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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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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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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17

DUMMY

이번엔 기숙사가 아닌, 바깥에서 달을 보고 있던 헤스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밀레트의 시덥잖은 참견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고민하던 그녀는 의외의 사람인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그때…… 흐릿한 기억을 뒤로, 하크가 쭈뼛거리며 다가오더니 손수건을 하나 내밀었다. 헤스타의 동그랗게 떠진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맑은 눈빛이 손수건과 하크를 번갈아보았다.

이 아이가 무슨 속셈이지? 귀족의 암계와 술수를 미리 배우고, 겪어온 헤스타에겐 평민의 순수한 호의는 알기 힘든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기가 내다버린 손수건을 주워다준 것이 그녀를 더욱 혼란케 하였다.

계급의 차이. 그것이 메울 수 없는 거리를 만들었다. 단 한 번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하크와 달리, 헤스타는 두 번 세 번, 심지어 대여섯 수까지 내다봐야했다. 물건을 아끼고, 아끼는 평민과는 달리 귀족은 제 기능을 다하거나 돈만 충분하다면 쓰고 버렸다. 라르카 백작만이 절약을 중요시하였기에 그런 부를 축적하였지만…… 아무튼, 그도 예외로 치부될만큼 이 사회에선 당연시되는 일이었다.


"그걸 왜 주워온 거죠?"


돌려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가 못 알아들을 거 같아 이렇게 말하였다.

블루 크리스털의 친구들이 봤다면 너무 까칠한 화법이 아니냐며 깎아내릴게 분명 했다. 숙녀라면 좀 더 조곤조곤, 돌려서 말할줄 알아야 된다고 짹짹 대겠지.

하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기엔 하크의 짝사랑은 컸고, 또 너무 순진했다. 그래서 어쩔줄 몰라하며, 자신의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근하게 뜻을 전하는 말을 생각하느라 한참을 머뭇거렸다.


"……떨…… 어…… 뜨려서……"


하크가 나뭇가지로 바닥에 끼적끼적 쓰는 글을 보며, 헤스타가 한 자 한 자 소리내며 읽었다.

이것도 교양없다고 흉볼텐데. 그보다 문자를 왜 저렇게 못 쓰는거지? 문자 예법도 배우지 않은 건가……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혀 보이지 않아.


"떨어뜨린게 아니라 버린 거에요."


헤스타가 퉁명스럽게 답하자, 하크가 놀라 나뭇가지를 떨어뜨렸다. 그의 머리론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척 보기에도 고품질의 천으로 짜고, 고풍스러운 문양이 박혀있는 이런 '사치품'을 왜 버린단 말인가? 어리둥절해하는 하크의 귀로 여전히 쌀쌀 맞은 헤스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돌려주지 마시고 그냥 내다 버리세요. 괜한 수작 부리지 마시고."


여기서도 뜻이 갈렸다. 헤스타는 괜한 짓 하지 말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썩 가란 소리였지만, 하크의 귀엔 너와 나의 차이를 알고 다가오란 소리로 들렸다. 하크는 눈에 띄게 기운이 빠져 돌아갔고, 헤스타는 크게 실망한 듯이 어꺠를 늘어뜨리는 모습에 왜 그러나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만 할뿐, 그를 잡진 않았다.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기에……















마구간 청소나 쓰레기 운반에도 별말 안하던 고르든이지만, 이번 만큼은 한 마디 해주고 싶었다.


"너 왜 그렇게 병신처럼 맞고만 있냐?"

"어…… 어?"


같이 훈련용 목검이 가득 든 자루를 옮기던 고르든이 이렇게 한 마디 하자, 로이트가 이유도 모르고 놀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고르든이 터지려던 속을 억누르고 그의 뒤통수를 소리나게 후려쳤다.


"아니, 내 말은 이렇게 쳐맞고 다니면서 왜 한 마디도 안 하냐고."


고르든은 로이트에 대한 소문을 듣고도 무시했고, 다른 아이들만 살펴보느라 그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욕을 먹든, 얻어 맞든 실실 웃는 모습을 처음 봤고 지금처럼 답답해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로이트는 소문과 달리 폭력적인 고르든의 손속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얘가 원래 이런 애였나? 아직 그가 왜 여기로 왔는지 모르는 로이트로선, 그가 피블론을 두들겨 팬 후로 더 이상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어 본래의 성질을 드러냈단 걸 알 리 없었다. 그저 자신이 만만해보여서 그런가보다 하고, 예의 그 바보같은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하여간 속없긴!"


고르든이 뚱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민 뒤론, 둘 사이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로이트는 문득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난데없이 나타나 엉뚱한 말을 내뱉어서 장난인줄 알았건만, 렐프가 콧김 가득한 말과 함께 같이 일할 아이란 말을 듣고나서야 그 말이 진짜란 걸 알았다. 그리고 든 생각은 하나였다.

이 아이는 무엇 때문에?

옆에서 어딜 어떻게 때리면 아파하고, 맞을 땐 이렇게 맞아야한다는 등, 이상한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간혹 머릿 속에 들어오는 말도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고르든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엔 날 잡겠다고 꼬마 셋이 덤볐는데, 하나는 어디서 구했는지 유리 조각을 가져왔더라고. 그걸로 날 찌르려하는데, 요령없는 놈이라 지 손만 다 베이고 가장 먼저 두들겨 맞았지! 들어보라고. 글쎄 그걸 어디서 구했다는줄 알아? 주정뱅이 옆에서 잠깐만 있으면 지가 술병을 깬대. 그걸 주워왔더라니까!"


혼자 웃고, 목청 높이며 말하는 모습이 한두 번 이런게 아닌 거 같다. 좋게 말하면 유쾌한데, 나쁘게 말하면 소란스러웠다. 정작 말하는 본인은 신경쓰지 않는데, 로이트가 인상을 구기며 주변을 힐긋거렸다.


"아무튼 간에 머릿 수 믿고 덤비는 싸움은 '대가리'를 부숴버리거나 한 놈 잡고 짓밟으면 아무 소용 없어.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무서워서 지들끼리 손발이 꼬이거든. 그러면 지 편한테 칼을 꼽아버려.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 그러면 대가리는 당황하고, 난 그 사이 도망가거나 대가리를 부숴버리지.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대체 저 질문은 바뀌지가 않는다. 그걸 모르는게 당연하거니와, 알아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무시한단 걸 알텐데도 이렇게까지 귀찮게 구는 건…… 아무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어서인가? 로이트는 귀를 막아버리고 싶지만, 두 손을 봉쇄한 자루를 내던질 순 없었기에 입술을 잘근거리며 간신히 창고까지 도착했다.

이제 지겨운 말소리를 안들어도 되나 싶었는데, 창고 내부 정리까지 따라온다면 말릴 구실이 없었다. 로이트는 여전히 웃는 낯을 띄우며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고르든에게 말하였다.


"저…… 이제 그만 가도 돼. 날 도우라고 해도 진짜 그럴 필요는……"

"왜? 안에 들어가면 안돼?"


단순한 질문인데, 정곡을 찔린 로이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웃는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이 잠깐의 주춤거림이 고르든의 눈빛에 딱 걸려들었다. 뭘까, 이런 호기심이 들었지만 다음에 또 알아내도 되었기에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아, 아냐. 근데 무기 창고라서, 잘못 하면 크게 다치거든. 다니기 쉽게 다 정리해놓으려고……"


상당히 구차한 변명이었지만, 들어가지 않기로 마음먹은 고르든은 기꺼이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에이, 그런거였어? 알았어. 그럼 이거 전부 너한테 맡기고 놀러가도 되지?"

"응……"


고르든은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뭐가 생각났는지 휙 돌아보며 말했다.


"야, 그거 알아?"

"어엉?"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새끼가 제일 병신이야. 돈을 벌 수 있는데 체면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는데 명예 때문에…… 이길 수 있는데 자존심 때문에…… 하여간에, 그런 건 다 개소리야. 그렇게 생각 안해?"

"어…… 으응……"

"에이, 싱겁긴…… 나 간다."


그렇게 로이트와 고르든의 첫 만남은 짧지도, 길지도 않게 끝났다. 하지만 이 만남으로 인하여 미래는 한 층 더 복잡하게 뒤틀리고, 얽혀간단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고르든의 봉사 명령과 피블론의 휴식기 동안, 검술 수업을 받을 조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에 아이들은 몹시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도 1조가 모든 면에서 우수하단 점은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건 아니었다. 2조는 이제 막 혈기가 넘치는 아이들 답지 않게 사소한 다툼은 있을지언정 조금의 불화도 없이 잘 지내왔고, 성적 또한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 3조는 들쑥날쑥하나 우수한 아이가 몇 보였고, 실상 1조와 가장 막상막하의 전력을 지닌 조이기도 했다.

일단 결과는 났으니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미심쩍은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비하크마 대공의 직계 혈족이란 자리가 주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이것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심은 약간의 불만을 심어주었고, 특히 생각없는 몇 아이들은 그걸 조금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 펠빅 님께서 검술 수업을 배울 수 없다니!!"


시끄럽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울 펠빅이 뚱뚱한 몸을 흔들며 절규했다. 4조원들은 그러려니 하며, 오늘도 그의 불만을 받아주었고, 특히 4조장 리든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어주어야만 했다.


"흥! 이 천재를 무시하다니. 리든, 너도 이들의 처사가 부당하다 생각하지 않아?!"


거만하게 2개의 층이 져진 턱을 들며 말하는 모습에, 리든은 속으로 역겨움을 참으며 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내가 애들을 잘 못 끌어서 그런거기도 하고……"

"무슨 소리야? 넌 충분히 잘 하고 있어! 근데 네 실력을 알아주지 못하는거지. 지미……"


에건을 비롯한, 리든을 따르던 단순한 골목길 아이들이라면 이 한 마디에 코가 시큰해졌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랬고…… 하지만 리든은 그의 관용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무능한 가문의 삼남이란 자리에서 생격난 지독한 외로움과 짙은 따돌림, 그것들이 만들어낸 자비로움. 좋은 성질이었지만, 펠빅에게선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성질이었다. 측근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자의 말만 듣고, 조금만 겉돈다싶으면 충신의 간언조차 들어주지 않는 게 펠빅과 같은 부류였다. 한 마디로 누군가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이 오래 가지 않는 어리석고 자기소모적인 모습의 대표였다.


'그래도 이런 단순한 애들한텐 좋지.'


여전히 감격에 젖어있는 멍청이들을 보며, 리든은 이 속사정을 알리지 않았다. 마음에 안든다고 좋은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피해의식은 남아있었으니…… 4조가 검술 수업을 받지 못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한게 누군지 확실히 인식하였다.


'로이트……'


안된 건 안된 거고, 당장 눈앞에 불똥이 떨어졌는데 그걸 동정할 순 없다. 활활 타오르지 못한게 불쌍해서 살려주면 제 발만 태우는 꼴이 되버린다.

리든은 눈매를 좁혔다. 고르든의 일을 떠올렸다. 그의 돌발 행동 때문에 리든이 큰 피해를 봤다. 조원을 관리못한 조장의 잘못이 크단 이유로 말이다!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를 붙들지 못했단 이유로 리든은 큰 낭패를 보았다. 그러나 이 일이 고르든에 대한 반감을 심어주지 않았다. 같은 뒷골목 잡배라 해도 고르든은 격이 다르다. 잘못 하다간 졸업하는 순간 길거리에서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되버릴 수도 있었다.


'씨발……'


어차피 그가 생각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다. 고르든의 일로 뭔가를 얻으려 했기 때문에, 잡쳐진 기분을 스스로 달랬다. 현재 피블론과 고르든은 수업에 전혀 참가할 수 없는 상황. 달리 말하자면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단 것이었다.

로이트를 강제로 휴식시킨다! 이 일은 아주 쉬운 일이면서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쉬운 이유는 어느 누구도 로이트를 공격하는 걸 막지 않을 것이며 되려 이 일에 끼기도 쉽단 것이다. 어려운 이유는…… 고르든이 사고를 친 지 얼마 되지 않았단 것이다. 이 일로 교관 몇 명이 아카데미 주변을 돌며, 순찰병도 배로 늘었다. 그렇다고 감시가 철저해진 건 아니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어정쩡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

다른 조가 로이트를 공격해야 한다. 자신이야 조원이 무방비하게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하면 되지만 사고를 친 조원의 조장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나머지 조가 너무 까다롭단 것에 있었다.

1조와 3조는 조장이 귀족이다. 게다가 생각 이상으로 잘 휘어잡는 통에 조원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물론 무리할 수는 있겠지만, 추궁하는 과정에서 그가 뒷공작을 펼친 것이 드러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아니, 분명 들킨다. 그래서 귀족들의 눈밖에 난단 건……

그렇다면 2조밖에 없는데, 2조의 단합력은 굉장했다. 조장이 사라진 시점에서 불안해하긴커녕 임시 조장을 세워 더욱 탄탄해졌으니, 이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잘 뭉치는 지 알 수 있었다. 힘들다. 하지만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누굴 꼬셔야 하지?'


리든이 미간을 구기자 펠빅이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자, 자…… 오늘은 이 펠빅님께서 살테니, 얼굴 펴. 노땅들 머리가 골아서 판단이 흐려진걸로 우리 젊은이들이 화내면 안되지!"
















몸져 누워있는 피블론의 상태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의료진의 말로는 겉으로 벌어진 타박상만 있을 뿐, 내상은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달만 쉬면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하였다.


"이렇게 많이 다쳤는데……"


보에르의 우는 소리에 같이 병문안을 온 라인 역시 표정이 좋지 못했다.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피블론은 검은 머리칼이 몇 뭉텅이 삐죽 나오고, 얼굴의 절반만 보일 뿐이었으니, 누가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피블론은 애써 웃으며 보에르의 머릴 쓸어주었다.


"머리가 좀 깨지고 두들겨 맞아서 멍만 난 거지, 불구가 될 정돈 아냐. 솔직히 한 달도 길다고."

"그치만……"

"이거야 원, 우리 아가씨 우는 모습 보기 싫어서라도 일어나야겠네."

"누, 누가 아가씨야!"


보에르가 시뻘개져서 소릴 치자, 피블론이 라인을 힐긋 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던 라인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아드가 와서 얘기해줬어. 나 대신 조장을 맡아줬다면서?"

"잠깐뿐이야! 너 일어나면 바로 너가 맡아야해!"


열성적으로 자신의 바람을 피력하는 모습에, 피블론이 킥킥 웃으면서 알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검술 수업은……"

"1조가 받게 됐다며? 그것도 들었어."

"미안해……"

"너가 조장을 맡고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거 원, 어른이 되서도 이렇게 눈물 많으면 누가 널 데려갈까."

"난 걱정하고 있는데……!"


툭 건드리면 통 하고 반응하는 보에르는 피블론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유약해보이면서도 약하지만은 않은 그는 깨끗한 수정을 보는 기분인지라, 곁에만 있어도 절로 마음이 맑아졌다. 아마 아이들도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꼈기에 보에르에게 선뜻 2조장의 자리를 맡긴 것이리라.


"아, 참. 고르든은 어떻게 됐어? 아드는 아무 말도 안해주던데."


이 물음엔 라인이 답해주었다. 조금 과격하게.


"그딴 새끼 그냥 잊어버려. 복수할 생각도 하지 말고. 후…… 너 때리고 받은 처벌이 뭔줄 알아? 한 달 동안 아카데미 봉사란다. 겨우 그걸로 퉁칠 생각이라니……"


자기가 그런 일을 당한 것 마냥 콧김을 뿜으며 말하는 모습에도 피블론의 표정은 애매했다.


"라인 너, 아카데미에서 봉사가 얼마나 힘든줄 알고서 그런 말 하는 거야?"


그 물음에 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잘 모른다. 하지만 로이트가 일을 하고 와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힘든 수련양을 소화하는 걸 보며 별일 아니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 자기보다 더 강한 아이인데, 자신도 통과한 시험을 왜 떨어졌는지 의문을 품었고, 그 생각은 이어지는 피블론의 말 때문에 깨져버렸다.


"말이 봉사지. 사실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어. 최소한의 식사와 휴식만을 주며 온갖 힘든 일은 다 시키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쉬운 일이 하나 없어. 마구간에서 말똥을 치우고, 음식 쓰레기를 운반하는 것 따위는 차라리 나은 정도야. 이 드넓은 아카데미를 혼자서 청소하고, 수백 명이 사용하는 검과 방어구를 옮기고 손질하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상급자의 횡포는 고스란히 받고 정작 급여를 받는 건 그들이야. 학생들은 한 푼도 못 받아."


말만 들으니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라인의 표정은 마뜩찮아보였고, 보에르는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려는게 얼굴 그대로 보였다.


"아무튼 우리끼리 있어서 하는 얘기지만, 걔도 참 불쌍한 아이야. 귀족이 평민을 내리깎는 건 몰라도, 평민끼리는 내치면 안 되지 않을까?"


걸러듣지 않는다면 따돌림없이 서로 잘 지내잔 얘기로 들렸겠지만,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고차원적인 발언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피블론의 우회적인 말을 알아듣기엔 둘은 아직 어렸다. 그저 알았다고만 고갤 끄덕일뿐이다.















고르든의 지속적인 수다는 로이트의 귀를 점점 열리게 만들었다. 그의 과격한 사상과 거침없는 말솜씨는 평민조차 천박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특히 고르든이 펼치는 '첫 경험' 얘기는 낯뜨겁기 짝이 없는지라 로이트는 식은 땀을 뻘뻘 흘려대며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 잡았다.


"하여간 넬시 그년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글쎄 첫 날을 그렇게 보내고도 나한테 와서 말이야……"

"끙……"


어떻게 이 대화를 끊어야할까.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남자 덕분에 해결되었다. 하지만 차라리 고르든의 음담패설이 더 듣기 좋았을지도 모른다.


"안녕하십니까, 교관님."

"……그래."


렘피룬트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인사를 받았다. 고르든은 히죽거리면서 고갤 숙였다가 로이트를 흘긋 보았다. 그는 자루에 얼굴을 묻고 있었는데, 렘피룬트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아도 신경쓰지 않는지 말없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렘피룬트가 지나가고 로이트가 고갤 들었다. 차갑게 식은 얼굴. 그건 온전한 감정을 가진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좁혀진 동공, 실핏줄 하나 없이 드러난 새하얀 눈자위, 핏기가 싹 가신 입술과 악다물린 이는 마치 인간성을 버리기 일보 직전의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당연히 그 모습을 고르든도 보았고, 그는 실실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표정 죽이는데."

"……무, 뭐?"


순간, 로이트는 어벙한 얼굴로 고르든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본 고르든이 못마땅한 듯 눈썹 사이를 좁히다가, 곧 크게 웃으며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렸다.


"그런 표정도 지을줄 알고…… 그냥 답없는 찌질이인줄 알았더니 말이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로이트는 괜히 짜증을 부리며 홱 고갤 돌렸다. 고르든은 어깰 으쓱이더니 들고있던 자루를 늘어뜨리고, 로이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뭔일 있지?"


목을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가도, 로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르든은 그 이상 재촉하지 않고 특유의 입담을 발휘했다.


"하긴 내가 봐도 저 교관은 싸가지가 없어. 포스티어 최고의 교관? 기사 지망생들의 우상? 그야말로 헛소리지!"


아무래도 싫어하는 자의 험담이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굳은 표정과는 다르게, 로이트의 귀는 열려 있었다.


"듣자하니 검술을 가르쳐준다는데, 내가 알기론 그거 반쪽짜리일 뿐이야. 배우나마나 한 걸 가르쳐주는데 무슨 최고의 교관이야? 아, 그러고보니 1급 학생 중의 한 명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하던데…… 너도 알지? 꽤 유명한 애야."


이건 무슨 말일까? 3년이란 아카데미에서의 경험 덕에 렘피룬트의 가짜 검술에 대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헌데 그가 누군가를 데리고 가르친단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항상 검술을 배울 의지가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라했지만, 실제로 찾아간다면 주제도 모르는 놈, 노력하지 않고 얻으려는 놈 등 갖가지 무안을 주며 쫓아냈다. 직접 목격한 건 여덟 번, 소문으로 들은 건 세 번이었다. 소문이 훨씬 적은 이유는 워낙 입단속을 잘 시키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만큼 찾아간 사람이 적은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나름 아카데미에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로이트이기에 고르든의 말은 흥미가 동하기 충분했다. 그래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


"알지? 라르카 백작의 장남."


로이트의 표정…… 아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다. 덜컥 멈춰버린 로이트 때문에 고르든도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하고서 발끈 화를 냈다.


"너 뭐하……"

"진짜야?"


고르든은 아니 꼬운 얼굴로 바라보다가, 입가를 비틀어올렸다.


"맞아. 틈만 나면 밀레트 그 놈이 렘피룬트를 찾아가. 그리고 검술을 배우지."


로이트가 고르든을 쳐다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십 세커(Kg)의 자루의 무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키라스(해)의 따가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을 짓누르는 피곤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그를 자극하는 건…… 허망함. 상상 이상의 허탈감 뿐이었다.


"난…… 이렇게 되었는데……"


고르든은 고갤 살짝 꺾어, 삐딱한 자세로 로이트를 보다가 말하였다.


"어떻게 되었는데?"


그의 물음에 로이트가 삐걱, 고갤 돌렸다. 말해야할까? 누군가를 극렬히 증오하는 이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을까? 수많은 고민이 그의 뇌를 두들겼다. 도무지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이, 혼이 빠진 듯한 얼굴로 웃었다.


"……궁금해?"

"어."


이 정도 뜸을 들였는데도, 고르든은 더 재촉하지 않았다. 코일런이나 다른 형님들이 봤다면 기절은 안하더라도 당황하기 충분했다. 말과 주먹이 함께 나가고, 들불보다 화끈하고 성급한 성격에 이런 얌전히 있단 건 놀라운 일이었으니까!


"……죽였어……"

"뭐?"


꿍얼꿍얼. 로이트는 정신병자처럼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쯤 되니 고르든도 답답해서 그의 근처로 귀를 갖다댔다.


"그가 내 아버지를 죽였어."


그리고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멎고 차갑게 식은 로이트의 한 마디가 들렸다. 고르든은 처음 느껴보는…… 아니,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에 로이트의 얼굴을 보았다. 섬찟한 미소, 전신의 모공으로 찬 기운이 파고드는 듯한 그 표정이 고르든의 가슴을 짓눌렀다.


"렘피룬트 그 새끼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다고……"















렘피룬트는 개인 교관실에 앉아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원인이 눈앞에서 눈을 부릅 뜨고 서있었다.


"검술 수업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

"직설적인 표현이긴하지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제트는 담담하게 말했다. 렘피룬트로선 그의 결정이 이해가 갔다. 다름 아닌 제국의 1인자이자 파괴자, 비하크마 대공의 후계자이니 뭐가 부족하겠는가. 도리어 교관인 그가 가르침을 청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여러 세대를 걸쳐 갈고닦여진 특유의 검로와 호흡법, 움직임…… 고작 몇십 년의 수행으로 따라갈 수 없었으니, 굳이 자처해서 '후진 검술'을 배울 의무는 없었다.

다만, 그를 의문스럽게 하는 사실이 있었다. 우선 그 자신만이 아닌, 1조 전체를 끌어들였단 것이다. 그가 직접 가르칠 것도 아닌데, 굳이 배움의 기회를 박탈하다니? 여지껏 조원들을 힘있게 휘어잡아왔으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좋지 않은 길로 들은 적은 없었다. 그런 제트가 이번엔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시기가 이상하단 것이다. 왜 발표가 난 직후가 아닌, 수업이 끝난 후에 온 것일까? 검술을 배우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1조에도 이 뜻을 강요할 생각이었다면 즉각 처리했어야 옳다. 이 약간의 시간은 마치…… 그가 '즉흥적으로' 일을 결정한 것처럼 만들었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없습니다."

"……그래."


렘피룬트는 더 묻지 않았다. 그저 다른 조에게 검술 수업을 진행할 때, 남은 시간은 자유로이 수행하란 말만 전했다. 제트는 고갤 꾸벅 숙이고 물러났다.


"후."


갑작스럽게 수정구로 전해진 연락. 비하크마 대공의 최측근인 글래셔 백작의 전언은 아주 해괴했다.

검술 수업을 받지말 것.

이 말의 의미를 풀어보기도 전에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누가 뒤를 캐는 것일까. 찝찝함이 말로 이룰 수도 없었다. 분명 자신을 믿고 이곳에 보내놓고선, 이렇게 뒤가 켕기는 짓을 하다니! 제트는 불만을 가졌지만 표출하지 않았다. 그건 사회에서나 전장에서나 하수들이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후……"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은 제트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 소식을 1조 전부에게 전달해야했다. 반발이 조금 있겠지만 자길 따르는 아이들이니 걱정하지 않았다. 그저 불만을 진정시켜야하는 약간의 귀찮음이 문제일 뿐…….


작가의말

끄어어... 늦어 죄송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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