 그 피해가 적지 않게 휘말린다는 점에 있다.


그것 때문에 마법을 쓸 때마다 빈사상태에 빠지질 않나, 물약값이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그래서 정말로 위험할 때가 아니면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쓰라고 얘기를 맞춰놨다.


10년 동안 같이 원정 다니면서 마법을 쓴 게 몇 번이나 될까. 한 서너 번?


회귀를 몇 번 반복한 시점에서 그녀가 나서는 경우가 적어진 만큼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 탓에 아마 제대로 나설 차례가 없었으니 그만큼 황제가 습득할 수 있는 정보도 적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마법을 구사한 만큼 걱정되는 것도 없지 않아 있다.


마법을 과하게 쓰다가 아카데미 째로 날려먹지 않았을까 하고.


음, 아즈엘카도 있고 뭣하면 그 녀석들도 같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괜찮겠지.


"재미있군. 네 원정대에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재미있는 인재들이 많은 모양이야."


어째 계획이 실패한 입장인데 황제의 머리는 즐거운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건가.


미친 황제의 생각을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


"말했잖아. 네 그 얕은 수는 안 통할 거라고."


"그런 모양이야. 역시 세상에는 아직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


"그리고 너는 여기서 죽고."


서걱


나는 아카시를 빼들어 그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죽는다고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차피 놈의 본체는 따로 있지만.


그런데 반을 갈라버린 와중에도 녀석의 입이 뻐끔거렸다.


"조만간, 찾아, 가지."


"그러면 찾아 오자마자 베어버리겠어. 얼마 안 남은 목숨 부지하려면 구석에 처박혀 있지?"


"쿡, 쿡, 쿡. 목숨, 따위, 내게는 하찮은, 것인데."


"좋아. 주소 말해라. 당장 네 대가리부터 깨주러 갈 테니까."


"쿡, 쿡, 쿡."


황제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다가 드디어 골로 가버렸다.


녀석의 호흡이 끊기자마자 얼굴과 몸이 회색 재가 되어 하늘에 흩뿌려졌다.


황제가 말했다. 그 쪽에서 찾아오겠노라고.


내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 줄 알고.


"음."


적어도 주변을 둘러보면 이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베어버린 S급 모험가 수십 명과 각 왕국의 국왕들의 시체가 방 하나에 나뒹굴고 있었으니까.


방 안이 온통 피바다였다.


"이거, 이제 용사로 활동하기에는 이미 글렀다, 그치?"


"네. 그런 것 같네요."


수배령이 안 떨어지는 곳 찾기 더 어렵겠네.


은퇴하고 홍보대사 역할 하면서 편하게 먹고 살아볼려고 명예를 중요하게 여겼던 건데 이제 와서는 왜 그랬나 싶다.


여명 묵시록이 노리고 있는 게 여기 모여 있는 주요 인사들인 줄 알았는데 일이 끝나고 나니 내가 왕들을 전부 베어버렸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여명 묵시록이 의도한 대로 움직인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찜찜해졌다.


내가 왕국들을 초토화시킨 꼴이잖아.


대부분의 왕국들의 왕족에게 있어서 나는 원수가 되었고 이 광경이 들키는 즉시 척살하라고 수배령을 내리고 군대를 징집할 것이다.


이제 어린 내 모습도 기사단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목격했으니 지금 모습도 몽타주로 그려질 게 뻔하다.


그렇게 되면, 내가 머무를 곳은 어디에서 없어지는 게 된다.


이제 정말로 동료들과도 안녕이야.


범죄자 신세로 떨어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나는 자리에 혼자 남은 국왕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아무래도 이제 내 이름으로 벌어먹고 살기에는 그른 것 같은데."


농담 삼아 말한 건데 왜 저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거지.


나를 죽이려고 작당모의질 한 녀석들과 같은 공간에서 동조하고 있었던 주제에.


"알아. 아저씨가 그 동안 나 지켜줬던 거."


나는 알고 있었다.


애초에 내가 용사가 되기로 했을 때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해줬던 게 빡빡이 아저씨였으니까.


나를 용사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그 때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죄없는 아저씨일 뿐이다.


금전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어도 뒤로는 나를 챙겨주려고 했던 걸 아니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함께 베지 않았다.


그 전에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그럼 가볼까."


나는 아카시를 검집에 집어넣고 문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디 가시는 거예요?"


"해야할 일이 남았거든. 여명 묵시록은 아직 쌩쌩하지, 마족의 피로 세상은 파국 직전이지. 하다 못해 마족으로 변한 사람들을 편하게 보내줘야 하지 않겠어?"


"한두 명이 아닐 거예요. 대륙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마족이 되었을 수도 있어요. 마족이 된 사람들 중에는 이 정도 되는 강자들도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그래도 해야지."


그러라고 용사가 있는 건데.


아무렴 마왕도 혼자서 잡았는데 대륙 절반 넘는 사람들쯤이야 난이도가 낮은 편 아닌가.


"그러면 저도 같이 가요. 저라면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 너는 아카데미로 돌아가."


"네?"


"네가 말했던 대로 나는 이제부터 대륙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러 가는 거야. 대부분의 국왕을 죽인 범죄자 신세로 말이야. 너까지 같은 신세가 되지는 말아야지."


그리고 또 하나.


마족의 피로 마족이 된 사람들 중에는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는 녀석도 적지 않다.


땅에서 일어나는 시체인 좀비와는 다른 개념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칼을 휘두르다보면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하면서도 살인을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 적도 많다.



적어도 그런 경험을 그녀에게 시킬 수는 없지.



"상관 없어요."



"내가 상관 있어요."



내가 뭣 때문에 회귀하면서까지 너를 살려놨는데.



"저는 상관 없어요!"



아리아는 내 뒤로 서둘러 걸어왔다.



그녀가 내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머리가 내 등에 닿았다. 머리카락이 등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혼자서 가지 마세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질 바에는 저까지 수배자로 만드세요. 저를 두고 떠나지 말아주세요. 다시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 알고 있었구나.



지금 이 모습을 보이는 걸 끝으로 그들에게서 영영 멀리 사라질 거라는 걸.


"마지막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주세요. 설령 마계라고 해도 끝까지 찾아가 벌을 줄 테니까."


"와, 그건 진짜 싫은데."


그 꼴을 또 당하라고?


나는 등을 돌려서 아리아를 내려다봤다.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움츠려든 그녀는 마치 예전의 어렸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마냥 어리고 소심했던 처음의 그 때처럼.


나는 그런 그녀가 너무나도 가련해보였기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환하게 웃어주었다. 안심시키려고.


"그 녀석들한테 설명 잘 부탁한다."


그리고 마법을 썼다.


"전송."


"용사님······!"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내 품에 달려들려고 하던 아리아의 모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내가 순간이동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동료들도 모르고 있었을 거다. 쓴 적이 없으니까.



한 번 가 봤던 장소로 이동시켜주는 편리한 마법, 전송으로 나는 그녀를 아카데미로 텔레포트 시켰다.


아이리스의 마법 때문에 초토화되어 전송이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럴 일은 없었다.


전송은 장소가 변질되면 사용할 수 없으니, 적어도 아카데미가 완전히 박살나지는 않았나 보다.


아마 안전하게 갔겠지.


"그러면 이제 아저씨 차례야."


나는 국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모든 국왕들이 죽은 와중에 국왕 혼자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면 의심 받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나와 일을 계획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내 죄마저 뒤집어 쓸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아저씨는 해명도 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 바보 같지만 착하기는 한 아저씨가 나 때문에 죽게 냅둘 수는 없지.


이 아저씨도 내가 뭘 할지 알고 있는 눈치다.


"용사. 일이 끝나거든 왕국으로 와라. 편하게 은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두도록 하마."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아?"


"그나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는 소리지."


"허이구. 그런 이쁜 말 할 수 있으면서 이쪽 일은 왜 입 앙 다물고 있었대?"


"···미안하다."



"딱히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약소국 아저씨가 뭘 어쩔 수 없었다는 건 누구보다 왕국 시민인 내가 제일 잘 아는데 뭘 이제 와서.


"아재요. 건강하쇼."




"윽."


나는 그의 목을 손날로 쳐서 쓰러뜨렸다.


"아따 거 드럽게 무겁네 진짜. 살 좀 빼지 쫌."


한 번에 정신을 잃은 아저씨의 뒤룩뒤룩한 몸을 부축해서 바닥에 눕히는데 지방 때문에 낑낑거렸다.


맨날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먹어재끼니까 살이 안 쪄?


다음에 그의 주변에 작업질 좀 쳤다.


"이제 여기에 피 좀 뿌리고 하면 완벽한 공작 완성."



이제 이곳에서 볼장은 다 봤다.



쾅!



나는 곧장 문을 박차고 왕궁 밖으로 도주했다.



이윽고 광보를 이용해 하늘 위로 날아올라 대륙을 내려다봤다.



"우와. 생각보다 더 심각한데."



세상이 불에 집어삼켜져 있었다.



마족의 피로 대륙은 혼란이 찾아왔다.



여기를 봐도 마족, 저기를 봐도 마족.



"인간, 죽인다."



온갖 건물에 불이 붙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사람이었던, 가족이었던 마족이 사람을 해치고 있었다.



"살려줘어어어!!!"



"엄마아아아아!!!"



"마족이 쳐들어왔다!"



"경비는 도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용사는?! 용사는 마왕을 쓰러뜨리고 어디 간 거지?!"


"용사님! 제발 살려주세요오!!!"


비명과 절규, 이어지는 사람들의 희망 구걸과 원한 돌리기까지.


"말을 바꿔야겠네."


여명 묵시록의 계획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절반 정도는 달성한 것 같다.


이걸 어디에서부터 해치워야 할지 감이 안 잡힐 지경이야.


여명 묵시록은 저 정도의 마족을 통솔할 수 있는 어떤 기술 같은 게 있다고 황제가 그랬다.


마왕을 통솔했다고 했으니까 마족도 똑같이 통솔할 수 있을 터.


이 정도의 사단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겠지.


"천 리 길도 한 걸음 씩이라고들 하니까."


그 동안 몸이 버티려나 모르겠다.


일단 힐을 받아서 몸은 짱짱하지만 막 소생한 참이라서 몸도 굳었고 체력도 솔직히 만전은 아니었기 때문에.


"마족의 피도 몇 개 챙겼으니까 당분간 졸릴 때 마시면 괜찮겠지."


말하고 나니까 마족의 피가 무슨 자양강장제 쯤 되는 것 같은데.


"여명 묵시록은 그 다음이야."


감히 내가 마왕과 씨름하고 있던 사이에 이딴 일을 계획하고 저질러?


간 부은 놈들 같으니. 다들 편하게 눈 못 감을 줄 알아라.


"그럼 가보실까!"


나는 낙하지점을 라엘라 왕국 근처의 마을로 잡고 곧장 아래로 떨어졌다.


내 왕국 주변부터 정리해야 나중에 아저씨가 뒤탈이 없을 테니까.


빠르게 떨어지고 있는 사이, 내 시야에서 사람들을 죽이기 직전에 팔을 휘두르고 있는 마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죽어라, 인간!"


"흐아아악! 살려줘어!"


쾅!


"케엑?!"


나는 그들 중 하나의 몸에 떨어져 그대로 공중분해 시킨 뒤, 빠르게 아카시를 휘둘러 마족들을 썰어나갔다.


칼부림 하나에 수십, 수백 명의 마족이 반으로 갈려나가서 영문도 모른 채 머리가 하늘로 붕 떴다.


"크륵?! 강하다!"


"잠깐. 마족, 마족의 피가 느껴진다."


"마왕님. 주군의 피가 느껴진다."


"그렇다면 저 분이 마왕님?"


"용사에게 죽은 게 아니었던 건가?"


"오?"


내 기습에 당황하던 마족들이 마족의 피를 마신 나를 보더니 멋대로 마왕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아니면 내 안에 마왕이 깃들어 있는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건가?


일전에 베었던 병사들은 내가 작은 모습이었을 때에는 뭣도 모르고 덤볐는데, 마족의 피를 마시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어느 정도 느껴지기는 하나 보다.


"잠깐만."


나는 베는 것을 멈추고 턱을 쓸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르겠는데?"


마족에게는 간혹 마족을 집단 통솔할 수 있는 집단지성체가 존재한다.


고블린에게는 고블린 로드가 그러한 존재고 고스트에게는 리치가 그러하듯 대개 강한 녀석을 숙주로 삼은 마족의 경우가 집단지성체로 진화하는데.


그 녀석을 이용하면 주변에 있는 마족들을 한 데 끌어모을 수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 강한 마족의 기운이 느껴지는 녀석을 찾았다.


"저깄네."


단걸음에 날아가 녀석의 목을 잡았다.


"켁, 켁. 이 기운은, 용사? 아니, 마, 마왕님? 어떻게?"


녀석도 처음에는 나를 용사로 알더니 잠재하고 있는 마왕의 기운을 느끼고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래도 이게 정답인 듯 했다.


당장 여명 묵시록의 행방을 찾을 여유가 없는 내게 마족들을 한 곳으로 유인할 수 있는 방법.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한 자의 말을 따르고 마족의 왕인 마왕의 말은 절대적일 것이다.


"대륙에 있는 모든 마족들에게 명령해. 당장 침공을 멈추고 데르사바 평야로 집결하라고."


제국과 마계 사이에 있는 커다란 불모지.


거기라면 대부분의 마족들이 한 곳에 모일 정도로 크니, 피해 없이 싸그리 잡아서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 하지만 저희도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터라······."



"마왕의 명령을 듣지 못하겠다는 거냐?"



"바, 받들겠습니다!"


그나마 상위 개체라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모양이다. 어중간한 조무래기들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띄엄띄엄 말하면서 죽인다는 말밖에 못 하더만.


녀석을 포함해 지성체 몇 명에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체력도 회복할 겸 먼저 데르사바 평야 한가운데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바위에 걸터 앉은 채 기다린지 몇 십 분째.


"와아, 마족이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천? 수만? 수십만?


서서히 모이고 있는 마족의 수는 이미 몇 명인지 셀 수가 없었다.


"도대체 저게 몇 명이냐?"


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벴던 마족의 수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바글바글하게 모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땅에서 거대한 진동이 생길 정도의 대이동.


이미 이건 스탬피드라고 불리기에도 무색하지 않은가.


"전부 베려면 팔이랑 허리 다 나가겠네."


마냥 베는 것도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 많은 수들 안에서도 유독 강한 개체들이 몇 명 보였으니까.


마족이 되어 다들 몸집이 헬창들 마냥 한 층 부풀어 오른 것도 모자라 수십 미터 크기의 거인들도 있었다.


아예 사람의 모습을 벗어나서 네 다리로 기어오는 녀석들도 있었고.


"살 수 있겠지?"


너무 큰 걸 바라는 건가?


혼자서 다 처리하지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용사로서 처리한 임무들 중에서도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축에 속하는 거 아닌가.


자칫하다가는 뒤처리를 또 동료들에게 맡겨야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저기 있다."


"사람이잖아."


"하지만 마왕님의 기운이 흐른다."


"다른 마족 아닌가?"


그들 중 일부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내가 마왕을 죽였다는 사실이 마계에서 일파만파 퍼진 모양인데.


그래봤자 여기가 놈들의 장례식장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선빵필승.


"흐읍."


나는 숨을 참고 한껏 허리를 틀어 아카시를 있는 양손으로 잡았다.


웅웅웅


아카시에 불어 넣은 소드 오러가 강렬한 푸른 빛을 내었고.


"차앗!"


나는 기합과 함께 아카시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푸른 빛의 소드 오러가 아카시의 검신에서 방출되어 순식간에 나를 향해 집결하고 있는 마족들 무리의 한가운데를 갈랐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소드 오러의 범위 바깥에 있던 마족들을 제외한 마족들이 반으로 갈리며 그대로 선 채 죽었다.


소드 오러는 그러고도 한참을 끄트머리까지 날아가 저 끝에 있는 마족들까지 쓸어넘기고 사라졌다.


바다를 가르는 듯한 시원한 모양새였지만 이내 그 자리를 다른 마족들이 시체들을 밟으며 빠르게 메꿨다.


분명 방금 공격으로 수천에서 만 가까이 죽였을 건데.


"와. 진짜 더럽게 바글거리네."


도무지 끝이 안 보인다.


마족들은 이제 막 모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캬악?! 마왕님이 동족을 죽인다!"


"저 자는 마왕님이 아니다! 우리를 속였구나!"


"저 자를 죽여라!"


갑작스러운 공격에 나를 의심하던 마족들이 경계 태세를 갖추고 달려들었다. 방금까지 집결하던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놈들이 나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적의를 가진 마족과 그렇지 않은 마족은 움직임부터 격이 달랐다.


"용사님 등장이시다, 고개를 조아려라 마족 새끼들아!"


나는 그들의 한가운데에 뛰어들고는.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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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44. 살풍경 23.03.09 22 0 11쪽
43 43. 나름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한 23.03.08 35 0 12쪽
42 42. 1교시 대환장 파티 (2) 23.03.07 29 0 13쪽
41 41. 1교시 대환장 파티 23.03.06 17 0 11쪽
40 40. 기습 23.03.05 19 0 14쪽
39 39. 용암 근처에서 노숙 23.03.04 22 0 13쪽
38 38.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3) 23.03.03 20 0 12쪽
37 37.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23.03.02 28 0 10쪽
36 36. 종 쳐 (2) 23.03.01 34 0 10쪽
35 35. 종 쳐 23.02.28 31 0 10쪽
34 34. 정신교육과정 불나방 23.02.27 18 0 9쪽
33 33. 망나니 테스트 (2) 23.02.26 27 0 10쪽
32 32. 망나니 테스트 23.02.25 20 0 10쪽
31 30. 참교육 23.02.24 20 0 14쪽
30 30. 짹짹 23.02.23 22 0 14쪽
29 29. 할 일 투성이 23.02.22 18 0 16쪽
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26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0 0 11쪽
25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3 0 11쪽
24 24. 결산 보고 23.02.17 24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4 0 12쪽
»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3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5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3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18 18. 배로 갚는다 23.02.11 24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16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8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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