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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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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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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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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DUMMY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여기에서 신세를 질 수만은 없었다.


편안히 몸을 침대에 뉘이고는 있다만 어디까지나 나는 황제를 비롯한 대륙의 수뇌부 대부분을 참수한 최악의 범죄자라는 시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3주가 지났다면 이미 내 수배지가 대륙 전역에 퍼진지 오래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죽이기 위해 눈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누가 억지로 기억의 중간을 가위질한 것처럼.

뭔가를 잊은 게 분명한데, 거슬리는 것처럼 뒤통수 언저리가 간질간질하다.


어쨌든.


지금은 안전한 것 같지만 언제 들킬지 모르는 일이다.


만약 아르토리아 아카데미 측이 나를 치료해주고 숨긴 것을 들키게 되면 그 때는 이들 또한 수배 명단에 포함될 터.


이들은 어떻게든 나를 이곳에 두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는 대로 떠나야 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먹고 자는 것만 반복했다.


눈을 감고 뜨는 사이, 전 원정대 동료들이 병문안을 왔다.


"용사님! 괜찮아요?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저지르신 거예요? 용사님이 안 계신 틈에 아카데미가 난리도 아니었다구요!"


눈을 한 번 뜨니 헤이즈가 과일을 깎고 있었다.


“분명히 용사님이 관련 있는 일이겠죠. 또 그렇게 무리하시곤······.”


나를 걱정하기도 하다가 핀잔 한 스푼 얹더니 이내 어쨌든 다행이라는 듯이 웃어보였다.


그 동안 아이리스가 나를 찾아왔다는 이야기, 진짜 나를 힐로 밟아서 죽이려는 것을 말렸다는 이야기 등, 내가 정신을 잃을 사이 수많은 시련들이 있었다는 걸 들었다.


그래도 얘기하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는 걸 보니 안도했다.

잘 지냈구나.


아니, 어쩌면 나를 위해서 일부러 웃어주는 건지.


다시 한 번 눈을 뜨니 가늘고 긴 여자의 손이 내 손을 기도하듯이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 바라보려 했더니 얼굴보다 수녀복의 후드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잠결에 손을 움찔거렸더니 아리아가 고개를 들어 내쪽을 바라봤다.

괴로운 것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 그녀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용사님······."


그녀는 내 손을 꼭 붙잡고 그 위에 자기 이마를 댔다.


떨리는 손 사이로 그녀의 눈물이 뜨겁게 전해졌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용사님을 구하지 못했어요. 저는 용사님에게 있어서 필요없는 사람이에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때 아닌 고해성사에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제 몫을 다해줬다. 자기 목숨의 상당수를 할애해 나를 소생해줬지 않았던가.


마지막에 만났을 때 강제로 작별을 시킨 게 나였다,

그럼에도 없는 죄를 만들어 용서를 구하고 눈물을 짓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텁텁한 것처럼 막혔다.


단어 선택을 어떻게 해줘야 최대한 그녀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무사해서 다행이다."


해줄 수 있는 게 쓰다듬는 것밖에 없는 내 자신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졌다.


"용사님······."


아리아는 그 자그마한 내 손에 의존했다. 양팔을 들어 내 품 안에 파고들었기에 가만히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냥, 말할 길 없이 씁쓸하구나.


내가 정신을 차린 이후로는 아이리스가 나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들어보니 초고위 마법을 사용한 까닭에 초췌한 상황에서도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마나 고갈 증상 때문에 다시 겨울잠 자듯이 자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태에 빠진 나를 매일 같이 죽이려고 들락거린 거면 얼마나 나를 죽이고 싶은 거야.

다 나으면 도망부터 쳐야지.


"옛날에는 저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지금의 아이리스와 그 때의 아이리스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였다.


그리고 이번 일에 숨은 공신 한 명.


아이리스의 15서클 초고위 마법으로부터 아카데미를 지킨 장본인인 내 전 원정대 동료.


그녀가 전위에 서서 마법을 막아세우지 않았더라면 아카데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거라는 게 사람들의 중론이었다.


그래서 그 동료는 병문안을 안 오고 어디에 있나 했더니.


"읍! 읍!"


바로 내 옆 침대에 있었다.


그것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붕대에 꽁꽁 묶인 채로.


15서클 마법과 맞붙은 탓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이렇게 조치했다고.


아카데미 강사로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재회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너도 참 대단하긴 하다. 정면에서 15서클 마법을 맞고 살 정도면 얼마나 몸이 튼튼한 거야."


"읍! 읍! 으읍! 으읍!"


"그 꼴이 됐는데 팔팔하구나."


"으읍!"


읍읍 거려서 뭐라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팔딱거리는 걸 보면 건강하긴 한가 보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머지 동료들은 인근 국가에 구조 작업을 하러 갔다고 들었다.


그래서 병문안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떠나기 전까지 얼굴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흠. 이제 혈색에서 마족의 피를 쓴 흔적이 지워졌군요. 이제부터는 성마법을 받아내도 인체에 해는 없을 겁니다."


의사에게서 성마법을 맞아도 해가 없을 거라는 진단이 떨어졌다.


처음 다쳐서 왔을 때에는 마족의 피처럼 검었고 마찬가지로 닿으면 마족으로도 변할 수 있는 유해물질 취급을 받았다.


원래라면 희석되기는커녕 마족으로 변하지 않은 게 신기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다시 붉은 피가 돌기 시작한 것도 기적이라는 소견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피 때문에 마족이 될 뻔했는데도 의사로서의 의무를 우선시하고 수술을 감행한 걸 보면 정의감 있는 의사란 말이야.


감사의 한 마디라도 건네려 했지만 의사는 쿨하게 등 돌려서 자기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부르기도 뭐해서 문 닫히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이후 회복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리아에게 힐 받으면 몸은 완전히 회복되니까.


"괜찮을까요? 또 상처가 벌어지는 건 아닐지······."


아리아는 나를 치료했을 때 역효과가 났던 게 오죽 충격적이었는지 처음에는 엄청 망설였지만 내 무리한 부탁을 받아 결국 치료해주었다.


그리고 완전히 낫는 내 모습을 보고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다. 다시 용사님을 치료할 수 있게 돼서······."


이번 일에 그녀를 여러 번 울렸다. 이렇게 울음이 많은 여자였나 싶었을 정도로.


"이제 다시 용사님을 방에 가둬서 고문할 수 있게 됐어. 영원히."


흠칫.


나는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서둘러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


"와. 직접 보니까 살벌하네."


외벽의 난간 위에서 올려다보니 가관이었다.


그 거대하던 성채가 산산히도 박살이 났고 용암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며 살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마계촌이 아니면 뭘까.


하물며 그 많던 학생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남은 학생들과 강사들은 잔해를 치우면서 정리를 도왔다.


"지금쯤 한창 현장 수업을 받아야 할 시기인데, 안타까울 따름이죠."


뒤에서 아즈엘카가 걸어오며 말을 받았다.


"어때? 계속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아?"


"참혹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입니다. 건물에서 제대로 운용되는 시설은 손에 꼽지, 인근 왕국들은 초토화됐지, 학생들은 지레 겁 먹고 도망갔지, 강사들도 상황은 다르지 않고 지금 아카데미에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 있는 사람들뿐이에요. 여기 말고 달리 갈 데도 없는 사람들."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가 졸지에 다 무너진 보호소 다 됐네."


"그나마 제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보수 작업의 진전은 훨씬 더뎠을 겁니다."


"그렇구나."


다른 곳은 다 손절을 쳤는데 제국이 나서서 보수 작업을 거들어줬단 말이지.


수배자 신분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보수 작업을 거들어줬을 텐데 아쉽게 됐다.


"응?"


아니, 잠깐.


지금 뭐라고?


"어디? 제국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제국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이곳에 마족 군단을 보낸 게 제국인데 그 쪽에서 이곳에 조력을 해줄 리가 없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제국은 지금 남을 도와줄 여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제국의 황제를 내가 베었으니까.



시신을 수습하고 체계를 바로 잡는데 진력을 다해야 할 시기이고 3주가 지났다고 한들 이렇게 빠르게 움직임을 보일 수가 없었다.



"알칸타라 제국에서 지원을 해주었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아즈엘카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것도 뭐 이상한 게 있냐는 듯 의문을 표하는 동그란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모르고 있는 것인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말이 안 되지. 이 상황은 말이 안 되지."


"도대체 방금 전부터 혼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말이 안 된다니, 이해가 되게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이야말로 왜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네?"


그녀의 고운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또 이 느낌이었다.


이야기가 전혀 맞물리지 않고 겉도는 느낌.


"제국이 왜 여기를 도와. 내가 수배를 당했는데."


"용사가 수배를 당해요? 혹시 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제국의 귀족 중에서 여명 묵시록의 배후가 있었다거나?"


"그럼 내가 그 동안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명 묵시록의 배후를 파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까. 근처의 바로나 왕국에서 마족의 피 제조 공장을 제거했다는 소식은 들렸습니다."


이 무슨 벽과 대화하는 듯한 답답한 심정일까.


마치 3주 전에 처음 만난 교장과 대화를 하는 것만 같았다.


공장을 박살낸 것은 내가 본격적으로 임무를 하러 나선 극초반의 이야기였다.


교장은 내가 제국에 간 것도,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아니, 아예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멋대로 흐르던 3주라는 시간에 멈추지 않고 있던 건 나 혼자였나?


왜 정신을 잃었던 건 나인데 3주 전에 있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역할도 내가 맡아야 하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제국에서 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래!"


나는 이제야 이야기가 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감탄한 나머지 박수까지 쳤다.


답답한 게 한 번에 뻥 뚫리는 느낌이 들어 감격한 표정으로 아즈엘카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그 뒤에 그녀가 내뱉는 말이.


"축제의 내빈객으로 왔던 국왕들이 담합을 해서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었죠. S급 모험가들을 대동해 회담 도중에 황제에게 칼을 휘둘렀다더군요. 기사단장의 희생으로 황제는 죽음을 면했다고 하더랍니다."


"······."



"이후 문 안으로 들어온 엘리시움 기사단과 전투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국왕들과 S급 모험가들 대부분이 사망했다지요."



"······."



"황제는 진노했고 모든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모든 병력을 대동해 인근 국가를 점령했고 수장을 잃은 국가들은 패닉 상태에서 초토화, 항복 선언을 하고 영토의 절반씩을 알칸타라 제국에게 넘겼죠. 이제 대륙의 땅의 3/4는 알칸타라 제국의 수중에 들어간 셈입니다."



"······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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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5. 내기 23.03.10 19 0 12쪽
44 44. 살풍경 23.03.09 22 0 11쪽
43 43. 나름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한 23.03.08 36 0 12쪽
42 42. 1교시 대환장 파티 (2) 23.03.07 31 0 13쪽
41 41. 1교시 대환장 파티 23.03.06 17 0 11쪽
40 40. 기습 23.03.05 20 0 14쪽
39 39. 용암 근처에서 노숙 23.03.04 22 0 13쪽
38 38.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3) 23.03.03 21 0 12쪽
37 37.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23.03.02 28 0 10쪽
36 36. 종 쳐 (2) 23.03.01 34 0 10쪽
35 35. 종 쳐 23.02.28 31 0 10쪽
34 34. 정신교육과정 불나방 23.02.27 19 0 9쪽
33 33. 망나니 테스트 (2) 23.02.26 27 0 10쪽
32 32. 망나니 테스트 23.02.25 20 0 10쪽
31 30. 참교육 23.02.24 20 0 14쪽
30 30. 짹짹 23.02.23 23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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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26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1 0 11쪽
»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4 0 11쪽
24 24. 결산 보고 23.02.17 25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5 0 12쪽
22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4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6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4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18 18. 배로 갚는다 23.02.11 25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16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9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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