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아 학교 폭파했으면. (진짜 함)
“자 그럼 이번엔 전투의 기초 자세에 대해···.”
이전의 선생과 달리 나긋나긋한 목소리의 수업이 계속되었다. 한마디도 졸려 뒤지겠다는 소리다.
“하. 존나 지루해...”
카힐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선생이 쉬지 않고 말하는 덕에 그녀의 하품이 들리진 않았다.
그만큼 쉬지 않고 수업이 계속된다는 소리였다.
카힐은 책상에 볼을 기댄 채 옆자리 학생을 구경했다.
덥수룩한 머리의 소녀가 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 것이 필기를 하느라 손을 쉬지도 못했다.
‘흠.. 앙피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학생들을 구경하는 건 금세 질렸다. 수업에 집중한 학생은 아무 재미도 없으니까.
카힐은 책상에 손톱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에 흘러가는 구름을 구경했다. 하지만 이 길고 긴 수업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하.. 갑자기 학교가 폭파해 버렸으면 좋겠다.’
카힐이 그런 생각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을 때였다.
하늘에서 조그만 먼지가 날렸다. 그리고 그 먼지라 생각한 것은 점점 커지고 많아지더니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다.
“뭐야 저거.”
“카힐. 수업 시간입니다. 조금만 조용히.”
“아니 저거 뭔데. 무슨 기숙사인데 저런 훈련을 해?”
“훈련이요? 헤라 기숙사가 또 과격한 훈련을 합니까?
... 뭡니까 저거.”
카힐을 따라 창밖을 올려다본 테리아가 두 눈을 비볐다.
먼지처럼 하늘을 가득 메우며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이때가 바로 그때였다. 최랑 연합이 아카데미를 습격했을 때다.
그들은 말했던 대로 하늘을 통해 한꺼번에 침입했다.
그리고는 쾅-!
학교가 폭파했다.
카힐의 바람이 통한 것이다.
최랑 연합이 준비된 마력탄을 수업용 별관에 터뜨렸다.
덕분에 안에서 수업을 받던(?) 카힐은 무너지는 천장을 가까스로 피했다.
검지에 벽을 저렇게나 튼튼히 쌓은 사람들이 지은 건물치고는 생각보다 내구성이 약했다. 최랑 연합의 마력탄이 그렇게 정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다들 침착하게 탈출하세요!”
테리아는 서둘러 다른 아카데미생들을 챙겼다.
반면 카힐은 신이 났다. 드디어 수업이 끝나서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야! 누구야! 어떤 새끼가 학교를 터뜨렸어!”
‘어떤 이쁜이인지 얼굴 좀 보자. 칭찬해주게!’
슈 기숙사생들이 건물을 탈출하는 동안 카힐은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웬 이상하게 생긴 녀석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삐죽빼죽과 몽글몽글. 두 부류의 사람인데 솔직히 카힐 눈엔 다 똑같이 생겼다.
‘복제품인가?’
카힐이 사태를 파악하기도 전에 갑자기 삐죽빼죽한 녀석 하나가 달려들었다.
“죽어라. 용사 아카데미생!”
카힐의 모습을 보고도 용사라고 생각하다니. 조금 덜떨어진 녀석인가?
카힐은 날아오는 주먹을 가볍게 꺾었다. 그리고는 녀석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뭐냐 이거. 네가 학교 폭파했냐?”
“아뇨! 아닙니다! 제가 안 했습니다!”
삐죽빼죽 녀석이 겁을 지레 먹고 부인했다.
“그럼 뒤져.”
덕분에 그는 땅속에 얼굴을 파묻는 건 피부에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카힐은 이 사건의 주동자를 찾으러 주변의 최랑 연합을 하나둘씩 잡아 패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죄다 특징 없이 서로를 따라 한 것처럼 똑같이 생겨 구분하기 힘들었다.
“너냐? 니가 주동자야?”
“으아악! 또 괴물이다!”
“이 시발 누구보고 괴물이래.”
카힐이 지나간 곳엔 카힐 연합이 나무처럼 땅에 쏙쏙 박혔다.
“그나저나 ‘또’라고? 비비가 있는 곳에도 얘네가 나타난 건가? 그럼 아카데미 전체가 이런 상태인가?”
카힐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의 몽글몽글한 녀석 하나를 땅에 박아넣었다.
“이보게. 카힐 양.”
“뭐야. 시발.”
갑자기 누군가 카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를 땅에 박아넣었다.
“ㅇ.. 이 몸일세. 후후후... 인사 치고는 거칠지 않나..”
별관 앞 운동장에서 체력단련을 하던 나영웅이었다.
뒤집혀 박힌 탓에 웃통이 훌러덩 내려가 꼭짓점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카힐은 소리를 지르며 그를 발로 걷어찼다.
“으악 시발!”
“ㄴ.. 나영웅일세.”
“알아 시발! 옷 빨리 다시 올려 입어!”
“그보다 저 사람들은 갑자기 뭔가. 설마 그건가?”
“맞아. 너 무슨 일인지 아는 거야? 아니, 그 전에 옷부터 올리라고!”
카힐이 나영웅의 가슴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피를 토하며 옷을 올려 입었다.
“훈련을 받다가 들었네. 이 지옥 같은 훈련이 어서 빨리 끝나기를 빌었지. 그래서 갑자기 테러가 일어나면 내가 모두를 구하는 상상을 했더니 현실이 되었네.”
“어. 너도? 나도 학교 폭파해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상상력의 힘은 강한 법이군.”
“그러네. 그러니까 개소리 말고 너도 모른다는 거지.”
“그렇다네.”
나영웅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근데 평소보다 팔뚝 살이 덜 출렁거린다.
그러고 보니 찐빵 같던 얼굴이 평범한 빵 정도로 줄어든 것 같기도 하다.
“너 살 빠졌냐?”
“후후후. 그대가 이 몸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군. 어떤가. 그대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몸매가 되었나?”
나영웅이 훌렁 배를 깠다.
진짜 개 열받을 정도로 애매하게 빠져서 봐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그나마 주의 깊게 봐서 알아챈 것이다.
나영웅의 뱃살 같은 걸 계속 보긴 싫다. 아 잠시만, 옷을 너무 올렸다.
“아이 씨발 진짜!”
카힐이 나영웅을 그냥 땅에 처박아버렸다.
“멈춰. 거기까지.”
그때 삐죽빼죽한 녀석 하나가 또 카힐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녀석은 조금 다르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눈썹이 엄청나게 짙다. 거의 유일하게 생김새가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녀석도 윗옷을 안 입고 있다.
“난 최강 아카데미의 부학생회장. 우리의 계획을 막는 자는···.”
“하. 또 노출증.. 시발..”
하필 타이밍이 나빴던 덕에 부학생회장이란 녀석은 자기소개도 못 하고 제압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름만이라도 말해주자면 ‘파쿨’이었다.
“아. 그래서 침입한 거라고.”
“맞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응? 아니 난 고마워해 주려던 건데?”
“예?”
카힐과 파쿨은 눈을 마주 보며 서로 끔뻑댔다.
지가 다니는 학교를 폭파했는데 고마워한다니, 파쿨은 뭔 개소리를 하나 싶었다.
“아무튼 그럼 주동자가 너야?”
“아뇨. 주동자는 당연히 학생회장이죠. 전 부학생회장이라니까요?”
“후후후. 그렇군. 그렇다면 그 녀석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뭐야. 너 어떻게 나왔어.”
파쿨은 둘을 학생회장이 있는 호수로 데려갔다.
그가 순순히 데려가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의 학생회장은 정말 강했으니까. 그의 이름은 ‘양산’. 파쿨이 이전에 덤볐을 때 손가락도 까닥하지 못하고 졌다. 그때 느꼈던 압도감은 카힐에게 제압당했을 때보다 더욱 컸다.
‘크큭. 내가 괜히 이 아카데미에 들어갔던 게 아니라고.’
“학생회장 형 어딨어요. 양산 형! 양산 형 어딨어요!”
하지만 파쿨의 자신만만한 외침은 닿지 않았다.
호수엔 이미 한참 전에 쓰러진 양산과 멀쩡한 일외동이 있었다.
자신만만했던 파쿨의 생각과 달리 양산은 손쉽게 패배했다. 일외동이 조금 버겁다고 느낄 정도에서 이미 싸움은 끝이 났다.
그리고는 이미 한숨 가득한 푸념을 푸는 중이었다.
“··· 그래서 마법사에게 부탁했지. 날 닮은 분신을 만들어 달라고. 어떻게 인원수는 채웠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사라졌어. 남은 건 날 똑 닮은 수백 명과 분할되어 약해진···.”
양산은 물을 잔뜩 먹은 산책로에 누워 하소연하고 있었다.
뭔가 이미 상영 중인 영화관에 들어간 듯하지만 마침 하이라이트 때 들어간 기분이다.
습격한 이유만 요약해주자면 개백 학생이 대부분인 자신들을 위해 이곳을 뺏으려 했단다.
카힐은 이게 무슨 일인가 눈을 굴려봤다. 그리고는 남아있는 녀석이 당연히 주동자겠거니 싶었다.
“야. 네가 주동자였냐? 배신했구나!”
“후후후. 누구보다 월등했던 녀석이 개인적인 원한으로 아카데미를 배신. 그리고 흑화하여 모든 것을 파.멸. 시킨 스토리군.”
“... 왕궁엔 원래 제정신이 없냐?”
일외동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뭔 소리야. 중간부터 못 들었어. 그래서 저렇게 존나 약한데 습격을 온 거라고?”
“...... 하. 그러니까 본인들의 계급에 불만을 품고···.”
일외동의 설명이 두 번 더 되풀이되고 나서야 카힐과 나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분신을 만들면서 힘이 약해진 게 다행이야.”
하나 같이 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게 실제로도 한 사람의 분신들이어서 그랬던 거였다.
“근데 있잖아.”
“어, 왜. 또 못 알아들었냐? 설명을 몇 번 해줘야 해!”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아카데미생도 쟤 이기냐?”
“음. 일대일로 붙는다면 힘겹게나마 이기겠지. 근데 워낙 수가 많아서.”
“그니까. 아직 쟤 분신 수백 명 남아있는데?”
“아.”
일외동의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저 멀리서 한 번의 폭발이 또 일어났다.
원래 본체를 잡으면 분신도 다 사라지는 게 강호의 도리가 아니었나?
일외동이 양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야! 저것들 빨리 철수시켜!”
“크큭. 어림도 없지. 날 잡았다고 끝난 줄 알았나?”
“후후후. 그럴 거면 푸념은 왜···.”
“야 비켜봐.”
카힐이 양산의 멱살을 이어받았다.
이런 일이라면 역시 그녀가 전문이었다.
“크큭. 뭐 어쩔 셈이지.”
“뭘 어째. 죽일 건데?”
“크하하! 허세를 부리다니! 어디 한번···.”
뿌득-
일외동이 허세를 채 다 부리기도 전에 카힐은 그의 팔목을 부러뜨렸다.
“으아아아아악!!!!”
최강 아카데미에선 원래 죽이지 않는 것이 도리였다. 완벽하게 이겨놓고 다음을 기약하거나 친구로 삼는 것이 그들의 룰이었다.
그런 물렁한 마음가짐으로 카힐에게 허세를 부린 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빠각-
“끄어어억···.”
그의 다리까지 부러뜨리자 그는 그대로 실신했다.
“뭐야 얘도 좀비인가? 비비처럼 똑똑 잘 빠지는데?”
카힐이 잘도 무서운 소리를 했다.
그런데 양산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도 그의 분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힐은 고민에 빠진 듯 머리를 짚었다.
“후후후. 카힐 양. 걱정 말게. 내 트릭을 간파한 듯하니.”
“아니. 그게 아니라. 굳이 이 사태를 막아야 할까?”
“너... 그러고도 용사 아카데미에 잘도 전학을...”
일외동은 앙피 일행을 만날 때마다 충격을 받았다.
그런 그를 피해 카힐이 나영웅에게 속삭였다.
“이대로 시끌벅적할 때 그냥 도장 훔치면 되잖아?”
“후후후. 카힐 양답지 않은 똑똑한 발상이군. 역시 지식 기숙사에서의 수업이 도움이 되는 건가? 그렇다는 건 나도 힘 기숙사에서···.”
“헛소리 말고. 그래서 동의하냐?”
“후후. 당연히 콜일세.”
“코릴? 뭐란 거야 씹덕이. 어쨌든 알았단 거지? 그럼 내가 도장을 훔치러 갈 테니까, 네가 애들을 모아서 도망칠 준비를 해.”
“요카이.”
카힐과 나영웅이 모의 작당을 끝내고 무해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날 기회가 왔다.
이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도둑질과 도주를 실행하면 된다.
“뭐. 왜 갑자기 그렇게 보는데.”
“있잖냐. 혹시 앙피 어딨는지 알아?”
“아. 맞다.”
“?”
“호수에 던져졌는데.”
카힐과 나영웅은 동시에 호수를 쳐다봤다.
호수는 조금의 물결도 없이 고요했다. 호수 주변에도 앙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 빠져 죽었나?”
“이런 미친. 작전 취소! 앙피부터 구하러 가!!”
앙피가 죽으면 소환수도 전부 소멸이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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