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모든 일이 끝났으니 이제... 튀어!!
그렇게 추방의 문에서부터 시작된 해일은 아카데미를 휩쓸고 메이커 마을을 휩쓴 후 더욱 가속이 붙어 순식간에 검지의 80% 이상을 집어삼켰다.
아니, 원래부터 검지는 이 정도의 토지만 있었기에 어쩌면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었다.
지저 왕이 벽을 세워 바닷물을 막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검지는 깨끗하게 청소되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사실 평범하게 잘 살았다면, 벽이 무너질 일도 이런 대사건이 일어날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가정하고 후회해도 검지인, 아니 메이커들은 너무 많은 짓을 저질렀다.
만약, 그들이 추방의 문을 만들지 않았다면.
만약, 그들이 계급에 대해 차별을 하지 않았다면.
만약, 그들이 지저 왕의 터전인 호수를 메꾸지 않았다면.
메이커가 후회할 일은 많다. 억울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사태를 만든 게 꼭 앙피 일행의 독단적인 일이었을까. 언젠가 일어날 일이 조금 앞당겨졌을 뿐이었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무너졌을 계급이었다. 마치 추방의 문으로 인해 균열이 생긴 벽처럼.
이제 이것만은 분명해졌다. 이제 검지인 중에 ‘메이커’라는 계급은 없어졌다고 말이다. 살아남은 이가 있든 없든, 이제 검지에 메이커는 없다.
그렇게 살아남은 검지인과 아카데미생, 그리고 지저와 앙피 일행은 잠겨버린 검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와. 진짜 순식간에 잠기네.”
“ㄱ... 그러게요.”
앙피는 벽이 있던 곳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는 벽이 무너질 때 어떻게 무너졌는지도 똑똑히 지켜봤었다.
벽은 막무가내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전부 안쪽으로 무너졌다. 아카데미와 마을이 있던 안쪽으로 말이다.
덕분에 하마터면 바다로 흘러 떠내려갔을 쓰레기가 무너진 벽에 짓눌려 바닥으로 묻혔다. 이것도 딱히 바닥에 이롭지는 않지만, 나중에 대마법사 불러서 치우면 된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보다야 이렇게 뭉쳐서 가라앉혀두는 편이 치우기도 편했다.
한편, 죽기 살기로 도망친 검지인들은 사태를 파악하느라 여기저기 말을 걸고 다녔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요?”
“왜 벽이 무너진 것이죠? 아카데미 안쪽부터 무너졌다던데, 아카데미에서 뭘 한 거죠? 교장은 또 어디 갔어요.”
검지인 대다수가 교장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장은 영원히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 틈을 타 앙피 일행이 도망칠 준비를 했다. 이렇게 크게 뒤집었으면, 누구보다 빠르게 도망가는 게 이들의 특기였으니까.
“야. 가자. 튀튀튀어.”
“후후후. 그런데 마스터. 저 덩치는 어떡할 건가?”
나영웅이 바다가 된 검지 쪽 바위를 가리켰다. 그 뒤에는 지저 왕이 코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누구에게 들킬까 숨만 쉬며 앙피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카힐 정도의 배짱만 되었어도 이미 갔을 텐데 말이다.
앙피는 바위 뒤를 힐끔거리고는 잠시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동안 나머지들은 반지를 어떻게 뚫고 지나갈 것인지 생각해두라고 했다. 이제 나름 소환수들에게 명령도 하는 것이 소환술사 같기도 하다.
“ㅇ.. 어.. 어어.. 그.. 지저 왕... 님?”
아닌가. 막상 지저 왕과 일대일로 말하려니 어색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는 바위를 끼고 천천히 돌아 수면 위로 떠 오른 지저 왕을 조용히 불렀다. 그러자 지저 왕은 얼굴만 빼꼼 밖으로 내밀었다.
“끼갹?”
어우, 근데 물에 젖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됐다.
앙피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가세요..!”
그러고는 후다닥 다시 카힐 쪽으로 돌아갔다. 앙피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지저 왕도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바위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천재가 얼굴에 화색이 돌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가 바다로 뛰어들자 지저 왕은 그를 머리에 얹고 사람들을 피해 저 멀리 헤엄쳐 갔다.
늘 그렇듯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뒤로 그들이 어떤 여행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곳보다는 낫겠지.
“아니. 이 교장 어디 갔어!”
“그보다 이제 어디서 살아야 되나!”
“어. 근데 메이커들 없는데?”
검지인들이 웅성거리는 동안 앙피와 카힐, 비비 그리고 나영웅은 잽싸게 인파 사이를 빠져나갔다.
입고 있던 교복은 이미 탈출할 때 해일에 떠밀려 저 멀리 보냈다. 이르하라가 꼭 반납하라고 했던 건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반지는 어떻게 지나갈지 정하셨어요...?”
앙피가 비비에게 업힌 채 물었다.
그나저나 비비랑 체형도 비슷하면서 폭 안긴 게 자존심도 없는 것일까. 옆에서 어떻게든 속도를 맞춰 뛰는 나영웅이 자랑스러울 정도였다.
“그냥 가도 될 것 같은데? 우리 올 때도 왕궁 사람인 거 인증해놨잖아. 나갈 때도 똑같지 뭐!”
“후억후억.. 맞네.. 이 몸이 들어올 때 눈도장을 톡톡... 흐에에엑.”
“키킥. 닥치고 뛰기나 해, 돼지.”
카힐이 그를 비웃으면서도 뒤에서 등을 밀어주었다. 그래도 이 아카데미라는 것이 앙피 일행에게 좋은 영향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직도 비비 등에 업혀 가는 앙피만 제외하면 말이다.
넷은 그렇게 오순도순 떠들며 반지까지 곧장 달려갔다. 혹여나 여유롭게 가다가 다른 검지인을 만날 수도 있으니 서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교복을 벗어 던지고 해일에 휩쓸려 오던 아무 옷이나 건져 입은 탓에 차림새가 심상치 않았다.
치렁치렁한 노란 원피스를 입은 카힐과 고스족처럼 진한 블랙으로 무장한 비비.
둘이 평소에 입던 옷을 바꿔입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것도 나름 잘 어울리긴 했다.
반면, 어울리지도 않는 여자아이 옷을 입은 앙피가 있었다. 평소 입던 후드티나 짙은 색이 아닌, 밝고 상쾌한 하늘색의 명랑한 옷. 사실 이건 전시용 인형의 옷이었는데, 교복을 벗은 앙피가 일단 아무거나 주워 입었던 것이었다.
아래쪽도 치마라서 무언가 이상함은 깨달았지만, 이미 옷을 주워입을 기회는 놓친 이후였다.
그렇게 이 이상한 옷차림의 네 명은 반지에 도착했다.
아, 잠시만. 왜 나영웅은 설명해주지 않느냐고?
음.
나영웅은 커다란 줄무늬 팬티만 하나 주워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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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에서 앳된 얼굴의 병사 하나가 일기를 끄적이고 있었다. 그는 몇 달 전 새로 들어온 신참으로 지루한 경비 일을 매일 일기를 쓰며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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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반지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어디 반지에선 대마법사도 오가고 악마에 대한 소문도 돌고 그런다던데. 이 검지는 바깥으로 나가고자 하는 이가 전혀 없어서 반지도 썰렁했다.
요 몇 주 전에 오랜만에 외부인이 찾아오긴 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왕궁 사람들이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예의를 갖추고 그들을 안내해주었다. 우리 검지인들은 계급에 민감하니 그분들은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개백이나 이런 곳에 유배되어서 지루한 나날을 보내지, 메이커들은 오늘 있는 아카데미 축제를 구경하며 실컷 즐길 것이다.
재밌겠다. 나는 그거 한 번도 못 봤는데.
이 반지의 경비 일은 너무 심심하다. 이런 말을 한 걸 선임들에게 들키면 혼나려나? 모르겠네.
근데 진짜 너무 심심해서 차라리 습격이라도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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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경비병이 한창 구석에서 일기를 쓰고 있을 때였다. 밖을 살피던 선임 경비병이 급하게 반지 안으로 들어왔다.
“야! 바깥에 거수자 네 명 접근 중이다! 전투 준비해!”
“네? 정말입니까!?”
앳된 경비병은 처음 듣는 거수자라는 단어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래, 그가 굳이 메이커 시중보다 경비 일을 택한 것엔 이런 로망이 있어서였다.
우리의 검지를 지킨다는 로망!
앳된 경비병은 과연 어떤 흉악한 사람들이길래 반지로 당당히 접근할까 궁금했다.
손바닥 깊은 곳에 산다는 척박한 자들?
아니면 최근 중지의 법정이 사라지며 탈출했다는 흉악범들?
그것도 아니면 설마 오른섬에서 마족들이 쳐들어온 건가?!
앳된 경비병은 기다란 창을 꽉 움켜쥐며 전방을 노려봤다.
“야. 그쪽 아니야. 이쪽.”
“잘못들었습니다? 그쪽은 저희 검지 쪽이잖습니까.”
“그래. 이쪽에서 온다고! 저기 봐! 쟤네야!”
선임 경비병이 서둘러 앳된 경비병의 시야를 반대로 돌려주었다.
그러자 저 멀리 검지 방향에서 네 명의 사람(으로 추정되는)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앳된 경비병은 평범한 마을 주민이 아닌가 하며 선임을 의심하다가 그들의 옷차림새를 보고는 창끝을 똑바로 들었다.
“옷차림이 괴상합니다!”
“그래. 아무리 개백이라도 저렇게까지 옷을 이상하게 입을 리가 없어!”
경비병 둘은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강건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 이상하게 옷을 입은 네 명.
“저기다! 시발 저번엔 마차 타고 와서 존나 가까운 것 같았는데. 개 멀잖아!!”
“꾸에엙.. 꾸에에에엙!”
비비가 잔뜩 지쳐 앙피 등에 업혀 있었다. 조금 전에 비비가 힘든지 지쳐 쓰러진 탓에 이번엔 앙피가 업고 뛰는 중이었다. 근데 사실 말이 없는 것이지 흐물흐물해진 비비를 얹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그들은 반지 앞에 웬 사람이 둘이나 나와 있는 것을 보았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반지의 경비병들인 것 같았다.
“오... 마중... 나왔나 봐요...”
“그런 거야? 야, 나영웅 너 말대로 우리 기억하고 나왔나 보네!”
“ㅎ... ㅎ.... ㅎ...”
“이 샊 말도 못 하네 이제.”
그렇게 앙피 일행은 반지 앞에 서 있던 경비병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들에게 친절히 인사를 건넸다.
“ㅇ.. 안녕핫.. 하세요..”
“동작 그만!!!”
경비병 중 근엄해 보이는 녀석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 그러고는 창끝을 얼굴에 들이밀며 정체를 밝히라고 했다.
“얘네 우리 기억 못 하는데?”
“훅훅훅. 그렇군.”
“너 웃음소리 잘못됐어. 숨 좀 더 쉬어라.”
“잡담은 그만두고 정체를 밝혀라!”
“우리 기억 안 나? 왕궁 사람들, 몇 주 전에 여기 지나갔잖아.”
카힐이 사람(마족)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설명했다. 그녀가 청순가련한 원피스를 입고 그래서인가 확실히 평소보다 덜 위협적이긴 했다.
“왕궁 사람들? 어디서 거짓말을! 그런 분들이 여기 왜 있을 이유가 없지! 이봐, 너는 본 적 있나?”
근엄한 경비병의 물음에 앳된 경비병이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네! 몇 주 전에 지나가시긴 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진짜 왕궁 분들이신가.”
“얼굴이 조금 낯익은 것 같기도 합니다.”
경비병들은 힘을 풀고 창끝을 내렸다. 그리고 앳된 경비병이 앙피 일행을 잠시 살펴보기로 했다.
“후후후. 이보게 자네. 이 몸이 기억나지 않는가?”
나영웅이 친근한 표정으로 앳된 경비병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영웅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다. 한 마디로 앳된 경비병의 시야에 나영웅의 듬직한 흉부가 가득 찼다.
“이 몸을 모르겠는가 말이다.”
이 몸이라니. 나영웅이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지금 상황상 단어 선택이 크게 잘못되었다.
앳된 경비병은 동공을 파르르 떨다가 선임과 눈이 마주쳤다.
선임은 ‘설마 저런 녀석과 아는 건가? 게다가 몸이라고? 설마···.’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거수자가! 난 네놈의 추악한 몸 따위는 모른다!!”
앳된 경비병이 이상한 취급을 받지 않으려 발악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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