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옆자리 소녀는 항상 운이 없다
‘젠장 우리앙인가 우량아인가 하는 년은 어딜 간 거야.’
교장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리앙은 조금 전 부스에서 음식을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또 먹었다.
거기엔 앙피가 배탈약을 뿌려둔 음식이 잔뜩 있었고, 하도 많이 먹은 덕에 약효가 이렇게나 빨리 발동한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앙, 그녀는 지금 화장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뇨. 질문 시간은 끝입니다. 대답하지 않겠어요.”
교장은 바보같이 최악의 대답을 했다. 그냥 적당히 웃어넘겼으면 농담이 됐을 것을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그는 똥 씹은 표정으로 서둘러 운동장을 떠났다. 아마 그는 속으로 앙피가 왕궁에서 나온 감찰관으로 추측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도 이 거짓된 역할 놀이를 너무 오래 했단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내가 왜 이리 소란스럽소? 다들 닥치시오. 내 연설을 시작하겠소.”
다행히 남도가 등장하며 금방 잦아들었다.
교장 다음으론 각 기숙사의 대표가 연설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연설 후에는 그들도 질문 시간을 받는다.
제일 먼저 나온 남도는 특유의 거친 말투임에도 그 뜻은 친절한 연설로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 덕분인지 짓궂은 질문은 없었다.
마지막에 딱 하나, 의미심장한 질문이 있긴 했다.
“우리앙이랑 사이좋던데 어떤 관계입니까!”
“안 그래도 요즘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그건 우리 둘이 알아서 하겠소.”
남도는 질문자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단상을 내려갔다.
아니, 정확히는 질문자 옆에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여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화장실에서 용무를 잘 끝마치고 왔길 바란다.
다음으로는 슈 대표인 파시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마스크 속에 침묵을 유지했다. 하지만 나름 축제라고 마스크에 조그만 폭죽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아카데미생을 쭉 훑었다. 그리고 낮은 어조로 말했다.
“가능.”
그 뜻을 이해한 건지 그냥 연설이 짧아서 좋은 건지 학생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사실상 OX 퀴즈나 다름없는 질문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마지막 테리아가 단상으로 올라왔다.
앙피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그녀를 유심히 쳐다봤다.
“너. 테리아 좋아해? 그러다 앞으로 꼬꾸라져.”
아까 옆에서 도와줬던 아카데미생이 앙피의 몸을 지탱해줬다.
덕분에 앙피는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편하게 테리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저기. 팔 아픈데 언제까지···.”
‘음식을 먹긴 한 건가...?’
앙피는 그녀가 배탈약을 뿌린 음식을 먹었는지 긴가민가했다.
우리앙만큼 지나치게 먹은 정도가 아니라면 당장 아무 반응도 없는 게 맞긴 했다.
얼마나 치밀하게 만들어진 약이냐면, 약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기 전까지는 오히려 배가 전혀 아프지 않게 해준다.
그래야만 약 효과가 발휘됐을 때 더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앙피가 굳이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며 감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이 배탈약을 먹은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 사실 그런 사람이 너무 많긴 했어.... 너무 많이 뿌려놨나..?’
앙피는 카힐이 구해다 준 배탈약을 한 통 다 썼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테리아가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인자하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앙피의 실수였다. 저번에 만났을 땐 그냥 돈을 뜯어서 평온한 사람인 줄 알았다.
‘으어... 이럼 안 되는데... 뭐 설마 하나도 안 먹었겠어...’
축제 음식을 잔뜩 먹은 앙피가 그냥 편한 대로 믿기로 했다. 무료에 맛있는 음식이 잔뜩 있는데 안 먹을 정도로 자제력이 높긴 힘드니까.
“그럼 마지막으로, 기숙사 대전에 나오는 참가자들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테리아도 이미 참가자를 모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인자한 표정으로 정확히 다른 참가자 셋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신의 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테리아는 미약한 광기가 보이는 웃음을 보이고는 단상에서 내려갔다.
이로써 교장 그리고 각 기숙사 대표의 연설이 끝이 났다.
무소속인 앙피는 왜 안 하냐고?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일외동이 교장에게 미리 말해서 빼줬다. 일외동이 학생회장 직을 내려놓기 전 마지막 행적이었다.
다음 학생회장의 후보로 각 기숙사 대표가 떠올랐지만, 아직까지 정해지진 않았다.
항간에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교장이 이번 축제에서 정한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기숙사 대표들은 이번 축제에서 교장의 눈에 띄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소리였다.
학생회장직에 별로 관심이 없는 파시를 제외하고 본다면 후보는 남도와 테리아, 단둘이었다.
항간에서는 언네임드인 앙피가 유력하다고는 하지만, 아카데미가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그럴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도가 교장의 눈에 띄기 위해 준비한 행사가 시작된다.
「아- 아- 곧 본 행사를 시작하기 전 각 동아리에서 준비한 공연이 있겠습니다. 좌석의 학생들은 운동장 위 무대에 집중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1학년들 중 설지거 학생들은 공연 진행 동안 아직 밖에 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오시길 바랍니다. 검사, 아니 감사합니다.」
안내방송이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있었다.
앙피는 잠시 자리에 늘어져 있기로 했다.
이제 남은 축제 순서는 3개.
공연, 단체 행사, 기숙사 대전.
모든 게 달린 기숙사 대전까지 고작 2개만 남았다.
앙피는 문득 아까 ‘지저 왕과 벽’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실 일반 아카데미생은 [지저 왕]의 존재를 모른다. 물론 평범한 작은 지저는 호수에도 있고 교내 곳곳에 있긴 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의 근간인 지저 왕은 모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아카데미생은 앙피의 발언을 ‘요정이 벽을 소환했어.’와 다를 바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때, 뒤에서 누군가 앙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언네임드. 교장이 찾는다.”
그 사람은 앙피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밖으로 나올 것을 지시했다. 자신의 체면을 생각한 교장이 보낸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래, 교장 성격에 그 발언을 가만 둘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가 박살 나는 것보단 왕궁의 사람을 처리하는 편을 택할 남자였다.
그리고 앙피는 그런 수상한 곳에 굳이 가지 않는 남자였다.
“ㄱ... 공연 재밌겠다... 언제 시작하지...”
앙피는 뒤의 남자가 뭐라 속삭이든 아직 시작도 안 한 공연에 열중한 척했다. 뒤의 남자는 당연히 앙피가 따라올 줄 알고 저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앙피에게 아무리 신호를 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 좋게 첫 번째 공연이 시작했다.
‘이런 건 따라와 주는 게 도리 아닌가.’
“이런 비겁한 녀석...”
남자는 처음 보는 반응에 심히 당황하며 일단 물러났다. 그는 교장에게 돌아가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 걸려들지 않았다고 알렸다.
교장도 혀를 차며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당장 축제에서 더 눈에 띄게 앙피와 접촉할 수도 없었으니까.
제일 먼저 나온 동아리 덕분에 앙피는 금방의 수상한 남자를 바로 잊었다.
앙피가 가장 잘 아는 동아리인 ‘지존마’가 첫 번째 순서였다.
‘...? 설마 그거 하나...?’
설마라고 할 것도 없이 지존마의 활동은 그거 하나뿐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무릎을 굽히지 않고 뛰기’를 해야 한다니, 앙피는 동아리를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공연은 훌륭했다. 어떻게 저런 아이디어를 낸 것일까 신기할 정도였다. 남도가 동아리를 통해 교장에게 톡톡히 눈도장을 찍겠다는 게 보였다.
어떤 공연인지 궁금하다면 돌고래 쇼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땅에서 하며 돌고래가 아니라 무릎을 꼿꼿이 세운 사람이다.
공연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역시 전설의 동아리!!”
“지존마는 지존이다!”
앙피와 나영웅 덕에 지존마는 다른 동아리와 비교할 수도 없는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전용석에 앉아있는 교장도 흡족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 뒤에 자연환경으로 연주하는 동아리와 극적으로 부활한 ‘안놀라유’ 동아리가 나왔지만, 앞의 지존마가 워낙 강력했던 덕에 별 호응은 받지 못했다.
그렇게 공연 일정은 빠르게 끝이 났고 곧바로 단체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니 단체 행사는 뭐지...?’
기숙사 대전만 준비한 탓에 다른 행사는 뭘 하는지도 모르는 앙피였다. 그래서 그는 슬쩍 옆의 아카데미생에게 물어봤다.
“아, 이거? 나도 몰라.”
“아....”
앙피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짓자 그 학생은 다시 앙피를 붙잡고 말했다.
“아니, 이게 원래 시작 전까지 뭘 하는지 안 알려줘. 누가 참가하는지도 안 알려주고. 조금 있다가 방송으로 다 알려줄 거야.”
하필 앙피 옆에 앉아서 여러모로 수난을 겪는 학생이었다.
사실 이 학생은 최근 수업 시간에도 옆자리 학생 때문에 고통을 받던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카힐이 심심할 때마다 쳐다보던 옆자리의 그 소녀였다. 이 정도면 이 소녀는 자리에 대한 운이 지독하게 없나 보다.
‘설마 단체라고 다 나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앙피는 순간 불안했지만, 스타디움 안에 앉은 학생들의 수를 보고 나니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전과 달리 대본을 보고 읽는 듯 딱딱하고 정직한 발음으로 안내가 시작되었다.
「올해의 단체 행사에 관한 공지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행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퍼즐 조각 해독>
승리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은 퍼즐을 단상 위 상자에 넣기>
승리 보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학년 진급을 약속하셨습니다. 우승한 1인은 축제가 끝나고 교장 선생님의 도장을 받습니다.」
“뭐라고? 학년 진급!?”
“미친 이런 적 없었잖아! 미친 기회야 이건!”
“참가자는 누구야! 누구누구 참가인데!”
당연히 아카데미생들은 난리가 났다.
단체 행사는 모든 것이 비공개인 상태로 준비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던져졌을 때 어떻게 해결하냐를 보는 게 주목표였다.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갑작스럽게 발표하는 것이다.
안내방송의 마이크 너머로 조금의 소란이 있는가 싶더니 곧이어 안내가 다시 시작되었다.
「아- 아-. 제가 대본을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이번 참가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교생 모두>
원하시는 분은 언제든 난입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럼 나도 기숙사 대전 참가 안 하고 여기서 이기면...!’
앙피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리고 관객석에서 테리아가 두꺼운 성전을 들고 제일 먼저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곧이어 아카데미에서 난다긴다하는 녀석들이 잇따라 경기장으로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앙피는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숙사 대전 힘내야지..!’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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