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소환술사 앙피]
소환 조건 없음. 소환 재료 없음. 소환 패널티 없음.
앙피의 소환술을 방해하는 건 오직 앙피 자신뿐이다. 그런 앙피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한 순간, 이제 소환술에 한계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소환수가 모두 없어졌을 때, 앙피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맑은 정신을 경험했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지고 싶을 정도로 청아한 기분.
하지만, 앙피는 기어코 다시 소환술을 사용했다. 소환술을 쓰면 그 소환수와 연결되기 위해 뇌의 신경을 뽑아가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앙피는 이 선택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머리 정도야 늘 아팠어... 이런식으로 해결하고 싶진 않아... 그러니까...’
소환수들은 죽음으로 인해 소환이 해제된 것일 뿐, 그들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 무사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세계에서 사라진 소환수는 다시 소환하면 그만이다.
그들이 싫어할 수도 있다고? 아니, 앙피가 본 그들은 하나같이 이곳의 삶을 즐기고 있었다.
‘ㅅ... 싫으면 다시 소환 해제해주면 되니까...’
아무튼 신경 안 쓰는 앙피였다.
앙피는 퀭해진 눈으로 나르여앙을 노려봤다.
“다들 무사하죠...?”
“후후후. 또 트럭에 치여버렸군.”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곧이어 안개를 뚫고는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갸르르륵. 죽은 줄 알았네. 그르릉.”
커다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자.
“뭡니까? 갑자기 번쩍하더니 여긴 또 어딥니까?”
“아이고 삭신이야!”
강인한 근육에 갑옷으로 무장한 자와 세련된 옷차림의 노인.
그 외에 어디선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쪼그라드는 커다란 덩치의 괴수들까지.
앙피가 지금껏 만났던, 혹은 만나지 않았던 모든 소환수가 지금 이 자리에 소환되었다.
“우리가 왔네. 마스터.”
나영웅이 커다란 용을 타고 등장했다. 그 모습이 정말로 앙피를 구원하러 온 영웅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필멸자여. 죽고 싶은가?”
물론 그 용이 윈스였기에 나영웅은 곧장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앙피는 바닥에 떨어진 나영웅에게 달려가 그대로 안겼다.
“나영웅 님!”
앙피의 목소리에 당참이 섞였다.
“후후후. 마스터, 잘했네. 이젠 우리에게 맡기게나.
가자! 소환수들이여!”
빼곡한 소환수가 나르여앙 주변에 둘러서자 그녀는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흐응. 이 정도까지 가능했다고? 성가시게..”
“갸르릉. 주인님? 주인님! 무슨 일입니까!”
그사이 앙피를 발견한 하이드로가 쭐레쭐레 뛰어와 앞에 턱 앉았다.
“ㅅ..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혹시 다들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앙피가 조심스레 말하자 그의 소환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앙피를 만났던 이들은 그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봤기에 어색함을 느꼈다. 이젠 반대로 그들이 어색함을 느낀다니, 참 웃기다.
하지만, 곧 앙피의 진심을 알았는지 모두가 동시에 나르여앙을 쳐다봤다. 소환수로서가 아닌 한 명의 존재로서 앙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위기감을 느낀 나르여앙은 즉시 손을 휘둘러 전방을 썰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곧장 윈스가 바람을 일으키며 그녀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섰다. 마왕의 힘을 넣었다고 해도 고작 인간,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드래곤인 윈스의 비늘에 생채기조차 낼 수 없다.
그렇게 윈스를 필두로 다른 녀석들도 일제히 나르여앙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끼갸갹!”
저 먼발치에선 괴상한 바다 괴물을 머리에 올린 지저 왕이 뛰어왔다. 둘이 친구라도 먹은 건가. 그동안 잘 지낸 모양이었다.
앙피의 소환수들은 하나하나가 강했다.
누군가는 뒷세계를 점령했고 누군가는 중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게다가 소환수 중 일부는 지저왕과 같은 괴수였기에 나르여앙은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들에게 잠시 부탁을 한 앙피는 소환된 소환수 중 누군가를 발견했다. 중지의 감옥에서 만났던 철없는 노인, 제트. 그의 손에 들린 물건을 보고는 앙피는 좋은 작전이 떠올랐다.
“ㅈ... 제트님..!”
“으잉? 뭐여. 오랜만~”
그렇게 단 5분 만에 나르여앙은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마왕의 힘을 절반이나 가져왔다고 해도 그녀의 육체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그 강력한 힘을 계속해서 쓰기엔 몸이 버티질 못했다.
“흐억... 흐억... 너무 많아...”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앙피의 소환수들에게 제압되었다. 마족처럼 변했던 그녀의 모습도 절반쯤 풀려 인간도 마족도 아닌 애매한 모습이 되었다.
그런 그녀를 중지의 경비병 출신인 뭉치가 단단히 잡고 있었다.
나영웅 뒤에 숨어서 지켜보던 앙피는 그녀가 지친 것을 확인하고는 걸어 나왔다.
격렬한 사투를 한 자신과 달리 멀쩡한 앙피를 보니 나르여앙은 울컥 화가 났다. 앙피에 관한 정보에서 그가 소환술을 더이상 쓰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봤단 말이다.
“앙피 너... 소환술을 다시 안 쓰겠다고 약속한 걸로 아는데!”
그래, 그랬다.
여정 초반에 소환술을 쓰다 보니 오히려 여정이 힘들어짐을 느꼈었으니까. 그러다 앙피는 소환술을 이제 쓰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애초에 능력을 없애는 여정이라서.
애초에 소환술을 쓸수록 피곤해지는 건 자신이라서.
애초에 소환수 따위 앙피에게 중요하지 않아서.
그런 이유로 소환술을 쓰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ㄴ... 나 자신과의 약속은 깨도 괜찮지 않나....?’
앙피는 그런 신념 따위 손쉽게 버리는 소년이다. 그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니까!
“ㅈ.. 조금 음침하시네요... 그런 것도 조사하셨어요...?”
“네가 워낙 난리를 피우고 다녔으니까 그랬지!”
음침하단 소리를 돌려받으니 나르여앙은 신경이 긁혔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다시 반격을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저 수많은 소환수를 전부 상대하는 건 부담스럽다. 그렇기에 기회를 틈타 앙피만 데리고 도망가 죽일 생각이었다.
그러면 주인이 죽었으니 자연스럽게 소환수도 사라질 것이다.
‘괜히 지체했어. 이번엔 바로 죽인다.’
나르여앙은 앙피가 조금만, 몇 발자국만 더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앙피는 천진하게도 나르여앙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왜냐고? 조금 멀리 있어서 그런가 그녀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렸거든.
“아직도 왼섬을 파괴하고 싶으세요..?”
“으흥. 글쎄. 조금 회개한 것 같기도 하구~”
“갸르릉? 왼섬을 파괴하다니. 감히 내 사업장을!”
“넌 걔구나? 뒷세계에서 푼돈 버는 짐승 놈.”
왼섬을 없앤다는 발언에 소환수들이 발끈했다. 그들 대다수가 왼섬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앙피가 일단 놔두라는 손짓을 했기에 나서진 않았다.
자진해서 마지막 기회를 날리는 앙피의 모습을 나르여앙은 속으로 비웃었다. 그가 그녀의 사정권 안에 들어왔으니까.
그런데 그때, 앙피가 갑자기 등 뒤에서 무언가를 불쑥 꺼냈다.
“혹시... 이게 뭔지 아세요...?”
“그런 조악한 나무망치. 내가 알겠니? 근데 이건 알겠다. 넌 이제 죽···.”
“ㅎ...헤헤.. 다했다.”
앙피를 급습하려던 나르여앙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몸이 왜..!”
그야 당연하지.
앙피가 들고 있는 건 [중지의 재판봉]이니까.
세 번의 질문에 답하면, 질문자의 선고를 받게 되는 대마법사의 물건.
어느새 재판봉에서 뻗어 나온 사슬이 나르여앙의 사지를 묶어버렸다. 그런데 분명 중지에 버리고 왔던 재판봉이 어떻게 여기 있는 걸까?
그 대답으로 소환수 사이에서 제트가 건들거리며 나타났다. 아닌가 늙어서 흔들리는 건가.
“어뗘, 잘했지 아빠?”
“... 제가 왜 아빠에요......”
“날 만들었으니 아빠 아니여?”
“으악...”
둘의 만담을 무력하게 지켜보던 나르여앙이 끼어들어 소리쳤다.
“이건 뭐냐고! 소환술사가 이런 마법을 어떻게 써!”
“아.. 그게 그.. 세 번 질문에 답···. 그 뭐 있었는데... 암튼 대마법사 물건이에요 이거...”
“그런 사기적인 능력이 어딨어!”
“ㄱ.. 그러게요...?”
앙피도 이거에 당해봤기에 사기적인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있을 나르여앙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소환수들이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사슬을 끊고 앙피의 목을 딴다.
육신을 내어주고 마왕의 힘을 전부 다 흡수하면 이런 사슬쯤은 쉽게 끊어내니까.
“마왕의 힘이여. 스며들어라!”
“...”
“...”
“푸흡.”
“뭐야! 왜 안 되지?”
“후후후. 그대는 심각한 중이병인가?”
쏟아지는 조롱에 나르여앙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하지만 분명 있어야 할 마왕의 장갑이 없이 그저 맨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나... 불사야....”
마왕의 장갑을 낀 비비가 킥킥 웃으며 나르여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 맨땅에 낙뢰가 친 게 이상했다. 먼지가 된 비비가 모여있던 곳에 내리친 것이었다.
그렇게 잠시 회복할 힘을 만든 비비가 부활한 것이었다. 그녀는 죽지 않는 좀비의 몸이니까.
게다가 마왕의 장갑에서 흘러든 힘이 망가졌던 그녀의 성대를 고쳐놨다. 덕분에 어눌하지만 말을 하게 되었다.
“너... 어떻게 안 죽은... 쿠엙-!”
심하게 당황하던 나르여앙이 돌연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비비의 엄지발가락이 툭 튀어나왔다.
그때 먼지가 된 비비를 조금 마셨는데 그 부위가 엄지발가락이었다.
“내.. 발가락...!”
“우에에엑. 뭐야 이건. 으에에에에엑.”
헛구역질을 하는 나르여앙을 보며 비비는 떨어진 엄지발가락을 가져가 붙였다. 발톱도 절반이나 깨진 썩은 좀비의 발가락. 그 모습을 본 나르여앙은 위장을 쏟아낼 기세로 괴로워했다.
마왕의 장갑을 뺏긴 그녀가 앙피의 소환수에 둘러싸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생전 처음으로 패배를 경험한 나르여앙은 반쯤 실성해서 실실 쪼갰다.
한편, 앙피는 재판봉의 선고를 어떻게 내릴지 고민했다.
보아하니 이미 전의는 상실했고 더 날뛸 힘도 없었다. 굳이 심한 선고를 내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문득 예전에 봤던 양피지 하나가 앙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는 사형이다. 수고 빠셍~]
내용은 좀 변질되었지만, 나르여앙이 보냈던 그 칙령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칙령도 나르여앙의 계획 중 일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실제로는 칙사의 실수였지만).
앙피는 사적인 감정을 담아 나르여앙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ㅅ... 선고 내용 정했어요.”
“흥. 어디 죽여봐. 아니면 내가 어떻게든 널 찾아 죽일 거야. 내 모든 걸 걸어서라도 죽일 거라고!”
“소환수로 만들래요.”
“뭐?”
쿡-
“잠시.. 잠시만! 그냥 말 들을게! 그건 싫어!!”
“ㄴ... 느에..? 이미 표식 새겼는···. 어... 움직이셔서 잘못 찍었ㄴ···.”
나르여앙의 볼에 새기려던 소환수의 표식이 그녀가 움직이는 바람에 콧볼 바로 옆에 커다랗게 찍혔다. 보기 영 우스운 자리에 양파처럼 생긴 소환수의 표식이 생겨났다.
“내가.. 여왕인 내가 누군가의 밑에 들어가다니!! 말도 안 돼!!!”
얼굴에 왕 점 같은 표식이 생긴 나르여앙이 울부짖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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