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무너지는 도미노, 그 끝의 앙피
한편, 나르여앙은 무언가를 예감이라도 한 듯 그대로 마왕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도 잠시 빠져있어야겠다.”
“내 힘으로 나에게 덤비다니. 멍청이냐.”
“흐응. 안타깝게도 인간 세상에선 멍청하면 못 살아남아~”
나르여앙은 능글맞은 얼굴로 마왕의 뒤편을 손가락으로 쿡쿡 가리켰다.
그곳엔 이미 잘려 나간 마왕의 두 뿔이 있었다. 마족의 뿔은 타인이 자를 수 없다. 그렇기에 카힐도 뿔이 잘린 게 아니라 자라지 못하는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르여앙은 마왕의 힘을 갖고 있었기에 마왕의 뿔을 잘라낼 수 있었다.
“이... 대체 언제...!”
“원래 일은 한 번에 하는 게 효율적이야. 왕이 그런 것도 모르니?”
나르여앙이 발로 마왕의 복부를 차버렸다. 뿔이 잘린 마왕은 힘을 완전히 잃고 그대로 넘어졌다.
아까의 그 공격.
단순히 앙피 일행만을 노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에 마왕까지 한꺼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여보!”
“크윽. 몸에... 힘이...”
마왕은 자신을 감싸려는 고브를 오히려 감쌌다.
“마족도 사랑이 있는 걸까? 걱정 마. 방해만 안 하면 죽이진 않을게. 난 자비로운 왕이니까.”
이제 자신을 위협할 존재가 없어졌다고 확신한 나르여앙은 고개를 돌려 앙피에게 다가갔다.
앙피는 다가오는 그녀를 피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비비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비비는 이미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해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당장 잘려 나간 목을 회복할 기운도 없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앙피, 네가 왜 대마법사를 찾는지 알아.”
나르여앙이 뒷걸음질 치는 앙피를 아주 천천히 쫓으며 말했다. 그녀는 마치 이 상황이 즐겁기라도 한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앙피를 귀여워했다.
앙피가 소환술 능력을 없애려고 대마법사를 찾는다는 사실까지 아는 것인가. 그렇다면 저런 여유가 나오는 것도 이해되었다. 저걸 안다는 건 이미 앙피의 모든 걸 안다는 소리니까.
“ㄱ... 그걸 어떻게...”
“혁명이겠지.”
아, 틀렸네. 나르여앙은 한참 잘못 짚었다.
어떻게 생각했으면 앙피를 혁명가로 생각한 것이지? 그런 대의를 위하는 성격이 아닌데.
앙피도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모른 척 말렴. 넌 각 마을의 독립을 원하는 거야. 네가 살던 소지는 스스로 성장할 거리가 없으니, 다른 섬들을 도와줘서 은근슬쩍 끼어가려던 것. 맞지?”
아무래도 앙피가 모든 손가락을 돌며 마을을 뒤집어엎고 다닌 것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인장을 모은다는 것은 그럴싸한 핑계. 결국 모든 마을을 갈 생각이었잖니. 그렇게 마을도 도와주며 대마법사와 접선해 완전한 독립을 꿈꾼 거지.”
“...아니에요.. 전 그냥 능력을 없애려고...”
“그런 거짓말은 안 해도 된단다.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원을 빌겠다고 이런 모험을 하니?”
앙피요.
“ㅈ... 진짜···.”
“됐어. 거짓말은 지겨워. 어차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니까.”
나르여앙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앙피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마왕의 힘 따위 쓰지 않아도 앙피를 제압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앙피는 소환술을 빼면 그냥 힘없는 남자애였으니까.
그래, 소환술을 빼면.
“쿠에에엙!”
비비가 그런 그를 구하러 나르여앙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있는 힘껏 지른 것 같은 괴성도 평소에 비하면 힘이 심하게 빠진 소리였다.
지칠 대로 지친 비비가 달려들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힘없이 나르여앙의 손목을 무는 것뿐이었다.
“윽. 애완견 관리는 잘했어야지 앙피. 사람을 물게 키우면 어떡하니.”
나르여앙은 장갑을 낀 손을 뻗어 그대로 비비를 토막냈다. 그녀의 표정에 혐오가 섞여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저 친구는 처음부터 별로였어. 생긴 것도 영, 손바닥 놈들이 생각난단 말이야. 그 지겨운.... 어머? 보통 애완견이 아니었네?”
“크르르륽..”
비비는 다시 회복한 모습으로 나르여앙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평소보다 더 사납고 과장된 목소리로 울어댔다.
비비는 이미 한계치다. 불사의 몸이라고 해도 무한 동력은 아니다. 회복하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무엇이라도 주워 먹어야 했다.
비비는 일단 배에 넣으면 웬만한 건 다 소화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옆에 쌓인 쓰레기 더미를 쳐다봤다.
언제 버려진 지 모르는 고철과 썩은 음식들이 섞인 쓰레기 더미. 곳곳에 오물과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비비는 그런 걸 입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비비의 본능이 아까부터 외치고 있다. 곧 있으면 앙피는 물론 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이라고.
그렇기에 비비는 주저 없이 쓰레기 더미를 향해 뛰었다. 마왕의 부하도 단신으로 쓰러뜨린 그녀였기에 배만 좀 채워진다면 어쩌면 나르여앙을 이길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게 두겠니?”
스윽. 샤사삭.
나르여앙은 공중에 사인을 하듯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뛰어가던 비비의 몸이 그대로 조각나 바닥에 흩어졌다.
비비는 얼른 다시 몸을 붙여 회복하려 했지만, 나르여앙이 가만두지를 않았다.
나르여앙은 회복하려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쉴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얼마나 회복하는지 궁금하네~”
새액- 새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 속에 비비는 비명을 지를 성대조차 계속해서 잘렸다.
“그만.. 그만해요..!”
앙피가 나르여앙의 허벅지를 붙잡고 끌어냈지만, 소환수가 없는 그는 무력함 그 자체였다.
손바닥만 했던 비비의 조각은 곧이어 손톱만 하게 바뀌었고 결국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다져져 공중에 흩어졌다.
나르여앙은 매캐한 먼지를 마시기라도 한 듯 기침을 하며 손을 휘적였다.
“ㄱ... 그런 힘이 있으면... 왼섬에서 직접 하시면 되잖아요... 왜 저희한테.....”
앙피는 공중으로 흩어진 비비를 찾기라도 하듯 공중을 멍하니 바라봤다.
“왼섬을 직접? 아니, 난 질렸어.”
나르여앙은 그런 앙피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말했다.
“난 왼섬을 부흥시키려 최선을 다했어. 하지만, 그들은 내 노력도 모르고 오히려 자기들 밥그릇을 키울 생각밖에 없었어!
그러니 이제 왼섬의 사람들을 통제할 방법은 단 하나야.”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지른 나르여앙은 앙피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왕의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없애는 것.”
나르여앙이 장갑에 조그만 상처를 냈다. 그러자 장갑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흘러나와 나르여앙의 팔을 타고 그대로 그녀를 감쌌다.
마왕의 보랏빛 기운에 휩싸인 나르여앙은 마치 마족처럼 모습이 변해버렸다.
그녀는 왼섬을 통째로 없애고 오른섬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생각이었다. 나르여앙이 마왕의 힘을 더욱 이끌어냈는지 이젠 눈빛 하나로 마왕과 고브의 심장을 1초간 멎게 만들었다.
“너무 좋아. 이렇게나 흘러넘치는 힘을 안 쓰다니!”
“크어어억... 아무 방해도 안 했···.”
“이번엔 제대로 된 유토피아를 만들 거야! 내가 완벽한 섬을 만들 거라고!!”
“ㄱ.. 그치만.. 오른섬의 손가락을 파괴한 것도 나르여앙 님 본인이잖아요...”
“그야 그것들을 두면 또 반복될 테니까. 그러니 내가 직접 고를 거야. 내가 원하는 녀석들만 오른섬에 들여서!”
그렇게 기쁨에 가득 차 웃는 나르여앙을 향해 앙피는 속삭이듯 말했다.
“...... 꼭 그렇진 않아요...
원하던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당장은 싫었더라도···.”
앙피는 지난 과거 속에서 나르여앙과 같은 길을 걸었다.
원하는 소환수가 아니라서. 너무 무서워서, 두려워서, 어색해서. 그는 소환수를 버렸다.
하지만 막상 같이 그들과 다닌 앙피는 이제야 깨달았다.
“같이 있다 보면 좋아지는 사람들도 있어요...”
앙피는 세 사람과의 지난 여정이 좋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 그럼 이 녀석도 그런지 보자.”
나르여앙이 이번엔 손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그 검은 연기는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려오더니 그대로 바닥에 누워있던 나영웅에게 흘러 들어갔다.
태평하게 코를 골며 강제 취침하던 나영웅의 코로 검은 연기가 흘러 들어갔다. 그러자 나영웅은 꾸에엑 하는 돼지 비명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호호호. 이 무슨 일인가.”
어쩐지 웃음소리가 나르여앙처럼 변했다. 좀 열받게.
“몬스터. 가서 앙피를 붙잡으렴?”
“호호. 이 몸이 마스터 이외의 말을 들을 것 같나?”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검은 연기에 빼앗겨 앙피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몸이 말을 안 듣네! 왜 이러는가!”
“아오 시끄러. 빨리 뛰어가서 붙잡기나 해~”
나영웅이 나르여앙의 말에 복종하며 앙피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그는 앙피를 코앞에 두고 갑자기 멈춰 섰다.
“뭐야. 왜 갑자기 멈춰?”
“ㄲ... 끄으아아아아! 이 몸을 함부로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가!! 난 영웅이 될 몸이다. 난 나영웅이다!!!”
나영웅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나르여앙의 강제 명령에 저항했다.
“뭐? 어떻게 하는 거야 그거? 마왕의 힘을 어떻게 버티는 거냐구.”
“호호호. 이것이 나의...! 나의...의. 의. 의어어어어어~”
나르여앙이 손가락을 튕겨 나영웅의 생각을 막아버렸다. 그러자 나영웅은 무생물체처럼 나르여앙의 명령만 따르는 바보가 되어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앙피를 붙잡았다.
“ㄴ... 놔요...”
앙피가 그의 손을 뿌리치며 말하자, 나영웅은 손을 놨다.
그래, 아무리 나르여앙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인다 해도 결국은 앙피의 소환수. 그의 명령 역시 따라야 했다.
“뭐하니? 빨리 잡아!”
“하지 마요....”
“제압하라고!”
“싫어요...”
두 명령을 둘 다 듣느라 나영웅은 고장 난 로봇처럼 몸을 뚝딱거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춤을 추듯 팔을 뻗었다 굽혔다만 반복했다.
‘그만... 그만하게 이 사람들아...’
“아이씨. 하라고!!”
나르여앙이 더욱 짙은 안개를 내뿜어 나영웅 몸에 그려진 앙피의 소환수 표식을 가려버렸다. 그리고는 그가 앙피의 말을 듣지도 못하게 두 귀를 막아버렸다.
그러자 나영웅은 더이상 앙피의 말을 듣지 못하고 나르여앙의 명령대로 앙피를 붙잡아 제압했다.
앙피의 팔을 뒤로 꺾어 그대로 밑에 깔고 앉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육중한 몸무게를 앙피로서는 들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영웅 님 정신 차려요...!”
“어머 안 됐네. 아무래도 그 몬스터는 앙피를 안 좋아하나 보다. 차라리 나랑 같이하지 않을래 앙피?”
“싫어요...”
“왜? 너도 마왕처럼 능력 하나 제대로 못 쓰잖니. 내가 다 도와줄게. 내 유토피아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ㄱ.. 그러면 잠도 마음껏 잘 수 있어요...?”
“그럼~. 최고급 침대와 잠이 솔솔 오는 향을 피워줄게.”
“.... 역시 싫어요. 그리고 나영웅 님은 몬스터가 아니에요! 사람이라고요!”
그 목소리의 떨림을 들었는지 초점이 없는 나영웅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뭐? 저런 게 인간일 리가 없잖니~ 농담도 참.”
나영웅의 양쪽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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