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사천왕 중 최약체인데 혼자 남았으면 뭐라 불러야 하지
손가락을 쫙 펼친 모양이었던 오른섬은 어느새 주먹을 쥔 손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모든 손가락이 사라졌고, 그 손가락에 있던 주민들 또한 행방이 묘연해졌다.
“흐흐. 사라졌나.”
고브가 사라진 중지를 보며 웃어댔다.
자신이 살던 마을이 사라진 사람이 보일 반응이 아니었다.
“ㅇ... 왜 웃어요...?”
그리고 그런 찜찜함을 안고 갈 앙피도 아니었다.
“흑흑... 결국 사라졌나... 라고 했다.”
고브는 뻔뻔하게 부인하며 애꿎은 눈꺼풀을 닦으며 우는 척을 했다. 그 뒤로도 의미 없는 변명이 따라왔다.
그를 붙잡고 계속해서 추궁할 수도 있었지만, 앙피는 그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이 도망쳐온 곳엔 마왕 성이 있었다. 작전이고 준비고 곧장 마왕 성에 도착한 것이었다.
‘하긴... 대마법사만 찾는데 작전이 왜 필요해...’
그러는 사이 카힐이 뚜벅뚜벅 마왕 성을 향해 걸어갔다.
“와 시발. 똑같은데?”
마왕 성에서 일을 해봤던 그녀였기에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었지만, 이 웅장함만은 여전히 기억한다. 타죽은 시체로 쌓은 성벽과 용암을 덕지덕지 발라 강렬한 붉은 색을 내뿜는 성채. 여기저기 뚫린 창문이란 것에서는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저 안은 인간은 들어가기도 힘든 온도로 어렸던 카힐은 마치 폐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었다.
“꾸어어?”
비비가 그 사실을 모르고 함부로 성문에 손을 대려고 하자 카힐이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안 돼! 마왕 성은 왕궁과는 달라. 마계는 이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남기 힘든 곳이라고. 성문에 함부로 손을 대면 그대로 영혼까지 불타 사라질 거야.”
“후후후. 그런 건 좀 진작 말하게.”
카힐이 가장 중요한 말을 맨 뒤에 하는 탓에 나영웅이 이미 성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야 이 미친놈아!”
“이런. 내 모험은 여기까지인가. 이번엔 울지 말게 카힐 양.”
나영웅이 카힐의 눈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앙피가 한마디 거들었다.
“저... 창문에서 나오는 증기가... 안 움직이는데요....?”
그 말에 카힐이 나영웅의 손을 치우며 마왕 성의 창문을 바라봤다.
정말로 앙피 말대로 창문에서 나오는 증기가 가만히 멈춰 있었다. 마치 그림인 것처럼 말이다.
“뭐야. 시발.”
이상함을 느낀 카힐이 성문을 발로 뻥 찼다.
그러자 성문은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아니, 마왕 성이라 생각한 거대한 그림이 뒤로 넘어갔다.
쿵-! 뽀각.
마왕 성 그림은 바닥에 쓰러지며 그대로 부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타난 것은 그림보다 더 조잡한 모습의 풍경이었다.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듯한 가구들이 맨땅에 놓여있었고 마족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웅장했던 마왕 성 뒤에는 허름한 쓰레기장 모습의 10평 되지 않는 공간이 전부였다. 그 옆에는 망가진 가구가 잔뜩 놓인 거대한 쓰레기 산과 황폐한 대지가 펼쳐졌다.
그리고 저쪽의 다 망가진 냉장고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너흰 누구냐.”
커다란 뿔이 달린 남자가 이가 나간 커피잔을 갖고 소파에 앉았다. 그가 앉은 소파마저 팔받이 부분이 부서져 있었다.
“마왕님....?”
카힐이 그 남자의 정체를 직접 말해주었다. 뿔과 새하얀 피부만 빼면 점잖은 중년으로 보이는 저자가 마왕이었다.
“흠? 나를 아냐?”
“ㅁ... 마족은 인간이랑 비슷하구나...”
“아냐. 마족도 저마다 생김새가 달라. 나영웅도 인간인데 몬스터처럼 생겼잖아.”
“후후. 몬스터는 좀.”
그리고 그때, 옆의 쓰레기 산에서 마족 하나가 침대를 머리에 얹고 나타났다. 온몸이 뾰족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돌로 만든 밤송이 같은 모습의 마족이었다.
“마왕.. 침대 찾았다.. 전보다 더 푹신하다..”
마치 돌을 비비며 내는 듯한 목소리였는데, 얼굴이 어딘지 안 보여서 어디로 말하는지도 알아볼 수 없었다.
“오. 잘했다, 르방! 저기 탁자 옆에 두거라.”
마왕의 말을 따라 침대를 옮기던 르방은 쓰러진 마왕 성 그림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침대를 떨어뜨렸다. 그 바람에 침대가 르방의 뾰족한 발등에 떨어지며 안의 솜이 다 튀어나왔다.
“뭐하냐! 침대가 망가졌···.”
“침입자... 없앤다...”
르방이 발을 구르니 바닥에서 현무암이 솟아나 그대로 마왕을 감쌌다.
“마왕.. 안에서 안전히 기다려라..”
“...!”
마왕은 한숨을 쉬며 그냥 르방이 만든 벙커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르방은 거대한 바위 같은 몸집으로 앙피 일행 앞에 섰다.
“또... 또 부수냐...”
“안녕핫.... 혹시 대마법···.”
“야! 지금 그럴 때냐! 피해!”
카힐이 앙피를 안고 굴렀다. 그리고 바로 르방의 주먹이 금방까지 앙피가 서 있던 곳에 박혔다.
쾅-!
르방의 주먹이 바닥에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그는 파편이 떨어지는 주먹을 다시 들어 올리며 앙피 일행을 노려봤다.
“우리 사천왕... 인간이 다 죽였다... 우린 교류를 위해 왔을 뿐인데 악당 취급했다!”
르방이 거대한 몸을 쿵쿵 움직이며 집요하게 앙피만 노렸다. 그도 평생을 마왕을 섬겼던 이라 본능적으로 누가 중요한 사람인지 아는 것이었다.
“야 이 시발. 어쩌라고! 우린 아니야!”
카힐이 르방의 주먹을 피해 그의 종아리를 발로 찼다. 하지만 부스러기만 나올 뿐 전혀 타격이 없었다.
서서히 힘이 돌아오고 있는 카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인간의 범주에서만 해당이었다. 마족에게는 그런 미미한 차이가 아무 의미 없었다.
르방은 그녀의 타격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그대로 카힐을 밟아버렸다.
끄극-.
“난... 사천왕 중 최약체다... 근데 이젠 아니다!”
르방은 다른 사천왕이란 놈들을 생각하며 카힐을 밟았다. 본래 사천왕 막내였던 르방이었지만, 다른 사천왕이 전부 죽어버려 이제 그가 가장 셌다.
근데 혼자 남았는데 아직도 사천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혼자 살아남았으니 그가 사천왕 중 최강이었다.
“으윽! 얘 좀 떼봐!”
카힐은 팔다리로 몸을 감싸 뼈를 으스러뜨리는 대신 완전히 깔리지 않게 버텼다. 하지만, 가장 강한 카힐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데 다른 녀석들이 그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카힐이 납작한 접시가 되게 둘 수도 없었다. 그녀는 비비처럼 완전한 불사가 아니었으니까.
“ㅇ... 어 그러면...”
앙피는 하찮은 팔로 르방의 다리를 밀며 작전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르방을 공격할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마스터! 좋은 작전이라도 있나?”
“으아뇨...”
“끄게게겕.”
그때 비비가 무언가 말했다.
그녀는 르방의 다리를 물어뜯으며 목을 가는 소리를 계속해서 냈다.
그러나 앙피는 비비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성대를 긁으며 내는 것 같은 소리를 알아듣는 게 더 신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항상 비비의 말을 알아듣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나영웅 님... 비비 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저 발치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나영웅이 당황한 듯 앙피와 비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후후후. 비비 양, 다시 말해주겠나?”
“꾸에엙! 끄갸갹! 우어어..”
앙피에게는 아까랑 전혀 다른 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나영웅은 정말로 알아들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앙피에게 잠시 멀리 떨어지라고 했다.
“비비 양이 도와달라는군. 카힐 양이 깔려 죽기 전에 자신의 작전을 따르라고 하네.”
나영웅은 그렇게 말하며 즉시 르방에게 달라붙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뾰족하게 튀어나온 현무암을 밟으면 위로 올라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의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는지 르방이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어깨까지 올라온 나영웅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몬스터...”
“후후후. 몬스터는 그대 아닌가.”
르방은 밟고 있던 카힐을 놔주고 몸에 올라탄 나영웅부터 떼려고 했다.
쾅-!
르방이 마치 몸에 붙은 벌레를 잡듯이 자신의 몸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나영웅은 미련 없이 바로 바닥으로 뛰어내렸고 르방은 애꿎은 자신의 어깨만 공격했다. 그의 주먹에 맞은 어깨가 바스러져 파편이 떨어졌다.
“지금이네 비비 양!”
바닥으로 내려온 나영웅은 깔려있던 카힐을 챙기며 소리쳤다. 비비는 이때다 싶어 르방의 몸에 올라탔다.
그러나 이번에는 르방이 곧장 비비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두 번 안 당한다.. 르방 바보 아니다..”
르방이 비비가 달라붙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계속해서 비볐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 하나.
비비는 불사다.
“우어어어!”
비비는 주먹에 닿기 직전 스스로 몸을 조각내어 피해를 분산했다.
“괴물이다! 몸이 조각났는데 안 죽는다!”
그리고 그가 모르는 사실 둘.
비비는 몸이 조각난 상태로 움직인다.
그녀는 조각낸 머리, 몸통, 팔, 다리 등을 그대로 움직이며 르방의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으악.. 떨어져라!”
그 괴상한 모습에 르방은 겁을 먹었다. 웬 여자애가 몸을 스스로 조각내더니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었으니까.
르방이 그녀를 떼어내려 손으로 치면, 애꿎은 자신의 몸만 파손되었다.
“쿠게겔...”
그리고는 엄청난 속도로 르방의 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르방에겐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한번 생각해봐라.
조그만 청개구리가 몸이 조각난 채 나한테 달라붙어 몸 여기저기를 엄청난 속도로 기어 다닌다.
“으어어어!”
그녀를 떨치려고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공격하던 르방은 비비의 머리통이 어깨 정중앙에 온 순간 비명을 질렀다.
마치 돌을 맷돌에 넣고 돌리는 듯한 비명과 함께 숨겨놨던 그의 머리가 쑥하고 어깨에서 솟아났다.
솟아난 르방 얼굴의 눈두덩이에는 비비의 머리통이 씩 하고 웃으며 올라타 있었다.
르방은 그대로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가격했다. 그리고는 쿵 소리를 내며 그대로 땅에 쓰러져버렸다.
그렇게 뾰족했던 그의 몸은 다 마모된 채 머리도 떨어져 나간 르방이었다.
르방을 물리친 비비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몸을 조립했다. 돌아온 그녀는 우선 카힐의 상태부터 걱정했다.
“꾸어?”
나영웅이 안고 있는 카힐의 몸은 여기저기 멍이 들긴 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조금만 누워있으면 부러진 뼈와 끊어진 근육도 곧 회복될 것이었다.
“니가 나보다 강한 것 같냐 왜.”
“꾸헿.”
카힐은 비비의 머리를 자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영웅을 쳐다봤다.
따지고 보면 나영웅이 비비의 작전을 알아듣고 스타트를 끊어준 덕분이기도 했다.
“맨날 구라까는 줄 알았는데. 진짜 비비 말을 알아듣던 거냐?”
“후후후. 당연하지.”
나영웅은 비비와 눈을 맞추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비비 양이 뭐라 하는지 전혀 모른다. 하지만 동료의 감정을 알아채는 건 쉽지. 카힐 양을 걱정하는 마음. 충분히 느껴졌네, 비비 양.’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나영웅은 이미 비비와 마음이 통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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