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을 달다가 옛날 일이 생각나서 문득 적어봅니다.
고등학교 때 저는 수업은 커녕 교과서 한자도 들춰보지 않는 학생이었습니다. 시험기간에, 심지어는 시험직전 쉬는 시간 10분 동안 교과서를 부랴부랴 공부하며 이해하고, 그래서 암기할 시간도 없이 시험볼 정도로 게을렀습니다. 그럼 수업시간엔 뭐 했냐면요.
수업시간에 라노벨을 썼습니다. 그땐 라노벨이란 말 자체도 없을 때지만요. 워낙 일본만화나 순정만화를 많이 볼 때라서 그런 류의 스토리를 끄적끄적했습니다. 전학생이 알고 보면 무슨 첨단기술을 갖춘 비밀조직의 일원이라거나, 고등학생인데 부모끼리 정혼한 상태라서 좌충우돌 한다든지...내용은 그야말로 순정만화나 버라이어티로 옮길 만한 스토리였고, 분량도 사흘이면 노트 한권 뚝딱이었지요.
그러면 제가 쓴 소설 들이 교실 문턱을 넘어 옆반, 또 옆반으로 넘어가서 결국은 어느 선생님께 걸려서 교무실로 들어가고..저는 담임께 호출되어 교무실에 불려갔습니다. 당연히 성난 얼굴로 노려봐야할 담임은 오히려 공책에 얼굴을 묻고 키득키득 웃으면서 배꼽 빠져라 읽다가, 자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진 제 그림자에 화들짝 놀라서 공책을 건네주며 겨우 한마디 하셨지요.
“수업시간에 이런 거 쓰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대학 가야지.”
작가들도 지금 쓰는 글이 킬링타임 용이라거나 라노벨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별로 없으실 것 같네요. 저처럼 학창시절 이런 소설을 써보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혹은 아예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지금은 역사소설을 씁니다. 딱히 가볍게 쓰지도 않고, 쓰면서 힘들 때도 많아서, 여전히 밝고 가벼운 라노벨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재충전을 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나이를 먹어선지, 성격이 어두워져선지, 지금은 밝은 소설을 쓰고 싶어도 써지질 않습니다.
작년 가을에 조아라와 문피아에 완결지은 소설은 고증 차원에서 공부한 역사책만 70권입니다. 연재하기 전에 시놉을 짜고, 캐릭터 공책을 한두권 이상 써서 캐릭터를 충실하게 세우고, 그러고도 대본으로 씬, 대사까지 짜서, 다시 소설로 옮기고...그런 과정을 거쳐 썼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평 때문에 속을 끓일 때도 많았습니다.
이번에도 역사소설 한편 연재하는 중인데요. 쓰다 보면 속이 답답하고 힘들 때도 많아서 한담을 끄적이고 싶다가도, 자칫 홍보로 분류되거나 규정에 어긋날 것 같아서 참는 중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고증 차원에서 공부하는 서책들 꽤 됩니다. 사전에 짜둔 시놉이 130kb 용량인가 되는데, 그러고도 전개하는 데 애를 먹어서 공책 대여섯권에 나누어 세부 장면을 짜고, 에피소드 순서를 짜고, 필요한 대사를 적어놓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꿈에서도 고민을 하지만요.
쓰다 보면 필력이 좀더 늘까...고민하게도 됩니다. 고교시절 라노벨을 쓴 폐해는 한동안 제가 소설을 쓸 엄두가 나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내 필력으로 무슨... 이런 생각을 곧잘 하게 되었달까요. 순정만화나 일본만화를 보지 않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야 제대로 소설을 써보고 싶은 의욕으로 집필하는 중입니다. 쓰고 싶은 메세지가 강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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