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기껏 탈출했더니 아무도 신경 안 씀
“으아······.”
쿠과과과광-!
누군가의 비명이 굉음에 묻혔다.
“흐에에엥..”
앙피는 제일 먼저 달리기 시작했으면서 금세 따라잡혔다.
“야야! 이러다 죽어!”
카힐은 느려터진 앙피를 냅다 어깨에 올렸다.
이미 그들이 있던 피고인 대기방은 바닥으로 꺼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바로 뒤로 붕괴가 쫓아온다.
다리를 멈추는 순간 균열이 그들을 진짜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후후후.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여.”
“크에에에엙!”
다가오는 붕괴와 거의 동일선상으로 달리는 나영웅을 비비가 뒤에서 열심히 밀어줬다.
쿠르르르릉-!.
무너지는 재판소를 앙피 일행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했다. 그들이 벗어나자마자 재판소는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 모습을 감췄다.
재판소가 있던 곳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끄어어어. 우어어어어···.”
나영웅을 한참이나 밀어준 비비는 혀를 쭉 내뺀 채 누워 앓았다.
그리고 왜인지 나영웅도 그 옆에서 같이 헛구역질을 했다.
“휴. 뒤질뻔했네.”
카힐은 힘든 기색 없이 짐 던지듯 앙피를 바닥에 던졌다.
쿵.
“아야...”
앙피는 비틀비틀 일어나 내리막길을 내려다봤다.
정상에 지어졌던 재판소의 위치에선 양쪽의 마을이 전부 다 보였다.
중지 마을과 사형수 마을.
중지인들은 하나 같이 사형수 마을은 지옥과도 다름없다고 말했다. 규칙도 질서도 없는 마을이 멀쩡히 운영될 수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양쪽을 다 내려다본 앙피는 어느 쪽이 중지 마을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저 멀리 보이는 손바닥 숲으로 겨우 구별할 순 있었다.
앙피의 눈에는 두 마을의 풍경이 별다르지 않았다. 중지인이 그렇게 말하던 지옥은 어디에도 없었다.
‘...재판봉은 어떡하지...?’
앙피는 제 역할을 다한 재판봉이 거슬렸다. 인장을 얻은 이상 재판봉을 굳이 갖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물론 대마법사의 엄청난 마법이 걸려 있긴 했지만, 앙피는 딱히 탐나지 않았다. 앙피는 남에게 할 질문을 세 가지나 만들지 못하니까.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게다가 챙겨두면 분명 누군가에게 뺏길 확률이 더 높았다. 대부분은 본인의 소환수가 가져가겠지만.
변수가 질색인 앙피는 ‘마을 쪽에 버리면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재판봉을 나뭇잎으로 감싸 내리막길로 던졌다.
미끄러운 나뭇잎으로 감싸진 재판봉은 그대로 마을의 근처까진 당도할 것이다.
다만, 방향을 잘못 잡은 앙피는 재판봉을 사형수 마을 쪽으로 내려보냈다. 후에 재판봉은 사형수 마을 중 누군가가 줍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재판봉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그들에게 달렸다.
그 이후는 이제 앙피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그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ㄷ..다 쉬셨나요...? 슬슬 중지에서 나가요...”
편하게 업혀 온 앙피가 눈치 없이 눈치를 줬다.
“후욱후욱. 1분만 기다려주게. 마나가 다 떨어졌다네.”
“...”
‘마나가 뭐지...?’
앙피는 기다리기 지루한지 혼자 슬슬 내려갔다.
중지 마을은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분명 잠들어야 할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거리에 사람이 돌아다닌다. 커다란 모닥불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후후. 이건 ‘긴 국수’의 냄새? 이 늦은 시간에 잔치라도 하나 보군.”
나영웅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마을 사람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못다 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규칙에 얽매여 살았던 삶을 비웃으며 그들은 즐겁게 잔치를 즐긴다.
앙피 일행이 처음 중지에 왔을 때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할 상황이었다.
“뭐야. 쟤 뛰어다니는데? 쟨 소리 지르면서 노래하는데? 뭔데! 왜 안 잡아가!? 난 왜 사형시키려던 건데!”
감옥보다 시끄러운 모습에 카힐은 어이가 없었다. 본인을 무슨 욕설이니 뭐니 하는 사항으로 잡아 가둬놓고 이렇게나 자유분방하게 놀고 있다니.
계속 감옥에 있던 삼인방은 이 마을이 얼마나 딱딱했는지 상상조차 못 할 것이다.
유일하게 본래의 중지 마을을 알았던 나영웅만이 흡족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훨씬 보기 좋아졌군.”
별생각 없이 모닥불을 구경하는 비비와 달리 앙피는 어렴풋이 상황을 이해했다.
‘밤에 노는 게 규칙인가 봐...’
너무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때 앙피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제트와 아치를 발견했다. 둘은 중지인 사이에 녹아들어 즐겁게 웃고 있었다.
앙피는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지나쳤다.
그도 분명 느낀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소환수라 할지라도 다른 생명체와 다를 바 없다고.
단순히 자신의 소환수라고 해도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앙피는 자신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어서 능력을 없애 소환수들에게 자유를···.
‘...저분은 데려가면 오히려 손해야.’
앙피는 혹여나 제트가 자신을 발견할까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앙피 일행이 지나쳐 지나가고 한참이 지나도록 중지인들은 잔치를 즐겼다. 비록 아직 고기나 술의 존재조차 모르는 그들이지만 그들도 중지다운 행복을 찾을 것이다.
***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후후. 왠지 시선을 끌어야 할 것 같아서 해봤네.”
손바닥 숲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 갑자기 이레스트가 할 말이 있다며 나타났다.
여전히 편한 복장의 이레스트는 조금 늘어지는 말투로 말했다.
“저 이만 은퇴하겠습니다.”
“ㄴ...네? 왜...”
“중지에서 지내보니 깨달았습니다. 규칙에 얽매이고 갑갑하게 사는 것보다 값진 인생이 있다는 것을요.”
잠깐 가졌던 자유 시간이 생각보다 더 달콤했던 모양이다. 물론 변해가는 중지인들을 보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레스트의 변화를 지지해줄 수도 있긴 했지만, 앙피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일하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보내버리면 남은 세 명과 난관을 헤쳐갈 자신이 없다.
앙피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옷깃을 잡았다.
‘가지 마요. 나랑 계속 있어 줘요.’
“....지금 가요..?”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레스트는 늘 하던 대로 꾸벅 인사를 하려다 허리를 숙이지 않고 멈췄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손을 천천히 올리며 말했다.
“주인주ㅇ···. 아니, 앙피. 다음에 보자.”
이레스트는 어색한 웃음을 짓고는 사라졌다. 늘 그렇듯 조금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앙피 파티는 다시 넷으로 돌아갔다.
앙피, 카힐, 비비, 나영웅.
그나마 앙피에게 희망은 있었다.
이레스트가 은퇴한 사실을 하이드로가 알게 되면 새로운 인물을 보내줄지도 모른다. 하이드로가 그럴 정신이 있다면 말이다.
‘...그래도 두 개만 더 찾으면 되니까. 별일 없겠지....’
앙피는 사라진 이레스트를 떠올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 너무 대놓고 아쉬워한다? 저런 음침한 스타일이 취향이었냐? 어울리긴 하네.”
“...제일 유능했는데...”
비웃는 카힐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속삭였다.
“그보다 앙피 군. 이제 남은 인장은 2개인가?”
“....네. 어서 서두르죠.”
“그 후에 왕궁으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느에..”
앙피는 귀찮은 듯 답했다.
“그럼 저 누가 봐도 왕국 옷을 입은 사람은 뭔가?”
나영웅이 가리킨 나무 뒤에 누군가 숨어 있었다. 실루엣이 겨우 보이는 정도인데 나영웅은 용케 왕국 사람이라 특정 지었다.
카힐은 어깨를 우드득 풀었다.
“왕국 사람이 여기 왜 있냐. 시발 보나 마나 왕국 옷을 뺏은 손바닥 놈들이겠지.”
카힐은 자신 있다는 듯 실루엣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실질적으로 봉인된 힘은 그대로였지만 두 팔이 자유로워진 것만으로 전투에는 유리해졌다.
“기다려. 족치고 올게.”
카힐은 자신만만하게 나무 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무언가 확인하고는 곧장 돌아왔다.
“하. 시발.”
“....왜요? 1초 만에 패배하신···.”
“헛소리 말고. 네가 직접 봐라.”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실루엣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익숙한 콧수염. 익숙한 옷차림.
관절이 없는 듯 흐느적대는 저 몸짓.
“하하. 오랜만이네 앙피!”
“으에...? 칙사 님.....?”
뜻밖에 인물의 등장에 앙피는 당황했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 때문에 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저 사람이 날 찾아왔다는 건·········. 설마···.’
앙피의 불안감이 적중하듯 칙사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핫! 핫!”
칙사는 양피지를 맛깔나게 돌리며 리듬을 탔다.
“엄청난 춤 솜씨군.”
“저게? 존나 구린데.”
휘리릭- 찻.
칙사가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꾸어어?”
비비가 신기한지 칙사를 쿡 찔렀다. 덕분에 각 잡고 있던 칙사는 화들짝 놀라 엎어졌다.
“ㄱ...괴물!”
“아... 제 소환수에요. 이쪽 나영웅 님도...”
“그....그렇군!”
칙사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옷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양피지를 펼쳤다.
“나. 나르여앙은 말하노라. 앙피, 그대는 당장 왕궁으로 오거라.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만나서 하지.”
‘왕궁으로 오라고....? 갑자기?’
“흐어...”
“아, 시발.”
카힐과 앙피는 동시에 이마를 짚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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