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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오면 당신은 설 것이다.

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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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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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9,336

작성
23.02.1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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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결산 보고

DUMMY

"······하."


지친 나머지 터져나오지 않았던 헛웃음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안도한 나머지 실없이 터지는 헛웃음이었다.


힘이 빠져서 베개 위에 머리를 떨궜다.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까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고개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는 걸.


"내가 여기 온지 얼마나 됐어? 아니, 그 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3주가 흘렀습니다. 당신이 마족들과 사투를 벌이던 기간이 1주, 당신이 피투성이인 채 이곳에 돌아와 정신이 들기까지 2주."


"3주······."


벌써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말인가?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 아리아 씨가 가장 먼저 당신을 치유하려고 회복 마법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용사, 당신에게 치유 마법이 통하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상태가 악화되어서 중태에 빠졌습니다."


"아. 그거야."


마족의 피를 배 터질 때까지 마셔댄 탓에 나도 거의 마족이 되기 직전이었으니까.


아리아의 치유 마법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마족에게는 버프를 부여하는 주제에 나한테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처가 악화된 것이다.


적을 치유하기로 악명이 높은 아리아의 마법이 나쁜 의미로 잘 작동했다. 이게 무슨 넌센스냐.


마족의 피를 취한 내 모습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목격했지만 그게 곧 마족과 비슷한 피를 띄게 띄게 된다는 것을 아리아는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치유 마법이 안 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오히려 치유 마법이 해가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아즈엘카도 내 몸상태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니 당황했을 것이다.


"아리아 씨. 당신을 끌어 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분명히 당신 혼자서 이 상황을 감수하려고 먼저 떠나보낸 거겠죠."


그랬지. 분명히 마지막으로 보는 거라 생각하고 떠나 보냈는데, 낯짝도 좋게 돌아와 버렸다.


걔 얼굴을 이제 어떻게 본담.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나중에 돌아오면 잘 달래주세요. 두고 와버렸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줄곧 자책하고 있었으니까."


두고 온 게 아니라 내가 보낸 건데.


"교장 선생님, 도와주세요."


"교우 관계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세요, 학생."


교장이 학생 고민 나몰라라 한다. 학부모회에 꼰지를까보다.


"다행히 의사가 있어서 고비는 넘겼습니다. 당신의 잘렸던 팔과 다리도 수복했어요."


그러고 보니 환자복의 어깨 양쪽이 멀쩡히 소매 안쪽에 잘 들어 있었다. 다리쪽도 마찬가지.


마법이 판을 치는 이곳에서 의사라니, 귀한데.


"발작이 워낙 심해서 꼬맸던 상처가 여러 번 터지고 중태에 몇 번이나 빠지는 바람에 그 가죽띠로 여러 겹 덧댄 다음에야 얌전해지더라니까요."


내가 꽁꽁 묶여 있었던 원인이 발작 때문이었구나.


나한테는 기억에 없는 일인데.


"지금은 기력이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겠지만 정신을 잃은 동안에 근육에 전류를 흘려 보내서 억지로 운동을 시켜놨으니까요. 금방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이 오랜 시간 정신을 잃은 채로 누워만 있으면 근육이 죽어서 다시 눈을 떠도 몸을 움직일 수 없다더라.


그래서 전기충격으로 조치를 취한 것일 터.


"나 하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겠네."


"당신이 저희들에게 해준 일에 비하면 다 갚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겁니다."


아즈엘카는 잠깐 입을 닫았다가 말을 이어나갔다. 화제를 바꾸려는 의도로.


"엄청난 소란이었죠. 마물의 대이동이었다고, 대륙에 있던 모든 마물들이 데르사바 평야에 모였다고 하더군요. 그 수라장을 모두 정리하고 살아 돌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즈엘카는 내 공로를 치하해줄 것처럼 입에 침을 발라가며 칭찬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나한테 한 마디도 닿지 않았다.


그녀의 얘기를 흘려 듣는 동안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내가 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이 저질러지기 전에 저지하지도 못했고 여명 묵시록에 대한 단서 하나 못 찾았고.


배후를 잡기는커녕 괜한 뒤통수나 맞고 죽었다 살아났고.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게 뒷수습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처리 못 했으면 얼굴도 못 들고 다녔을 것이다.


원래는 모두 사람으로서 살다가 사람으로 죽었어야 했을 목숨들.


내가 지켜야 했던, 용사가 지켜야 했던 사람들.


그들 모두를 내 손에 죽게 만든 건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게 안일했던 내 탓이야.


그랬는데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를 해버리고 만다.


이렇게 비참한 용사가 또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 그래.


"미안해. 심장 되찾아주고 싶었는데, 단서 하나 찾지 못했어."


"아."


아즈엘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부탁이었을 뿐인걸요. 당신이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어넘기려 했지만 그녀의 미소에는 근심이 엿보였다. 애써 올린 입꼬리가 반쯤 꺾일 정도로.


이렇게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넘어가려고 하는데.


내가 여기서 괜히 더 초상집 분위기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근데 당신네도 용케 멀쩡하게 살아남았네. 이쪽에 몰려온 병력도 상당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


애써 웃던 아즈엘카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줄곧 나한테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배려로 여겼던 그녀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지?


"용케 살아남기는 했죠. 멀쩡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의아하던 찰나.


아즈엘카는 말을 증명하려는 듯 커튼을 들추고 창문을 양쪽으로 열어젖혔다.


"우웃! 뭐, 뭐야?!"


금방이라도 살갗이 전부 타버릴 것 같이 화끈한 열기와 잔불이 엄습했다.


잠깐 숨을 들이마시려고 해도 열기 때문에 산소가 꺼지는 것처럼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화끈거렸다.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에도 창가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고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견고하고 거대한 성체가 자랑거리 중 하나였던 아르토리아 아카데미.


그러나 지금 내가 바라보는 아카데미는 종말을 맞이한 이후의 잔해에 불과했다.


우르르르!


견고한 벽이었던 잔해물이 아주 작은 흔들림에 여지없이 곤두박질쳤다.


높이 솟아 올랐던 탑은 하나도 빠짐없이 부숴졌고 아르토리아의 깃대는 부러져 있었다.


그 깃대에 걸려 있던 깃발은 반절 이상이 찢겨져 날아갔고 멀리서 보이던 높은 건물들이 하나같이 무너지고 갈라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그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장 무너지지 않는 게 이상한 폐허.


어디 그뿐인가?


지금 내 얼굴을 뜨겁게 달구는 이 열기.


나는 이 열기를 얼굴에 맞는 순간 화산이 떠올랐다.


다시 말해 이 정도의 열기는 내가 원정을 다니면서 화산에서나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근데 사방이 평지인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에서 난 데 없이 화산의 기운이 느껴지다니 이게 말이나 되나?


"당신의 동료인 아이리스 아마게돈이 마족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고위급 마법을 펼쳤습니다. 14서클 두 개의 마법을 합쳐 15서클이라는 전무후무한 마법을 창조해내더니 그걸 대뜸 땅에 쏟아 부었죠."


"오우. 저런."


평소랑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재앙에 가까웠기에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족 군대는 소멸했지만 이후에도 마법은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팽창했죠. 빛무리에 집어삼켜진 아카데미 건물은 대파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모자라 끝도 없이 땅 깊숙이 들어가더니 지하 중심부를 건드려버린 것 같습니다. 아래에서 갑자기 용암이 솟구쳐 오르더니 이제 아르토리아 아카데미의 방위 10km는 용암이 흐르는 용암지대가 되어버렸죠."


그리고 내 반응에 아즈엘카는 호응을 얻은 것처럼 입을 놀렸다.


마치 당시의 일을 실황중계 하는 것처럼 엄청난 현장감이 느껴졌다.


"얘기만 들어보면 여기가 마왕성 같은데?"


"누가 아니라고 하던가요."


용암지대에 녹슨 철다리 하나 딱 얹어두면 딱 마왕 취향의 아지트가 아닌가?


자연스럽게 원정 막바지에 다다랐던 용암지대가 떠올랐다.


불 내성 장비 없이 가까이 다가가면 불이 붙던 열옥.


다시는 가기 싫을 정도였다.


"마치 대륙이 소멸하고 다시 태어나는 듯한 광경. 그런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습니다. 덕분에 목숨은 연명했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아즈엘카는 스스로를 감싸 안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저렇게까지 치를 떨 정도로 충격적인 상황이었나?


······아 충격적이긴 했겠구나.


여러 번 당해본 입장으로서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보고 듣는 것만으로 판단해보자면 이제 더 이상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말고를 논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일단은 상처가 나을 때까지 쉬세요. 이야기는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갈 때는 가더라도 이건 풀어주고 가."


내가 위험할까봐 임시방편을 해뒀지만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 계속 구속구를 찰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슬슬 하반신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슬슬 신호가 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3주 동안 쉬야는 어떻게 했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막연히 그녀가 돌아와서 풀어줄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르륵 탁


아즈엘카는 그렇게 말하고 그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 이렇게 그냥 가?"


이거 안 풀어주고 그냥 간다고?


나 슬슬 방광이 차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아니 터질 것 같은데?


"아즈엘카~ 아즈엘카~? 교장 선생님?"


그녀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내 목소리는 허공만 휘저었다.


"교장 선생님? 이거 실제상황이거든요? 아래쪽에 감각이 돌아오면서 방광 터질 것 같거든요? 이거 안 풀어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 저기요?"


차오른다.


그것이 차오른다.


터질 것만 같이 차오른다.


의식하니까 전립선까지 그게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애원하듯이 불러봤지만 발소리만 멀어져갔다.


멀어져갈수록 아래쪽에서 경보음을 울린다.


"야! 어이! 야! 놀리는 거지?! 다 들리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마! 나 진짜! 급하다고! 이거 풀어! 나 부순다?! 부술 거야?! 야! 야아아아악!!!"


침대 위에서 버둥버둥 거렸지만 꿈쩍도 안 했다. 어지간히 질긴 가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용가리 가죽을 뜯어서 만들었나.


나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했지만.


반응해서 터져나오는 건 내 방광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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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45. 내기 23.03.10 19 0 12쪽
44 44. 살풍경 23.03.09 22 0 11쪽
43 43. 나름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한 23.03.08 35 0 12쪽
42 42. 1교시 대환장 파티 (2) 23.03.07 29 0 13쪽
41 41. 1교시 대환장 파티 23.03.06 17 0 11쪽
40 40. 기습 23.03.05 19 0 14쪽
39 39. 용암 근처에서 노숙 23.03.04 22 0 13쪽
38 38.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3) 23.03.03 20 0 12쪽
37 37.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23.03.02 28 0 10쪽
36 36. 종 쳐 (2) 23.03.01 34 0 10쪽
35 35. 종 쳐 23.02.28 31 0 10쪽
34 34. 정신교육과정 불나방 23.02.27 18 0 9쪽
33 33. 망나니 테스트 (2) 23.02.26 27 0 10쪽
32 32. 망나니 테스트 23.02.25 20 0 10쪽
31 30. 참교육 23.02.24 20 0 14쪽
30 30. 짹짹 23.02.23 22 0 14쪽
29 29. 할 일 투성이 23.02.22 18 0 16쪽
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26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0 0 11쪽
25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3 0 11쪽
» 24. 결산 보고 23.02.17 24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3 0 12쪽
22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2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5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3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18 18. 배로 갚는다 23.02.11 24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16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8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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