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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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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2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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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3

DUMMY

혼란스러웠다. 정말 그가 내쫓은 것이다. 렘피룬트에 대한 배신감이 미친듯이 터져올랐다. 아니, 배신감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했다. 애당초 그를 믿지도 않았으니······


대체 이 느낌을 뭐라고 불러야할까. 그래······


불쾌하다.


이 낯선 감정은 로이트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일까? 만일 집 안에 큰일이 난 것이라면? 어쩌면 그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찾아왔을 수도 있었지만, 그가 아는 아버지는 결코 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로 바래다 주던 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겼단 것 외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설마.


로이트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혹시······ 어머니가? 만약, 이란 가정은 점점 확신이 되었다. 음푹 패인 볼과 푹 꺼진 눈두덩으로 언제나 눈부신 미소를 보여주었던 어머니. 언제나 따뜻한 음식과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을 반겨주었던 어머니가······ 설마······?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갑자기 가족이 너무 보고 싶었다. 아카데미의 학생이라면 1년에 2번은 간다는 휴계 때도 그는 남아서 일만 했다.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했고, 그런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꿋꿋이 버텨내 기사가 되어 돌아가겠단 생각 하나로 끌어온 비참한 삶이 서서히 깨부숴지고 있었다.




"아."




그 어떤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목에 뭔가 걸린 것처럼 답답하다. 숨을 삼켜도 튕겨져나오고, 침을 넘겨도 도로 입 밖으로 나왔다. 기침 한 번 시원하게 하고 싶은데도 꽉 막혀 나오지 않았다. 이 먹먹함, 어떻게 해야 풀 수 있을까. 도저히······ 도저히 모르겠다.




"왜 그러냐 로이트야?"




자기도 모르게 창고로 와버렸다. 누굴 만나러 왔었지? 하크? 그는 늦은 저녁이나 밤에만 볼 수 있고······ 카나르? 또 물리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역시 라호드 노인밖에 없는 건가? 하지만 왜? 아무리 자신을 믿어준다 해도 고민거리를 얘기할만큼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이 아카데미의 사람이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녜요······"




일단 말을 그렇게 뱉었지만, 다시 물어봐주길 원했다. 하지만 라호드 노인은 입을 쩝쩝 대며 느리게 고갤 끄덕이곤 실없이 웃기만 했다. 평소 같으면 마주 웃었겠지만 왠지 기분이 안좋아져서 고갤 꾸벅 숙이곤 뒤돌아 가버렸다.
































"엔소닉 경,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고 있소?"




푸른 로브의 노인, 엘번의 물음에 갈로스가 닦고 있던 검을 내려두고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노인은 자신이 깊은 고민에 빠질 때 검을 닦는다는 사실을 알고 물어본 것일까, 그 생각을 하며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저 심란해서 그럴 뿐이오."


"도련님이 내리신 명령이 마음에 걸리신게요?"




엘번의 핵심을 짚은 질문에 마법사는 전부 마음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란 의심이 피어올랐다.




"맞소."


"그저 아카데미의 문제아고, 노예 학생일 뿐이오. 뭐가 그렇게 신경쓰이는게요?"




맞는 말만 들으니 당연히 그 고민은 이상한 것이었다. 하지만 '맞는 말이기에' 그의 고민은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




"저도 처음엔 그냥 넘어가려 했소. 포스티어 제국의 실세 중 하나인 라르카 백작에게 찍히고 노예 학생으로 낙인된 아카데미 최악의 문제아······ 하지만 그렇기에 신경쓰일 수밖에 없소."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오?"


"그 놈이 엘더 포레스트에서 홀로 남아 살았다는게 문제요."




그 말에 엘번이 뒤늦게 긴 눈썹털을 파르르 떨며, 갈로스를 보았다. 이제야 그가 어떤 문제를 따진 건지 깨달은 것이다.


엘더 포레스트. 델브라의 수수께끼이자 남쪽 브라슐 사막 다음으로 가장 방대한 지역. 도처에 깔려있는 알 수 없는 지형과 미개발지역은 제국에서조차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곳을, 아무리 초입부라지만 아이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갈로스가 속한 '소드윙 나이츠'의 어떤 기사들도 홀로 그곳에서 견뎌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갈로스처럼 단장급에 속하거나, 철저한 준비가 있다면 또 모를까 식량 하나 없이 달랑 검 한 자루 쥐어주고 생존하라 한다면 어느 누가 쉽게 해낼 수 있을까. 근데 그것을 아카데미의 노예 학생이 해내버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갈로스는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엘번을 바라보았다.




"이제 아시겠소? 어떤 형태로든 지금 도련님은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소. 그리고 그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 영향이라는게 도련님인지, 그 학생인지 주체를 생략한 말에 엘번의 고뇌가 한 층 더 깊어졌다.




"분명 이상하다고 느껴야 정상이오.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아카데미에서 눈치챘어야 했던 일이오. 어느 아이가 극심한 노동 후에 다른 학생보다 몇 배 더 힘든 수련을 하고 멀쩡히 버틸 수 있겠소? 대체 어느 아이가 그렇게까지 박대를 받으면서 스스로 아카데미를 걸어나가지도 않고 있겠소? 그건 우리 기사단 내의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아이가 버티기엔 매우 고단한 일이란 말이오."


"허면?"


"그 아이가 특별하단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 정상은 아니지. 그리고 이 아이에 대한 아카데미의 대응도 몹시 이상하오. 노예 학생으로 그 안에 가둬놓는다는 건 말이 안 되오. 귀족들의 사생아나 돌이킬 수 없는 쓰레기들을 재활용하는 아카데미에서, 효율을 최고로 치는 그곳에서 그런 낭비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아카데미에 대한 소문과 진실을 알고 있는 건 귀족과 귀족 밑에서 일하는 몇 측근들 뿐이었다. 그리고 엘번과 갈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갈로스의 말에 엘번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래, 그런 비효율을 감수하고서라도 아카데미에 목숨을 거는 그 아이를 가둬놓는게 이득이라고 판단하는게 분명하오. 그 아이가 아카데미를 벗어나면 꼭 큰일을 벌일 것처럼······"




갈로스는 심하게 말을 끌다가 헛웃음을 켰다.




"하,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주시오. 아이가, 그것도 일개 평민이 그런 사상을 품을 리 없는 일이겠지······ 설사 생각한다하더라도 그걸 실천으로 옮길 용기와, 실현해낼 밑바탕이 없을테니······"




심각한 일이 생길 땐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 건 소드윙 기사단에서도 유명한 일이었기에, 엘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갈로스가 채 못 맺은 의문을 그가 이어받았다. 정말 아카데미에서 왜 그 아이를 붙들고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이라면 왜 로이트가 아카데미에서 구박을 받으며 목을 메는지부터 생각했겠지만, 워낙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엘번은 이 난제를 다음에 해결하기로 하고, 긴 수염을 흔들며 고갤 털었다.




"아, 최근 달이 붉어졌던데 혹시 가문에선 별일 없소?"


"응?"




이번엔 갈로스가 의아한 소릴 냈다. 그리고 뒤늦게 탄성을 내며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아니, 아무 일도 없었소. 생각해보면 마법사 엘번, 그대도 달에 대한 해괴한 말들을 맹신하고 있었지 않소?"




그 말에 엘번은 그저 인상만 구길 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달에 대한 온갖 가설들은 그저 가설일 뿐이었다. 특히 지금은 죽고 없는 블루 크리스털의 교장 에이블의 논문은 모두가 말도 안되는 비약이라고 하고 있었다. 신이 없다라는 명제가 확정된 이 세계에서 '신의 경고'라니. 하지만 어디에서나 그렇듯이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이들은 있었고, 간혹 맹신에 가까운 믿음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엘번은 이중 후자에 속했다.




"큼."




엘번의 불편한 기침 소리에 갈로스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고갤 돌렸다. 어떤 형태로든 가문을 걱정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이에 맞지 않은 순수함에 기분좋게 웃다가 하늘을 보았다. 그도 가끔 보곤 한다. 아니, 어느 누가 델브라의 땅을 밟으면서 붉은 달을 본 적이 없을까.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보는만큼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그 달에 반영되어 있었다.


쟁기의 이음새가 부러질 징조, 병충해가 극악이 일어날 시기, 비가 올 염려, 징크스, 불길한 상상, 안 좋은 소식, 물질을 쉬어야 하는 날, 길을 잃어버리면 큰일나는 때.


어느 누구도 이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특히 몇 전쟁학자들은 피튀기는 전투가 일어날 예고라며 침튀기며 떠들어대곤 했는데, 실제로 이것이 정설로 굳혀질만큼 그 시기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그래서 모두가 이 이론에 부정적인 가설을 한두 개쯤 얹고 한다. 그리고 갈로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모두의 생각과 다른 상상을 했다.


영웅의 탄생.


전쟁에는 반드시 특출난 자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 특출난 자는 공을 받고 장수가 되거나 큰 보상을 받아 영웅이 된다. 목숨이 오고가는 곳에서 살아남은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갈로스의 상상은 근거없는게 아니었다.


악몽을 부른 마법사, 칼티어스를 물리친 에이블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라운드종 고블린 150마리의 침공을 드리핀 경이란 이름없는 자유기사가 홀로 막아냈다. 돌연변이 오거 윌리거가 팔십의 기사를 죽이고나서, 팔십한번 째 기사 렐트로폰 경이 놈의 숨통을 끊어냈다.


많은 위인들이 사건이라 불릴만한 극악의 전투에 나타났고, 존재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붉은 달이 떠올랐을 때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며 사건을 끝내버렸다. 갈로스는 스스로 동화적인 망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으론 이번엔 어느 영웅이 탄생할까 생각했다. 엘번이 뒤에서 욕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밀레트의 표정은 일그러지다 못해 구겨져버렸다. 몰래 가져온 애완동물에 대해 추궁받으니 그 기분은 가히 좋지 않았다. 아무리 야수라지만 놈은 어렸다. 잃어버린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 사람을 해쳐봐야 얼마나 해쳤겠는가. 이렇게 따지고 드는 교관 브렘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를 혼낼 공식적인 이유를 대야 했기에 입을 쉬지도 않고 있었다.


밀레트는 학생이고, 교관인 브렘비가 더 높은 위치다. 이건 아카데미에서의 규칙이지만, 상대는 그런 규칙을 깨부술만한 힘이 있는 아이였다. 그랬기에 브렘비 역시 적갈색 수염을 파르르 떨면서 훈계 아닌 훈계를 하고 있었다. 밀레트는 뻔히 보이는 수작에 이마를 감싸쥐었다.




"제 잘못인 건 인정합니다. 그럼 이제 뭘하면 되죠? 반성하는 것으론 끝나지 않을텐데."




참다 못한 그가 화두를 던져주니, 브렘비가 냅다 그 말을 받았다.




"네가 인정하니 고맙구나. 사실 위에서도 압박하는게 장난이 아니란다. 졸업식 기간이 다가오면서 너희 수준에 맞는 연회를 치러야하는데 그 비용이란게······"


"30길드입니다."




밀레트가 선뜻 내놓은 주머니엔 포스티어 제국의 인장이 박힌 누런 금화가 가득 담겨있었다. 브렘비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밀레트가 말을 이었다.




"물론 이건 ​실버팽을 놓친 것에 대한 보상비입니다. 연회에 대해선······ 백작 각하께 말씀 드려서 300, 아니, 400길드까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브렘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기분이 좋지만 그걸 드러낼 수 없기에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것이다. 비굴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그가 고갤 까딱이면서 주머니를 집었다. ​그 모습을 본 밀레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밖으로 향했다.




"그럼 몸 조심해라. 알잖니, 그 은둔자란 괴물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거······"




브램비는 그의 안위를 걱정해주는듯한 말을 하고서 황급히 돌아서서 주머니 안의 돈을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본 밀레트는 코웃음을 쳤다.




'천한 놈.'
























죄다 똑같았다. 라르카 백작의 장남이란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방탕함을 꾸짖으려던 선생도 검로를 지적하려던 교관도, 화단을 망가뜨려 한 소리 하려던 관리인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금세 사납던 눈빛을 죽이고 당장에라도 손에서 불을 만들어 낼 기세로 손바닥을 비비며 그에게 불편한 점을 물었다.




'당신네들 그 태도가 불편해.'




지조없는 그 ​눈꼴신 행각에 밀레트는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와 신분 격차가 크다 해도 관리는 해야하는 법, 그저 웃는 얼굴로 괜찮으니 수고하란 말만 흘렸다.


불쾌하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태생이 미천했다면 저들이 똑같은 모습을 보였을까. 어쩌면 라이가스나 헤스타의 태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불쾌하다! 무엇보다 그를 기분나쁘게 만드는 건 졸업 기간까지 라르카 백작, 즉 그의 아버지가 내린 명령이었다.




'반란의 싹은 미리 밟아놔라.'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포스티어 제국이 힘으로 델브라의 모든 단체를 일통시켰다지만, 고작 재활용이나 거치는 아카데미에서 반란이라는 어마어마한 짓거릴 생각할 리 없었다. 지금 눈앞의 사람들만 봐도 틈만 나면 굽신거리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로이트가 눈에 들었다.


학기 초만 해도 로이트는 미움받지 않았다. 평민치고 유들유들한 성정과 괜찮은 말솜씨 덕에 되려 바깥에서 나도는 방계 귀족이나 골칫덩이에게 관심을 샀다. 밀레트도 그중 하나였다. '호기심'을 불러들이는 로이트에게 그도 모르게 조금씩 신경을 썼다.


이때, 교관 하나가 그에게 라르카 백작의 전언을 가져왔다.




'그를 찍어눌러라.'




​일개 평민을, 그것도 힘없는 아이에게 손을 쓰란 말이었다. 처음엔 밀레트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그 아이가 무엇이 특별해서, 뭐가 그리 눈이 가게 만들어서 그런 걸 주문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카데미 사람들과 더불어 로이트를 괴롭힐 뿐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로이트 주변을 맴돌던 모두가 등을 돌렸다. 밀레트가 손을 댔을 때부터, 그들은 조금씩 멀어져 갔고 라르카 백작의 눈 밖에 났다는 말이 들렸을 땐 그가 원수라도 되는 것마냥 따돌리기 시작했다.


검조차 제대로 못 잡던 엘키스, 말더듬이 볼리, 글을 잘 쓰던 콘소드, 그와 같은 밀밭 출신의 에빌러, 어업을 생업으로 삼으려는 칸쟈······ 모두가 외면했다.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를까,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가졌던 친구란 것들이 적으로 돌변했다. 그 모습을 밀레트도 보았고, 역겨움을 느꼈다. 차라리 거기서 그쳤다면 모를까, 그들이 전부 밀레트에게 들러붙었을 땐 체면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욕을 내뱉고 싶었다.


밀레트는 뼛속까지 와닿는 더러움에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간악한게 인간이라니. 자신에게 있는 건 그저 돈과 귀족이란 핏줄 뿐이었다. 물론 이 생각은 밀레트가 상업에 종사하는 귀족인만큼 자유로운 사고를 가졌기에 가능한 것이지, 다른 귀족이었다면 '귀족의 고귀한 핏줄'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밀레트의 혐오감은 극도로 치솟았다. 이대로 어디가서 토악질이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로이트가 보였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그 녀석이.




​"로이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러버렸다. 밀레트의 말에 로이트는 퀭하니 죽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괜히 소름이 끼친 밀레트가 인상을 구기며 노려보았다.




"이젠 똑바로 보기까지 하는 군."


"아아."




로이트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고갤 수그렸다. 밀레트는 되려 눈을 빛내며 지나치려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누가 마음대로 가도 좋다 했지?"


"그럼······?"




로이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동시에 터져나온 말은 밀레트의 두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어쩌라고?"


"뭐······?"




로이트가 그의 손을 털어내고 가버렸다. 밀레트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뒤늦게 라르카 백작의 말을 떠올렸고, 로이트의 '말투'를 되새겼다.


뭔가······ 변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보에르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시선을 모았다. 나무에 뒤통수를 박고 앉아있는 나다크도, 서로 정신 시험에 대해 분석하고 있던 라인과 피블론도, 두꺼운 책을 읽던 네보도 보에르를 보았다.




"우리가 아무리 강해져서 기사가 된다 해도 마법사나 몬스터를 이기긴 힘들잖아?"




그 말에 모두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다크의 작게 터진 웃음으로 대화가 시작됐다.




"엉뚱한 건지 바보인 건지."


"왜?"




피블론의 말에 라인이 답했다.




"보에르가 상정하는 건 일 대 일의 상황만을 얘기했을 때야. 사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기사가 홀로 마법사나 몬스터를 이길 수 있는 경우는 정말 압도적인 차이가 아니고서야 힘들어."




만물박사 네보의 말이 시작되자, 이번엔 그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오크만 봐도 알 수 있어. 그때 엘더 포레스트로 갔을 때 얘기했었지? 오크의 근력은 성인 남자의 7배라고. 근데 이게 '일반적인 오크', 그러니까 사람으로 치면 아무리 못 쳐줘도 성인 남자나 징집병 정도인 셈이지."


"우와······"


"팔씨름 하면 굉장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뭐?"




라인과 피블론의 말다툼을 보던 네보가 책갈피를 끼워넣으며 말을 이었다.




"델브라에서 상정한게 있어. '위험도'란 수치는 수십의 학자가 머리를 맞대고 몇 달을 연구하며 산출해낸 일종의 '기준'이자 '단위'야. 1레벨부터 10레벨까지 있는데, 일단 우리가 알아야 되는 선에서만 설명해줄게."




설명이란 말에 보에르의 표정이 보기좋게 시무룩해졌다. 흡사 꾸중듣는 강아지같은 표정에 네보가 웃음을 간신히 집어삼키며 말했다.




"평균적인 기사의 수치는 2레벨이야. 그것도 충분한 단련과 단단한 무장을 했을 때를 가정하지. 그에 비해 오크는 그저 난 그대로가 2레벨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타고났단거잖아?"


"그래. 하지만 여기서 큰 헛점이 있어."




네보의 시선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나다크를 보았다.




"나다크가 얘기를 안해서 그렇지, 아마 제트처럼 나다크도 오크를 잡아봤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몬스터와 싸워서 이겼지."


"그게 왜?"




무슨 말인지 눈치 챈 피블론이 히죽거리자, 네보에게 되물은 라인이 눈을 부라렸다.




"나다크를 아무리 잘 쳐줘도 2레벨에 근접하였다고 보기 힘들어. 아직 크는 중이라서 힘도 달리고, 경험도 많이 없지. 그런데 훨씬 위험도가 높은 몬스터를 잡았어."


"그럼······ 위험도라는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거잖아?"


"정답."




보에르의 말에 네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그건 '예외사항'이야. 1레벨의 고블린이 2레벨의 오크를 잡기란 '힘들지', '어렵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확률이 매우 낮아."


"그런데 갑자기 그런 얘기는 왜 하는 거야?"


"흠흠, 이제 할 얘기의 초석이었어. 그리고 기사는 이런 예외사항이 매우 많아. 경험, 무구, 함정, 상황······ 그 중에서도 '지휘'는 빼놓을 수 없는 변수지."


"지휘······"




이제 책을 완전히 덮은 네보가 일어나더니 검지, 중지, 약지로 땅을 찍었다.




"기사에게 주어지는 건 명예와 검술이 끝이 아니야. 그 외에도 여러 단련할 요소······ 그러니까, 지금부터 우리가 치르게 될 '정신 시험' 역시 기사의 조건에 포함되어 있지. 그게 뭘까?"


"어, 음······ 굴하지 않는 마음!'


"······낯 간지러운데 그거."


"용기?"


"푸학!"


"이게!"




보에르는 피블론의 말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고, 이어서 라인은 자신있게 외쳤다가 나다크가 웃음을 터뜨리자 발끈해서 소리쳤다. 네보 역시 웃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가 도중에 설명을 끊어버릴 수 없어서 겨우 참아냈다.




"아까말했던 '지휘'야. 기사로서 할 수 있는 특권이자, 가장 큰 힘이지."


"으음······"


"어렵지? 원래 이게 좀 그래. 병법은 어른들도 난해해하는거니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아무튼 말이야, 기사는 홀로 싸우지 않아. 전쟁이든 몬스터 토벌이든, 그들은 반드시 둘 이상의 수하를 가져. 그게 바로 칼릭소 공작 님께서 말씀하신 '세 머리의 공식'이야."


"세 머리?"




네보는 머릿 속 깊이 잠들어 있던 지식을 끄집어냈다.




"인간은 셋 이상일 때 최고의 힘을 발휘한단 말이야. 공격을 담당하는 자, 방어를 담당하는 자, 그리고 이 둘을 오가며 지휘하는 자, 이렇게 셋이면 그들이 가진 힘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단 소리지. 달리 말하자면 우리 인간은 셋이 아닐 땐 본래 가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해."


"그러니까 쪽수가 최고라 이거 아냐?"




라인의 말에 네보가 고갤 저었다.




"그랬다면 오크나 고블린, 실버팽이 델브라를 집어삼켰겠지. 그들의 무서운 점은 여타 개체보다 월등한 수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지휘가 된단 점이야. 물론 인간의 지휘력에 비하면 한참 뒤처지기 때문에 델브라에서 입지가 좁을 뿐이지,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순 없어. 오죽하면 어떤 책에선 이렇게 집단을 이루는 종족에 대해선 위험도를 재편성하거나 아예 쓰지 말아야 한다고 하겠어?"


"에이······ 그래봤자······"


"어떤 고블린은 오거까지 잡아먹는다더라."




그래봤자 우리랑 비슷한 정도인데, 라고 말하려던 라인은 말을 쏙 삼켰다. 아무리 헛된 소리라 해도 네보가 말하니 신빙성이 갔다. 애당초 그는 여러 책을 비교해서 나온 정보만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렇게 허황된 소리도 아니었지만······




"요지는, 기사는 그저 홀로 서는 존재가 아니라 이거야. 그들보다 약하다 해도 용납할 수 있단 거지. 아무리 마법사가 뛰어나고, 몬스터가 강해도 뛰어난 지휘 앞에선 무릎 꿇을 수 밖에 없어."


"······그러니까, 몸만 단련해서 정신 시험따위 그냥 넘기잔 생각은 말아야지."


"그, 그렇지! 왜 그런 생각을 해!"


"난 그런 적 없는데."




나다크가 일침을 하며, 라인을 보았다. 괜히 가슴이 찔린 라인이 말을 더듬거리면서 피블론에게 화를 냈다. 보에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갤 끄덕였고, 네보는 설명을 끝마치자 웃으며 책을 펼쳤다.




"그래서 기사단을 설립하는거구나······"


"맞아."


"하지만······ 만약 한 명이라도 잘못 되면······ 큰일 나는 거 아냐?"




굉장히 뼈있는 보에르의 말에 나다크와 네보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말, 라인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한 명이 다치거나 큰 일이 나면 그만큼 나머지가 더 힘을 쓰면 되는 일이지. 안 그래?"


"······어어, 그렇지?"




피블론의 어정쩡한 대답에 라인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자기 말에 건성으로 답하는 게 마음에 안들었다. 네보는 뭔가 깊은 고민에 빠진 눈으로 책이 아닌,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나다크는 가라앉은 눈으로 보에르를 보았다.


보에르는 피블론에게 툴툴거리는 라인을 말리며, 다시 평소의 대화로 돌아갔다. 그제야 나다크는 눈빛을 거두고, 그 자리를 떴고 네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다.


























"제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검은 더벅머리의 소년 제트가 고갤 돌렸다. 그의 눈에 담긴 건 팍 죽어있는 눈빛의 로이트였다. 그는 휘청거리며 제트에게 다가왔다.




"제트······ 부탁이 있어."


"뭐?"




지금껏 나눈 대화라곤 연무장에서의 몇 마디 뿐이었다. 물론 그의 평소 모습이 더해져, 로이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서로 부탁을 할만큼 친해졌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듣자하니 엘더 포레스트에 다녀온 뒤로 하루 종일 어딘가에 숨어있었다는데······ 그렇게 심약한 모습을 들으니 김이 팍 새버렸다.


로이트는 심드렁한 제트의 표정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말을 다 하였다.




"너라면······ 너라면 할 수 있지······? 너······ 굉장히 높은 지위를 가진 거 맞지······? 엄청······ 대단한거지······?"


"그······ 렇긴 하다만······?"




왠지 심상치 않은 기세에 제트가 말을 ​흐렸다. 로이트는 그의 팔을 붙들며 소리쳤다.




"그럼······ 우리······ 우리 부모님의 ​소식 좀 물어봐줘······ 교관들은 전부 못 믿겠어······ 나머지 사람들에게 부탁하기엔 전부 힘이 없거나 나를 외면해······ 제발 도와줘······ 아버지가 날 찾아왔었다는데 렘피룬트 그 새끼는······!"


​"잠깐, 잠깐······ 일단 진정해봐."




너무 갑작스러웠다. 그가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로이트의 모습이 그의 생각을 마비시켰다. ​어쩌면 그간의 모습이 가면이고, 이게 본성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트는 생각을 조금 정리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교관 님이 부모님을 못 만나게 해서 걱정된다 이거지?"


"맞아······! 아버진 사소한 일로 그러실 분이 아니야, 분명······"


"별 일 아닐 거야."


"뭐?"


"별 일 아닐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교관인데, 큰 일이 난 걸 모른 채 하겠어? 아마 네가 잘 있나 궁금해서 온 걸······"




순간, 로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그딴 걸로 찾아오실 분이 아니라고 말했잖아! 근데 왜 만나게조차 못하게 하는데! 체력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서? 웃기지마! 그따위로 조작하면서 정당하단 듯이 말하지 말라고!!"


"진정해!"




제트가 보았을 때 그저 투정으로 보였다. 비하크마 대공 밑에서 엄격하고, 험하게 자라온 제트에게 로이트는 그저 우리 안에 갇혀 끙끙대는 나약한 짐승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생떼, 그것을 벗어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부탁이란 명목 하에 투정을 부리는 짓은 제트의 사상으론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다.




"겨우 그런 일로 이렇게 열내지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무 생각없이 그러지 말라고."


"겨우······? 아무 생각없이······?"




제트의 눈빛을 본 로이트의 눈이 흔들렸다. 그나마 믿고 있던,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그가 이런 눈을 하고 있다니? 뒤늦게 로이트는 제트도 밀레트와 같은 귀족의 자제임을 떠올렸고 잡고있던 팔을 놔버렸다.




"······그렇구나."




무언가 끊어졌다. 그건 아주 중요한······ 소중한 무언가였다. 제트는 멍하니 돌아서 가버리는 로이트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원석인줄 알았는데 돌멩이었나? 그 생각과 함께 로이트와는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두 남자가 서로 멀어질 때, 숨어있던 누군가가 고갤 내밀었다. 그리곤 그들처럼 미련없이 몸을 돌려 가버렸다.​


작가의말

훈련이다 휴가다 뭐다 해서 많이 늦었슴니다. 물론 내용 구상도 하느라... 아무튼, 수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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