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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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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9.0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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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21

DUMMY

델브라에서 동성애는 불법이 아니다. 물론 문화적으로 거부하는 경향도 존재하지만, 적어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개국공신 중 하나이자, 그림자 마술사, 아일레 백작 역시 동성애자였다. 그때 잠깐 동안 백작에 대한 추문이 나돌고 동성애를 거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7단계에 도달한 마법사이기도 한 그가 힘을 발휘하자 그 말들은 쏙 들어가버렸다. 이어서 잡초들처럼 돋아나는 동성애임을 밝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 일은 더이상 배덕이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이걸 이용한 조롱은 명백한 모욕이었다. 이 사실을 제트가 모를리 없었고, 나다크는 고갤 삐걱 돌렸다.


"뭐?"


분명 잘못 들은 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런 반응은 매우 모순적이다. 그럼에도 나다크는 이 반응을 택했다.


"네 귀가 잘못된 거 아냐."


제트의 이 말은 나다크에게 충분한 감정 변화를 일으켰다.


"시비냐?"

"그냥 의문이라고 해주겠어. 그게 아니라면 너 정도 되는 녀석이 저런 놈과 같이 다닐 이유가 없잖아."


그의 삐딱한 대답에, 나다크는 코웃음을 쳤다.


"그럼 거기까지 네 한계인거지. 네보의 진가를 모르는 네놈은 그냥 그렇게 살아라."


나다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검을 들고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만약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녀석에게 결투를 신청했을텐데…… 그 생각은 제트에게도 통했는지, 입맛을 다시던 그가 뒤틀린 웃음을 보였다.


"왜? 손이 허전해? 지금 검이 없는 게 다행이야. 그게 아니었다면 넌 진즉 뭉개졌을테니까."

"저급한 놈."


다짜고짜 시비를 걸더니 한다는 말이 양아치들이나 할 법한 수준낮은 도발. 그렇지만 나다크는 이 싸움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수업 끝나고 연무장으로 나와라."

"오."


나다크의 제안에 제트는 수락하였고, 이 둘의 대결은 삽시간에 아카데미로 퍼져나갔다.















"……의외인데."


피블론의 말에 보에르 역시 공감한다는듯 고갤 끄덕였다. 둘이 아는 제트란 인간은 이런 사고를 일으킬만큼 극단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힘을 갖고도 과시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로 겸손했는데…… 얘기를 들어보면 나다크에게 도발을 하여 결투를 신청하게끔 만들었다고 했다.


"근데 궁금하기도 하네."


아드는 자신의 옅은 금발을 손가락으로 꼬며 말했고, 라인과 릭트는 게슴츠레 그를 보다 고갤 돌렸다.


"난 별로."

"나도."


호전적인 두 사람이 그렇게 반응해버리니, 아드는 괜히 민망해져서 입을 쭉 내밀었다.


"둘다 강자의 후손이니까 궁금한 게 당연해."


피블론이 그렇게 웃으며 말하였고, 보에르는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았다.


"몰라서 그렇게 보는 건 아니지……?"

"아, 아니…… 그냥…… 아빠가 강하다해서 그 아들까지 강한가 싶어서……"


그건 완전히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강하면 아들도 강할 거란 편견을 깨버린 그 한 마디에 피블론이 피식 웃었다. 보에르는 자기가 말을 잘못 했나 싶어서 머뭇거렸고, 피블론이 머리를 쓸어주자 그제야 안심하고 웃어보였다.


"하긴 그래. 대공 님이 강하다고 제트도 강한 건 아니고, 백작 님이 강하다 해서 나다크가 강한 것도 아니지.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둘은 굉장한 놈이란 거야. 엘더 포레스트로 가기 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둘이 뭘 했는지."

"아, 기억나. 나다크는 이런 저런 몬스터들과 싸웠고……"

"제트는 오크의 족장 중 하나를 쓰러뜨렸지."


아이들은 네보가 구구절절 해주었던 설명이 어렴풋이 남아있었기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근데 내가 알기론 일반적인 기사라면 다 그 정도 하는 거 아냐? 렘피룬트 교관님 같은 기사는 오크 수십 마리가 덤벼도 끄떡없다던데?"

"동화같은 얘기하긴!"


아드의 말에 릭트가 딴죽을 걸었다. 당연히 아드의 눈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뭐? 어디가 동화같은데!"

"그건 정말 꾸며낸 얘기라 할 수 있어. 오크가 어디 뉘집 망아지 이름이야? 몬스터라고, 몬스터! 고블린 열 마리가 덤벼야 겨우 오크 하나를 감당할 수 있단 소리라고. 렘피룬트 교관님이 아무리 대단해도 고블린 수 백 마리를 홀로 쓰러뜨린단 거랑 똑같단 말이지!"

"그, 그것도 그렇네……"


아드가 기가 죽어 대답하자, 릭트가 콧방귀를 끼며 가슴을 쭉 폈다. 그러자 피블론이 툭 말을 던졌다.


"그런 단순 계산은 전투에서 도움이 안 돼. 그 상황이 어떤가가 중요하지. 만일 오크들이 달아나는 중이고, 교관님의 체력이 충분하다고 봤을 때 그땐 수십 마리를 잡는 건 일도 아냐. 하지만 반대로 교관님의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오크들이 정상적이라면 아주 힘들 거야."


그의 말에 아드가 릭트를 노려보았고, 릭트는 괜히 탁상을 좋은 나무로 만들었다며 말을 돌렸다.


"내가 말한대로, 아마 제트도 힘이 빠진 녀석을 쓰러뜨렸을거야. 그래도 족장은 족장. 그 흉폭하고 강한 오크족을 이끌 만큼 기세가 굉장히 셌을 테지.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긴 해. 무엇보다…… '경험'이란게 중요하지."

"경험?"

"응, 경험. 목숨을 걸고 싸워본 사람들은 '경험 상' 어떤 경로로 공격해올지, 어떻게 반격할지 대충 알아채거든. 음…… 뭐라 해야하나…… 라인, 잠깐 이리 와봐."

"어엉?"


라인이 다가오자, 피블론은 손을 휙 들었다. 보에르는 멀뚱히 지켜보는 반면, 라인은 깜짝 놀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아씨…… 뭐야."

"보에르는 집에서 맞은 적이 별로 없구나? 기껏 해야…… 잘 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셨지?"

"어…… 어떻게 알았어……?"

"라인은 틈만 나면 맞았고. 아버지인가…… 형인가……?"

"어? 맞아! 틈만 나면 형한테 머릴 쥐어박혔어!"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는 건데!"


라인이 자기 머리색처럼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자, 피블론이 서둘러 답해주었다.


"아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경험을 기초로 둔다는 거야. 이제껏 칭찬만 받아온 보에르는 내가 손을 들었을 때 별 반응이 없었지만, 라인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버릇'이 든 거지.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몸이 절로 알아채는 거야."

"어려워."

"생각보다 간단해. 우리가 검술 연습을 하는 거랑 같아. 세 가지 베기 동작을 미친듯이 했었지? 그게 다 베는 '습관'을 배게 하려는 거야. 그리고 습관 역시 경험과 같은 줄기이고, 즉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온 삶, 그 자체란 거지."


보에르와 아드는 나름 이해한듯 고갤 끄덕였고, 릭트와 라인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표정을 구겼다.


"아무튼 그 경험이란 건 모든 수를 뒤집어버릴 수 있는 변수야. 세상이 모르는 검술을 썼는데 상대가 이미 한 번 겪어봤다면? 주방장으로 초빙되어 요리를 해야하는데 처음 보는 재료가 있다면? 암수를 썼는데 상대가 알아챈다면?"

"으흠……"


피블론은 설명하는 걸 그만두었다.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이해는 본인들 몫이었다. 앞으로 이런 어려운 질문이 많이 생길텐데 일일히 떠먹여주었다간 스스로 떠먹는 법을 잊어버릴게 분명했다.


"뭐…… 복잡한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아무튼 제트와 나다크의 싸움은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어. 방금 내가 말한 경험이란 것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거니 말이야."

"우리끼리 떠들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말이지?"


아드의 물음에 릭트와 라인이 그렇구나, 라며 괜히 알아들은 척을 했다. 보에르와 피블론은 서로를 보다 큭큭 웃음을 참았다.














로이트의 머릿 속에서 떠오른 건 '쓰레기장'이었다. 귀족들(교관 기사나 마법사)이 남긴 대부분의 음식물, 생활 폐품 등이 버려지는 그곳이라면 얼마든지 '상한 음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은 며칠 동안 요양을 해야하고, 그때까진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

로이트의 눈빛이 깊어졌다. 졸업식까지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고, 자신이 병실에서 나오는 시기와 비슷한 걸 감안한다면 일을 치르기엔 더없이 부족하다. 분명 이리저리 불려갈게 뻔하고 실험을 하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촉박하다.

무엇보다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 언제 '그'의 버릇이 바뀔 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스본이란 마법사가 설명해준게 전부 맞다면 여기야말로 독을 실험하기에 최적화 된 장소였다. 어떻게 하지? 지금 최고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 준비도 되있지 않았다. 그 사실이 로이트를 촉박하게 만들었고, 조금씩 들끓는 마음을 억누르는데 정신력을 소모해야했다.


"요즘 애들 맹랑하기 그지없어."


이 목소리는…… 병동관리인이다. 이름은 롬스, 창고지기 라호드 노인과 동년배라고 기억한다. 하지만 라호드 노인보다 훨씬 젊어보였고, 목소리에도 힘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퉁명스러운 답은 하스본이 분명했다. 이렇게 들어보면 분명 상하 계급 간의 딱딱한 대화같지만, 하스본이 평소에 감정 표현이 서툴다는 것과 롬스가 그에게 편하게 대한단 걸 상기해보면 참으로 살가운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증거로, 롬스는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얄미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재밌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야. 자넨 이 곳에만 콕 박혀있으니 그 소식을 못 들었을 거 같던데……"

"소식?"


롬스의 얄미운 목소리에 더해, 웃음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가 알기론, 로이트가 알기로도 하스본이 저렇게 반문한단 건 궁금하단 뜻이었다.


"요번 연도에 거물들이 들어온 거 알고 있지?"

"거물이라면……"


하스본의 기억력이라면 충분히 끌어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롬스에 비해 상당히 젊어보이는 외모지만, 멜베스크 총교관이랑 말을 편히 나눌 정도로 연배가 깊고, 학식 또한 그만큼 넓었으니 말이다.


"요즘 정세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도대체 이런 끔찍한 곳에 자기 자식들을 보내고 싶을까…… 무엇보다 더 배울 것도 없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어도 기사 이상의 작위를 얻을 녀석들인데 말이야."


로이트는 귀를 쫑긋 세웠다. 말하는 걸 들어보니 분명 귀족가의 자제이고, 그것도 아주 높은 직위의 사람이 분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이 둘 있었다.

제트와 나다크.

그 둘이 무슨 일이라도 벌인 걸까?


"아무튼, 그 놈들이 왜?"

"자기들끼리 결투를 벌인다는군. 그것도 교관한테 직접 허락을 받겠다던데?"

"결투?"


기사들의 결투라면 명예를 높이기 위해, 혹은 굴욕을 만회하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쇼'이다. 한 마디로 아이들한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아버지 재킷을 자식이 입는 꼴이었다. 하스본은 겉멋만 든 놈들이라며 혀를 찼고, 롬스는 괜히 그들을 두둔해주었다.


"그래도 고르든 그 꼬마처럼 다짜고짜 패는 것보단 낫지. 그런 일이 벌어진 게 또 언제였더라……"

"괜히 그 얘긴 꺼내지도 마세."


하스본이 단호히 말을 끊어버리자, 롬스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


"아무튼 내가 보기엔 다 똑같아. 꼬마들 다투는 거 한두 번 보는 건 아니지만, 명예랍시고 검질하는게 제일 꼴 보기 싫어. 왜 이 멀쩡한 혀를 두고 몸뚱이를 못 놀려서 안달인거야? 말을 할 생각을 안해. 그렇게 무식하게 살면, 델브라(대륙 명칭)에 외교가 왜 있고, 협상이 왜 있어. 그냥 전부 밀어버리면 그만인데."

"에구구, 열이 많이 났어. 이제 그만 하고 좀 쉬세. 내가 밑에 애들한테 얘기 잘 해놨으니, 조금만 자릴 비워도 괜찮을게야."


롬스의 능청스런 목소리에도 하스본의 목소린 덤덤하기 그지 없었다.


"됐네. 아직 할 일도 있고, 결투 했답시고 실려오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나중에 같이 마시세."

"나중이라면……"

"그놈들 결투 시작할 때."














"곤란하군요."


에너텔의 우려 섞인 한 마디에 브렘비와 렘피룬트도 부정하지 않고 고갤 끄덕이며 수긍하였다.


"이건 오우거 싸움에 고블린 집 잃는 격입니다.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브렘비의 우려섞인 물음에 렘피룬트는 고갤 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그걸 말린다면 더 큰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입장을 지키면 돼. 정 뭣하면 다른 귀족에게 알려서 그들이 아무 짓도 못하게 해야지."

"총교관님께선……"


에너텔이 말을 흐리자, 렘피룬트가 그를 보며 말했다.


"형식은 그만두지. 오히려 그 일이 총교관님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란 걸 모르는 건 아닐테지?"


그 말에 에너텔이 고갤 숙였다. 옛날부터 총교관으로서 가져야할 잃어버린 힘을 실감하는 건 다름아닌 에너텔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장소, 무기, 규칙, 이 모든 건 아카데미에서 정한다. 둘중 누군가의 주관이 들어간 순간 끝장이다. 알겠나?"

"예."

"노력해보죠."

"브렘비 교관은 루컨 교관에게 졸업식 준비를 넘기고 에너텔 교관을 도와 대련을 주도한다."


그 말에 브렘비의 표정이 조금 애매해졌다.


"1급 학생 담당 교관이라 제 말을 들어줄지……"

"내가 말했다고 전하면 된다. 그리고 정 들어주지 않는다면 밀레트의 이름을 팔아도 된다."

"미, 밀레트를요?"


코앞에서도 쩔쩔 매는 그가 어찌 함부로 밀레트의 이름을 내걸 수 있을까. 그의 반응엔 렘피룬트가 한숨을 탁 쉬었다.


"그 녀석도 허락한 것이니 뭐라 못할 거다."

"그렇다면야……"


브렘비가 눈에 띄게 안도하였고, 에너텔은 이해한단 듯이 우려섞인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렘피룬트도 그들의 반응에 더 뭐라하지 않았다. 애당초 하급 학생을 담당하는 교관의 발언권이 낮은 데다가, 기사로서도 선배이니 렘피룬트처럼 특이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어려워하는게 맞았다.


'올덤 그 놈이 삐딱하게 나오면 안될텐데.'


마음 속으로 한 교관을 떠올린 렘피룬트는 대련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하필 졸업식을 얼마 안 두고 이런 소란이라니…… 뭔가 조금씩 엇나가는 기분에 파티때 반드시 술 한 잔을 걸치겠노라 다짐하였다.













"그 소문 들었어?"


평소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는 라이가스를 찾아온 밀레트가 화두를 던졌다. 라이가스가 검을 멈추고 땀방울을 훔치자, 밀레트가 말을 이었다.


"4급 애들이 칼싸움 한다더라."

"……누구입니까?"


라이가스가 호기심을 보이자, 밀레트가 신이 나서 말했다.


"거물이라고, 거물. 그 왜, 입학할 때부터 내가 얘기하던 애들, 걔들이 싸운다네."

"리호데 백작 각하의 자제와, 비하크마 대공 각하의 자제가……? 하필 개국공신들끼리 맞붙는군요."


그의 대답에 밀레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네? 헤스타도 록컨 후작님이 아버지와 충돌을 빚는다 했으니, 이제 나머지 셋끼리 싸우면 완벽한 내부 분열인가?"

"밀레트, 그런 위험한 말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라이가스의 훈계에 밀레트가 입을 쭉 내밀었다. 그의 걱정이 담긴 잔소리에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하여간, 아카데미에서 걔들 싸우는 거 주도한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전형적인 밥그릇 챙기기입니다. 신경쓸 필요는 없군요."

"그럼 학살자의 아들이 이길까, 승리자의 아들이 이길까."


그 말에 라이가스는 즉각 대답하지 않았다. 밀레트 역시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로이트에 대한 걸 물었을 때도 그는 신중하게 답을 내놓았으니, 더욱 거물인 그들이라면 더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다.


"아마 제트가 질 겁니다."

"무슨 근거로?"


생각보다 빠른 답에 밀레트가 놀라 되물었다. 라이가스는 또 고민을 하다 싶더니 곧장 답을 내주었다.


"아무리 오크 족장을 쓰러뜨렸다곤 하나, 다른 사람이 대신 힘을 빼준 녀석에 불과합니다. 본인의 그릇보다 넘치는 걸 이루게 되면 겸손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 스스로도 모르게 자만심을 갖게 됩니다. 물론 기초적인 훈련 상태는 제트, 그 쪽이 더 우월할 지는 모르겠지만…… 마음가짐으론 나다크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마음가짐이라. 대결의 원인을 알고있는 밀레트로선, 라이가스가 몰래 뒤에서 소문을 접하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정확하게, 제트의 썩어가는 정신 상태를 집을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그런 모욕적인 발언을 뱉는단 건 결코 참을 수 없고, 참지 말아야할 문제다. 만일 누군가 라이가스에게 비슷한 욕설을 날렸다면, 아마 밀레트가 먼저 나섰을테지.

하여간 자신의 생각과 같았기에 별다른 반박은 하지 않고 그저 대화를 이어나갔다.


"거 참, 어쩌자고 먼저 시비를 걸었는지……"

"제트가 걸었습니까?"

"그래. 걔 친구더러 네 애인이냐~ 이러더래. 아일레 백작님의 귀에 들어가면 어떡할려고 그랬을까."

"하긴, 그분의 성격상 그런 걸로 조롱하는 건 용서치 않으니…… 문제를 일으키진 않더라도, 대공 각하께 한 마디 할 수도 있겠군요."


사교적인 문제. 귀족 사회에선 가장 골칫거리다. 귀족 중에서 이걸 간과하는 이는 결코 없다. 심지어 칼부림 좀 한다는 대대로 내려오는 무장의 가문이라도 이걸 무시하지 않았다. 몇 마디 말로 수십 만 길드의 값어치가 오갈 수도 있고, 수많은 인맥이 끊어질 수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한 순간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으로 전락하여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설사 금전적인 피해가 없더라도 정신력을 심하게 소모하여서 지치고, 그 틈을 타 권력이 교체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제트는 그런 문제를 싹 무시해버리는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멍청한 짓거리였다. 누군가 이 일을 꼬투리잡거나 이간질을 시작한다면 끝도 없는 견제를 받게될 것이다. 스스로에게 흠을 남긴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행위! 그에 비해 나다크의 대처는 아주 훌륭했다. 성급하게 반응하지 않았을뿐더러 은근히 수하를 위해주는 상급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이번 일로 나다크에 대한 소문은 매우 좋아질 게 분명했다. 당연히 대련에 져도 큰 손해는 없고, 이기면 굴러가는 바퀴에 기름칠을 해주는 격이었다.

밀레트가 흥미로운 대상을 볼 때면 보여주는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꼭 오므리고 눈썹을 꿈틀거리는 저 표정…… 여자들은 그걸 귀엽다고 수근거렸지만 라이가스가 보았을 땐 협상할 때 참으로 좋지 않은 약점이었다.


"뭐, 그건 넘어가고…… 라이가스 너도 갈 거지? 어차피 곧 졸업이라 교관들이 건드리지도 않잖아?"


밀레트가 눈을 빛내며 권유하자, 라이가스가 웃으며 답했다.


"안됩니다."

"왜?"

"괜히 4급 학생에게 갔다간 이목만 쏠립니다. 아시잖습니까?"

"눈에 띄는 거 별로 안 좋아 한다고? 그치만 입학한 시점부터 넌 주목받았어. 알기나 하고 말해!"

"아무튼 전 싫습니다. 헤스타랑 같이 가시죠."

"걘 하는 걸 좋아하지 보는 걸 좋아하진 않는단 말야!"

"그럼 평소처럼 여학생들과 함께 가시는 건 어떨는지요?"


철벽같은 라이가스의 거부에 밀레트도 더 권하지 않았다. 그저 불만스러운 눈으로 노려볼 뿐…….


"그렇게 보셔도 가지 않습니다."

"라이가스!"

"대체 왜 그렇……"


라이가스는 말을 멈추고, 밀레트의 기분을 가정하여 생각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보채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결론에 도달하는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부러움.

같은 고위 귀족의 자제라 해도 저쪽은 기사로서의 길이 결정된 무관이다. 그에 비해 밀레트는 아무리 재능이 특출나도 기사가 될 수 없는 상인의 자제. 아무리 노력해도 기사가 될 수 없는 밀레트에게 있어서 그 둘은 더할나위 없이 좋은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밀레트는 분명 자신이 바라던 삶으로 태어난 자들이 어떨지 두 눈으로 보고 싶을 것이다. 바로 둘의 충돌을 통해서!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라이가스는 얼굴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척 하다 고갤 끄덕거렸다.


"대신 최대한 바깥에서 볼 겁니다."

"에이, 왜 그래. 기왕 볼 거면……"

"안 가길 바라시는 겁니까?"


라이가스가 이렇게 으름장을 놓자, 밀레트도 더 강요하지 못하고 입만 삐죽거렸다.


"후우, 일단 그 얘기는 넘어가겠습니다. 교관에게선 소득이 있었습니까?"

"올덤? 렘피룬트?"

"후자입니다."

"늘 그렇지 뭐. 온갖 종류의 검술 이론을 듣고, 실전까지 해봤는데 별로 얻는 게 없더라."

"……음."


괜히 분위기가 꼬이는 듯 하자, 라이가스가 입을 다물고 앓는 소릴 냈다. 밀레트는 실실 웃으며 그의 어깨를 빵 때렸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숙소로 돌아가자. 내가 특별히 아끼는 포도주를 따야겠어!"

"또 뒷돈 주고 빼돌린 겁니까?"

"말 섭섭하게 하네! 내가 아카데미에 부어준 돈이랑 비교하면 헐값이라고!"

"빼돌린 건 부정하지 않는군요."

"하여간에 입만 살아서!"

"제 곁에 계신 누구 덕분에……"

"이게 진짜!"

"어이쿠."


라이가스가 목검을 들고 달아나고, 밀레트가 뒤를 쫓는 사이……
















"말도 안되는 짓이라 생각하는데."


리든의 제안을 부정한 건 그의 패거리 중 하나인 에건이었다. 쓸데없이 의리만을 찾는 에건이라서, 모두가 위험해질만한 일은 자처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머리는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쉽게 설득할 수도 있지만, 리든은 그런 불편을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로이트 그놈이 있으면 우리 조에 피해만 돼. 놈이 잘 하든 못 하든 그건 상관없는거야."

"왜?"


에건이 인상을 구기며 물어봤고, 리든은 자신의 패거리를 훑어보며 말했다.


"솔직히 너희도 싫잖아? 걔가 같은 조란 말듣고 제일 먼저 욕한게 누군데? 엉?"


그 말에 모두가 아니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귀족에게 찍힌 골칫거리를 좋아할 아이가 누가 있을까. 리든은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한 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우리가 찍힐 일은 없어. 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라고.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줄 지원군이 있잖아."


리든의 말에 자기들끼리 그 의문의 지원군을 추측했다. 그 한심한 모습에 이마를 문지르던 리든이 윽박을 질렀다.


"정말 모르겠어?! 로이트를 그렇게 만들고 가장 싫어하는 놈이 누군지?"

"너……?"

"아냐, 내가 봤을 땐 교관님인거 같아."


리든이 가슴을 퍽퍽 치며 소리쳤다.


"밀레트!"













라이가스와 추격전을 끝낸 밀레트가 아카데미의 길을 걸었다. 비교적 아카데미 내부에서 야외활동이 잦은 3,4급 학생들을 위해 연무장은 그들에게 전부 양보되었다. 2급 이상 학생은 아카데미 밖에서 실전을 겪거나, 내부 건물에서 교양 혹은 이론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상급 학생들은 아카데미에서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환상은 더욱 커져갔고, 라르카 백작이라는 뒷배경 때문인지 밀레트는 하급 학생들에게 거의 꿈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그에게 찍힌 로이트의 위치는 바닥을 길 수밖에 없다. 아무튼 여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때 말곤 잘 다니지 않는 이곳을 홀로 걸었다.


"……불쾌하네."


문득 떠오른 로이트에 대한 기억이 그를 붙잡았다. 똑바로 보는 것도 모자라 자신에게 대드는 말투가 떠올랐다. 그렇게 된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단, 불경한 태도만이 머릿 속에 자리잡았다. 만일 밀레트가 이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다면……


"밀레트!!"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이쪽에서 졸업을 앞둔 1급 학생이 있을리 없다. 그렇다면 교관? 하지만 목소리가 너무 어렸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건물 뒷편. 불량한 애들이나 모이는, 나무가 우거진 곳에서 아이들 몇을 모아놓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밀레트는 웃는 얼굴로 다가갔고, 등을 지고 있는 아이를 제외한 나머지가 그를 보고 얼굴색이 파리해졌다.


"무슨 소린지 못 알아먹겠어? 그러니까 그 양반에게 부탁하면 우리 뒤도 봐주고, 정당하게 조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고!"

"그 양반이 누군데?"

"아, 말했잖아! 밀레……"


아이는 말해놓고도 뭔가 이상했는지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굳어버린 눈앞의 아이들을 보고서, 뭔가 잘못 되고 있단 걸 느꼈다. 끼긱…… 돌아간 고개 끝에 보인 건 환한 미소를 품고있는 금발의 청년. 그가 알기로 금색, 그것도 눈부시게 찰랑이는 금색 머리칼을 가진 건 아카데미에서 단 한 명 뿐이었다.

밀레트 데리반 르 라르카.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아이의 표정 역시 새파랗게 변했다.


"으흠. 나더러 뒤를 봐달라 이 말이지?"

"그, 그그……"


밀레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이 점이 정말 기괴했다. 누구라도 뒤에서 자신의 얘기를 한다면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여야할텐데, 그에게선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그들이 어찌 알가. 귀족의 사교계에선 표정 관리가 우선 순위고, 상거래에서도 우선적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음을.

아무튼 아이들은 덜덜 떨며, 그의 이름을 거론한 아이를 노려보며 원망하였고, 아이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최대한 떨리는 걸 힘주어 잡았다.


'오오.'


밀레트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모든 평민이, 심지어 귀족의 아이조차 긴장하는게 자신이거늘 그걸 억제하려고 하다니! 그의 관심어린 시선과는 별개로, 아이, 리든은 죽을 맛이었다. 조금 과격하게 말했거로니, 하필 그때 당사자가 듣다니! 재수없으면 귀족모독죄와 연계될 것이고, 어쩌면 로이트처럼 노예 학생이 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처형당할수도 있었다. 마음 속 깊숙히 있던 공포를 억누르고, 리든은 입을 열었다.


"부,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으음?"


상급 학생이니, 하급 학생 측에서 말을 높여도 문제는 없다. 애당초 그런 규칙이 상실된지 오래인 아카데미에서, 신경이나 쓰는 자가 몇이나 되겠냐마는……

어쨌든 밀레트는 리든의 당돌한 요청에 방긋, 아까보다 환한 웃음을 지었다.


"한 번 들어나볼까."


작가의말

생각보다 빨리 써져서 빨리 올렸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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