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이딴 게 음식?
이 음식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일단 검은 털처럼 보이는 게 국수 같은 면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잔디를 으깬 듯한 초록 액체는 여전히 뭔지 모르겠지만.
그럼 국수에 가깝다는 건데 문제는 젓가락도 없이 수저만 덩그러니 줬다는 것.
‘.... 먹는 게 맞나...?’
“뭐해. 안 먹어?”
장래는 그 수상한 음식을 잘도 떠먹었다. 수저로 검은 면(?)을 으깨고는 국물과 섞어 먹었다. 근데 그의 수저가 이상한 녹빛을 띄고 있는데 괜찮은 건가.
어쨌든 장래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보기엔 저래도 맛은 있나 싶었다. 음식이 꼭 비주얼이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다른 마을의 음식도 존중해줄 필요는 있었다.
“후후후. 이 몸은 예전에 걸레처럼 생긴 천엽이란 것도 먹어봤지.”
“처녀...?”
“천엽일세. 논란이 생길 언행은 삼가해주게.”
나영웅은 편견 없는 마음으로 눈앞의 음식을 입에 넣었다.
녹진하게 입 안을 감도는 육수, 혀끝에 감기는 면발. 입에 넣자마자 이제껏 맛보지 못한 신세계가 열렸다.
“꾸에에에에엙...”
나영웅이 먹은 국수를 그대로 토해냈다.
아무래도 신세계가 황무지였던 모양이다. 나영웅은 이 음식에 대한 평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일주일간 머리를 감지 않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깻잎에 싸 먹는 맛.’
흙바닥의 풀뿌리까지 뽑아먹던 비비도 그릇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으으으..”
비비는 갑자기 멍청한 좀비가 된 연기를 하며 음식을 못 본 척 허공을 응시했다.
“미친 돼지가 못 먹을 정도라고? 설마 독이라도 탄 거 아니야!? 이 교활한 노인네가 식당 넘겨주기 싫어서!”
“뭔 개소리여! 이렇게나 맛있는걸!”
장래는 이미 본인 몫을 다 먹고 카힐의 그릇까지 뺏었다.
나영웅이 거짓으로 음식을 뱉을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래는 정말 저걸 맛있다고 먹는 것이었다.
“먹기 싫으면 가거라! 주변 식당에도 이야기는 해놨으니 민폐 끼치지 말고.”
“네..!”
바로 앙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그릇은 물론 수저조차 깨끗하게 놓여있었다.
***
엄지의 도시까지는 꽤 걸렸다. 장래가 마차를 빌려주었지만, 말이 여전히 병에 걸린 것처럼 미쳐 날뛰어서 도저히 탈 수가 없었다. 결국 걸어서 이동하다 보니 해가 머리 위까지 올라온 후에야 도착했다.
이 도시의 이름은 ‘나르’였는데 그 나르여앙에게서 따온 것이 맞았다. 나르여앙이 태어나 자란 곳이 이 엄지였다.
원래 왕궁이 있던 곳이어서 이렇게나 부유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나르여앙이 손바닥으로 거처를 옮겼음에도 여전히 그 관습이 남아 부유함을 유지한 것이다.
왕궁의 흔적도 아직 남아 있어 나르에는 세 가지 구역이 있었다.
제일 중앙에 원 모양의 1구역. 그리고 도넛처럼 그 주변을 감싸는 2구역, 그 주변의 또 3구역.
총 3겹의 구역으로 나뉘어 다양한 상점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미 본래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안쪽으로 갈수록 이런저런 혜택이 많아지는 건 여전했다. 가격을 더 비싸게 팔아도 된다거나 더 넓게 가게를 확장해도 된다거나.
그리고 장래에게 받은 식당은 가장 외각인 3구역에 있었다. 그것도 입구에서 가장 멀어서 사람의 발길이 거의 안 닿는 곳.
앙피 일행이 지나가자 외부 상인인 줄 알은 다른 가게 주인들이 열심히 호객행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이 식당 열쇠를 든 것을 보고는 금세 열기가 식었다.
“뭐? 너희가 여기를 샀다고? 여기 원래 주인 할배가 사기 치다 걸려서 평판 디지게 나쁜데.”
옆 가게 주인인 마뇨르 씨가 혀를 차며 그들을 반겨주었다.
“뭐? 아니 목숨을 구해줬는데 이딴 식당을 줘? 이 망할 할배가!!
아내 이야기는 왜 하다 만 거야.”
카힐이 분노하며 문을 주먹으로 쳤다.
글쎄, 운영 잘~ 하면 모은다니까~. 장래의 아내도 이 식당 때문에 욕을 하며 떠났었다. 딱히 아내가 사랑했던 마지막 식당이다 같은 감동 스토리랑은 거리가 멀었다.
“가게로도 사기를 치다니, 역시 장래 할배답네.”
“후후후. 음식이 이상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네.”
“음식은 안 이상했는데? 할배 음식 하나는 잘했어. 가격으로 사기를 치다가 걸린 거거든. 메뉴랑 받는 돈을 다르게 했어. 여간 영악한 노인이 아니었다니까.”
마뇨르 씨가 조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는 할 일이 있다며 먼저 가버렸다. 보아하니 장래와 가깝게 지냈던 것 같았다.
“식당 이름 봐라.”
카힐이 식당 입구에 걸린 간판을 빤히 바라봤다.
[장래 식당]
사기가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이름 때문에 잘 안되던 식당 아닌가. 간판부터 이미 식당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곳이었다.
게다가 간판에 이름을 장래가 직접 썼는지 ‘당’의 ‘ㄷ’이 찌그러져 ‘ㅈ’으로 보였다.
“장례식장...?”
“후후후. 간판부터 바꿔야겠군.”
“근데 바꿀 돈이 없잖아. 어차피 식당이 음식이 중요하지, 외관이 중요해? 일단 들어가자.”
카힐이 맞는 말을 했다.
간판 따위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식당이니만큼 중요한 건 맛. 근데 저런 이름으로 식당인 걸 알릴 수나 있나.
앙피는 장래에게 받은 열쇠로 식당의 문을 열었다. 최근에 정리했다더니 문을 열자마자 먼지가 뭉게뭉게 나왔다.
“콜록- 콜록-.”
“쿠그르륽.”
비비가 먼지를 먹었는지 목을 긁어댔다.
짐을 빼다가 긁었는지 여기저기 찢어진 벽지와 긁힌 바닥. 조명은 취조실처럼 중앙만 겨우 비추고 있었고 어디선가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와.. 뭔 식탁도 하나밖에 없냐.”
“ㅇ... 의자는 아예 없어요.... 식당인데...”
앙피가 새끼에서 운영하던 가게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여기는 더 심각했다.
당장 영업을 시작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해야 할 게 많아요...”
그나마 식당에서 일해본 앙피를 필두로 새 식당 일으키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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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
- 청소
- 식탁, 의자 배치
- 요리 정하기
- 식자재 거래처 만들기
- 각자 할 일 정하기
- 홍보 및 영업 시작!
목표는 100만 골드.
(50/1,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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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괜찮다. 일단 식당을 하면 성공할 자신이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식당 청소를 하기 전 나르부터 돌아다녔다. 여기엔 어떤 식당이 있는지 조사해야 적당한 음식을 정하니까.
하지만 나르에는 식당이 단 2곳밖에 없었다. 그것마저도 무슨 커다란 젤리 덩어리를 파는 식당.
식당 앞에는 [한 입 거리 배부른 영양가 최고]라는 어색한 문구의 홍보물이 부착되어 있었다.
시험 삼아 이를 먹어본 카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궁의 탑에서 나영웅 입에 넣고 씹었으면 딱 이 맛일 듯?”
슬라임 조각으로 변했던 나영웅과 같은 맛이란다. 음식 이름도 그냥 ‘먹’이다. 그런데 엄지인 중 그 누구도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엄지인을 몇 명 붙잡고 물어본 결과, 엄지에는 원래 음식이 없다고 한다.
나르여앙이 엄지를 떠날 당시 국민들에게 엄지의 신념을 전부 전파하고 떠났다.
돈을 모으는 법이나, 거래자와의 신뢰. 그리고 타 마을과의 관계 유지.
그러나 딱 하나. 엄지의 음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싶어 딱히 요리법 같은 걸 남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엄지의 도시로 들어온 엄지인들은 먹을 걸 찾지 못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바로 저 ‘먹’이라는 음식. 나르여앙이 키우던 강아지의 간식이었다.
하지만 이게 생각보다 영양가도 높고 먹기도 간편했고 자연스레 돈을 버느라 바쁜 엄지인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엄지인은 저 ‘먹’을 빼고는 먹는 게 없다.
이제야 왜 장래가 자신의 음식이 맛있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맛’이 있는 음식이 드물어서였다.
‘... 슾밥을 팔면 대박이 날 거야....’
그렇다고 엄지인이 딸기개불토마토스프를 맛있다고 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엄지에는 딸기나 개불이 없었다.
식당이 블루오션임을 알았으니 남은 건 서둘러 개업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위치가 너무 구린데?”
카힐이 못 쓰게 된 판자를 부수며 말했다. 그나마 구석에서 망가진 의자 몇 개를 찾았지만, 이미 벌레가 갉아먹어 손만 대도 부스러졌다. 아무래도 의자는 새로 사든가 해야겠다.
“흠. 가장 외곽에 가장 안쪽이군. 손님을 모으려면 파격적인 홍보나 컨셉이 필요하네.”
“..... 마족이 끓인 슾밥...?”
앙피가 식당 문을 열심히 닦으며 말했다.
확실히 이 시기에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이긴 한데 그랬다가는 영업도 전에 엄지에서 쫓겨날 것이다.
비비나 나영웅을 간판으로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넷은 식당을 청소하며 꾸준히 의견을 주고받았다.
음식 하나에 100만 골드를 받자, 다른 식당을 전부 없애서 입구까지 나가자.
의견은 많았지만 실현 가능한 것은 없었다.
그나마 괜찮은 게 나영웅의 의견이었다.
“근데 그게 먹힐까...?”
“걱정 말게. 한국에선 이런 게 유행이었네. 돈도 아끼고 좋은 방법일세.”
“ㄷ... 돈이 없긴 해서... 그냥 그렇게 해요...”
사실 돈도 없는 마당에 새롭거나 독특한 걸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돈이 안 드는 나영웅의 의견으로 채택되었다.
덕분에 식탁이나 의자 같은 가구를 사는 것은 건너뛰었다.
청소를 완벽하게 끝내고 나니 그래도 식당다워졌다. 아직 문도 열지 않은 것처럼 휑하긴 하지만, 주방 도구와 음식을 갖다두면 구색은 갖출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옆 가게 주인인 마뇨르 씨가 지원해주었다.
“감사는 됐어. 그 할배한테 갚을 돈 너희한테 갚은 거야.”
마뇨르 씨는 창고에서 깨끗한 주방 기구를 꺼내주었다.
간단한 음식만 가능할 정도였지만, 어차피 앙피의 슾밥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녀는 “한 번 망한 놈들이니까 잘 써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는 씁쓸하다는 표정과 퇴장할 생각이었겠지만, 앙피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굳이 망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만든 앙피 덕분에 주방 기구의 고난을 들을 수 있었다.
미뇨르 씨도 예전에 음식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치 옷처럼 입는 빵을 만들었다는데 긴 시간을 입어도 튼튼함을 유지하도록 만들다 보니 점차 빵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결국에는 빵 냄새가 나는 튼튼한 옷이 되어버려 ‘음식’으로서의 타이틀을 뺏겼다고 한다. 지금은 그 경험을 살려 평범한 옷가게를 운영 중인 그녀였다.
“아... 지금은 안 팔아요..?”
“응. 말했잖아 망했다고.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지.”
“아깝다... 재밌을 것 같은데...”
앙피는 마뇨르의 아픈 부분을 자꾸 쿡쿡 찔렀다.
“후후후. 마담. 혹시 엄지에는 곡식도 수출하는가?”
“곡식? 아, 그 쌀이나 보리 같은 거? 넘쳐나지.”
“그렇다면 슾밥을 만드는 것에 문제는 없겠군.”
나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요리를 어느 정도 할 줄 알기에 앙피를 도울 수 있었다. 앙피가 슾밥에 대해 말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서 대강 어떤 요리인지는 파악했다.
그러자 구석에서 잠자코 듣던 카힐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잠시만. 우리 슾밥인가 개밥인가 파는 걸로 확정이야?”
“... 개밥.....”
“안 될 것도 없지 않은가?”
나영웅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슾밥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이러는 것 같다.
“그 젤리를 슾밥에 넣어볼까....”
그리고 한쪽에서는 앙피의 실험정신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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