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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은퇴 용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만찬가
작품등록일 :
2023.01.25 09:01
최근연재일 :
2023.03.10 09:08
연재수 :
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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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8
글자수 :
279,336

작성
23.02.1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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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8. 배로 갚는다

DUMMY

몇 번을 다시 반복해야 할까.


언제까지 싸워야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끝낼 수 있을까.


수십수백만의 마물의 피를 내 손에 묻혔음에도.


악인이라 불리는 같은 사람의 피를 헤아릴 수도 없이 베었음에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던 평화라는 이상은 찾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막연히 생각한 모양이다. 최대악인 마왕을 죽인 뒤에는 모두가 행복해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아무도 행복해하지 않는 미래만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이, 그 암담한 미래가 내 두 눈을 가려버린다.


오히려 새로운 마왕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악을 만들고 말지.


아, 그렇구나.


사람은 악이 있기에 비로소 선을 찾아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존재구나.


절망 끝에 몰린 뒤에야 서로 힘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고 진화하지.


그렇기에 사람들 사이에 악을 자처하며 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면 나는?


나는 왜 필요하지?


용사라는 존재는 그런 사람들의 웃음을 지워내는 존재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왜 나라는 사람을 희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왕을 잡을 존재로서 떠받들고 있는 거지?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용사."


어둠 속에서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인격체가 슬그머니 말꼬리를 이어붙였다.


"또 다시 죽었구나. 나를 죽인 뒤에는 네 앞길은 꽃밭이라고 할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철 없는 꼬맹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이상이 덧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뻔했던 것을."


수없이 나를 향해 뻗어 오는 얼굴들이었다.


남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여자의 얼굴을, 개의 얼굴을, 꽃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 녀석은 온갖 잡다한 생물과 감정이 뒤섞인 혼돈의 존재.


사람들은 이 녀석을 마왕이라 불렀다.


그래. 그렇게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어떤 사람들은 이익을 추구해 만들었다고 하던 상업적인 존재.


그게 바로 이 녀석이었다.


나는 녀석과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았고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왕도 내게 스스로 목을 내밀었다.


"이건 계약이다. 모든 것을 잃고 종속된 삶을 살던 내가 네게 앞으로 나갈 기회를 주도록 하지. 대신 그 길을 내게도 보여다오."


나는 마왕의 목을 베었고, 마왕은 토벌되었다.


하지만 녀석의 잔여물은 내 몸에 깃들게 되었다.


이른바 운명공동체라는 걸까.


원래 나 혼자 싸웠다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겨우 잡을까말까한 녀석이었는데, 뭔지 모를 심경 변화 때문에 나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녀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족의 피를 마시고도 온몸이 멀쩡하고 갑자기 피가 정화되어 멋대로 힘이 빠져나가는 건.


뒤이어 내 뒤를 쫓아온 동료들에게 나는 말했다.


그거야 살면서 이렇게 후련한 적이 있겠냐 싶었을 정도로.


"마왕 원정대는 오늘부로 해산이다!"


이번 생에서는 녀석들에게 정을 붙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모질게 대하면서 정을 붙일 틈을 주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여행을 다니고, 보초 한 번 더 서고, 녀석들의 무리한 부탁에 욕 한 사발 퍼부으면서 들어주기도 하고.


그런데 왠지 모르게 이 녀석들이 내게서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는다.


어째서지.


이딴 꼰대 같이 행동하는 새끼가 뭐가 좋다고 눈물까지 보이는 거야.


그 얼굴을 보기도 싫어서.


아니, 솔직히 말하면 볼 수가 없어서 광보로 한달음에 왕국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했다.


헤이즈는 궁정 마법사가 되지 않을까. 마법에 맛을 들인 이후로 연구하는 걸 좋아했으니까.


아리아는 어떻게 할까. 여기에서는 그녀를 성녀라고 부르는 신봉자들이 생겼다고 했으니까 그들과 함께 교리를 펴는 수녀로 돌아가지 않을까.


이번에는 적어도 마녀로 몰려서 화형에 처하는 일은 없겠지.


쓸쓸하긴 하겠네. 그 애들은 기억 못하는 몇 십 년 동안, 나는 계속 얼굴을 봐왔으니까.


하지만 잊혀지겠지. 함께 했던 일들은 영원히 남을 지언정 그들의 얼굴과 이름은, 아득히 먼 미래에서는.


그랬는데.


씨발, 호랑말코 새끼가 갑자기 아카데미에 가라고 하더니 다시 만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에 다다른다.


"용사로서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말로가 이런 꼴이라니."


"시끄러워. 나라고 이럴 줄 알았겠냐고."


겨우 마왕을 잡아재꼈더니, 그건 다 헛짓거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비참하게 전 지인들에게 온 몸이 찢겨 죽어버리는 결말이라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툴툴거리는 것뿐.


"그러면 이제는 네가 내 말을 들을 차례로군."


"아, 그랬지."


잊고 있었다.


이 녀석과 함께 나눴던 또 하나의 계약.


머지 않아 나는 또 과거로 회귀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반복하게 될 현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될 걸.


"내가 네게 미래를 주었으니 이제는 네가 내게 미래를 줄 차례야."


"알고 있었다니까. 안 까먹고 있었어."


용사가 마왕 없이는 성립이 안 되듯, 마왕 또한 용사 없이는 단순한 악에 지나지 않는 존재.


몇 번이고 용사가 탄생하고 그를 죽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살아야 하는 그런 정해진 인생을 마왕은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마왕도 한 번쯤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용사가 있어도 쓰러뜨리지 않아도 되고 마왕으로서 종속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을 바란 것이다.


"이제는 네가 마왕이 될 차례야."


나는 이 녀석에게 내 몸을 주기로 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공평하니까.


마왕이라.


내가 마왕이 되면 어떻게 될까.


지금까지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게 될까.


엄청나게 시끄러울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도 그럴 게, 이 새끼 안에서 우글우글대는 얼굴들이 온갖 울음소리로 짖어대거든.


살려달라고. 무섭다고. 원망한다고.


나는 다시 사람을 죽이게 될까.


황제가 말하길, 마왕은 그의 개라고 했지.


이제 보니 종속된 삶이라는 말을 마왕이 꺼낸 건 황제 때문일 수도 있겠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죽이고 영토를 넓히고 번식하다가 그들의 미움을 받고 힘을 합치는 모습에 멋대로 위축되고 물러나는 그런 무대 위의 연기자.


그걸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608년 동안 반복해온 마왕이라는 놈이 새삼스럽게 대담하게 느끼져네.


지루하다고 했으면서 괴로울 것 같기도 하고, 어째 더 안쓰러워지고.


이제부터 내가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지.


아, 씨발. 이제 이틀 지났는데.


"이거 너무 불공정 계약 아니냐? 계약서 다시 써."


"불만하지 말지. 자기가 목숨 잘못 간수 한 주제에."


쩝. 할 말 없네.


적어도 몇 달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봤더라면.


그랬더라면, 후회는 없었을 텐데.


아니, 실은 있어.


실은 녀석들이 마지막에 웃으면서 죽는 얼굴을 봤으면 좋겠어.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못 할 테니까.


"야. 가는 길에 부탁 하나만 하자."


"뭐냐."


"있잖아. 네가 마왕에서 벗어나게 되면······."



"리바이브!"



뭐지? 뭔 개소리야?



사람이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왜 끼어들고 지랄이람.



그것도 리바이브라니. 그건 생명을 대가로 사람을 살리는 마법······.



어라?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이 든다.


아니, 애초에 새까만 공간에서 마왕이랑 대화하고 있어서 눈앞을 흐려진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동안 눈을 감고 있었나 싶은 착각에 눈을 뜨는 행동을 해보았다.


"커헉!"


갑자기 입 밖으로 피와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아마도 내 기도를 막고 있던 거겠지.


나는 죽었던 게 아니었나?


여기가 어디지?


빠르게 고개를 돌아봤다.


"아니!"


"어떻게 사지가 붙어 있지! 분명히 사지를 분해시켜 놨는데!"


좌중이 시끄럽다.


보니까 낯익은 왕관을 쓴 사람들이 자리에 벌떡 일어서 있고.


그 중에는 돼지 호랑말코 빡빡이 문어대가리도 있고.


기사에게 끌려가면서 내게 손을 뻗은 수녀가 있었다.


"아리아."


내 동료.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익숙한 성내의 풍경.


익숙한 피의 냄새.


나를 찢어 발겼던 낯익은 개새끼들.


그리고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짓는 노친네까지.


"하."


웃음이 나오네.


헛웃음인가.


버릇이 든 걸지도 모른다. 하도 기가 차는 일을 많이 당해야 말이지.


하지만 지금 내뱉은 웃음은 헛웃음이 아니었다.


"용사님! 일어나세요! 용사님은 이런 곳에서 쓰러질 사람이 아니잖아요! 악을 물리치고 저희를 지켜주셔야 하잖아요!"


와, 듣는 사람이 오글거리네. 그런 말을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냐. 부끄럽지도 않냐.


하지만 나는 아카시를 지팡이 삼아 짚으며 일어섰다.


갈라진 복부에 살점이 채워졌음에도 여전히 온몸에 근육통이 가시지 않아서 죽을 맛이었지만.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팬이 적어서 말이야.


힘내세요라는 말 한 마디로도 힘이 멋대로 솟아날 정도의 관심 종자거든.


그리고 나를 개처럼 부려먹고 내 행동을 무위로 돌리는 만행을 일삼는 악을 두고는 죽어도 눈을 절대로 못 감으니까.


"그렇지? 이렇게 죽는 건 아무래도 너무 불합리하잖아?"


야, 마왕아.


기대컨 잔뜩 했을 텐데 어떡하냐.


좀 더 기다려줘라.


아직은 갈 때가 아닌가보다.


"이 등신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마법만큼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


성녀의 정점에 오른 그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소생 마법.


한 번 사용할 때마다 그 대가로 사용자의 생명을 가져가기에 절대로 쓰지 말라고 했는데.


"용사님이 없는 세상, 살아봤자 의미가 없는 걸요! 죽을 거면 제 손에 죽으라구요!"


와, 진짜 무서운 여자야. 미친 년이고.


감동선 다 끊어버리네.


그래서 더욱 고맙고.


"그래. 나를 죽이려는 새끼들을 족쳐 줘야 공평하지 안 그래?!"


나는 다시 한 번 황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황하던 S급 모험가들은 다시 나를 베기 위해 몸을 날렸고.


그로 인해서 데자뷔 같은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몸이 치유된 내 속도를 따라올 수 있는 놈은 따라와보라지.


"아직도 나를 해하는 게 가능할 거라 보는 건가?"


황제는 다시 한 번 내게 손을 뻗었다.


놈의 반지에서 빛이 발했다.


그래서 그게 뭐.


"응."


나는 마법이 시전되는 속도를 뛰어넘어 그의 목에 아카시를 대었다.


스윽, 하고 녀석의 목에 칼날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훌륭, 하도다."


철퍽.


만족한 웃음을 짓던 노인의 눈알이 돌아가며 그 목이 몸을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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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용암 근처에서 노숙 23.03.04 22 0 13쪽
38 38.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3) 23.03.03 20 0 12쪽
37 37. 탈락자는 아카데미 퇴출 23.03.02 28 0 10쪽
36 36. 종 쳐 (2) 23.03.01 34 0 10쪽
35 35. 종 쳐 23.02.28 31 0 10쪽
34 34. 정신교육과정 불나방 23.02.27 18 0 9쪽
33 33. 망나니 테스트 (2) 23.02.26 27 0 10쪽
32 32. 망나니 테스트 23.02.25 20 0 10쪽
31 30. 참교육 23.02.24 20 0 14쪽
30 30. 짹짹 23.02.23 22 0 14쪽
29 29. 할 일 투성이 23.02.22 18 0 16쪽
28 28. 적과의 불편한 동거 (4) 23.02.21 21 0 14쪽
27 27. 적과의 불편한 동거 (3) 23.02.20 23 0 13쪽
26 26. 적과의 불편한 동거 (2) 23.02.19 20 0 11쪽
25 25. 적과의 불편한 동거 23.02.18 23 0 11쪽
24 24. 결산 보고 23.02.17 24 0 11쪽
23 23. 낯선 천장이다 23.02.16 24 0 12쪽
22 22. 마무리는 용사의 몫 23.02.15 23 0 19쪽
21 21. 아이리스 아마게돈 23.02.14 25 0 17쪽
20 20. 배로 갚는다 (3) 23.02.13 23 0 15쪽
19 19. 배로 갚는다 (2) 23.02.12 22 0 18쪽
» 18. 배로 갚는다 23.02.11 25 0 10쪽
17 17. 뒤통수 얼얼하네 (2) 23.02.10 27 0 17쪽
16 16. 뒤통수 얼얼하네 23.02.09 28 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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