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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오면 당신은 설 것이다.

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조회수 :
1,645
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작성
23.02.0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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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6. 뒤통수 얼얼하네

DUMMY

수도 알렉시스에 위치한 네르카잔 성은 사람이 건설한 건물 중에서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알칸타라의 황제가 천문학적인 거금을 들여 무려 수 만 명의 용역자들을 동원해 건설했다고 한다. 제국이라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와서 올려다 보니까 끝이 안 보인다. 건물의 끄트머리가 구름에 끼어 있는데 이걸 도대체 어떻게 지었는지 감도 안 잡힌다.


저기 위에 사는 사람은 있는 걸까.


"근데 저기 위는 어떻게 청소하냐."


"마법으로 청소하지 않겠어?"


"궁정 마법사들이 청소하는 걸까요. 저 정도 높이까지 밀대 같은 걸 들어올리려면 마력이 상당히 소모될텐데."


시덥잖은 소리를 하면서 성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경비대원들 앞에 섰다.


"충! 성!"


그러니까 그들이 갤러거의 얼굴 한 번 슥 보더니 바짝 몸에 힘을 주고는 경례를 취하더라.


나와 아리아 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갤러거가 옆에 있으니 용무를 묻지도 않는다.


엘리시움 기사단장은 제국 황제에게 무제한 신뢰를 받고 있으니 누구를 데리고 오든 프리패스라는 뜻이다.


"요올, 클라스~"


"그만 치켜 세워. 어깨 뽕 안 빠진다."


쑥쓰러워 하는 건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실실 웃는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건 또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내부구조를 자랑하고 있었다.


좌우로 끝없이 뻗어나간 기둥과 드래곤의 석상. 정가운데에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붉은 색 융단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노라면 양쪽 외벽에 저절로 시선이 간다.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유리조각들을 덧대어 만든 것 같은 특이한 양식의 그림이 바깥의 햇빛을 받아 실내 바닥에 무지개 그림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진짜 기깔나네."


"그렇지? 나도 가끔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도대체 건물 하나에 얼마를 바른 거야. 저 유리조각들 하나만 떼어도 국민 한 명이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값어치를 가졌다.


우리 왕국에서는 어림도 없는 스케일인데, 이참에 일 끝나면 제국으로 망명이나 해볼까?


"그런데 용사."


정신을 다른 데 놓고 막연히 따라 걷고 있으려니 갤러거가 말을 걸어왔다.


"엉?"


"황제 폐하께 가서 직접 보고할 만한 일이라는 게 뭐야? 네가 직접 올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일일 텐데."


아직 갤러거에게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고 직접 황제 폐하께 드릴 얘기가 있다고 언질만 둔 상태였다.


지금은 모든 왕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륙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다고 들었기에 기왕 가서 직접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갤러거는 황제의 측근 중 한 명이니까 어차피 알게 될 거라 먼저 얘기해줘도 상관없나?


엘리시움 기사단의 조력을 받게 되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아. 지금 제국에 쥐새끼들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쥐새끼? 적이라는 뜻이야?"


"적이지. 그것도 축제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틈에 사람들을 마족의 피로 물들여서 제국뿐만 아니라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려는 괘씸한 놈들."


"뭐라고? 마족의 피를? 그게 정말이야?"


"어. 그냥 애들 장난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심인 모양이야. 마족의 피 제조 공장에 백작 이상의 귀족들까지 가담하고 있더라고. 어쩌면 왕들 사이에서도 가담하고 있는 사람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황제 폐하도 위험하실지도 몰라. 서두르는 게 좋겠어."


갤러거는 내 말을 듣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나와 아리아도 그의 발걸음에 맞춰 템포를 올렸다.


그런데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이놈의 복도는 끝이 안 보이네. 급똥 올라올 때 화장실까지 어떻게 간다냐?


한참을 걸어서 계단을 올라간 뒤에야 알현실 앞에 다다랐다.


과연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황제의 문은 그 크기만으로 어지간한 성문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고 견고해 보였다.


문앞에는 경비대가 아니라 기사단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도 한가닥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왕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라서 그런가 기세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그들 마저도 갤러거가 앞에 서자 몸에 힘을 준다.


"충! 성!"


"황제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나?"


"예. 지금 각 국의 왕들과 회담을 하고 계십니다."


"문을 열어라. 황제 폐하를 뵈어야 겠다."


"황제 폐하께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라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시가 급한 안건이다. 황제 폐하께서 위험에 처하신 상태일 수도 있어."


"예?"


기사단은 투구에 가려진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는 그를 보고 상황이 묘하게 흘러가는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함께 오신 두 분은 누구십니까?"


"용사와 그의 동료인 아리아다."


"예? 용사요? 이 수녀 분이 용사?"


"얘 말고 나 말이야, 나."


이것들이 이름 다 들어놓고 굳이 아리아를 용사로 지목해? 아리아. 딱 들어봐도 여자 이름이잖아.


나한테는 이 국보검 아카시가 있는데 누가 봐도 용사라고 광고하는 거 아니냐?


"이런 꼬마가?"


"베어버린다, 새끼야."


아무리 그래도 마왕을 잡은 용사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표정. 못마땅해하는 표정. 안 푸냐?


그들은 내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과 마주하고도 영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길을 텄다.


갤러거는 문앞에 서 양 손을 문 양쪽에 각각 대고.


"흡!"


그대로 있는 힘껏 밀어 젖힌다.


구우우웅.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던 거대한 문이 미는 힘을 받아 무거운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벌어진다.


"이야. 힘 엄청 센데?"


옛날에 날고 기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은 티가 난다.


지금의 나는 저 문을 저렇게 쉽게 열 수 있을까?


음. 이 어린 몸뚱이로?


입구가 열리자 내부의 근엄한 분위기가 매서운 바람과 함께 밖으로 방출되는 느낌이 들었다.


양쪽에 각국의 왕들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옆을 각 국의 호위 기사와 일부 병력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었고 그들 중 다수가 나와 면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륙에서 손에 꼽는 S급의 모험가들이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있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인데.


마법사, 궁수 등 직업도 다양하고 모두 그 쪽 계열의 정점에 선 사람들이었다.


회담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각 국 국왕들의 보이지 않는 알력 싸움이 있었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겠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하고 막히는 공기야.


그리고 가장 멀찍이서 입구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거대한 의자.


금색 테두리에 제국의 문양이 등받이 양 끄트머리에 걸쳐 용솟음하고 있는 디자인은 보기만 해도 절로 고개를 숙일 정도의 기품과 위엄이 느껴졌다.


어지간한 명망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앉는 것은 엄벌에 처한다.


하늘을 칭하는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하늘을 계승 받은 한 사람뿐이니까.


그래.


지금 앉아 있는 노인.


비록 머리가 희끗한 노쇠한 몸이라 할지라도 내려다보는 시선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용사인 나조차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 같은 게 느껴진다.


어디 감히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느냐고, 뒷목에 천 근이 넘는 무게추가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국왕들조차 그의 발언이 있기 전까지 말 한 마디 꺼내지 못하고 시선조차 아래로 내리고 있다.


지금 이 엄숙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저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네란 말이다.


이 노인이 바로 하늘의 의자에 앉은 알칸타라의 황제, 알렉시스 오르제게 알칸타라.


나도 얼굴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엘리시움 기사단장 갤러거가 무례를 무릅쓰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갤러거는 그의 앞까지 깔린 레드카펫 위를 몇 걸음 걸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렇게 보니까 모험가를 했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네.


"무슨 일이지, 갤러거?"


노인이 입을 열었다.


벌어진 입에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건조하지만 중후한 목소리가 담담하게 흘러나왔다.


그의 명으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명을 무시하고 들어온 갤러거의 행동은 분명히 황명을 어겼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갤러거가 황명을 어길 정도로 알현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보고 드릴 것이 있어서 무례를 무릅쓰는 점을 용서해주십시오."


"보고라. 무엇인고?"


"그것이······."



갤러거는 목소리를 내다가 말꼬리를 들이더니 국왕들을 둘러보고 나를 한 번 되돌아본다.



아까 내가 국왕들 사이에도 스파이가 있다는 말을 염두하는 건가.



"다시 한 번 무례를 무릅쓰고 요청하겠사온데, 황제 폐하님께 걸음하는 것을 허락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허락하노라."



"황송하옵니다."



격식차리는 거 봐라. 대사 하나하나가 딱딱해서 숨이 턱턱 막히네.



갤러거는 황제의 바로 앞까지 걸어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엘리시움 기사단장은 고개를 들고 용건을 말하라."



"예."



갤러거는 고개를 들고 황제에게 보고를 올렸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리지만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지 않을까.



얘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본다. 나와 아리아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는 거겠지.



"요, 용사?"



응?



누가 나를 불렀다.



가만히 서서 황제와 갤러거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보고 있었는데 부름에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에는.


"빡빡이?"


익숙한 체형의 국왕이 눈에 들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호랑말코문어빡빡이 국왕이잖아.


나를 아카데미에 보내놓고 자기는 말도 안 하고 이런 으리으리한 곳에서 중요인사 마냥 회담 자리에 참석했다 이거지?


하긴 내 이름값으로 다른 나라에 돈 빨아먹는 양반인데 아무렴.


근데 어째 나를 보고 반갑다는 얼굴을 하기는커녕 당황한 것처럼 얼굴이 새파래진다. 덜 맞았나?


"요."


나는 그에게 가만히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랬더니 빡빡이가 들릴 둥 말 둥 뭐라뭐라 한다.


"숙여!"


"뭐라고?"


"몸 숙이라고! 황제 폐하께 예의를 갖추라고!"


아, 내가 무릎도 안 꿇고 가만히 서 있으니까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혹시라도 내가 황제에게 밉보이면 조력 받는 지원금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저 새끼라면 그럴 만도 해.


나는 그런 그에게 가만히.


"빠큐."


가운데 손가락을 펴 보였다.


평민 용사는 예의 따위 몰라용.


"저, 저, 저 싸가지."


빡구는 눈에서 치우고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가만히 갤러거의 얘기를 듣던 황제의 표정이 무언가 생각을 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후, 관자놀이를 손에 기대고 있던 황제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용사여. 가까이 오겠나?"


"용사?"


"용사라고?"


황제의 목소리에 모든 왕과 호위들이 나를 바라본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시선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당황, 의문, 부정.


이런 어린이가 용사라고 불리는 것에 적잖은 거부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혹은 이질감이나.


심지어 나와 면식이 있던 녀석들도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면 나라고 해도 지금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의식을 안 할 수가 있나.


그 와중에 황제의 부름에 나는 기꺼이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황제 씩이나 되는 사람이 내게 의사를 강요하지 않고 물어봐주니 안 가는 게 이상해 보여서.


가까이서 보니 위압감이 엄청난다.


그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황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간 부은 놈들밖에 없을 거다.


어디 보자. 이렇게 무릎을 꿇으면 되나?


옆에 갤러거를 따라서 엉성하지만 나름 격식을 차려 자세를 갖춘 후.


"용사. 황제 폐하를 뵙사옵니다."


이렇게 존대를 하여 인사를 올렸다. 뭐 내뱉은 말 중에 이상한 건 없었겠지?


"그래. 나 또한 용사와 사담을 나누고는 싶다만 시급한 사안을 가져온 모양이니 차일로 미루도록 하지. 누군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지?"


"예. 여명 묵시록이라는 악의 집단이 마족의 피를 이용해 사람을 마족으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계획은 오늘 실행이 되며 그 장소로 추정되는 곳은 이곳 알칸타라 제국입니다."


"뭐라고?! 마, 마족의 피?!"


"그런 말도 안 되는! 마족의 피를 취급하는 것은 금기 중에서도 금기거늘!"


"흠."


마족의 피가 유포된다는 말에 국왕들이 적잖이 당황하며 말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 황제만이 신음을 냈다. 더 얘기해보라는 뜻으로 알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흉계를 꾸미는 집단의 일원 중에는 왕 또한 가담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저런 무엄한!"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뚫린 입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용사라고 해서 입을 가볍게 놀리지 말라!"


그러니까 확정이 아니라 생각이라고, 생각.


하나같이 벌떡 일어나서 얼굴 붉히면서 노발대발하는 거 봐. 찔리는 것도 아니고 행여나 황제의 의심을 살까봐 나를 찢어 죽이려 하고 있네.


"호오."


내 발언을 들은 황제의 표정에 호기심이 드러났다. 내가 하는 말에 신빙성을 느끼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 생각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 걸까.


높은 사람 생각은 표정만 보고는 알 수가 없다.


"지금 그 말을 밑받침할 증거는 있는가?"


"예."


나는 간단하게 답하고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파피루스 여러 장과 마족의 피가 든 악세서리를 갤러거에게 내밀었다.


외부인인 내가 전해주는 것보다 최측근인 그가 직접 전달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갤러거는 나와 내 손에 들린 것들을 번갈아 보다가 마족의 피를 보고 흠칫 놀랐다.


이 녀석은 모험가였으니까 내가 들고 있는 마족의 피가 진짜라는 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갤러거가 자리에 일어서 황제에게 대신 전달했다.


"호오. 이건 정말로 마족의 피로구나."


황제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마족의 피가 든 악세서리를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 보고는 파피루스를 펼쳐 그간 정리해놓은 사안들과 여명 묵시록의 인감이 찍힌 파피루스를 읽어나갔다.


"그렇군. 아무래도 장난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간계가 있는 듯 하이."


황제는 파피루스를 말며 내 기대에 부응하는 말을 했다. 이 정도면 그에게 경각심을 불어넣는데 충분할 것이다.


이제 황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사건을 해결해볼까?


"헌데 용사여.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노라. 아무래도 이 내용을 봐서는 오늘 어디에서 마족의 피가 퍼지는지 알 수가 없거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 대답을 들어볼 수 있을까?"


"여명 측 심복의 입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오늘, 대륙 전체에 피바다가 불 것이라고 했죠. 그리고 알칸타라 제국에서는 마왕을 토벌한 기념을 하기 위해 축제를 개최했고 각 왕국의 국왕님들과 주요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족의 피를 이곳 중심지에 흩뿌리면 제국을 비롯해 대륙의 모든 왕국이 제 기능을 잃고 초토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군. 우연 치고는 시기가 너무 절묘해."


역시 황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추측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여명 묵시록의 일원 안에 국왕이 소속되어 있다면 각국의 주요인사들이 모인 이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마족의 피를 심어 확산시킬 수도 있다고 말이야."


황제의 혜안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그렇게도 생각하는 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처음에 배제해둔 생각이기도 했다.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마족의 피가 턱없이 부족할 겁니다."


"밑받침 할 증거는 있는고?"


"증거 말씀이십니까?"


방금 보여준 마족의 피랑 주모자 리스트가 적혀 있는 파피루스만으로는 증거가 안 된다고 말하는 건가?


그거 말고 증거가 있을 턱이 있나. 공장 몇 개 부수고 남작 처단하다가 오늘 일 터진다기에 곧장 이곳까지 날아왔는데.


아니 애초에 대륙 전체에 마족의 피를 터뜨릴 정도의 양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그 동안 쓸어버린 마족이 얼만데.


하지만 내게는 아직 또 하나 이유가 남아 있다.


"설령 국왕님들 중에 누군가 여명 묵시록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도 백성들을 마족의 피로 물들일 생각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있기에 국왕이 존재하는 법.


국민이 없는 땅에 사는 사람을 국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관만 머리에 얹은 일반 시민일 뿐이지.


하지만 이번에도 황제의 대답은 같았다.


"그러하다 밑받침 할 증거는?"


"증거 말씀이십니까?"


물론 없었다.


"용사는 국왕이었던 적이 있는가?"


물론 없지.


"없습니다."


"결국 이것 또한 추측일 뿐인가."


뭐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 된 거지?


어째서 황제는 나를 훈계하는 듯한 스탠스를 취하는 거지?


왜 납득할 만한 증거를 가져왔는데 눈을 돌리는 듯한 모양새인 거야?


갑자기 잘 풀릴 것만 같던 모든 일이 비웃는 듯이 복잡하게 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아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추측. 추측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추측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짓밟으며 이 자리에 올랐다오. 아, 저 사람은 내 편일 수 있겠군. 아, 저 사람은 내 적이 될 수도 있겠군. 저 사람이 아바마마께 나를 칭찬했다지? 혹은 나를 흉봤다지? 다양한 추측으로 적과 아군을 고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잘못된 추측으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걸 흉계라고 한다. 얄팍한 이해를 가지고 일을 치르면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한 살인자로 만들 수도 있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치 내가 지금까지 보고한 말들을 다 흉계라고 꼬집는 것 같은 느낌이다.


황제는 마족의 피와 파피루스를 한 손으로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가령 이런 걸세. 만약 용사가 내게 피와 주모자 리스트를 전달한 것을 제삼자가 보면 어떤 추측을 할까? 아, 용사가 황제에게 마족의 피를 건네는 구나. 애초에 용사는 마족의 피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을까? 여명 묵시록이라는 집단은 애초에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이것 또한 용사의 추측이 아닐까? 그러면 다시 돌아와서, 이 마족의 피를 용사는 왜 소유하고 있는 거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금기일텐데. 용사는 금기를 저질렀구나. 금기를 저지른 용사가 왜 마족의 피를 황제에게 건네는 걸까? 아, 용사가 황제를 마족으로 만들려고 하는 구나. 용사가 황제를 시해하려 하는구나."


이런 씨발.


뭐가 잘못 돼도 단단히 잘못 됐다.


나는 어떻게든 잘못을 바로 잡으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아니, 일어나려 했다.


푹.


"커헉······!"



"용사니이이임!!!"


뭐지?


지금 뭐가 벌어진 거지?


나는 갑자기 타오를 것 같은 고통이 휩싸여오는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 곳에는.


등을 관통한 칼이 내 내장과 배의 피부를 뚫고 나와 있었다.


왜 칼이 내 배에?


뚝, 뚝, 후두두두둑.


배와 칼 사이에 드러난 틈에서 선혈이, 내 피가 레드카펫 아래에 얼룩을 만들었다.


식도 바깥으로 피가 터져나와 입을 피로 더럽혔다.


갑자기 온몸의 힘이 쫙 빠지며 눈이 아른거린다.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데 저절로 다리에 힘이 풀려 한쪽 다리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갤러거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내 곁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를 알현하고 있던 갤러거.


그랬는데.


어느새 내 뒤에 서서 등에 칼을 꽂고 있었다.


"그렇게 됐다."


뭐가.


뭐가 그렇게 됐다는 건데.


아리아.


너는 왜 갑자기 그렇게 절규하듯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고 있는데?


빡빡이.


너는 왜 기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그렇다면 이런 추측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여명 묵시록에게 편을 드는 국왕의 머리 위에 황제가 있다면? 그러면 모든 게 설명이 되지 않을까? 추측이란 이런 걸세."


이런 씨발 개좆같은 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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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26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1 0 11쪽
25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3 0 11쪽
24 24. 결산 보고 23.02.17 24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4 0 12쪽
22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3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5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4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18 18. 배로 갚는다 23.02.11 25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9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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