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앙피, 국왕의 펫이 되다...?
앙피의 당찬(?) 인사가 끝나자 알현실에는 짧은 탄식과 정적이 맴돌았다.
“....미친놈. 제정신 아니네 이거.”
카힐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킥킥 웃어댔다.
안녕하세요.
그나마 ‘시발 마을’ 식으로 인사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아마 저기 활을 매고 있는 자가 즉시 화살 하나를 선물했겠지.
아니, 정말 다행일까?
앙피의 인사를 들은 나르여앙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앙피를 향해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왔다.
나르여앙은 앙피의 앞에 꼿꼿이 섰다. 그녀의 적안이 불에 델 정도로 뜨거워 보인다.
앙피의 동공이 그녀의 열기에 데일까 이리저리 흔들렸다. 카힐의 압박감과는 다른 느낌의 압박감이었다.
동시에 앙피는 몰려오는 불안감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저번 칙령을 떠올려 보아라. ‘님 사형 ㅅㄱ’였나. 아무튼 여왕이 칙령을 내린다는 것이 절대 좋은 일이 아니다.
나르여앙은 좋은 것을 발전시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쁜 것을 없애는 것이 그녀의 성미에 맞았다. 그 때문에 이 흉악한 손바닥의 밑바닥까지 직접 행차한 것이겠지.
그렇기에 그녀가 보내는 칙령 대부분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런 그녀가 직접 누군가를 부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카힐 님 사건이 제대로 마무리 안 된 건가...? 카힐 님 건네주면 난 살려주려나......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또 감옥에 가는 거야.....?’
앙피는 도망칠까 싶었다.
그래, 도망치자. 결국 대마법사만 찾으면 외형과 신분도 바꿔달라 하면 되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 나르여앙이 앙피의 앙증맞은 볼을 잡았다.
“아웅. 귀여워!”
“느에..?”
나르여앙이 앙피의 볼을 잡고 빙글빙글 돌린다. 상황 파악이 안 된 앙피는 두 초점이 갈라진 채 “흐에에에..”거릴 뿐이었다.
“여왕님. 체통을!”
저 멀리서 안경 쓴 궁수의 사내가 말했다.
“됐어~. 나 얘네랑 할 말 있으니까 어서 다 나가.”
“안 됩니다! 저 녀석들은 두 마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범죄자들입니다! 여왕님의 안위가!”
궁수가 경멸 섞인 시선을 보내며 막아섰다. 아마 이 남자가 앙피 일행에 관한 일을 여왕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나 앙피 일행을 쓰레기 보듯 대하는 거겠지.
“점사. 까불지 말고 어서 나가.”
“하지만..!”
“나가라고.”
잠시 수그러들었던 나르여앙의 눈빛이 다시 불탔다.
결국 점사란 자는 꼬리를 내리고 다른 신하들과 함께 알현실을 떠났다.
“크음. 그래서 네가 앙피 맞지?”
“ㄴ.느..네! 맞아요...”
호의적인 나르여앙의 태도에 앙피는 조금 안심했다.
아직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 사형은 아닌듯하다. 나르여앙은 앙피가 마음에 드는지 품에 껴안았다. 앙피도 여왕을 거스를 수는 없기에 인형처럼 가만히 굳어 있었다.
“아웅. 귀여워. 앙피, 내 펫 안 할래?”
“ㅅ..소환수 하나 드릴게요.”
“농담이야. 떨지 마.”
나르여앙이 앙피를 끌어안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미약한 음식 냄새와 두려움, 피곤 그리고 미지의 냄새가 났다.
잔뜩 앙피를 골려준 나르여앙이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을 살폈다.
“너희가 앙피 소환수야?”
‘생각보다 강해 보이진 않네. 얘네가 정말 약지와 중지를 잠재운 애들이라고?’
“어. 맞아.”
“후후. 카힐 양. 여왕에게 반말은 좀...”
“어머. 넌 꽤 먼 곳에서 왔구나? 희한한 냄새가 나네.”
나르여앙이 나영웅의 존재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는 혈통이나 운으로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니까.
힘을 되찾은 카힐이라도 여왕을 이기긴 힘들 것이다.
“그보다 너희. 엄청난 사고를 쳤던데. 대체 목적이 뭐야?”
“알 바···.”
“저흰 오른섬으로 갈 것입니다. 여왕님께 폐를 끼칠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웬일로 나영웅이 헛소리 없이 카힐의 무례를 막아섰다.
그나저나 갑자기 저건 무슨 말투지. 나영웅이 유일하게 무릎을 꿇고 여왕에게 예를 표했다.
“...어색하게 굴지 마세요...”
“후후후. 원래 영웅은 왕에게 약한 법이라네.”
“오른섬이라. 대마법사를 찾는 거구나?”
“..네. 그걸 어떻게....”
앙피가 나르여앙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그런 앙피가 귀여운지 더 꽉 껴안았다. 앙피가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는 걸 무시하며 나르여앙이 답했다.
“오른섬에 가려면 내 허락이 있어야 하잖아. 당연히 알지, 내가 보내줬으니까.”
“뭐야. 그럼 우리도 보내줘.”
카힐이 나르여앙 앞에 철벅 앉았다. 그리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갈겼다.
“풋. 그건 안 돼. 잊었니? 모든 손가락의 인정을 다 받아야 한다구.”
“대마법사는 그냥 보내줬다며.”
“걘 5초 만에 다 모아오던데? 너희도 몇 개 안 남았다고 들었어. 게다가···.”
‘이 녀석들 꽤 잘하고 있단 말이야. 손가락들에 그 정도 변화를 이끌어내다니. 다른 곳도 보내볼 필요가 있어.’
나르여앙이 앙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앙피 일행이 돌아다니며 사고를 치는 것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르여앙은 훌륭한 나라의 좋은 여왕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앙피 일행의 우당탕탕 여행이 그녀의 계획에 나름 도움이 되고 있다.
그것이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다음 목적지는 검지지? 근데 지금 거기 못 갈 거야.”
“왜요..?”
“이제 시험 기간이거든. 바쁠 거야 엄청.”
카힐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험이 뭐냐.”
“후후후. 시련을 말씀하신 것이겠지. 아아···. 떠오르는군. 이 몸을 강하게 만들었던 수많은 시련이.”
나영웅이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능을 보는 날 급똥이 마려웠던 순간, 군대의 맞선임이 억지로 걸그룹을 시청하게 만들었던 날. 탑을 픽했는데 정글이 유미였던···.
굳이 더 떠올릴 필요 없는 하찮은 기억들인 듯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르여앙은 그에게 깊게 동감해주었다. 그녀도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이니까.
“어머. 힘들었겠네. 근데 내가 말한 건 진짜 시험이야. 거긴 교육열이 불타는 마을이거든. 최근에 아카데미도 세웠다나 뭐라나~.”
아카데미라고? 물론 앙피네 마을에도 비슷한 건 있었다. 농사를 가르치거나 일을 가르치는 곳. 하지만 아카데미라고 부를 정도로 전문적인 시설은 없었다.
물론 마을에 아카데미가 있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문제는 나르여앙이 굳이 언급한 것엔 이유가 있다는 것.
나르여앙은 검지의 아카데미가 별로 좋은 눈치는 아니었다.
“아웅. 내가 아카데미 세우지 말랬는데, 말도 안 들어~.”
“그래서 아카데미가 왜. 우리랑 상관없는 거 아냐?”
“호호. 그럴까? 인장을 교장이 갖고 있는데도?”
“아... 설마···.”
“맞아. 인장을 그 뭐더라···. 칭찬 도장? 그런 걸로 쓴다더라.”
다음 여정의 목표가 벌써 보인다. 이번엔 교장의 도장을 뺏는 건가? 저 도장도 또 대마법사의 물건이면 어떡하지.
아카데미라면 학생도 있고 선생도 있겠지? 설마 그 모든 사람을 뚫고 가져오는 건 아니길 바란다.
반면 카힐은 오히려 그쪽이 익숙하고 간단했다.
“야! 걱정 마. 그냥 가서 다 때려 부수고 훔쳐 오자!”
카힐의 자신감이 활활 불탔다. 이미 근육맨 무리와 감옥도 뚫은 입장인데 뭐가 무섭겠는가!
“꾸어!”
앙피 일행은 자신감에 불타고 있었다. 어차피 우당탕하다 보면 다 해결됐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벌써 3개나 모았으니 기세도 좋다.
그런 녀석들을 나르여앙이 귀엽다는 듯 쳐다봤다.
“근데 거기 용사 아카데미야. 최근 마왕이 나타났단 소식 들었지? 걔 잡는다고 아카데미 설립했어, 걔네.”
아. 오며 가며 얼핏 들었었다.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왼섬 여기저기에 퍼져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에 띄는 피해는 없었기에 그냥 가십거리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진짜였다니.
“용사가 장난도 아니구. 너희 몇백 명은 될 용사 후보생 뚫고 갈 수 있어? 금방 끽. 아닐까? 호호.”
“.....앙피. 그냥 적당히 짝퉁 하나 만들어서 찍자.”
“어머 얘. 그거 내가 만든 거라 다 들킨다?”
당연하지. 애초에 손가락들을 관리하는 게 나르여앙 그녀인데. 지금은 앙피나 껴안고 천진난만해 보여도 왼섬의 여왕이다.
“하. 제길 그럼 어떻게 해!”
“그거라면 걱정 말렴. 내가 생각해 둔 게 있거든. 너흰 그냥 하루 푹 쉬고 내일 출발해.”
나르여앙은 안고 있던 앙피를 놔줬다. 마음 같아선 앙피를 반려견마냥 온종일 곁에 데리고 있고 싶지만, 그녀도 나랏일을 해야 하니까.
“그럼 귀요미. 잘 쉬어?”
나르여앙이 앙피의 볼에 뽀뽀를 했다. 대체 얼마나 앙피가 마음에 든 걸까.
그녀는 알현실 밖으로 홀로 나왔다. 밖엔 처음 보는 신하 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자는 쓸만합니까.”
“응. 나쁘진 않네. 영 얼빵하긴 한데. 말은 잘 듣겠어~.”
나르여앙이 떠나자 앙피는 긴장이 턱 풀렸다.
앙피는 슬라임처럼 바닥에 축 늘어져 골골댔다.
“힘들어..... 슾밥 먹고 싶어...”
“우웩. 굳이 그걸?”
아무리 좋게 대해준다 한들 상대는 여왕이다. 혹여나 심기를 건들지 않게 조심하느라 계속 긴장 상태였다.
그때 푸근한 인상의 남자가 그들을 안내하러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전 왕궁의 잡일을 담당하는 이르하라입니다. 손님분들 방을 준비해뒀으니 어서 이동하시지요.”
그는 잡일 엘리트답게 친절히 앙피 일행을 안내했다.
안 그래도 피곤했던 앙피 일행은 그가 알려준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젤 뒤에서 따라가려던 비비를 이르하라가 잡아 세웠다.
“끄어?”
눈을 말똥말똥 뜨는 비비를 이르하라가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후욱. 손님은 이쪽으로.. 따로 할 게 있습니다.”
이르하라가 불쾌한 시선으로 비비의 몸을 훑었다. 하지만 비비는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한 표정으로 그를 뒤따랐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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