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
“마마, 대선우의 호위대장 려군이라 하옵니다.”
예상치 못한 곱상한 외모에 한 눈에 보기에도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애쓰는 모습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혼자로 상견례를 하기 위해 찾은 호위대장 려군이 자신은 원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사람이며,
여차여차해서 이번 혼사로 인해 선우가문의 일원이 되어 혼사를 치루게 된 사정을 이야기 하고서는,
이곳 사람도 아닌 자신이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면 이웃나라 간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선우께서 혼사에 관해 하문하시거든 그러한 사정 때문에 불가하다고 아뢰어 달라는 것이었다.
어찌 일국의 공주가 선우 가문도 아닌 먼 다른 나라 출신의 무사와 혼인을 하려 하겠는가.
한나라 공주가 그러한 사정을 잘 알아들은 것 같자,
려군은 겨우 안도하며 상견례를 마치고 공주의 처소를 나섰다.
이제 골치 아픈 부담에서 벗어나 지금처럼 대선우를 가까이 모시면서
훈국의 여러 여인들과 염문이나 뿌리며 지내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려군은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은 려군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진행되었다.
상견례를 한 이후 대선우가 의향을 묻기도 전에
오히려 한나라 공주측에서 먼저 기별을 보내 와,
이번 혼사는 나라간의 중요한 일인만큼 조금이라도 차질이 빚어지면 불미스러운 것이니,
이미 정해진 대로 성사되도록 만전을 기해 달라고 각별히 요청해 온 것이었다.
먼 이국 땅에서 온 한나라 공주는 다소 거칠어 보이는 훈국 사내들보다는 조선 출신의 꽃미남 무사가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떡이었고,
자신 역시 원래 한나라 공주는 아니었기에 신분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듯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려군의 속내와는 상관없이,
물론 대선우 묵돌이야 그 동안 생사를 함께 한 호위대장의 혼사가 성사되어 크게 기뻐했고,
곧이어 조선으로 간 상단과 함께 려군의 일가가 도착한다는 기별까지 있게 되자
결국 려군은 빼도 박도 못한 채 한나라 공주를 떠안게 되고야 말았다.
상단 사람들과 함께 려군의 일가가 선우정에 도착했다.
“려군아, 네 그 동안 어찌 그리 소식이 없었느냐.
아버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 줄 아느냐.”
“죄송합니다. 형님. 정말 그 동안 너무 경황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이곳 사정이 나아졌으니 앞으로는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먼 타국에 홀로 가 있던 려군과 재회한 일가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려군의 어머니와 형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머리에 상투를 매고, 흰 삼베 옷을 입고 있었던 조선 사람들은 한 눈에도 순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곧이어 려군의 일가가 대선우에게 예를 올렸다.
“불초한 소인의 자식을 이리 거두어 주시니,
대선우의 은혜가 참으로 하늘과 같사옵니다.”
려군이 먼 이곳에서 대선우를 호위하는 중책을 맡고 있음을 듣고 있었던 연로한 부친은 대선우 묵돌의 배려에 큰 감사의 뜻을 올렸다.
“아니올시다. 그 동안 려군이 갖은 고생을 다하며 잘 도와 준 덕에 이 사람이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오늘 이리 부친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사람 또한 기쁘기 그지 없소이다.”
대선우 묵돌은 자신이 거처하는 바로 가까운 곳에 려군의 일가가 불편 없이 머물도록 하였다.
려군의 일가가 도착함에 따라 곧바로 혼례를 치를 준비가 한창이던 때,
그 곳 사람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또 다른 누군가가 선우정에 나타났다.
도복 차림에 큰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 한 노인이 선우정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에게 자신은 한나라 공주의 일가 사람이라며,
이번 혼사에 참석하러 왔다는 것이 아닌가.
괴이하게 여긴 선우정 군사들에게서 한나라 공주측에 기별을 넣으니 그 노인은 바로 한나라 공주로 온 여인의 이전 양부였고,
다시 양부와 재회한 공주의 기쁨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대선우 묵돌 역시도 이 먼 곳까지 홀로 나타난 한 노인을 괴이하게 여겨 자신의 거처로 청하였다.
난생 처음 보는 이상한 복식을 한 채 대선우에게 예를 올린 후,
공주의 일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노인은 묵돌이 보기에도 뭔가 예사 사람 같지 않은 풍모로 비추어졌다.
풍비가 대선우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한나라 궁중에서 이번 혼례와 관련해 떠돌았던 소문들을 귓속말로 소상히 아뢰자,
그 때서야 묵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장장군이 말하기를 그대가 그리 관상과 길흉을 잘 본다고 하는데, 어떻소이까.
이왕 이렇게 만남이 이루어졌으니 그대가 이 사람도 한 번 보아 주시겠소.”
그러자 노인의 답이 의외였다.
“대선우, 이렇게 뵙게 되어 큰 광영이오나
대선우께서는 그런 것을 보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요?”
“대선우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을 스스로의 의지와 지략으로 이겨내시는 분이시오며,
그리하여 이미 천하의 지존이 되시었는데, 더 이상 무엇을 알아 보려 하십니까.
또한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시면 되실 것이옵니다.”
묵돌이 마음에 드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리자,
노인은 자신이 아는 한 훈국의 치세가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니
그저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이웃 나라에도 관용을 베풀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흡족해진 묵돌은 노인이 한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공주측의 혼주가 되어 려군의 일가와 함께 혼례를 주관하도록 허락하였다.
한나라 공주와 려군의 혼례는 신랑측 조선의 습속과 신부측 한나라의 습속에다 거행되는 장소는 또한 훈국이었으니,
그야말로 여러 습속이 뒤섞여 거행된 관계로 훈국의 백성들은 모두들 신기해 하였다.
그러나 형식이야 어쨌든 혼례야 어디서든 경사는 경사였기에,
그 동안 자신들의 대선우를 모신 호위대장의 혼사에 모두들 흥겨워했고,
대선우 묵돌 역시 전 일가를 대동하여 직접 참관함은 물론
혼주들이 각기 자신들의 습속대로 참석한 하객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도록 배려해 주었다.
려군의 일가가 머무르는 동안 대선우 묵돌은 그들과 늘 저녁 만찬을 함께 하곤 했다.
아무리 려군이 가까이서 모시고 있다고는 해도
한미한 려군의 가문 입장에서는 감히 지존인 대선우의 일가와 함께 만찬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유목민족의 습속은 크게 상관치가 않았다.
유목 민족은 의외로 ‘하늘이 내린 귀인’이라 해서 자신들을 찾은 손님을 크게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관습이 있다.
워낙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은 손님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는 없었으나,
천하의 지존인 묵돌이야 려군의 일가가 먼 곳에서 찾아온 손님들이니만큼 측근들과 함께 하는 저녁 만찬에 그들을 자주 동석시켰다.
훈국의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조선 사람들의 습속은 참 특이해 보였다.
유목민은 무엇이든 젊은 사람들이 우선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힘을 써야 하는 존재 위주로 모든 것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먹는 것이나 입는 것도 젊은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돌아간다.
그러나 연로한 려군의 부친을 대신해, 일가를 이끌고 있는 듯한 려군의 형님 내외가 부친을 깎듯이 모시며 무엇이든 먼저 권하였고,
심지어 만찬을 할 때도 부친이 먼저 음식을 먹기 전까지 일가 전체가 모두들 입에 대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려군 역시 대선우의 최측근으로 이곳에서의 위세가 거의 번왕급에 버금간다 해도 되었건만,
바깥 일과는 별개로 집안 일에서만큼은 무슨 일이든 일가를 이끄는 형님과 먼저 의논하여 행하곤 했다.
비록 거창한 가문은 아닌 관계로 소박하고 단란하면서도 저들에게는 또한 나름대로의 예가 자리잡고 있는 듯 보였다.
혼례가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찾은 려군의 형에게 대선우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려군이 이곳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니,
일가 또한 모두 여기에 남아 선우 가문의 일을 돌보는 것이 어떠하냐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려군을 가족처럼 여기던 대선우의 비가 려군 일가의 사람들을 그지 없이 마음에 들어 해 꼭 여기서 남아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고,
려군의 일가와 함께 지내며 대선우 묵돌 또한 한 때 단란했던 자신들 일가의 옛 기억이 살아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우 가문의 집사를 맡는다면, 단 번에 귀족 반열에 오름은 물론 잘만 하면 큰 영화를 누릴지 모를 일이었으나
려군의 형이란 사람의 답 또한 전혀 뜻밖이었다.
자신의 일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선우의 큰 은혜에 감읍할 따름이나,
나라님이 선정을 베푸시는데 어찌 백성된 자가 이를 저버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 훈국 사람들은 그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들이 알기에 조선에서 무슨 벼슬을 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농사꾼인 려군의 형이란 사람이,
백성된 자의 도리를 따지며 이렇게 둘도 없는 좋은 기회를 마다한단 말인가.
그러나 묵돌 형의 소신은 가식적이거나 결코 빈말이 아니었고,
천하의 패자인 대선우라 할지라도 농사나 짓는 일개 백성의 생각이라 해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긴 대선우 묵돌은
자신의 불초한 아우에게 중책을 맡기고 이렇게 혼사까지 치루어 준 대 대해 감사하며,
은혜를 갚아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자신들이라며 거듭 사양하는 려군의 형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한 후,
특별히 사람을 붙여 안전하게 조선으로 귀가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너희 조선 사람들은 다 저러하더냐.”
려군의 일가를 만나본 묵돌은 조선이란 나라에 대해서 달리 보는 듯 했다.
어찌 평범한 농사꾼조차 저리도 예와 도리를 따진다는 말인가.
척박한 초원에서 생존을 위해 이합집산을 거듭해야만 했던 자신들과는 뭔가 다른 결이 보이는 듯했다.
함께 있던 풍비가 저번 한왕과 함께 투항한 자들 중 자신의 밑에서 한나라와의 일을 맡아보던 자에게 얼핏 들은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남방에 공자라는 성인이 계시온데,
동쪽에 예의가 바른 나라고 있다고 하시며 자신도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묵돌을 비롯한 선우 일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사망 시 자신도 동이 사람이라고 밝히기까지 한다.
려군이란 녀석만 해도 그랬다.
태자 시절, 조선에서의 상단을 호위하는 무사로 훈을 한번씩 찾곤 하던 려군을 우연찮게 알게 되었고 무예가 보통이 아님을 알긴 했으나,
자신의 부족 출신도 아닌 이방인인 그가 그 곳에 남아 자신의 호위무사가 되겠다고 청하니 처음에는 거들떠 보기라도 했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거처 주위에서 노숙을 하면서까지 결코 떠날 생각을 않기에,
보다 못한 자신의 아내, 태자비가 막사와 먹을 것을 내어 주었고,
결국 손을 든 태자 묵돌이 호위무사로 삼았던 것이다.
이후로도 그저 자신을 신뢰하고 가족처럼 지내는 것으로만 만족할 뿐,
공에 비해 그만한 보상이 없었는데도 불구, 지금까지 불평 한마디 없이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랐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귀 영화를 다 누리고 싶은 것은 매 한가지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선인들은 뭔가 다른 결이 있는 것 같았다.
“려군아, 너희 조선이라는 나라의 백성들이 참으로 탐이 나서 그러한데,
내 만약 조선과 겨루려고 한다면 너는 어찌하겠느냐?”
“예? 대선우, 그게 무슨···”
뜻하지 않은 대선우의 하문에 려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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