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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만은 님의 서재입니다.

Messor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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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만은
작품등록일 :
2016.10.03 09:08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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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50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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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9,628

작성
17.05.0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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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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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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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쪽

동료

DUMMY

"이를테면, 죽음이란 거지. 영어로는 Death. 한자로는 죽을 사."

흰색 가운을 걸쳐 일부가 가려지긴 했으나 매부리코처럼 툭 튀어나온 아랫배가 고작 그런 걸로 가려질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남자인지라, 그는 터질듯이 부풀어오른, 그러면서 바지 안에 몰아넣었던 자신의 와이셔츠 앞자락을 슥 빼내고는 기괴한 미소를 띈 얼굴 위의 안경을 익숙하게 벗겨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론상의 이야기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거야. 끽 해봐야 0.000000······ 아주 끝도 없지. 무작정 자릿 수를 확인하려 해도, 하루는 그냥 지나갈걸?"

그리곤 먼지와 물때 등이 묻은 안경알을 대충 그런 셔츠 끝자락을 이용해 닦아낸 남자는 이어 계속해서 되뇌이고 있던 '0000···' 을 돌연 뚝 그쳐버리고, 이번엔 닦아낸 안경의 초점을 환한 하얀빛이 퍼져나오는 천장 쪽 조명에 옮겨내었다.

"아무튼, 이건 절대 강제적이 아니야. 난 오늘 네 의견을 들으러 온 것 뿐이거든. 일단 내 주관적인 판단으론··· 넌 끌리고 있어, 맞지? 당장 해보고 싶잖아. 그 표정에서··· 어··· 음, 붕대 때문에 안보이니까 이건 못들은 척 해주고. 여튼, 지금 네 눈빛이 말해주고 있거든. '아! 세계에 한명 뿐인 천재 의사가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치료 방법으로 꼭 이 상처를 치료 받고 싶다!' 라고. 그렇지?"

조명빛이 투과되면서 보여지는 안경알 곳곳의 이물질들이 제법 마음에 드는 상태로 제거된 모양인지, 벗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신중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다리 부분부터 귓등에 안착시킨 남자는 이윽고 콧망울 바로 위에 걸쳐진 안경을 부드럽게 밀어올렸다.

말을 한번 끝낼 때마다 잊지 않고 뱉어내는 '0000' 이란 단어가, 이젠 공명음까지 뒤섞이는 것 같은 착란적인 소음을 불러일으켰지만, 남자는 도저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아가 전혀 근본 없는,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오직 하나의 박자로만 통일된 리듬감을 '딱딱' 손가락으로 맞춰가며, '0' 이란 숫자를 계속해서 토해낼 따름이었다.

언젠가 흘렸었던 옅은 갈색의 손바닥 너비만한 커피 자국이 그런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대며 일그러졌다. 또, 언젠가 집어던졌던 차트가 여전히 바닥을 뒹굴어다니는 광경은 어딘지 조금 낯설어보이기도 했는데, 아마 깨끗하던 백색의 종이가 흡사 수십년은 묵은 것 같이 누르스름히 변색되고, 더불어 말라비틀어졌다는 점 덕분에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과일 바구니와 함께 조용히 놓여있는 메트로놈의 정적을 둘러싼 차분한 움직임은, 가만히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묘한 박자감을 띈 남자의 중얼거림과 기묘하게 가라앉은 고요함, 따분함, 그리고 병원 특유의 묘한 긴장감과 맞물려 문득 정신이 어디론가 끌려가버리는 다소 위험한 착각을 하게끔 만들었지만, 이완 별개로 남자의 입가엔, 앞선 커피 자국과 마찬가지로 여태 묻어 있는 귤의 노란색 과즙처럼 살짝 이질적인 미소가 베어나와 있었다.

"첫시술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 무려 첫번째로. 물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해서 무작정 강요한다고 받아들이면 안돼. 결국 선택은 네 몫이야. 내가 끼어들 틈은 없지. 하지만 넌 여길 찾아왔고, 공교롭게도 담당 의사가 바로 나야. 누가 장난친 것도 아니지. 그래서··· 살짝 모순적이지만, 솔직히 너한텐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해. 물론 아주 없다는건 아니고··· 그냥 네가 고민을 많이 할 필요가 없다라는 거야. 넌 어떤 '필요' 에 의해 이곳을 선택했고, 난 단지 그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지금까진 그다지 별 효과가 없었지만 말이야."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빼낸 와이셔츠의 앞자락을 다시 바지 속에 주섬주섬 집어넣고, 이어 툭 튀어나온 배를 셔츠와 함께 이중으로 감싸안은 흰색 가운의 주머니 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남자가, 잠시 끊겼던 말을 다시 이어붙여 나갔다. 그건 어느새 감쪽 같이 사라진 과일 바구니 안의 사과가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로 돌아왔을 무렵의, 그러니까 남자가 무척이나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재차 의자에 앉아 입가에 묻은 과즙을 빠르게 한번 소매로 훔쳐낸 뒤의 일이었다.

"음! 사과가 맛있구만. 미지근한게, 뭔가 당도를 더 올려주는 느낌인데? 귤도 좋지만 역시 과일은 사과가 최고지. 넌 얼른 그거나 읽어봐. 계약 내용에 대해 다 적혀있는 거거든? 내가 친히 복사기로 뽑아온 거니까, 짜증난다고 찢어대진 말고. 그거 다시 뽑으려면 눈치 보여. '이 놈의 돼지가 왜 이렇게 왔다갔다하나. 안그래도 더운데 온도가 확 올라가잖아.' 라는, 우리 병원 간호사들의 눈빛이 꽤 장난이 아니거든. 하하! 환자들한테도 그다지 좋은 눈빛을 받은 적도 없지만 말이야. 흠! 그렇게 따져보면 정말 외모지상주의가 팽배진 것 같단 말이지. 좀 뚱뚱하다고, 좀 못생겼다고 그 사람이 가진 능력치를 멋대로 끌어내려 확정짓는 건, 뭐 하나 잘난 것도 없는 정말 치졸한 찌질이들만 그러는 건데. 아, 그렇다고 우리 병원 간호사들이랑 환자들이 그런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어디까지나' 라는 전제가 달라붙은 예시라는 거지. 흠흠."

여전히 요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말로 끝을 맺은 남자의 입에서 다시금 '0000' 이 거진 반사적으로 터져나왔다. 그때까지 침대에 누워, 전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남자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마치 그림자 마냥 따라붙던 '무언가' 가,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침대 위, 정확히는 자신의 가슴팍 바로 위에 놓인 구깃구깃한 종이를 최대한 펼쳐내 읽어내리기 시작한 것은, 고장난 라디오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던 남자의 입에서 언뜻 '이번이 딱 135번째 소숫점이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고 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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