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모르겠고 일단 놀고 싶어!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축제 당일이 되었다.
앙피는 이제 박스 집에 익숙해져 나름 잘 잤다.
물론 비교적 잘 잤다는 소리였다. 아카데미에 막 도착한 며칠은 솔직히 시야 공유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시야 공유가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잠을 설치는 수준을 넘어서 하루종일 깨어있는 정신상태와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딱 2일. 시야 공유를 받지 않고 나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 공통점이 있긴 했지.’
호수에 빠졌던 날이다. 물을 마시며 기절하면 시야 공유 없이 숙면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잠을 푹 잤던 날이 있었어.’
아마 그 첫 기억은 약지의 ‘혁명 여관’에서였다. 그리고 그다음은 왕궁에서 목욕을 한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여관을 제외하곤 전부 ‘물’과 관련이 있다.
어쩌면 대마법사를 만나지 않고도 이 불면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은 그것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나아가며 저 방법은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오늘이구나...”
앙피는 박스 집의 문을 꽉 잠갔다. 이래 봬도 박스로 만든 열쇠와 자물쇠도 있다.
그는 간단하게 심호흡을 하고는 본관을 나왔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전투 훈련을 하는 훈련장이다.
단순히 운동장 정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애초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카데미이기에 차지한 영토가 제법 넓었다. 검지의 절반을 아카데미가 차지하고 있었다.
애초에 교육과 지시가 중요한 검지였기에 하나뿐인 아카데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도 개백에겐 해당되지 않았지만.
친구가 없는 앙피는 혼자서 슬슬 훈련장을 향해 걸어갔다.
앙피가 있는 본관은 기숙사 건물과 정반대라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훈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다다라서야 반대편에서 오는 아카데미생들이 보였다.
학생들은 축제 덕에 들뜬 분위기로 왁자지껄했다.
“이야. 드디어 오늘이 축제구나. 먹을 거 많겠지?”
“난 동아리가 여는 부스인가 뭔가가 더 궁금해. 나영웅한테 들어보니까 이게 동아리의 꽃이라던데?”
“그래? 나는 그것보다 역시 기숙사 대전에 나올 언네임드가 더 기대된다.”
“아! 그 호수 괴물 때려잡았다는 얘? 진짜 그 정도로 강한 건가. 궁금하긴 하네”
이야기의 주제가 어쩐지 대부분 앙피 일행과 관련된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한 명 한 명이 심상치 않은 놈들이라 그런 것 같다.
앙피는 입구로 밀려들어 가는 인파를 보고는 잠시 기다렸다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가 참가하는 건 기숙사 대전뿐이니까. 그리고 기숙사 대전은 축제의 마지막 행사였다.
축제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 음식과 놀거리를 즐기는 자유 시간.
- 각 기숙사 대표들의 연설.
- 공연.
- 단체 행사.
- 그리고 대망의 기숙사 대전.
사실 기숙사 대전까지는 한참 남았기에 벌써부터 축제에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축제....’
하지만 앙피는 축제라는 걸 경험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즐길 생각이었다. 기숙사 대전에 대한 준비는 이미 끝낸 상태였으니까.
카힐이 각 기숙사 참가자를 알아봐 준 덕이었다.
앙피는 얼른 사람이 빠지길 기다리며 훈련장 입구 옆 나무에 숨어있었다.
여기 숨어서 혹여나 기숙사 대전 참가자가 지나가진 않나 인파를 꼼꼼히 살폈다.
얼굴은 이미 익혀놨고 그냥 컨디션이 어때 보이나 확인하는 목적이었다.
“공연 준비는 잘했지?”
“그렇소. 그대로 실수하면 좃된다는 마인드로 하는 게 좋겠소.”
저 멀리 남도와 우리앙이 지나가는 것도 보였다.
둘이 예전보다 더 딱 붙어있는 게 우리앙의 노력이 성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앙피는 굳이 그런 분위기 사이로 끼어들어 인사하지 않았다. 절대 소심해서가 아니고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나선 것이다. 소심한 거 아니라고.
그 뒤로는 노란 모자를 쓴 슈 기숙사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와. 근데 저 호수를 다 메꿔버리냐 결국.”
“그니까. 이럴 거면 호수 건너는 연습 괜히 했네.”
“어쨌든 우리가 이긴 거지? 호수 걸어서 가는 게 더 빠른 게 되었잖아.”
“그건 아니지! 나중에 다시 토론해.”
여전히 급한 몸짓으로 다른 사람들 사이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 호수를 메꾼다고...?”
앙피가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 신경 쓰이는 점을 끄집어냈다.
호수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가 교장의 귀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교장은 그 괴물의 정체가 지저 왕이란 사실을 알았다.
호수에서 얌전히 지내길래 내버려 뒀더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교장은 불안함을 느꼈다. 죽이는 것보다는 감시하는 편이 더 간단하고 쉬워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저 왕에 대한 소문이 생긴 것만으로 메이커들은 충분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카데미생들은 앙피가 호수의 괴물을 쓰러뜨렸다고 믿었다. 하지만 교장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가 본 앙피는 전혀 그럴 정도로 강한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교장은 호수를 아예 메꾸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축제날이기에 꼼꼼히 막을 수는 없었다. 당장은 임시방편으로 호수의 수면 위에 강력한 철판을 까는 것으로 그쳤다.
앙피는 지저 왕이 괜찮나 걱정되었다.
‘... 정 안 되면 그냥 지저 왕 부를 생각이었는데.... 호수 밖으로 도망쳤으려나..?’
본인의 와일드카드로 써야 해서 걱정했던 것이었다. 지저 왕의 정체가 들켜도 본인의 소환수임을 밝히면 죽이진 않을 테니까. 소환술사인 앙피였기에 가능한 작전이었다.
“머행? 안 드러가?”
그때 천재가 어떻게 찾은 건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끼갸각!”
“우왕. 지저 왕이랑 똑같았어!”
앙피는 딴생각을 너무 하고 있던 탓에 깜짝 놀랐다.
“친구 없으면 나랑 같이 다닐래?”
“어... 아뇨.”
“.......응.”
천재는 풀이 확 죽은 채 혼자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아쉽네. 천재 님이 안 뽑히다니..’
지컬 기숙사 참가자는 아쉽게도 천재가 아니었다.
카힐에게 들은 바로는 테리아가 뽑혔다고 한다. 지컬 기숙사 대표인 그녀를 말하는 게 맞다.
하지만 괜찮다. 말했듯이 앙피에겐 작전이 있으니까.
‘사람 좀 빠졌나...?’
앙피는 조금 한가해진 훈련장 입구를 쓱 쳐다보고는 얼른 들어갔다.
***
훈련장은 크게 실내와 실외로 나뉘었다.
공연과 기숙사 대전을 할 스타디움 형태의 실내.
그리고 축제의 분위기와 자유 부스가 운영되는 실외.
스타디움은 아직 출입이 금지라 앙피는 실외부터 돌아다니기로 했다.
기숙사 대전 때문에 신경 쓰이지 않냐고?
앙피는 여차하면 쿠데타로 모든 걸 휩쓸 생각이기에 괜찮았다. 혁명군 대장인 나영웅도 있으니 가능하겠지 싶었다.
앙피는 양쪽으로 뻗은 부스 사이를 거닐었다.
작년까지는 밖의 부스는 조촐하게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아리들이 활기를 얻은 덕에 엄청나게 북적였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동아리를 뽐내려 화려하게 꾸몄다.
숲 컨셉으로 나무로 치장한 부스, 신비로운 분위기로 부스를 공중에 띄운 곳, 아예 미니멀하게 가판대조차 없는 부스.
부스 하나하나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걸어도 풍겨오는 각종 음식 냄새가 예술이었다.
음식 관련 동아리는 ‘괴식 탐구 동아리’밖에 없었지만, 막상 운영하는 부스엔 먹거리가 넘쳐났다.
나영웅이 “동아리 부스에서 가장 만만한 건 음식이라네. 만들기 쉬운 음식으로 고르길.”이라고 말한 덕에 이렇게나 늘어났다.
사실 당장 앙피가 있었던 지존마도 ‘무릎 굽히지 않고 점프’하는 활동을 부스로 만들 수 없었기에 달콤한 스무디를 팔았다.
스무디 위에 올라간 두꺼운 고기 조각은 누구 아이디어인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앙피는 부스 사이사이를 열심히 거닐며 무언가를 찾았다.
돌아다니다 보면 한쪽에선 즐거운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앙피는 슬쩍 음악이 들리는 부스를 바라봤다.
[음악은 자연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자세히 보니 풀잎과 나무껍질 같은 재료로 현란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나뭇잎에서 일렉 기타의 소리가 나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일렉 기타를 모르는 앙피에겐 그냥 찢어지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그가 찾는 건 다른 것이었기에 나뭇잎 따위에서 뭔 소리가 나든 알 바 아니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앙피는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았다.
“정말 신성한 모습입니다. 아주 잘하셨습니다.”
테리아가 한 동아리 앞에서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 자유 시간엔 축제를 즐기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기숙사 대전 참가자에게 손을 써두는 것.
앙피는 배탈을 유도하는 약을 미리 구해서 들고 왔다. 아무래도 먹을 것이 넘치는 이 자유 시간에 참가자들은 무언가 먹을 것이 뻔했다.
그때를 노려서 미리 약을 뿌려둔다면 기숙사 대전이 시작할 때쯤 효과가 발휘될 것이다.
‘... 좋아. 몰래 앞질러 가 있자..’
앙피의 첫 번째 타겟은 지컬 기숙사 대표인 테리아였다.
물론 지식으로 싸우는 기숙사이기에 단순 힘겨루기는 앙피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대표인 만큼 그녀의 작전을 앙피가 예측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머리를 굴릴 수 없게 배가 아프게 만들어버리면 된다.
‘똥 마려우면 합리적인 사고가 안 되니까...’
앙피는 어릴 적 몰려오는 손님 탓에 3시간 동안 화장실을 참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슬쩍 테리아를 지나 앞질러 갔다.
남은 건 그녀가 먹을만한 음식을 유추해서 배탈 약을 뿌리면 된다.
그래도 여학생한테 너무한 거 아닌가 싶지만, 앙피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앙피는 테리아가 걷는 길 앞쪽에서 기웃거리며 그녀가 뭘 집어 먹을지 찾아봤다.
그러다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음식을 파는 부스를 발견했다.
‘신성한 이슬 한 모금..? 저거다.’
앙피는 쭈뼛대며 부스 앞에서 서성거렸다. 부스의 동아리 부원들은 웬 맹한 녀석이 앞을 서성거리는 게 신경 쓰였지만, 워낙에 무해하게 생겨서 금방 시선을 돌렸다.
앙피가 본인들 음식에 배탈 약을 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는 테리아가 너무 가까워지기 전에 얼른 음료에 약을 뿌렸다.
무색무취의 가루약. 카힐에게 말했더니 간단하게 구해다 줬다. 음료든 음식이든 어디에 뿌려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축제의 음식은 전부 무료이기에 다들 가판대에 미리 음식을 담아 내놨다. 앙피가 이 작전을 괜히 짠 것이 아니었다.
앙피는 약을 뿌린 음료에서 조금 떨어져 테리아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신성한 이슬.”
역시나 테리아는 음료에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확 구기며 지나갔다.
“감히 신성하단 표현을 이런 것에 붙이다니, 이래서 멍청한 기숙사들은 안된다는 겁니다.”
“앗...”
앙피는 그녀를 놓칠까 서둘러 빙 돌아 다시 그녀를 앞질러 갔다.
그리고 앙피가 타 놓은 음료는 지나가던 다른 학생이 먹어버렸다.
하지만 비극의 시작은 이제 시작이었다.
‘... 대체 뭘 먹으려는 거지...?’
앙피는 그녀가 지나갈 모든 음식에 약을 뿌리기 시작했다.
자유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다. 다만, 테리아와 다른 참가자까지 작업하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내가 놀 시간이...’
앙피는 축제를 즐기고 싶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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