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소환수 전부 죽이기 VS 마왕 한 명 죽이기
나르여앙은 앙피의 소환 능력이 죽이기엔 아까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이만 뽑아내기엔 최적의 능력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앙피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쓸모가 많았다.
하지만 앙피가 회유에 휘말릴 생각이 없어 보이자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탐나는데. 죄책감이라도 심어줄까?’
“흐응. 그럼 우리 잠깐 재밌는 놀이 좀 할까?”
나르여앙은 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에서 보랏빛 안개가 나와 그대로 하늘로 솟아났다. 하늘은 순식간에 그녀가 만든 안개로 뒤덮였고 이내 보라색 낙뢰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쿵-. 쿵-.
낙뢰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오른섬 여기저기에 내리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안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왼섬을 향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낙뢰는 앙피 옆에도 3번이나 떨어졌다.
쾅! 쾅! 쾅!
하나는 나영웅에게.
하나는 마왕에게.
마지막 하나는 빈 땅에.
하지만 낙뢰는 그들의 숨통을 끊기에는 조금 약한 수준이었다. 나영웅은 낙뢰를 맞고는 몸이 그을렸지만, 여전히 정신은 차리지 못하고 있다.
“선택권을 줄게. 하나만 골라볼래?”
쾅쾅 내리치는 낙뢰 속에서 나르여앙이 빙그레 웃으며 앙피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동그란 버튼처럼 생긴 것을 2개 만들었다. 무슨 버튼인지 몰라도 영 수상하게 생겼다.
나르여앙은 앙피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잡았다. 그리고는 앙피의 양손을 버튼 위에 하나씩 올렸다. 앙피는 여기서 뿌리치는 것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자, 너의 왼손에 있는 건 너 소환수들 전부의 목숨이야. 반대로 오른손에 있는 건 저기 저 마왕의 목숨이구.
그럼 한 번 골라봐. 너가 누르는 쪽은 죽어. 마음에 드는 버튼이 있으면 좋겠네~”
전부 죽는다. 허세로 보일법한 말에 앙피는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조금 전부터 내리치는 낙뢰가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나영웅과 마왕에게 내리친 건 단순히 보여주기식이었다. 정말로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
그렇다는 건 앙피는 정말로 선택해야 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소환했던 모든 소환수의 목숨을 끊을지.
아니면, 오늘 처음 본 마왕의 목숨을 끊을지.
‘ㄱ...그래도 마왕은 잘 모르니까... 게다가 마왕은 나쁜.... 거 맞지...?’
하지만, 앙피는 섣불리 오른쪽을 누르지 못했다.
당장 오른편 너머에서 마왕과 그의 아내 고브가 앙피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눈을 보며 목숨을 끊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이 진짜로 그들을 살해하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가. 마왕 쪽에서는 한가로운 잡담이 나왔다.
“당신, 저런 것도 할 수 있었어요?”
“당연하지. 나 마왕이다. 원한다면 인간계 전부도 한 번에···.”
“조용히 하랬지!”
마왕과 고브는 또 나르여앙에게 경고를 받았다. 그 경고가 심장을 멈춰버리는 수준이라는 걸 알면, 조용히 있어야 할 텐데.
그들은 이상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지 못했다.
설마, 앙피가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나?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을 죽이겠다고 선택하는 이는 드무니까?
하지만, 앙피는 오히려 역발상을 해버렸다.
‘여.. 역시 목격자부터 없애야 하나... 마왕을 죽이면 내가 이런 선택을 한 건 아무도 몰라...’
소환수를 죽이는 걸 마왕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마왕을 죽인다는 건 단순히 1명의 목숨이 아니다.
마왕을 죽인다는 건... 마계에 선전포고하는 것과도 같았다.
앙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냥 선택을 안 하고 시간을 질질 끌까 싶었지만, 그런 마음을 눈치챘는지 나르여앙은 위협적으로 나영웅 옆에 커다란 낙뢰를 떨어뜨렸다.
소환수를 선택하면, 지금까지 함께 있던 세 명은 물론 얼굴조차 보지 못한 무수한 소환수가 목숨을 잃는다.
그렇다고 마왕을 선택하면, 자신들의 왕을 죽였다는 것을 마계가 알게 된다면 인간계를 침공할 것이다.
한마디로, 소환수를 죽이냐, 인간계를 죽이냐다.
그렇게 고민하는 앙피를 나르여앙은 즐겁다는 듯 지켜봤다.
“마지막 선택지를 하나 더 줄게. 내 밑에서 일하렴. 날 위해 완벽한 소환수만 소환해. 그렇게 한다고 하면, 두 버튼 다 누르지 않아도 괜찮아.”
그녀는 앙피를 심리적으로 압박해 자신을 따르도록 하려고 했다. 인질을 잡았으니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에게 복종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그녀는 앙피를 너무 몰랐다.
“ㅇ.. 어.. 이미 눌렀는데요오... ㅃ... 빨리 말하시지....”
“뭐? 진짜 눌렀다고? 둘 중 하나를 포기했다고?? 뭘 포기한 건데!?”
나르여앙은 설마 앙피가 진짜 누르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협박을 위한 퍼포먼스에 가까웠단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팍 숙여 앙피가 선택한 결과를 확인했다.
꾹- 꾹-
앙피의 손은 두 버튼 위에 모두 있었다.
둘 중 고민하던 앙피는 그냥 둘 다 눌러버렸다.
쿠구구구궁-!!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로 뒤의 나영웅과 마주 보던 마왕의 머리 위로 탁한 낙뢰가 떨어져 그들을 바싹 구워버렸다. 도저히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와 빛이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바다 저 너머에서 그 수백 배는 되는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왼섬에 있던 수많은 앙피의 소환수가 일제히 낙뢰를 맞아 목숨을 잃는 모습이었다.
강렬한 빛이 시야를 뒤덮고 한참이 지나서야 하늘을 뒤덮었던 검은 안개가 사라졌다.
주변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했고 코끝에는 기분 나쁜 탄내와 쓰레기장 냄새가 뒤섞여 났다.
“하핳. 미친. 너 진짜 엄청난 애구나!?”
나르여앙은 얼빵하게 빠진 앙피의 얼굴을 두 손으로 콱 붙잡았다. 그녀는 설마 앙피가 버튼을 누를 용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두 개를 다 눌러버리다니. 이 얼마나 당돌한 소년인가.
“봐. 니가 한 짓을 봐.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
그녀의 말대로 쓰레기장에 남은 건 앙피와 나르여앙뿐이었다.
낙뢰를 맞은 나영웅은 당연히 소멸했고 고브 역시 마왕을 껴안고 같이 낙뢰를 맞아 사라졌다.
하지만 앙피는 여전히 얼빵한 표정을 지은 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보자 나르여앙은 속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그나마 그를 협박할 인질마저 앙피가 전부 없애버렸다. 이제 그를 회유도, 협박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르여앙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껏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자는 없었다. 여왕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왕궁 사람이든 손바닥의 무법자든 전부 자신의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왕의 힘까지 이용했는데도 전혀 들어처먹을 표정조차 짓지 않는 앙피를 보자 피가 끓었다.
“본인이 소환한 소환수조차 어색해한다는 걸 들었을 때 알았어야 했어. 넌 이런 큰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ㄱ... 그러게요... 그냥 절 냅두셨으면 좋았을 텐데...”
앙피가 눈치 없게 말대꾸를 하자 나르여앙은 그대로 앙피의 멱살을 잡았다. 귀여워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제 그녀는 앙피를 그냥 죽여버리기로 생각했다.
그전에 조금만 괴롭히고.
그녀는 앙피의 어깨에 검지를 박아넣었다. 그리고는 죽지 않을 정도의 검은 안개를 주입했다. 검은 안개는 앙피의 혈관을 타고 신경 여기저기를 찌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앙피는 생전 느껴보지 못한 고통에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나르여앙은 앙피의 목을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멍청해. 화가 날 정도로 찌질하고 멍청해. 그러니까 소환수들이 그 모양이지.”
나르여앙은 그나마 카힐과 비비, 나영웅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앙피 일행 때문에 진작 미쳐 돌아버렸을 테니까.
지금까지 앙피에게 들인 수고를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야 했다.
하지만 앙피는 손 마디 하나하나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조여오는 목을 겨우 움직이며 힘겹게 말했다.
“ㅇ... 나르여앙 님은 왜 그러지 않아요? 나르여앙 님도 저와 똑같이 누군가를 다스리는 위치잖아요...!”
“그래. 네가 말했네. 우린 다스리는 위치야. 애초부터 그걸 위해 그런 힘을 갖고 태어난 거라고.
그러니 마지막 기회야. 죽기 싫으면 바닥을 질질 기어. 그럼 소환수 만드는 노예로라도 써줄 테니까.”
나르여앙은 마음에도 없는 기회를 줬다. 그냥 마지막으로라도 앙피의 비굴한 모습을 보고 싶어서.
하지만 앙피가 그런 일에 동의할 리가 없다.
“ㅇ... 그...”
아닌가. 고민하는 눈썹이다.
하지만 역시 앙피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전 한두 명도 신경 쓰기 힘들어서... 그리고 노예는 싫어요...”
“그럴 줄 알았어. 멍청하고 소심하고 음침한 남자애. 넌 누군가를 다스리기엔 어울리지 않아. 능력이 아까워.”
나르여앙은 앙피를 그대로 바닥에 던져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앙피는 목을 부여잡고는 캑캑거렸다.
그래도 발버둥을 심하게 친 덕인가 몸에 들어왔던 검은 연기가 거의 빠져나가 고통은 줄었다. 하지만, 몸을 조금 움직이는 수준일 뿐 애당초 여기서 나르여앙에게 반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맞아요... 전 누구도 다스리기 싫어요... 전 소환수의 주인 같은 건 되기 싫어요...
저는...... 차라리 소환수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앙피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닥에 짚었다.
애당초 친해지기 싫다고 생각한 적 없다. 다만 친구의 정의가 앙피에게 너무 어려웠다.
이 정도면 친구일까. 내가 친하다고 생각해도 저분들은 아닐 수도 있잖아.
같이 지내고 싶은 건 단순히 내 욕심이 아닐까.
...
항상 되뇌기만 하던 생각을 지금 와서 하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지? 소환수들의 곁으로 갈 생각을 하니 행복하니?”
“네. 곧 만날 생각에 기뻐요.”
바닥에 짚어놨던 손끝에서 익숙한 느낌이 피어난다.
“소환술.”
자신을 속이며 고민만 반복한 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근데 막상 그들이 없으면 그런 고민 따위 무슨 소용이야.
“범위 제한, 인간계.”
상처받더라도 솔직해지자고. 소환수가 아닌 친구로서 부탁하자고.
“다중 소환.”
어색하더라도 이젠 그들과 같이 있고 싶다고. 앙피는 느꼈다.
앙피의 주변으로 하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나르여앙의 검은 안개와는 결이 다른 짙고 무거운 안개.
그 안개가 앙피를 감싸고는 이내 나르여앙까지 삼키고는 주변반경을 전부 뒤덮었다.
그 짙은 안개 속에서 하나둘 발자국이 피어난다.
뚜벅거리거나 저벅거리는. 혹은 바닥을 뒹구는 듯한 소리가 바닥 여기저기서 피어난다.
“뭐야. 이 얼빵한 놈이 지금 뭘 한 거야!!”
그 얼빵한 놈이 어떤 소환술사인지 똑똑히 보길 바란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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