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카힐의 봉인이 풀리다
1층의 구조.
[최후 방어 지점]-[1차 방어 지점]-[슬라임 대기실]
현재 앙피 일행이 고군분투 중인 곳은 1차 방어 지점.
그리고 나영웅이 지목한 분수가 있는 곳은 처음에 있었던 최후 방어 지점이었다. 앙피가 향하는 곳도 그쪽이었다.
한편, 1차 방어 지점의 양쪽 길 말고 막힌 벽 그 너머엔 1층의 보스가 대기 중이었다. 벽을 부수고 나와 기습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뿌글. 왜 안 끝나나!”
벽 뒤에서 대기 중인 거대 슬라임, 뿌글은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다.
원래라면 안심하고 있는 도전자들을 기습해 마지막 절망을 줘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튜토리얼이 끝나지 않는다. 15분이면 끝났어야 할 튜토리얼이 30분이 넘도록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 역시도 앙피 일행으로 인해 발생한 ‘히든 퀘스트’의 존재를 몰랐기에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인내심이 긴 편이 아니었다.
“뿌그륵. 빨리 인간 놈들을 밟아줘야 하는 거 아니나!”
뿌글은 기포를 부글부글 뿜어대며 가만있지를 못했다.
비록 1층이라지만 보스는 보스. 자신에 대한 처우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그에게는 보상이나 퀘스트조차 부여되지 않았다.
잡지 말고 다음 층으로 도망가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도전자 중 뿌글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 그 처음에 나온 갑분싸 슬라임?” 정도가 뿌글의 평가였다.
시스템에게도 도전자들에게도 별 중요하지 않은 그였다.
그나마 눈에 띄기 위해 문 대신에 벽을 부수고 등장하는 아이디어도 뿌글의 것이었다. 큰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내 존재까지 있은 거나! 말도 안 된다!”
뿌글은 드릉드릉 몸에 시동을 걸었다.
이대로는 1층 보스조차 누군가에게 뺏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들었다.
결국 그는 시스템이 신호를 주기도 전에 먼저 벽을 부수고 뛰쳐나갔다.
“뿌그르륵! 왜 이렇게 안 끝나나!”
뿌글이 육중한 몸으로 도전자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일단 눈에 보이는 녀석들을 향해 몸을 훙 날렸다. 뿌글이 몸을 날린 곳은 마침 앙피를 막던 녀석들이 있던 곳이었다.
앙피의 길을 막던 놈들이 뿌글 덕에 잠시 혼비백산이 되었다.
거대한 슬라임의 위압감이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는 정도였다. 인간이 살아가며 집채만 한 생명체에게 공격당할 일은 없으니까.
조금 전 약해빠진 소형 슬라임을 잡은 자신감 가지고는 턱도 없는 수준이었다.
“우아...”
물론 여기 집채만 한 생명체는 흔하게 보는 녀석도 있었다.
앙피는 뿌글이 잠시 만들어둔 틈을 통해 빠르게 최후 방어 지점으로 뛰어갔다. 앙피를 잡으려던 놈들은 뿌글에게 휘말려 막지 못했다.
앙피는 나영웅이 가리켰던 분수로 곧장 달려갔다.
여전히 분수는 건조한 공기만 내뿜고 있었고 주변엔 지켜야 했던 횃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앙피는 비비의 머리를 잠시 옆에 내려놓고 키보다 조금 높은 분수를 끙차 올랐다. 나영웅이 말한 ‘분수 위의 그것’이 무엇인지는 곧장 알 수 있었다.
“.... 아.”
한편, 카힐은 위기 상황이었다.
갑자기 강해진 도전자들 때문에 토벌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양손이 떨어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시발... 구속이 더 세졌나..”
카힐은 목 주변을 둘러싼 구속구를 손으로 쓸었다. 그녀와 앙피에게만 보이는 구속구. 처음 힘이 봉인되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불편해질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전쟁통이나 멸망한 세계도 아닌 평범한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싸움에 휘말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검은 점에 휘말려 이상한 탑의 1층 보스로 오해받아 토벌당할 것이라고는 더욱더.
“아. 이거 언제 풀리냐고!”
카힐이 주먹으로 목의 구속구를 내리쳤다. 아니, 주먹은 이미 잘려 나갔으니 손목으로 쳤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리고 그런 푸념을 들을 생각조차 없는 도전자들이 곧장 카힐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이보다 먼저 카힐을 처치하기 위해 날아드는 스킬과 칼날들. 거기에는 망설임이 담길 이유가 없었다.
카힐은 이미 체력이 다 소진되어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여기서 뒤지면 진짜 뒤지나... 앙피한테 복수해야... 아니, 난 복수하고 싶던 게 맞나...?’
“후후후. 많이 졸린가, 카힐 양?”
익숙한 목소리에 카힐이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공격들 역시 전부 사라졌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깝다는 표정을 짓는 도전자들뿐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구제받았다는 표정을 하며.
“... 돼지?”
카힐은 나영웅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카힐은 무리하게 그를 찾는 탓에 이마의 상처가 터져 피가 흘렀다.
그녀는 눈 앞으로 흐르는 피를 팔꿈치로 닦으며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나영웅은 보이지 않았다.
“나영웅..?”
“뭐야 금방 그 덩치는.”
“몰라. 갑자기 뛰어들어서 깜짝 놀랐네.”
“아씨. 내가 잡을걸. 저건 절대 안 놓친다!!”
도전자들은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스킬쿨을 돌리는 녀석들보다 무기를 휘두르는 녀석들이 먼저 잽싸게 카힐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푹. 콰득. 찌지직.
피부와 근육을 가르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귀가 아닌 몸의 진동을 통해 전달되는 기분은 참 묘하다.
그러나 모두가 급소를 노린 탓에 서로의 무기가 얽혀버렸다. 덕분에 오히려 그들의 공격이 전부 급소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수 개의 칼과 도끼가 박힌 카힐은 신음 하나 흘리지 않고 도전자들을 바라봤다.
‘내가 하려던 복수도 결국엔 이런 모습인가?’
10년 전 자신을 버린 앙피를 죽이겠다. 그가 소환술사임을 포기할 때, 비로소 자유를 얻고 그를 직접 죽이겠다.
가끔씩 흔들리긴 했어도 항상 변하지 않던 목표였다.
하지만 막상 앙피와 함께 여정을 떠난 이후로 조금씩 목표가 흐려졌다.
앙피는 생각보다 여렸다. 눈치도 없고 사회성도 없지만, 생각이 없는 애가 아니었다. 게다가 넷이서 함께하는 여정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홀로 지냈던 지난 10년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카힐은 이제 헷갈렸다.
‘후에 앙피를 죽인다면, 지금의 이들과 다른 게 뭐지?’
카힐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도전자들의 눈을 바라봤다.
그들에게선 강렬한 악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불쾌함이, 오만함이.
그제서야 카힐은 깨달았다.
그녀는 앙피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카힐은 앙피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리고 비비와 나영웅도.
‘...... 나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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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Lv. 50)의 해제 조건을 일부 충당했습니다.
구속(Lv. 50)이 임시 구속(Lv. 50)으로 줄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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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구속>
종류:디버프
레벨:50(max)
지속시간 : 영구
구속과 같은 효과입니다.
단, 특정 상황에 봉인의 효과가 줄어듭니다. 특정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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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힐은 앞에 뜨는 시스템 창 따위를 읽을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시스템 창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몸에 박힌 무기를 놓지 못한 도전자들도 덩달아 그녀에게 끌려갔다.
“이거 왜 안 빠져!”
“니가 먼저 좀 놔봐!”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견제하며 먼저 무기를 포기하는 자가 없었다. 덕분에 무기들은 여전히 얽힌 채 빼려고 할수록 더욱 견고하게 얽혔다.
카힐은 순식간에 자라난 주먹을 높게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본 도전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급하게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힐의 목에 붙어있던 구속구가 툭 하고 해제되었다. 구속구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쿵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1층에 울렸을 때, 카힐의 앞에 있던 도전자 수 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카힐에게 붙어있던 도전자만 거진 25명. 그리고 이제 1층에 남은 도전자는 10명 남짓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뿌글을 피해 도망가느라 바빴다.
“...”
카힐은 멍하니 1층을 살폈다.
앙피는 어디 간지도 모르겠고 비비는 조각난 몸통만 한쪽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나영웅은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아까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분명···.
“나영웅...”
카힐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마족의 천성을 타고난 그녀가 눈물을 흘릴 리는 없었으니까.
그녀는 돌아온 힘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돌아오면 뭐 해...!’
카힐은 바닥을 쾅 내리쳤다. 오래된 돌바닥이 그녀의 주먹을 따라 쩌적 갈라졌다. 지금의 그녀에겐 이곳의 누구라 하더라도 벌레와 같았다. 그녀가 항상 말하던 벌레.
“벌레 주제에 왜 막냐고... 나영웅!”
“후후후. 무슨 일인가.”
“으악! 시발! 뭐야!!”
한창 슬픔에 빠져있던 카힐은 깜짝 놀라서 뛰어올랐다.
익숙한 저음에 짓눌린 듯한 목소리. 분명 나영웅의 목소리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환청까지 들릴 정도로 마음이 부서진 것인가?
‘... 내가 그 정도로 걔를...?’
바닥에 떨어진 구속구가 조금씩 꿈틀거렸다.
“나영웅..?”
“왜 그러는가. 난 여기 있네.”
“뭐야! 어딨어!”
카힐이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목소리는 그녀의 발밑에서 들렸다.
발밑에는 슬라임 조각 같은 게 하나 떨어져 있었다. 카힐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쓱 들어봤다. 하마터면 터뜨려버릴 정도로 말랑한 슬라임 조각이었다. 아마 <부식된 슬라임>의 전리품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그 슬라임 조각의 정중앙에 나영웅의 얼굴이 떡하니 그려져 있었다.
“........?”
카힐은 슬라임을 손에 올린 채 빤히 쳐다봤다.
슬라임에 넙데데하게 그려진 나영웅이 눈을 끔뻑이고 있다.
“으악 시발. 개 징그러워! 죽은 거 아니었냐?”
“눈을 떠 보니 이런 모습이더군.”
나영웅이 카힐을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졌고, 분명 처치당했지만 탑의 특성에 의해 죽진 않았다.
이 미궁의 탑은 죽어도 죽지 못하고 탑의 일부가 되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나영웅은 일단 죽지 않고 슬라임이 되었다. 아까 처치된 <부식된 슬라임>의 전리품으로 흡수된 것이었다.
“그래서 일단 카힐 양 다리에 붙어있었네.”
“내 다리에..?”
카힐이 다리를 내려다봤다.
유랑 상인에게 산 짧은 치마 밑으로 드러난 허벅지에 슬라임 진액이 묻어 있었다. 나영웅 딴에는 카힐에게 말을 걸려고 열심히 그녀의 다리를 오른 거긴 했다. 근데 이게 카힐 입장에선···.
“개 변태 새끼야!!”
카힐이 슬라임이 된 나영웅의 말랑말랑한 안면을 강타했다. 그는 자칫하면 또 소멸할뻔했다.
“쿸. 일부러 보려고 본 건 아니네.”
“뭐? 봤다고? 너 이 시발 진짜!”
카힐은 진짜 나영웅을 쪼개버릴까 싶다가 참았다. 지금 구속구가 풀린 상태라 힘 조절에 실패하면 진짜 죽일 것 같았으니까.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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