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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똘

1980 밴드천재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김규똘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3.08.26 17:04
최근연재일 :
2023.09.29 19:20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129,784
추천수 :
3,723
글자수 :
171,704

작성
23.09.17 18:30
조회
3,421
추천
94
글자
11쪽

난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

DUMMY

‘아? 정말로 그러면 되잖아?’


생각이 고속도로처럼 뻥 트이는 기분이다. 기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아무렇게나 흘려듣듯 대충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부탁하면 분명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들이다.


기현은 합주실 문을 열어 여전히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녀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네에엑!! 선배!!”


복도를 울릴 정도의 우렁찬 합창이다.


‘이 친구, 울림통이 남다른데···.’


맨 앞에서 열심히 대답하는 이 학생, 울림통이 범상치 않았다.

이 인원으로 학생회관을 울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이요!?”


부탁이라는 말에 소녀들의 눈이 일제히 동그랗게 커졌다.


기현 선배가 자신들에게 ‘부탁’이란 것을 하다니.


아아. 선배, 꺼지라는 부탁만 아니면 다 들어드릴 수 있어요.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여학생들이 합주실 안에 모였다.

기현은 바깥에서 자신을 구경하던 여학생들이 다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는 합주실 문을 닫았다.

그래도 제법 넓었던 합주실이 이제는 복작복작 소란했다.

기현을 바라보는 소녀들의 눈이 부담스러울 만큼 초롱초롱했다.


“다름이 아니라, 대학가요제 본선에 나갈 곡을 직접 골라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가 직접이요?”


우리가 직접 고른다고? 그 중요한 본선 곡을? 여학생들 사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네. 부담 없이 골라주세요. 저희는 둘 중 하나, 못 고르겠더라고요. 듣는 사람이 직접 고르면 좀 더 객관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여기로 부른 거예요.”


그때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선배가 우릴 부른 거구나.

기현의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투지를 불태웠다.

그래, 비록 막귀지만 이 한 귀, 아니 두 귀 불태워서 선배에게 도움이 되리.


“얼마든지요!! 선배 부탁이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더 들을 수 있어요!!”

“그럼···.”


기현은 마이크 스탠드가 있는 곳 쪽으로 향했다.


“시작해도 될까요?”

“네에!!”

“그럼 1차 예선에 선보였던 곡부터 연주해볼게요.”

“네에엑!!”


기현 선배의 곡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을 수 있다니.

내내 벽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노랫소리만 들었던 기현의 소녀들은 감동이라도 먹은 듯, 기도하는 것처럼 양손을 꼭 붙잡고 보고 있었다.


기현은 곡에 시동을 걸었다. 몽환적인 사이키델릭 무드에 포크가 섞인 곡. 성현의 리드 기타 멜로디를 따라 기현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곡을 듣는 학생들의 표정은 황홀, 그 자체였다.


*


‘저게··· 맞아···?’


여기 처음 본 남자에게 첫눈에 반한 여자가 있다.

이 여자의 이름은 이아름. 나이는 스무 살.

그녀가 남자를 처음 본 건 한국대학교 입학식 당일, 입학식 공연에서였다.


‘사람한테 빛이 날 수 있어···?’


이름도 모르는 밴드의 노래를 부르는 남자는 정말로 빛이 났다.

태양처럼 발광하는 남자.

사람한테 후광이 비친다는 얘기는 신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그는 그야말로 자체발광 그 자체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저 쿵쾅대는 마음뿐이었다.

이렇게까지 그에게 말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체불명의 그에게 반하게 된 것은 아주 찰나의 일이었다.


기숙사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한국대학교의 기숙사 계단은 번뇌와 고통 그리고 죽음의 108계단이라 불릴 정도로 그 경사가 가파르고 높았다.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오고 난 날이라, 유독 짐 가방도 무거웠고, 양손도 빈 곳 없이 온갖 강의 교재로 꽉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줄곧 공부만 한 인생. 체력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죽겠네···. 이거 들고 언제 다 올라가···.”


옷이 든 짐가방을 멘 어깨와 책을 든 양팔이 후들거렸다. 기숙사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는 시점.


한 걸음, 두 걸음, 다시 한 걸음···.


아아- 이제 더 이상은···.


눈앞이 하얗게 변하던 그 순간.


“어디까지 가세요? 들어드릴까요?”

“감, 감사합니다···.”


누군가 아름의 무거운 강의 교재를 대신 들어주는 게 느껴졌다. 아름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멀어지던 정신을 다잡았다.

하얗게 번지던 시야가 되돌아오자 보인 건.


“대중, 음악연구회···?”

“어, 어떻게 아셨어요?”


입학식 공연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던, 이아름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그 장본인의 얼굴이었다.


‘운명···.’


스무 살 신입생 이아름은 그렇게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대중음악연구회라고 했지···.”


분명 서클 이름이 대중음악연구회라고 했다.

새 학기가 되면 서클에 가입할까?


아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대중음악연구에 이 한몸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그녀 앞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있었으니.


“노래도 못 하고 악기도 못 하면 역시 안 받아주겠지.”


그녀가 음치 박치에 끼도 없는 천생 범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서클에 가입하는 방법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그녀의 마음을 다르게 표현하기로 했다.


“선배에엑!!!”


아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복도를 울렸다. 음공을 쓴 것도 아닌데, 그녀의 목소리는 혼자 일당백을 하고 있었다.

스무 살 이아름,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누군가의 오빠부대를 자처한 순간이다.

그녀는 대중음악연구회 연습 시간일 때는 합주실 앞에서 진을 쳤다.


합주실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노랫소리. 직접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름의 몸은 비록 바깥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합주실 안쪽에서 기현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현은 갑자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다름이 아니라, 대학가요제 본선에 나갈 곡을 직접 골라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중요한 대학가요제 본선곡을 직접 골라달라는 부탁까지 해오는 게 아닌가.

아름은 너무 좋아서 그만 뒤로 넘어갈 뻔했다.


'오늘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어···.'


그렇게 기현 선배가 제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순간.


'황홀경.'


좋아하는 사람이 손 닿으면 닿을 곳에서 웃으며 노래하고 있다.

아름은 듣기만 했던 황홀경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선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기억은 무덤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좋다.’


대중음악연구회의 곡은 선배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 정말 좋았다.

첫 번째 곡은 진중하고도 몽환적인 느낌을 가진 곡. 야성적인 선배의 목소리와 잘 어울렸다.


두 번째 곡은 통기타 멜로디의 흥겨운 곡으로, 귀여운 선배의 얼굴과 정말 잘 어울렸다.

아름은 물론 두 곡 모두 다 좋았다. 사실 선배가 만든 곡이니 뭔들 안 좋을까.


‘하지만 이 두 곡 중 반드시 한 곡을 골라야 한다.’


그래야 기현 선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름은 본고사를 쳤을 때보다도 더 심기일전한 정신력으로 신중히 곡을 골랐다.


‘첫 번째 곡은 아름다운 가사가 매력이지. 분명 선배 목소리로 첫 번째 곡 가사를 읊는다···? 아, 이거 극락이지.’


첫 번째 곡은 아름다운 가사가 돋보인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반면 두 번째 곡은.


‘두 번째 곡은 첫 번째 곡보다는 풋풋한 맛이 있지. 앳되고 순한 선배 얼굴이랑 정말 잘 어울리는 곡이야. 좀 더 대중적인 느낌이기도 하고··· 선배 웃으면서 기타 쳤던 거, 정말 좋았지. 이것도 극락···.’


아름은 맨 앞자리에서 첫 번째 곡일 때의 미래와 두 번째 곡일 때의 미래를 상상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름이 생각하기에 두 경우 모두 다 장밋빛 미래다.


‘혹시, 영 좋지 않은 곳이 아픈가···?’


한편 기현은 저 여자애는 어디가 그렇게 아프기에, 그렇게 무섭게 웃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몇 차례의 상상에 상상을 걸친 결과, 아름과 소녀들의 선택은.


“두 번째 곡이요!”


아름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지어 보였다.

냉정하게도 생각해보고, 이성적으로도 생각해본 결과, 두 번째 곡이 대학가요제의 대회 취지와 심사 기준과도 더 잘 맞을 듯했다.


“대학가요제의 제 1 심사 기준이 뭔지 아세요?”


아름이 똘똘한 목소리로 기현에게 물었다.


제 1 심사 기준?

그게 뭐였더라?


“곡의 완성도?”

“아뇨, 틀렸어요.”

“가창력?”

“아뇨, 풋풋함이에요.”

“풋풋함?”


뭐 이런 심사 기준이 있을 수가 있나.


“심사위원들이 풋풋한 느낌을 좀 더 선호한다는 의견이 있더라고요. 78년에 심수봉이 떨어졌던 일도 있고요.”

“아···.”


심수봉이라는 예시에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들고 온 ‘그때 그 사람’은 입상에 실패했지만, 히트곡 반열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해주다니. 대중음악연구회 멤버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다.


“그런 건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어. 첫 번째 곡은 살짝 진중한 느낌이라, 풋풋한 맛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는 두 번째 곡이 좀 더 낫겠네.”


미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선 곡, 그렇게 두 번째 곡으로 결정되었다.


*


한편 한양레코드.


“조철우! 정신 안 차리지!!”


우레와 같은 호통이 조철우에게 쏟아졌다. 뒤이어 조철우의 시야에 가득 흩뿌려지는 서류 뭉치들. 조철우는 부장의 모욕에도 묵묵히 허리를 굽혀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을 한 장씩 주웠다.


“임마, 너 왜 이번 일 그따위로 처리한 거야? 내가 너 뒷배 되어주니까 천군만마 얻은 것 같냐? 너 그러면 내가 너 방어 못 해줘! 부장 달고 싶다매! 야, 철우야. 부탁 좀 하자! 나도 나간 최 이사님 자리 앉고 싶다!”

“······.”

“나도 너한테 받아 처먹은 게 있어서 나승연 그 계집애 말고 너를 이 자리에 앉히고 싶다고. 너, 정말로 걔한테 뺏기고 싶냐?”

“설마요, 부장님.”


조철우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다 주워 다시 부장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젠장, 기분 더러웠다. 이런 순간에도 상사 놈 기분 맞춰야 한다는 것이.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이야? 나승연 걔, 이번년도 죽 쑨 거 대학가요제로 빠르게 수습하고 있다고. 올해 대학가요제 관심 장난 아니야. 이러다가 올해 가기 전에 확정된다?”


부장님의 말이 다 맞았다. 나승연은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고, 그동안 잃은 실적을 거의 회복한 상태였다.


“아뇨, 그걸 제가 두고 볼 리 있나요. 부장님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드시면 됩니다.”

“뭐?”


하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조철우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기에는 심하게 건방진 말투다.


“이번 대학가요제, 좀 시끄러울 겁니다.”


조철우의 품에는 아직 꺼내지 않은 조커가 있었으니까.


작가의말

오늘의 곡

Radiohead- spec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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