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앙피, 너 재능있어
이야기가 끝나자 지저 왕은 풀이 죽었다. 아직도 배신당한 상처가 남아있는 모양이다.
천재도 그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해주었다.
‘괜히 들었네. 또 마을 하나를 뒤집어엎을 수는 없어...’
“그냥 못 들은 걸로 할래요. 전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이렇게 열심히 설명했는데! 너무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
“악마는 따로 있는데···. 모르겠고 돌아갈래요.”
“안 돼! 너한테 설명하느라 하나도 못 놀았단 말야!”
“가요, 지저 왕님. 나갈 땐 어떻게 나가죠..?”
지저 집의 입구가 곧 출구다. 한마디로 다시 수중 터널을 지나 호수의 중앙으로 나가야 한다는 소리다.
앙피가 계산을 끝내자마자 지저 왕이 앙피와 천재를 낚아챘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물웅덩이로 뛰어들었다.
“꼬르르륵-”
“호수 마시쪙···. 꼬르르륵-”
덕분에 둘은 물에 빠지는 기분을 한 번 더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호수 옆의 산책로였다. 지저 왕은 앙피와 천재를 두고 다시 모습을 감춘 듯했다. 앙피는 주변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목소리 덕에 금방 정신이 들었다.
“얌마! 눈 떠 제발!”
카힐이 앙피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이거야 뭐, 살리겠다는 건지 죽이겠다는 건지 모를 정도로 세차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름 진지했다. 아직 자신이 복수하기도 전에 앙피가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그러면 복수는 둘째치고 자신도 소멸해버리니까.
그런 진지함은 앙피가 얼굴에 물을 뱉어대는 덕에 사라졌다.
앙피가 시원하게 호숫물을 카힐 얼굴에 뿜어댔다. 점심으로 먹었던 라면의 매운기가 남은 불쾌한 액체였다.
덕분에 카힐은 자신이 했던 걱정이 부질없던 것만 같아서 화가 났다. 뜨뜻미지근한 앙피의 토사물이 화를 더 돋웠다.
“아이. 시발. 존나 멀쩡하네! 죽었는 줄 알고 걱정했더니!”
카힐이 앙피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앙피는 맹한 표정이긴 했지만, 물에 빠졌던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
“침착하게 카힐 양. 인간은 물속에서 이 정도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네. 어쩌면 유령일지도.”
“으에엙.. 빨리 도장...”
“오. 맞다 도장. 야, 나영웅 빨···.”
오랜만에 생각이 통한 앙피 일행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이 이미 끝나있었다.
홀로 양산의 분신을 막으러 간 일외동은 잠재력을 폭발시켜 모든 분신을 막아냈다.
안타깝게도 앙피 일행은 호수에서 첨벙거리느라 보지 못했지만, 일외동은 정말 ‘용사 아카데미’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였다.
호수 맛만 잔뜩 본 앙피와 토를 뒤집어쓴 카힐. 그들은 호수 저 멀리 본관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그들이 덩그러니 서 있는 호수도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말끔했던 산책로도 흙과 찢어진 교복이 낭자했고 호수 곳곳엔 기분 나쁜 붉은 색이 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분명한 행복과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데 덩그러니 호수에 남겨진 앙피 일행의 모습과 대비되었다. 조금 비참해 보일 수도 있었음에도 앙피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야 아카데미를 구하는 건 일외동이 할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최랑 연합의 아카데미 습격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다.
한동안 습격이 다시 올까 불안에 떠는 학생도 있었지만, 일외동의 활약을 되새김질하며 습격과 관련된 이야기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명문 영웅육성과마왕퇴치그리고가문의재건 아카데미]는 그렇게 다시 평화를 맞이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앙피는 습격 사건 이후로 줄곧 혼자 다녔다. 일외동은 어딜 갔는지 그가 만든 상자 집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아, 그의 지갑도 남아있어서 요긴하게 썼다.
아쉽게도 한동안은 일외동의 활약이 너무 컸기에 딱히 교장의 도장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 덕인지 때문인지 앙피 일행은 각자 아카데미 생활을 즐겼다.
나영웅은 서서히 밀려오는 파도처럼 아주 조금씩 살이 빠지고 있었고 비비는 여전히 공중 보법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카힐은 마족학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다른 과목에서 전부 꼴찌를 기록하고 있던 탓에 머리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앙피는···.
“기야아아악.”
앙피가 새로 지어진 별관 주변을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고 있다. 일주일 동안 아무도 그와 말을 하지 않은 탓에 사회성이 더 떨어진 모양이다.
“우와.. 저런 분도 영웅을 하는구나...”
그렇게 고집하던 존댓말도 애매하게 잃어버렸다. 덕분에 한층 더 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였다.
혼자가 된 앙피는 매일 같이 별관을 기웃거렸다. 부러움 반 지루함 반으로 별관에서 훈련 중인 사람들을 구경했다.
어쩌다 뜀박질 중인 나영웅을 만나기도 했지만, “후후후. 이 몸은 바빠서 이만.” 같은 말만 듣고 금방 또 혼자가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별관 뒤뜰로 향했다.
듣자 하니 별관을 새로 짓는 김에 이것저것 많은 시스템을 만들어 보기로 했단다. 동아리라던가 텃밭이라던가. 조금 더 평범한 활동도 하기로 했단다.
앙피는 그중 텃밭에 관심이 갔다. 그나마 잘하는 것이 요리였기에 텃밭의 채소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이 보라색 작물은 뭐지... 이것도 슾밥에 넣어도 되려나...?’
하필 요리할 줄 아는 게 슾밥뿐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앙피가 한창 텃밭의 작물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 왜 쳐다보지..?’
그 사람은 티가 너무 나게 슬금슬금 다가오더니 앙피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이보게 자네.”
“ㅁ... 뭐...”
앙피가 잔뜩 쫄면서 뒤를 돌아봤다.
그의 앞에 서 있던 건 다름 아닌 헤라 기숙사의 대표였다. 딱히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뿐이어서 대충 기억했다.
텃밭보다는 서예 따위에 어울리는 사람이라 텃밭을 목표로 온 건 아닌듯하다. 그렇다는 건 뒤뜰에 오줌이나 갈기러 온 것도 아닐 테니 앙피가 목적일 것이다.
“누구? ···”
하지만 앙피는 일단 모른척했다. 왜냐하면 먼저 아는척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건 못했으니까. 차라리 기억이 안 나는 척하다가 ‘아~’하면서 반응하는 편이 더 쉬웠다.
다행히 헤라 대표가 예상대로 반응해 주었다.
“지금 소인을 기억 못 하는 겁니까? 빡대가리인가 보구려.”
“아.. 느에.. 누구...?”
앙피는 갑자기 들어온 욕설에 진짜로 멍청하게 답했다.
“남도라고 하오. 또 잊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거라 믿소. 허허허.”
“아... 나는 앙피요..”
앙피는 남도의 말투가 독특해서 따라 해봤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남도는 한소리할까 고민하다 본래의 목적을 위해 참기로 했다.
“그보다 앙피. 동아리는 들었소?”
“ㅇ.. 안 들었으소.”
“그 자꾸 좃같이 따라 하지 마시게.”
남도가 인상을 확 지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허세 가득해 보여서 웃겼다.
“느에... 근데 저 동아리 안 할 건데...”
“그대는 왕궁 사람이지 않소? 그렇다면 이런 동아리를 하며 서민을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경험이 될 것이오. 맨날 편한 왕궁에 갇혀서 아랫것들에게 인형처럼 사는 삶이 지겹지도 않았소?”
남도가 뒷짐을 진 채 일침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앙피가 진짜 왕궁 사람이어야 먹힐 말이었다. 게다가 왕궁의 환경은 남도의 생각만큼 좋지도 않았었다.
‘하긴.. 다들 왕궁이라 하면 으리으리한 생활만 생각하니까..’
앙피는 문득 이르하라가 떠올랐다. 몇 안 되는 신하 중에서도 거의 모든 일을 다 담당하는 사람. 어쩌면 그가 노예 중의 노예가 아닐까?
어쨌든 중요한 건 검지인들은 상하관계를 중요하게 한다는 점이었다. 앙피는 굳이 왕궁 출신인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진실을 알아낼 방법도 없으니 들키지 않겠지 싶다.
“좋소. 그럼 우리 동아리에 들어오게.”
남도가 앙피의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이런 목적으로 접근했던 것이었다.
왕궁 출신인 앙피가 동아리에 들어온다면 동아리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다. 사실 기존 아카데미생들도 동아리가 뭐 하는 건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서로 뽐내는 악세사리 정도로 만들었다.
“무슨.. 동아리신데요?”
“동아리의 이름은 [지존 마법사들의 영웅일대기를 위한 준비생 모임]이오.”
“....... 그러면 마법 동아리 같은..?”
“틀렸소! 우린 마법을 쓸 줄 모른다오. 헤라 기숙사생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마법사랑은 거리가 멀다네. 허허허.”
남도가 멋쩍게 웃었다. 지금 보니 그리 영리한 것 같지도 않다.
그나저나 마법사도 없는데 동아리 이름은 왜 저럴까. 마법사도 아니고 영웅도 아직 아니니, 결국 남는 건 [준비생 모임]이란 것이다.
허영심 가득한 이름을 짓는 건 검지인의 특성인가 보다.
앙피는 굳이 그런 허례허식에 동참할 생각이 없었다. 저런 동아리로 교장의 도장을 받을 가능성은 없다시피하고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게 뻔하다.
“... 근데 뭐 하는 동아리에요..?”
“뭘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오?”
“동아리면 무슨 활동을 하지 않나요..?”
시발 마을에도 모임 같은 개념이 있었기에 앙피는 동아리의 개념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참고로 앙피가 들어갔던 모임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훈련만 받던 아카데미생은 동아리가 뭔지 몰랐다.
그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기숙사별 훈련, 점심, 통합 훈련, 저녁, 개인 시간’이 끝이었다.
그나마 있는 개인 시간도 대다수 훈련에 매진했다. 그들의 천성이 어떻든 간에 용사가 되려고 모인 자들이니까.
바보처럼 보이는 모습이 많아도 전부 마왕을 잡겠다는 선한 마음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말해 동아리 같은 일상에 가까운 일은 어색하다는 소리였다. 그런 점에서 동아리 시스템을 도입한 교장의 선견지명이 느껴졌다.
“동아리는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이오?”
“보통은... 그러려고 만들죠...? 없으면 그냥 갈래요. 사실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고···.”
앙피는 인사를 꾸벅하고 남도를 피해 뒤뜰에서 나왔다. 앙피가 나갈 때까지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앙피가 평소처럼 호수에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오늘은 헤라 기숙사의 쿠케 가슴살.... 쿠케가 무슨 동물인진 몰라도... 맛있겠지...?’
앙피는 수많은 가슴살 고기 중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걸 가져왔다.
많이 남은 건 인기가 없는 상품이란 것쯤은 앙피도 알았다. 하지만 헤라 기숙사생들이 눈치를 주는 것만 같아서 그냥 적당히 가져왔다.
앙피는 누런빛의 쿠케 가슴살을 한입 베어 물었다.
“....... 딱딱해...”
역시나 많이 남은 음식은 이유가 있었다.
앙피가 고기를 거의 핥아먹고 있을 때 남도가 떡하니 나타났다. 급하게 달려온 건지 그의 바지 밑단에 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
“우리 동아리가 뭐 하는 곳인지 생각났소!”
“.... 갑자기요..?”
“그렇소! 무릎을 굽히지 않고 제자리에서 뛰는 동아리오!”
남도가 비장한 표정으로 자랑스레 말했다.
‘... 그게 대체 뭔데.’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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