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제발 구해주지 마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이번 기숙사 대전은 앙피가 나온다고 했소. 그래서 승리 조건이 궁금하다고 했소.”
“아, 일외동 그놈이 우리 기숙사로 와서 무소속이 너밖에 없구나?”
앙피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근데 딱히 승리 조건이라 할 게 없는데?”
“느에..? 무기나 마법 제한 없어요...?”
“응. 없지. 실제로 마족이랑 싸울 때랑 같은 조건이니까.
기숙사 대전은 상대가 마족이라 생각하고 싸워야 해. 그러니까 아무 제한도 없지.”
앙피에겐 나쁜 소식이었다. 지금 그가 왜 소환술을 쓰지 않는지 아는가?
여기서 소환수가 하나라도 더 늘었다간 시야 공유의 가짓수나 시간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는 대마법사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성장하는 마법사’였으니까.
“...그럼 어느 정도로 제압해야 이겨요....?”
“제압을 왜 하겠소? 마족은 당연히 죽이는 것이오.
기숙사 대전에서도 죽을 수 있소. 좆될 수 있다는 뜻이오.”
남도가 종이를 구기며 앙피에게 겁을 줬다.
‘..... 얏 됐나...?’
앙피야 그런 말 배우지 마.
‘그래... 죽으면 평생 자는 거니까.... 도장이고 뭐고..’
그가 반쯤 실성한 채 헤헤 웃어대니 우리앙이 남도를 꾸짖었다.
“애를 왜 겁을 줘! 안 그래도 소심해서 포기하면 어떡해. 앙피야 괜찮아.
그 경기장 가보면 동그란 원 모양으로 선이 그려져 있거든? 거기서 벗어나면 패배야. 전장 이탈이랑 같은 개념으로 생각하면 돼.”
그렇다는 건 굳이 전투와 상관없이 상대를 밀어내기만 해도 승리라는 소리다.
“아... 죽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아니? 죽어도 패배지. 내 말은 승리 조건이 하나 더 있다고.
근데 나는 그런 경기에서 죽을 정도면 전장에서 쓸모없다고 봐.”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앙피가 꾸벅 인사를 했다.
어쨌든 승리 조건은 알아냈다. 앙피의 체급을 생각한다면 상대를 제압하기보다는 밀어내는 방향으로 작전을 짜는 게 좋을 것이다.
그래도 단순 제압보단 충분히 가능성이 생겼다.
이제 남은 건 누가 경기에 나오냐다.
앙피는 남도와 우리앙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갈 채비를 했다.
“아니 근데 예전에, 무슨 요새 같은 거 지어서 사흘 동안 버틴 사람도 있었어. 결국 상대방이 포기하고 나가서 이겼잖아. 그때 관객들 야유가 장난 아니었어.”
“ㄴ...느에?”
앙피가 말을 끊으려고 못 알아들은 척했다. 하지만 우리앙은 대화가 고팠는지 앙피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가고 나면 다시 입부 신청서의 늪에 빠져서가 아닐까 싶다.
“왜냐면 걔가 지컬 기숙사였거든. 아무튼 걔네 기숙사 애들은 하나 같이 잔머리만···.”
“저.. 가볼게요.”
앙피는 무슨 밀항하는 사람처럼 우리앙에게 음식을 좀 찔러줬다.
“뭐야. 사탕? 나 배 안 차는 건 안 먹···.”
꾸벅-
앙피는 그녀의 말을 다 잘라먹으며 지존마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동아리실이 있던 별관을 빠져나온 앙피는 곧장 쉼터로 향했다.
각 기숙사가 다 모여있는 곳이니 정보를 구하기 가장 최적이다. 게다가 승리 조건에 어울리는 막 생각난 것도 있고.
듣기론 아직 참가자를 뽑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기다리다가는 정작 작전을 준비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앙피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뭐냐. 그 최적의 방법이 나라고?”
“ㄴ...네.”
앙피는 카힐을 찾아왔다.
이젠 그녀만큼 편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나름 오래 붙어있던 덕인가, 부탁을 하는 것도 나름 수월해졌다.
소환수 입장인 카힐로선 부탁이라기보단 명령에 가까웠지만.
“혹시 아직.. 그거 안 뽑았죠...?”
“아, 기숙사 대전 참가? 니 그거 강제로 나간다며? 개 웃기네 푸흡.”
“... 그래서 누구누구 나오는지 알아봐 주세요.”
“아니, 근데 내가 젤 만만하냐? 왜 나야. 비비랑 돼지도 있잖아.”
카힐은 팔짱을 끼고 불만을 품었다.
그러고 보니 이쯤에서 주먹이 한 번 날아와야 하는데, 얌전한 것 보니 지컬 기숙사에서 영향을 조금 받았나.
뭐 어쨌든, 말도 못 하는 비비한테 부탁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그렇다고 나영웅에게 부탁하기엔···.
“후후후. 그게 이번 작전의 퀘스트인가.”
앙피는 순간 환청이 들렸다.
약지에서 나영웅에게 했던 첫 부탁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었는지 생각하면 그도 적합하지 않다.
결국은 만만한(?) 카힐밖에 없다.
“부탁드려요...”
“하, 알았어. 뭐 거절도 못 하는데..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러냐?”
카힐이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앙피의 턱을 콱 잡았다. 그러고는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박스 집에서 잔다더니 제대로 못 자는 거 아니냐?”
“ㄱ.. 괜찮아요.. 잠은 또 자면 되죠.”
앙피는 차마 소환수인 카힐 때문이라고는 말 못 했다.
숙면을 위한 여행은 느리지만 꾸준히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그래라. 암튼 알아내면 알려줄게.”
“넴..”
카힐에게 부탁을 끝낸 앙피는 곧장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 바람에 기숙사로 들어가려던 카힐이 다시 뛰어나와 그를 건져냈다.
“야! 괜찮다며!! 물에 왜 뛰어드냐!”
“ㅇ.. 아니 그게 아니라...”
지저 왕을 만나러 가려던 앙피였다. 지저 왕을 만나려면 호수 정중앙의 탁한 물로 가야 했다.
하지만 제삼자의 눈엔 그냥 호수로 목숨을 던지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카힐은 필사적으로 그를 막아냈다.
결국 앙피가 이유를 설명하고 나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 그래서 저번에도 괜찮았던 거예요...”
“아니. 여기도 소환수가 있다고? 너 대체 소환 가능한 소환수가 몇이냐?”
“ㅁ... 몰라요... 멀리 있으면 소환 해제도 안 돼서...”
“그나저나 무슨 동물도 소환수로···. 갑자기 같은 소환수로서 기분이 별론데...”
카힐은 구시렁대며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앙피는 또 이상한 오해를 받을까 사람이 잘 안 오는 산책로로 이동했다.
호수를 기준으로 쉼터 입구와 기숙사 건물이 정확히 맞은편에 있는 게 아니었다. 덕분에 아카데미생은 짧은 길로만 이동해서 다른 쪽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앙피는 한 번 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호수에 몸을 담갔다.
한 발자국씩 호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차오르는 호숫물이 교복 안으로 스며들었다.
‘으악.. 차가워....’
호숫물이 턱 끝까지 차올랐는데도 호수 중앙까진 한참 남았다.
결국 앙피는 조금 헤엄쳐 보기로 했다.
“읏차. 읏차.”
앙피는 팔다리를 빠르게 휘적이는 이상한 수영법으로 조금씩 전진했다. 무슨 머리만 수면 위로 둥둥 떠서 움직이는 모습이 해파리 같았다.
머리만 쭉 내민 채 수면 아래서 팔다리를 아무렇게나 빠르게 휘적여 가라앉지만 않게 하는 것이다.
수영을 할 일이 없었던 앙피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어쨌든 가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앙피는 호수 중앙을 향해 꾸준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저 멀리서 무슨 외침이 들렸다.
“저게 뭐야?”
“야! 저기 좀 봐!”
아뿔싸. 출발지점에 사람이 없었다고 도착지점에도 사람이 없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중간에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호수 중앙에서 조금 빗나가 기숙사 건물 쪽으로 가까워져 버렸다.
노란 건물인 슈 기숙사에서 아카데미생 몇 명이 앙피를 보며 소리치고 있었다.
앙피는 당황해서 얼른 방향을 틀어 다시 호수 중앙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번 집중된 이목은 사라지지 않았다.
“뭐지 저거?”
“괴물이다. 괴물이야!”
아카데미생들이 뭔가 이상한 오해를 시작했다.
“호수엔 언제나 괴물에 관한 괴담이 있지. 저게 우리 아카데미 호수의 괴물이야!”
이상한 녀석 하나가 헛소리를 하며 학생들을 동요시켰다.
자세히 보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기러기였다. 그럼 그렇지, 기사로 쓰려고 온갖 어그로를 끄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호수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의 정체가 정말로 궁금했다.
그들이 이렇게까지나 오해한 것에는 정말이지 동글동글한 앙피의 머리 모양도 한몫했다.
‘빨리.. 호수 중앙으로 가서 지저 왕을...’
앙피는 혹여나 또 구조 당할까 열심히 헤엄쳤다. 그의 수영법은 근본 없는 만큼 에너지 소모가 너무나도 컸다. 앙피가 체구가 작은 덕에 물에 잘 뜨지만 않았어도 벌써 가라앉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구조 당하면 또 이 짓을 다시 해야 하는 건 끔찍했다.
하지만 그때 저 멀리서 우렁찬 함성과 동시에 파도 소리 같은 게 들렸다.
‘ㅍ... 파도...? 호수에서...?’
앙피는 살짝 뒤를 돌아봤다.
“꺄아악!”
앙피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슈 기숙사생 중 몇 명이 수면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앙피가 제안했던 ‘호수 위를 뛰어서 가로질러 가세요.’에 성공한 녀석들이었다.
“이야. 진짜 이게 훨씬 빠른데?”
“그니까. 근데 금방 울음소리 같은 거 들었냐?”
“어. 진짜 괴물인가 봐! 거의 다 왔다! 저거야!”
슈 기숙사생들이 여유롭게 수면 위를 달려서 앙피의 주변까지 다다랐다.
앙피는 서둘러 수영을 멈추고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정확히는 잠수라기보다 가라앉는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덕분에 슈 기숙사생들은 앙피 위를 그대로 달려서 지나갔다.
말 그대로 수면 위를 달리는 거였기에 아래로 잠수하면 잡히지 않았다.
“야. 저 아래로 들어갔는데 어카냐?”
“가위바위보로 한 명이 들어가자.”
그들은 수면 위에서 드리프트로 방향을 꺾더니 앙피가 잠수한 곳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누가 들어갈지 토의를 했다.
수면 밑에서 숨을 참고 있는 앙피는 죽을 맛이었다.
당연히 잠깐 잠수하면 자신을 지나쳐 계속 갈 줄 알았다. 방향을 틀면 속도는 줄어드니까. 근데 애초에 벽도 뛰어 올라가는 녀석들에게 상식이 통할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 발각되어 구조되기 전에 물속에서라도 빠르게 호수 중앙으로 이동해야 했다. 탁한 물이 코앞에 보이는 게 조금만 더 가면 됐다.
하지만 앙피가 물속이라고 제대로 된 수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지렁이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거의 기어가듯이 허우적댔다.
그리고 그렇게 느려터진 속도를 기다려줄 슈 기숙사생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빠르게 수중 피구를 해서 패자를 정했다. 공을 가지러 뭍으로 갔다 와서 수십 번의 공격과 회피 끝에 가장 먼저 맞은 녀석이 물속으로 잠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단 30초 만에 끝났다.
얼마나 성격이 급한 녀석들만 모였으면 이렇게 일 처리가 빠를까.
잠수하기로 정해진 학생은 발을 멈추고 호수 안으로 첨벙 들어갔다. 그리고 물속이라고 느려터질 리가 없는 녀석이기에 그는 빠르게 주변을 헤엄치며 잠수한 앙피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딨지. 이 괴물.’
이제 앙피가 잡히기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잠수했던 학생은 거대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끼갸가각-!!”
호수 안에서 지저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 밖에선 뽀송뽀송하니 귀여운 지저 왕이었다.
하지만 털이 물에 젖으니 골격이 드러나며 마치 괴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바로 앙피가 지저 왕을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었다.
아직 털이 자라지 않은 새끼였기에 어느 동물과도 비슷하지 않을 정도로 제멋대로 생긴 골격이 그로테스크했다.
“끼갸각!!”
지저 왕이 앙피에게 다가가려는 아카데미생을 향해 울부짖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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