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X같은 마을이네
나뭇잎은 바사삭 소리를 내며 앙피 일행을 감싸주었다. 1,000골드의 여관보다 0골드의 나뭇잎이 훨씬 따뜻한 기분이었다. 자본의 차가움을 실컷 느끼는 그들이었다.
밤은 깊어만 갔고 앙피 일행도 곧장 곯아떨어졌다.
나머지는 그렇다 쳐도 앙피까지 깊은 잠에 들 줄은 몰랐다. 그는 나영웅의 배를 베개 삼아 잠에 취했다.
터질 것 같던 머리가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나올 때쯤에는 정말 몇 주는 잠을 못 잔 것처럼 피곤했었다. 그마저도 익숙해지니 버텼던 것이었지만, 막상 누워서 눈을 붙이니 잠이 잘 온 건가 싶었다.
그래도 시야 공유를 일절 받지 않고 잠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뭇잎의 피톤치드가 도움이 된 걸까? 아니면 인장을 얻기 쉬운 상태라서?
그것도 아니면 나영웅의 배가 너무 푹신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그래도 앙피는 옅은 미소를 띠며 잠을 잤다.
“으잇. 왜 안 멈춰!”
푸흐흥-! 다그닥-! 다그닥-!
성난 말발굽 소리가 밤 도로에 울려펴졌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가 통제를 잃은 채 과수원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말은 주인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듯 과수원의 담벼락을 향해 멈추지 않고 돌진했다.
“뭔 소리지....”
한창 꿀잠을 자던 앙피는 예민하게 반응해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닿는 저쪽 끝에서 마차가 돌진해오는 게 보였다.
“쿠에에엙... 쿠에에엙...”
“흠냐... 이 몸은 최강.....”
아직 다른 녀석들은 자고 있었다. 저렇게 시끄럽게 돌진해 오는데도 여간 피곤했던 게 아니었나 보다.
‘... 근데 방향이 이쪽도 아니네...’
앙피는 마차가 담벼락으로 향하고 있단 걸 보고는 다시 누웠다.
“누가 좀 멈춰줘! 말이 말을 안 들어!”
앙피는 귀에 나뭇잎을 좀 쑤셔 박을까 생각했다. 근데 저렇게 놔뒀다가 과수원 주인이 밖으로 나오면 낭패였다. 이 푹신한 나뭇잎 더미를 잃으면 잘 곳도 없어진다.
결국 앙피는 곤히 자는 카힐에게 명령했다.
“카힐 님.. 저 마차 좀 막아주세요...”
“으걋? 음냐..”
카힐은 어지간히 깊게 잠들었는지 대답 대신 잠꼬대나 해댔다.
그러나 어차피 그녀의 몸은 앙피의 명령에 따르게 되어있었다. 카힐은 푹 잠든 상태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두 눈은 꼭 감긴 채 잠투정을 했지만, 그녀의 몸은 충실히 앙피의 명령에 따라 마차로 달려갔다. 그녀의 고개가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듯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손쉽게 달려오는 마차의 말을 제압해 세웠다.
카힐은 마차를 막아 세운 후 그대로 다시 꼬꾸라져 쿨쿨 코를 골았다. 앙피도 마차가 무사히 멈춘 걸 확인하고는 다시 나뭇잎 위로 누웠다.
이로써 과수원 주인이 나올 일은 없어졌다.
“아이고. 고마워!”
대신 마차 주인이 와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백발에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덩치가 앙피만큼이나 작았다.
앙피는 자는 척 쳐다보지 않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질리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
“하마터면 담벼락을 다 부술뻔했어. 저거 거의 10,000골드였거든.”
앙피는 골드 소리를 듣자 괜스레 몸이 움찔거렸다. 대충 지은 것 같은 담벼락 가격이 무슨···.
터무니없는 가격을 들으니 오던 잠도 다 달아났다. 앙피는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고개만 꾸벅 숙였다.
“ㄴ.. 네... 그럼 조심히 가세요...”
“잉? 가긴 어딜 가.”
앙피의 마음도 모르고 노인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이러다 과수원 주인이 깰까 앙피는 노심초사하였다.
그런 그를 단숨에 눈치챘는지 노인이 껄껄 웃었다.
“이 과수원 내꺼야.”
“ㄴ... 느에?”
앙피가 눈을 끔뻑이며 노인을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그렇게 부티가 흐르지 않는데 이런 커다란 과수원 주인이라니. 그것도 담벼락 하나에 10,000골드인 과수원의.
노인의 이름은 장래. 엄지인으로 몇십 년을 산 노인이다.
장래는 앙피 일행의 이야기를 듣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웃기는 놈들이네. 그래서 나뭇잎에서 잤다고? 거기에 벌레가 얼마나 많은데 누워.”
어쩐지 나뭇잎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푹신하더니, 벌레가 쿠션재로 들어있어서 그랬던 것이었다.
장래는 앙피 일행을 친절히 과수원 안으로 안내했다.
앙피는 거절하지 않고 넙죽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직도 나뭇잎 위에서 코를 골고 있는 다른 녀석들을 깨웠다. 저 멀리 마차 밑에 깔린 채 자고 있는 카힐도 잊지 않았다.
“으으.. 앙피 무슨 일이야...”
“아... 안으로 들어오래요....”
카힐은 눈을 벅벅 비비더니 되물었다.
“들어가? 어딜?”
“저 과수원이요.. 저희 안에서 자도 된대요...”
일반 여관도 1,000골드를 받는데 이런 커다란 과수원에서 잔다고?
카힐은 앙피 어깨 너머의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돈이 없는 앙피와 돈 많은 수상한 노인. 그리고 갑자기 생긴 따뜻한 호의.
카힐은 머릿속으로 이상한 상상이 지나쳐갔다.
“... 너 설마 이상한 짓···.”
“뭐해? 빨리 와라!”
장래가 재촉하는 탓에 앙피의 대답이 묻혔고 카힐의 의문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과수원의 대문을 지나자 양옆으로 드넓은 사과밭이 펼쳐졌다. 이미 수확을 마쳤는지 사과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앙상한 철조 구조물만 남아 있었다.
망한 과수원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망했어요..?”
“뭐얏? 아니야!”
망하지 않은 사과밭을 지나니 2층짜리 집 하나가 나왔다. 장래가 혼자 살기에는 다소 커 보였다.
“가족 없어요...?”
“아니야! 뭐 이런 무례한 꼬맹이가...”
장래는 앙피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생명의 은인만 아니었어도 이미 내쫓았다.
그는 집의 2층을 앙피 일행에게 내어주었다.
앙피 뒤를 터덜터덜 쫓아온 세 명은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어 다시 잠이 들었다. 침대는 고작 2개밖에 없었지만, 알아서 잘 엉켜서 잠든 모양이었다.
곤히 잠든 셋을 두고 홀로 잠이 완전히 깬 앙피만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왜 내려왔어? 안 자니?”
계단 바로 앞 주방에서 장래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계단으로 내려오는 앙피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 조금만 있다가 자려고요...”
“그래. 그 나이 땐 잠자기도 아까운 법이지.”
장래는 분위기상 당연히 앙피가 옆에 앉을 거라 생각했는지 찻잔 하나를 꺼내왔다.
하지만 그사이 앙피는 주방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구석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결국 장래가 먼저 찻잔을 들고 그의 옆에 와 앉았다.
“배가 고프진 않냐?”
“ㄴ... 느에..”
홀짝-. 앙피는 대답하며 그에게서 받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알싸한 향이 나는 독특한 차였다.
앙피가 낯을 가린다는 걸 눈치챘는지 장래도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구석에 쪼그려 앉아 차만 홀짝거렸다.
앙피는 이미 차를 다 마시고도 눈치를 보며 괜히 차를 마시는척했다. 빈 찻잔을 들이켜는 것도 한두 번이라 결국 앙피는 슬금슬금 말을 걸었다.
알싸한 차 덕분인지 괜한 용기도 났다. 고작 말을 거는데도 용기까지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 혹시 있잖아요..”
“으이. 왜.”
“그 엄지의 인장은 얼마에요...?”
“아, 그 도장 말하는 거냐?”
“네..”
노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답해주었다.
“100만 골드였던 것 같구나.”
“...........”
앙피의 침묵이 그 어느 때보다 깊었다.
“그나저나 고맙다. 너희가 아니었으면 오늘 죽을뻔했어. 하필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을 겪을 줄이야.”
“.... 고마우면 돈 좀 주세요...”
앙피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100만 골드를 요구했다.
“미안허이. 내 이제 엄지를 떠날 생각이라 그 정도의 돈은 없어. 대신 내일 맛있는 밥이라도 한 끼 주지.”
“ㅂ... 밥보다 돈이 좋은데..”
앙피는 빈 찻잔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비어있는 찻잔이 마치 비어있는 자신의 주머니와 같아 보였다.
사실 엄지인이라면 100만 골드쯤은 조금 무리하면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장래는 말한 대로 이제 엄지를 떠나기에 그런 돈을 넙죽 건네줄 수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도시에서 쓰던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라도 가져라.”
“.... 그 식당 팔면 얼마 줘요...?”
“예끼 이놈아! 팔긴 뭘 팔아. 식당에서 장사라도 해봐라. 워낙 유동 인구가 많아서 장사는 잘될 거야. 운영을 잘만 하면 100만 골드는 무슨, 1,000만 골드도 모은다.”
“ㅈ... 정말요...?”
앙피는 눈을 반짝 빛냈다.
그래, 식당이라면 자신이 있다. 이래 봬도 새끼에서 식당을 하던 몸이다. 게다가 엄지는 식자재의 천국, 슾밥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싫으면 말아라. 어차피 줄 사람 많어.”
“아뇨..! 가질래요...! 목숨값이잖아요.....!”
앙피는 가불기를 쓰고는 식당의 열쇠와 위치가 표시된 지도를 받아냈다.
그렇게 앙피는 받을 걸 다 받은 후에야 2층으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
쾅-!
“이놈들아! 밥 먹어라!”
이른 아침부터 장래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침대에는 앙피와 카힐, 비비가 옹기종기 뒤엉켜 자고 있었다. 나영웅은 어딨냐고? 새벽에 카힐이 발로 차는 바람에 바닥에서 잤다.
“후후후. 목이 조금 이상한데.”
나영웅은 고개가 꺾인 채 잤는지 이상한 자세로 걸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빠졌던 살이 어느새 거의 다 돌아온 느낌이었다.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빨리 돌아온 것이지.
‘후후후. 아카데미 축제. 검지의 반지 경비병의 도시락, 유랑 상인에게 구매한 음식 2kg, 미궁의 탑에서 먹은 벽의 이끼.’
부지런히도 처먹었네.
넷은 주방의 식당에 늘어지게 앉아 아침을 기다렸다.
“으아아악. 졸려. 근데 우리 이제 어떡하냐. 인장을 구매할 돈도 없잖아.”
“ㄱ... 그.. 장래 님이 식당 하나를 주셨어요...”
“오 진짜? 그거 팔면 인장 살 수 있냐?”
카힐이 턱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러자 뒤에서 나타난 장래가 그릇을 내려놓고는 그녀의 머리를 꽁 때렸다.
“그 식당은 내가 20년간 운영한 곳이야. 함부로 팔만한 식당이 아니라고!”
“아 왜 때려! 어차피 우리꺼잖아, 이제!”
“그 식당 때문에 내 아내가...!”
장래는 말을 하다 멈췄다.
“아. 그 미안.”
“됐어. 밥이나 먹어.”
그는 나머지 그릇도 전부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그릇에는 초록 액체가 검정 털 같은 것과 엉킨 무언가가 있었다.
“밥이 어딨지...”
앙피는 그릇을 살짝 들어 밑에 뭐가 붙어있나 확인했다.
“이게 밥이잖아!”
장래는 생전 안 내던 화를 어제 이후로 몇 번이나 내고 있었다.
근데 진짜 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
“와... 앙피 슾밥보다 심각한데...”
카힐은 문득 딸기개불토마토스프가 떠올라서 소름이 돋았다.
그릇에 담긴 수상한 밥(?)은 아직도 열기를 품고 보글거렸다.
- 작가의말
선호작과 추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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