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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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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1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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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4

DUMMY

딱!

목검이 서로 부딪치며 호쾌한 소릴 냈다. 도무지 나무가 냈다고는 믿기지 않는 맑은 울림에 몇 교관들이 탄성을 토했고, 아이들은 날쌘 몸놀림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저히 아이들의 싸움이라고 믿기지 않는 격렬하고도 수준높은 대련. 게다가 둘은 개국공신이자 기사로서 포스티어 제국의 전쟁터를 누비던 자들의 자식이었다. 어찌보면 권력 구도의 다툼으로도 보였기에, 교관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보고 있었다.

누가 이길까? 지금 상태는 그야말로 막상막하였다. 허나 몇 눈썰미 좋은 교관들은 한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그들은 지금 검술을 쓰고 있지 않았다.

공격하면 공격하는대로, 막으면 막는대로 그야말로 마구잡이식 검술을 펼치고 있던 것이다. 그 속도와 대처방법이 워낙 유연하다보니 검술을 하고 있단 착각이 들 뿐이었다. 그들의 검에 대한 깨달음 이 정도란 말인가?

사실 기사가 된 사람 중에 그들과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 많지 않았다. 되려 지금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보다 허술한 사람들이 즐비했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졸업하고 나면 바로 기사가 되는 정책의 폐해였다. 돈만 주면 졸업하는 자들이 많다 보니, 기사들은 썩어넘쳤고 그중에 제대로 된 기사는 손에 꼽았다. 그래서 기사란 이름의 허풍쟁이들 중 검술을 아는 이가 지극히 적었다. 교관들은 그걸 알고 있지만, 자신들이 청렴해야 제국에 이득이 되는 것도 없고 그들 자신에게도 좋은 게 없었다. 그런 점에서 렘피룬트가 괴짜란 말이 돌았다. 자처해서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여러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니 말이다.

따닥! 딱!

각설하고, 나다크와 제트의 대결은 점점 절정에 치달았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이 목검을 휘두르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고, 그와 더불어 더욱 힘을 주었으니 진검으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 모두가 땀을 삐죽 흘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박력이 있었고, 모두가 이 대결에 빠져들고 있었다.


"백작가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은데, 계속 숨기는군."

"그쪽이야말로."


둘 다 서로를 견제하는 이유는 가문의 검술을 얘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문의 검술은 미지의 한 수로서, 반드시 숨겨야만 했다. 둘다 상대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실전으로 다져진 엘리트란 걸 알았기에 검술의 일부만 보여도, 퍼즐의 한 조각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연상할 것이다.

먼저 검술을 내보이는 쪽이 진다. 가문의 검술이 아닌, 조잡한 검술을 썼다간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컸기에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치고 때리기만 하는 치열한 대결을 지속했다.

딱!

옆구리를 치고 들어온 제트의 목검을, 나다크의 목검이 세로로 막아냈다. 원래 거기서 공세가 이어져야하건만 검술로 잇지 않다보니 제트는 곧바로 물러났다. 나다크 역시 공격을 한 번 해서 막힌다면 바로 물러섰다.

이 지루한 대치에도 아이들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누가 이길까? 한쪽은 자타공인 최강, 비하크마 대공의 자제. 다른 한쪽은 기사로서의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들의 귀감 리호데 백작의 자제.

그러나 그들은 속으로 이미 결론을 냈다. 이 대결은 제트가 이길 것이다. 허나 대부분이 나다크가 이기길 희망하고 있었다. 분명 나다크 역시 귀족이건만 모두의 생각은 비슷했다.

보다 낮은 작위의 자제가 높은 작위의 자제를 이기는 것! 몇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제트가 나다크보다 재수 없어서! 단순한 아이들은 그저 제트보다 나다크가 더 좋아 호감이 가는 사람이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어떤 형태로든 지금 제트에겐 지지자가 없었고, 이 사실은 그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비하크마 대공 밑에서 몬스터를 잡아오며 단련한 감각. 그리고 그중 또렷하게 느껴지는 살의외에도, 적개심 역시 흐릿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제트를 휘감는 부정적 감정은 분명 아이들의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단순한 심리를 파악하고 있는 제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다크에게만 집중하였다.


'무서운 새끼……'


아마 그도 피부로 자신을 응원하는 아이들의 눈빛, 마음, 기세를 느꼈을 것이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으스대거나, 우쭐해져 방심하기 마련이다. 허나 나다크의 눈은 몹시 침착했다. 다른 사람의 호감은 신경쓰지 않는 듯, 혹은 이런 관심이 익숙한 듯 제트처럼 상대에게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점이 제트의 성질을 건드렸다.

얼마나 침착할까, 그 생각을 한 제트가 아까보다 빠른 찌르기로 그의 왼쪽 가슴을 노렸다. 나다크는 뒤로 물러나며 상체를 오른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피하는 와중에도 나다크의 눈은 제트를 살피고 있었고, 검을 쥔 손은 반격을 꾀하고 있었다. 헌데 나다크의 모든 예측은 검에 의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날아오는 제트의 왼주먹을 눈으로 보았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뻑!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트의 주먹이 나다크의 턱에 꽂혔다. 나다크는 순간 머리가 흔들려 비틀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제트가 한 손으로 목검을 휘둘러 그의 왼팔을 후려쳤다. 그 와중에도 나다크의 몸은 목검 쪽으로 기울여져 타격점을 흐려 피해를 줄였고, 제트는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나 상황을 살폈다. 예상대로 관중의 반응은 싸늘했다. 제트의 행동은 흑기사가 하는 짓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기사의 대결은 오로지 검으로만.

이것이 언제부터 정해졌는지 모른다. 허나 이건 손잡이를 치는 행위가 도발이란 것처럼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규칙이었다. 몇 기사들은 방패를 사용하긴했지만 제트처럼 맨손으로 벌이는 공격은 상상할 수 없었다. 맨손으로 싸우는 건 왈패들이나 하는 짓거리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사처럼 대결을 벌인 제트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다크도 이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관자놀이를 탁탁 치며 제정신을 차리고 침착하게 목검을 겨눌 뿐이었다. 차분한 그 행동은 다시 한 번 모두의 마음을 기울게 만들었다.


"저게 뭐하는 짓이야……?"

"세상에……"


교관들은 놀라고 있었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뭐야? 좋게 봤는데 반칙을 쓴 거야?"

"손을 쓰면 안된단 규칙은 없지만……"

"뭔가 비겁해 보여."


상급생 중 한 명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자기보다 어리고 급수가 낮다해도 상대는 엄연히 대공의 자제였다. 괜히 눈에 잘못 드는 날엔 노예 학생의 신세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기만 하였다.


"고마워. 간만에 실전이라 감이 안오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게 해줬네."

"뭘 이 정도로."


나다크는 말이 끝나는 즉시 목검을 내질렀다. 그 행동에 제트는 의아함부터 들었다. 찌르기는 분명 베기에 비해서 빠르다. 그리고 급소를 맞출 경우 가장 치명적이다. 하지만 그만큼 정확하지 못하면 역으로 반격당하기도 쉬운 공격법이다. 지금처럼 신경을 곤두세운 상대에게 기습적으로 쓰기엔 좋지 않은 선택이란 소리다. 만일 다른 애들이 그런 짓을 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빈틈을 파고 들었겠지만, 상대는 제트와 같은 길을, 아니 어쩌면 더 험난한 실전을 겪어왔을 지 모르는 상대였다. 그래서 회피와 공격을 동시에 벌이는 대신, 거리를 벌리며 찔러오는 목검의 옆을 쳐내려 했다.

훅-


"허?"


순간 나다크의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제트의 목검이 휘둘러지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휘청거린 그의 모습에 제트가 인상을 구겼다. 설마 발이라도 헛디뎌서 미끄러진 건가? 제트는 휘두르기에서 찌르기로 전환하겠다고 마음 먹은 그 순간!

턱-

제트의 목검에서 묵직한 힘이 솟구쳐올라왔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가 추측함과 동시에 무너져가는 균형을 잡기 위해 발을 뒤로 쭉 뺐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나다크가 찌르는 자세로 옆으로 기울어지며, 왼발을 힘껏 차올리는 것을……! 설마 나다크가 이런 수법을 쓰리라곤 생각지 못한 제트는, 당황으로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고 이게 패착이 되었다.

팍!

목검이 위로 솟구쳐올랐고, 제트는 뒤로 기우뚱 기울어 균형을 잃었다. 제트는 이를 악물며 팔에 온힘을 주었고, 목검을 내리쳤다. 허나 나다크는 여기까지 예상하였는지, 대각선으로 올려차기를 벌인 나다크가 그대로 몸을 반바퀴 돌아 옆모습을 보였다. 설마 이대로? 어느 정도 수련이 된 교관들은 위험하다고 외칠 뻔하였지만, 나다크의 상체가 확 꺾이며 목검이 빠르게 쏘아졌다. 내리쳐지는 목검에, 나다크의 검끝이 닿았다.

딱!

투박한 소리! 나다크의 정확한 찌르기에 놀라고, 그걸 버티는 제트의 힘에 다시 놀랐다. 둘의 대결에 놀람이 계속 되었고, 이 한 번의 공수가 끝난 뒤에 둘의 대치로 관중은 진정할 수 있게 되었다. 제트는 찌르르 울리는 손으로 목검을 조물거리며 노려보았고, 나다크는 흐느적거리며 바로 섰다.


"나다크, 너가 그런 수를 쓸줄 몰랐는데?"

"너가 그럴 줄 몰랐던 것처럼 말이지."


이 둘이 직접 검을 맞댄 횟수는 적었지만, 지금은 그 어떤 치열한 전장보다 긴장되었다. 그 증거로 관중 중에서 손이 마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렘피룬트와 에너텔만이 큰 긴장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다크가 발을 찍 끌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제트를 향해 기울어진 목검을 겨누었다. 제트는 그가 단 한 번에 승부를 볼 것이란 판단에 모든 상황을 계산하였다. 아쉽게도 힘은 그가 우위이고, 리호데 백작가의 검술의 특성 역시 꿰고 있었다.

백작가의 검술은 꾸준한 공격과 수비로 싸움을 길게 끌어가는 정직한 형태의 검이다. 당연히 그중에 필살기라 불릴만한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은 손에 꼽았고, 그것들은 제트의 머리 속에서 또렷하게 떠올랐다. 저 자세에서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제트는 손잡이를 꽉 잡으며 나다크와 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그리고 눈을 살짝 크게 뜨는 모습과 입술을 우물거리는 모습에 제트는 자신의 시도가 들어맞았다고 여겼다.

같은 자세로 하는 것이 백작가 검술의 공격에서 대처할 수 있는 최선책! 나다크의 반응을 살피던 제트는 오히려 자신이 당황해야할 일을 맞이해야 했다. 다른 공격법 혹은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할 나다크가 그대로 달려든 것이다!


"미친……!"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나다크는 검을 휘둘렀고, 제트는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딱!

묵직한 울림. 허나 제트는 당황하고 있었다. 느껴지는 충격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이다. 어째서?

실제로 나다크의 목검은 제트와 부딪친 순간 뒤로 튕겨져나가려 했고, 그것 때문에 제트의 균형이 잠깐 흔들렸다.

그의 당황스런 눈빛이 나다크의 움직임을 읽었다. 목검의 날이 뒤쪽으로 꺾이자, 나다크는 두 손 증 왼손으로만 손잡이 끝을 잡고 뻗었다. 제트는 맞닿은 목검을 힘으로 누르려했지만, 나다크는 그 힘을 타고 옆으로 밀려났고, 또한 거꾸로 든 목검을 계속 찔러갔다. 이도저도 안된다. 제트는 머리와 함께 상체를 최대한 뒤로 빼보았지만, 나다크의 추진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완벽히 허를 찔렸다! 빠르게 발을 차올렸지만, 결정타는 피할 수가 없었다.

뻑!

목검의 단단한 손잡이가 제트의 턱을 때렸다. 나다크의 힘이 더해진 그 충격은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뒤로 빠지던 제트의 몸은 그대로 고꾸라지게 되었다. 물론 제트가 그냥 쓰러지지 않았다. 힘껏 차올린 발로 옆구리를 때렸지만, 그뿐이었다. 제트는 뒤로 쓰러졌고, 나다크는 잠깐 휘청일 뿐이었다. 제트는 여전히 놓지 않은 목검을 들고, 일어나려다 목 밑으로 들어온 나다크의 목검 때문에 멈칫거렸다.


"항복?"


제트는 단번에 깨달았다. 방금 그건 백작가의 검술이 아니었고, 지금 여기서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된다. 이 패배를 받아들여야 그의 명예 손상이 최소화된다.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를 악물며 당장이라도 목검을 쳐내고 기습을 벌이고 싶었다. 다행히 그의 이성이 본성을 억눌렀다.


"……졌다."


64기의 신성 제트와 나다크. 이번 대결은 아카데미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후우……"


병동을 빠져나온 로이트는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둘의 대결 준비로 한창 어수선하다지만, 그렇다고 경비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허술해지긴 했어도, 몰래 어딘가로 침투할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로이트가 주의를 기울이며 걸었다. 그의 목적지엔 3급 학생과 2급 학생의 기숙사가 가까웠고, 멀지 않은 곳에 교관 전용 기숙사도 있었다. 그랬기에 다른 곳에 비해 경계가 더 셌다.


"후우……"


하크가 그곳에서 버려진 음식을 가져올 수 있었던 건 그가 모든 구역을 청소하기 때문이었다. 로이트가 이곳까지 올 일은 교관에게 갑옷이나 검을 배달하거나, 심부름 외엔 달리 이유가 없었기에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수상쩍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병동에 몸져누워있지 않았는가. 달리 도둑질을 의심하지 않더라도, 렐프같은 자가 그를 본다면 이제까지 농땡이를 피웠다면 주먹질을 할 것이다.

맞는 건 문제도 아니다. 대신 시간을 빼앗길 것이다. 어쩌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할 수도 있고, 그 이전에 아카데미에서 쫓겨나 아예 복수의 기회가 날아가버릴지도 몰랐다. 가장 안정적으로 1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로이트가 멀쩡한 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로이트는 어느 샌가 렘피룬트를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단 걸 자각하지 못한 채, 길을 걸었다. 닦여진 보도를 걷는 동안 몇 교관들이 슬쩍 보았으나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몇 경비병도 그를 그냥 지나쳐갔다. 이 순간, 로이트는 긴장으로 손이 젖었어도 안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도한 것이 무색하게, 쓰레기장에 도착한 로이트는 얼굴부터 구겼다. 악취도 악취거니와 그 방대한 양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끈적한 과일 껍질과 썩은 고기, 부러진 뼈다귀들을 보며 망설이던 로이트는 이를 악물고 쓰레기 더미에 다가갔다.

상상 이상의 악취와 불결한 장면이었지만 로이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안에 손을 넣거나 헤집으며 자신이 원하던 걸 찾아보았고, 결국 하나를 얻어낼 수 있었다. 시꺼멓게 죽은 메실리아의 열매, 그리고 그 씨앗. 설마 이렇게 간단하게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도 못하고, 로이트는 탄성을 속으로 죽이며 최대한 오물들을 걷어내고 주머니 안에 그것들을 넣었다. 과연 이게 맞는 짓일까, 도박은 커녕 허상이 아닐까란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누가 볼까 주머니를 품에 넣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응?"


그냥 일어나려던 로이트의 눈에 밟힌 건 쥐였다. 쓰레기를 파먹고 다니는 이 작은 짐승이 쓰레기장에서 보인단 건 특별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꼬리에 달려있는 하얀 리본은 예삿 것이 아니었다. 로이트는 무심코 쥐를 향해 빠르게 손을 뻗었고, 손바닥만한 크기의 쥐는 도망도 못치고 붙잡혀버렸다. 생각 외로 얌전한 쥐를 내려다보던 로이트는 쥐의 꼬리에 묶인 리본을 만져보았다. 종이? 좀 까슬하지만 천 재질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대체 누가 이런 걸 쥐의 꼬리에 묶어둔 것일까.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야!"


뒤에서 들려오는 큰 소리에 로이트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삐걱, 그의 고개가 돌아갔고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덩치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그는 마구간지기 프롭, 렐프나 크람처럼 무식하기 짝이 없는 아카데미의 일꾼이었다. 심지어 그와는 면식이 없었기 때문에 로이트는 온몸이 땀으로 젖어드는 걸 느꼈다.

농땡이. 분명 병동에 있어야할 그가 이렇게 밖으로 기어나와 돌아다닌단 사실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고, 렐프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렐프는 사사건건 로이트에게 참견을 할 것이다. 그의 쩌렁쩌렁 울리는 목청과 욕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집요할 정도로 쫓아다닌다면 일에 차질이 생겼다. 로이트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였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고, 붙잡힌 쥐가 괴로움에 찍찍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너 뭐하는 새낀데 쓰레기장에서 얼쩡대? 쓰레기도 귀족 자산인 거 몰라? 씨발, 애새끼들 생각머리가……"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다가오던 프롭은 딱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로이트의 손에 들려있는 쥐, 아니, 쥐꼬리에 매인 리본을 쳐다보았다.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화를 내던 프롭이 단숨에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부릅 뜨고 목을 움츠렸다. 그리곤 로이트의 당황하는 얼굴과, 열심히 그의 손을 비집다가 탈출한 쥐가 도망치는 걸 보다 슥 뒤를 돌아보았다.


"어후, 젠장. 이 근처엔 아무도 없으니 빨리 가봐."


프롭이 손을 휙휙 내젓자, 로이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쓰레기더미에서 내려왔다. 프롭은 그를 힐긋,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차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럴만하구만."


그의 혼잣말의 의미를 파악할 새도 없이, 로이트는 다급히 오물을 털어내곤 병동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볼새라, 황급히 달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프롭은 혀를 끌끌 차며 중얼거렸다.


"톰이랑 로던도 알고 있는 건가……?"


그는 갑자기 불안한 얼굴로 그 자리를 황급히 벗어났고, 로이트는 무사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다크의 승리.

이것은 비단 검술 대결의 결과만이 아닌, 미묘한 귀족의 세력 구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주의 힘은 인지도나 세력면에서 보았을 때 대공이 앞섰지만, 그 후계의 싸움에서 판가름이 나버렸으니, 자연스레 구설에 오르게 되고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카데미에선 이 소문을 수습하기 위해 최대한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들의 반응은 너무 뜨거워서 진압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교관들마저도 자기들끼리 수근댈까, 렘피룬트는 그저 졸업식이 무사히 끝나고, 1급 교관 올덤이 자신에게 딴지를 걸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말 굉장했어!"

"글쎄 제트가 이렇게 하는데 나다크가……!"

"쌤통이야 완전!"


길을 지날 때마다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네보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멀지 않은 미래의 자신의 주군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이렇게 칭송하는 소리를 듣는데 어찌 기분이 나쁠까. 다만, 이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나중에 모략꾼이든 전략가든, 협상가든 될 수 있었기에 네보는 헛기침을 하며 걸었다. 그러다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피블론을 발견하곤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아? 아직 완치된 건 아니잖아."

"돌아다니는 것 정도야 괜찮아."


네보의 걱정에 피블론이 깊게 미소를 그리며 대답하였다. 그리곤 주변에서 시끌시끌 들려오는 말소리를 듣고 한 마디 하였다.


"역시 떠오르는 신성답게 떠들썩하게 만들었구만."


피블론의 말은 지극히 네보를 의식해서 뱉은 말이었고, 네보는 그의 노골적인 말도 싫진 않은지 빙긋 웃어보였다.


"피블론은 못 봤겠지만…… 난 정말 나다크가 그렇게 멋졌던 적은 처음이었어! 설마 대공가의 후계자를 그렇게 쓰러뜨리다니……"

"그것보단 널 위해 나서준 것이 고마운 게 아니라?"


그 말이 맞는지라 네보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피블론은 피식 웃으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도 너무 자랑하고 다니진 말고."

"당연하지."


네보가 안경을 흘리며 헤헤 웃는 걸 보고, 피블론은 손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벌어졌던 일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다. 그가 왜 그 자리에 왔을까? 차라리 고르든이 있었다면 자신의 뒤를 밟아서 그런 거라 생각했겠지만, 그는 너무 의외의 인물이었다. 심지어 다른 목적으로 쓰레기장을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자신과 같이 병동 신세를 지게된 그가 굳이, 대결로 인해 시선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피블론은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기 위해서이다. 일부러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밝힐 필요는 없었고, 그걸로 경계심을 살 이유도 없었다. 그저…… 로이트가 쓰레기장을 찾은 이유가 궁금할 뿐이었다.









당연히 이 소식은 각 가문에도 전해졌다. 아니, 가장 먼저 전해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두 가문 중 하나인 리호데 백작가에선 리호데 백작이 껄껄 웃으며, 풍성한 수염을 쓸었다. 이 소식을 전해온 소드윙나이츠 기사단원 셀우드 경에게 휴식을 권하곤, 그는 곧장 정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리호데 백작과 비슷한 나이임에도, 늙음이라곤 입가의 얕은 주름 한 쌍 밖에 없는 금발의 여인이 꽃을 가꾸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나다크의 어머니인 샬리드 백작 부인. 무신의 가문에 들어온 여인답게 샬리드는 여인으로서의 유연함뿐 아니라 곧고 강직한 면이 있었고, 이 점이 나다크를 강하게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가문 내에서 유일하게 리호데 백작에게 독설을 할 수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잽싸게 달려오는 리호데 백작에게 그 어떤 독설없이 차분하게 말하였다.


"어찌 귀족으로써 그렇게 방정맞게 뛰십니까."

"부인! 어찌 내가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소! 글쎄, 나다크가 사고를 쳤지 뭐요!"

"남자라면 응당 어린 시절에 사고 한두 가지는 쳐야지요. 낭군께서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흠! 그 얘기는……"

"어차피 젊은이들에게 계속 회고되고 있는데, 어찌 그리 부끄러워하시는지요."


샬리드의 말에 리호데 백작은 헛기침을 하다 자신이 접한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샬리드는 마냥 기뻐하지 않았고, 리호데 백작도 그 이유를 알아챘다.


"대공가에서 이 일로 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나, 아마 치졸한 짓거린 할테지요. 그러나 걱정하지마오. 내가 누구요? 승리자라 불리는 제국의 3인자가 아니오?"

"많이 어정쩡한 위치가 아닙니까?"

"허, 허허…… 그래도 통일 제국의 상위권이니……"

"불안한 지위는 없느니만 못하답니다, 낭군. 어찌 그리도 단순하십니까?"


리호데 백작은 땀을 뻘뻘 흘렸고, 샬리드는 가만히 생각을 하더니 대뜸 그가 난감해할 말들을 뱉어냈다.


"그러고보니 제가 1 기사단을 보내라고 청했는데 2 기사단을 보냈더군요?"

"아, 그것이 브라슐 사막에서 곤란한 일이 있다하여……"

"그 일이 자식의 일보다 중요하단 말인가요?"

"글쎄 아일레 백작이……"

"얘기가 길어지겠군요, 방으로 들어갈까요?"

"……알겠소, 부인."


리호데 백작이 축 늘어져 샬리드를 따라 방으로 걸어들어간 그때, 비하크마 대공의 귀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그 어떤 이유도, 일의 경과도 듣지 않은 비하크마 대공은 착 가라앉은 얼굴로 눈앞에서 부복하고 있는 기사를 보았다. 제트의 검은 머리칼처럼 수염도, 머리칼도, 심지어 의복도 검은색 일색인 그는 하얗게 샌 리호데 백작보다 더 나이가 많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젊었다. 그리고 이 점이 대공가의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는 불사신이다.

이 말은 비하크마 대공이 일곱번 째 전투에서 반죽음으로 돌아오고, 다시 출정하였을 때 생겨난 말이었다. 포스티어 제국이 통일 제국을 이루기 위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가 휴식을 취한 날보다 전투를 벌인 날이 더 많았고, 단 한 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괴물. 학살자란 이름에 걸맞는 위상이었다. 비하크마 대공은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아끼다, 한 마디 던졌다.


"인장 없는 기사가 보였다 했지?"

"예, 그렇습니다."

"일단 지켜보아라. 다크나이트일 확률이 높으니 여차하면 실력을 알아보고 포섭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기사는 보고를 마치고 그 자리를 나섰고, 비하크마 대공은 어좌에 몸을 깊게 묻으며 숨을 내뱉었다. 그리곤 조금도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밖을 나섰다.


작가의말

다른 작품활동 및 생계벌이 때문에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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