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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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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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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8

DUMMY

"아나므."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빛은, 헤스타의 손이 파란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단 착각이 들게 하였다. 약간의 어둠이 끼어있어서인지 그 황홀한 푸른 빛은 그녀의 슬픔이 낀 얼굴조차 아름답게 비출 정도로 색을 빛냈다.


"비즈."


그 말에 푸른 빛이 손바닥에 살짝 뜬 상태로 뭉쳐지더니, 손가락 한 마디 크기도 안되는 구슬이 되었다. 방금의 아름다운 빛이 응집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만들어진 구슬은 보석을 창조해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게 마법이야?"


등 뒤에서 들려온 말소리에 헤스타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니 곧바로 손에 응집된 푸른 구슬을 쏘아내지 않았던 것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곧 졸업식을 치를 학생 하나가 실려갔을 뻔했다.

헤스타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릴 조금 날카롭게 벼렸다.


"밀레트, 레이디의 방을 침입하는 건 어디에서 배운 기사도인가요?"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오는데 그런 제한이 있다면, 음유시인들이 풀어내는 사랑 노래는 전부 사라져야 마땅하겠지."


그의 느글느글한 대답에 헤스타가 인상을 구겼다. 대놓고 싫다는 표정을 지으니, 밀레트도 별다른 말은 않고 술병을 흔들어보였다. 투명한 병에 은박이 새겨진 술병은 그렇게 고급스러워보이지 않았지만, 어린 그들이 마시기엔 충분히 사치스러워보였다.

헤스타도 그걸 알기에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려다, 상대가 제국의 황금 라르카 백작의 장남인 것을 상기하였다.


"어디서 구했냐고 묻지마. 이깟 싸구려 와인산다고 교관한테 뒷돈 먹였으니까."

"방탕해요."


헤스타는 옅은 웃음을 보이며 손에 있던 구슬을 중얼거리며 흐트리고, 나무잔을 가져왔다. 지위에 맞는 행태, 그것을 좋아하는 밀레트에게 이런 투박한 나무잔에 술을 따라마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밑에서 일하는 병사들이나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헤스타에게까지 그걸 강요할만큼 무뢰배는 아니었다.


"치얼스."


둘은 잔을 부딪쳤다. 잔 안에 담긴 탁한 보랏빛 액체가 찰랑거린다. 붉은 카나르 빛이 밀려들어와 피처럼 더 붉게……
















"인간은 죽기 쉬운 생물이다."


이 말로 한 수업의 시작은 렘피룬트가 인간의 급소를 짚어주며 진행되었다. 졸지에 실험 인형이 된 4조원 에건은 구부정하게 서서 툴툴거렸다.


"이전에 너희가 보았던 고블린도 그 점을 잘 안다. 그리고 다른 생물의 약점까지도 전부 파악하고 있지. 그래서 적중당한 주변만 퉁퉁 붓게 만드는 특이한 독을 쓰는 거다. 자, 보아라."


그가 막대로 툭 건드린 건 목젖이었다. 에건이 켈룩거리며 바둥거렸다.


"그때도 말했지만 고블린의 독침을 이곳에 맞는다면 필히 죽는다고 봐야한다. 그건 호흡이 막혀 움직임이 둔해져서 그런 것도 있지만, 부어오른 목 때문에 숨구멍이 막혀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 여기서 숨을 가장 오래 참을 수 있는 사람 있나?"


그 말에 2조원 샤노브가 손을 들었다. 어부 출신인 그는 이따금 그물이 바위에 걸리는 걸 빼냈다고 하며, 백을 셀 때까지 참을 수 있다 말하였다. 그 말에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렘피룬트도 제법 감탄하였다. 기사로서 호흡이 깊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그만큼 한 번의 숨으로 움직일 수 있는 동작이 많아지고, 그건 곧 고급 검술에 한 발 다가갈 수 있는 초석이란 말이기도 했다.


"고블린의 독을 아무런 조치없이 기다릴 경우 해가 떠서 질 때까지 지속된다. 그나마 완화되는 것이지 완전히 낫는 게 아니다."


렘피룬트는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자, 고블린의 독에 맞았을 때의 해결책은 세 가지가 있다. 무엇일까."


늘 질문이 들어왔을 때, 네보가 치고 들어왔기에 모두가 그에게로 눈을 돌렸지만 정작 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독에 맞지 않도록 주의하며 싸우거나, 그에 상응하는 치료제를 구비하고 다니는 겁니다."


나다크의 말에 렘피룬트는 대답을 잠깐 기다려주었다.


"나머지 세 번째는?"

"…… 면역."


일단 답을 제시한 나다크는 뒤이어 설명을 보충하였다.


"그 독에 대한 내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소용이 없으니, 아무리 독에 맞아봐야 쓸모가 없죠."


렘피룬트가 고갤 끄덕였다. 답에 만족한단 뜻이다.


"나다크가 제시한 답이 맞다. 맞지 않거나, 치료 하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통하지 않거나. 이 셋이 독에 대한 답이다."


결과를 낸 렘피룬트는 다음 주제로 이어갔다.


"급소를 안다는 건 정말 치명적인 일이다. 언제라도 쉽게,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단 뜻이니. 달리 말하면 '누구나' 그걸 알 수 있기 때문에 방비할 수도 있단 소리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이 고갤 갸웃거렸다.


"쉽게 말해주지. 만일 너라면 수백 걸음을 걸어가는 길을 택하겠나, 아니면 수십 걸음으로 도착할 수 있는 길을 택하겠나?"


이 설명에 대부분이 고갤 끄덕였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엔 라인도 끼어있었다.


"요컨대, 어느 누구도 어려운 길을 택하려 하지 않는단 소리다. 찌르면 곧장 죽일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구태여 팔이나 다리를 찌르는 일이 없단 것이지. 잡아가거나, 설득하려는게 아니면 말이야."


꿔다 논 보릿자루가 되버린 에건은 다리가 아프다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뻔히 보이는 공격'이 되버린다. 예측되버린 공격은 누구보다 막기 쉬울 뿐 아니라, 반격의 기회까지 주어지지. 그리고 이걸 위해 검술이 존재하고, 지금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갑자기 검술 얘기는 왜 나올까. 1조원들은 입이 툭 튀어나왔고, 3조원들은 눈을 크게 뜨며 고갤 끄덕였다.


"만약 상대가 알고 있는 급소와는 전혀 다른 급소를 공격한다면? 아니면 다른 부분을 공격하는 척 하며, 급소를 공격한다면? 혹은 급소가 아닌 부분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상대를 꺾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가능성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꾸준한 단련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그 말이 끝나고나서야, 멍하니 서있던 에건은 다시 교본으로 사용되었다.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한 건 너희가 조금이라도 이번 수업에 대해서 경각심을 갖고, 깊게 빠져들길 바란 마음에 그런 것이다. 자, 방금 고블린의 독으로 예시를 들었으니 이번엔 실버팽이 오우거를 사냥하는 방법을 통해……"


















"좋겠네?"

"뭐가."


그 날 이후로, 고르든의 치근덕거림은 심해졌고 로이트의 답변은 더 많아졌다. 왜인지는 몰라도, 로이트는 그의 말을 잘 들어주었고 그래서 지금처럼 뜬금없는 말에도 퉁명스럽게나마 답해주었다.


"뭐긴 뭐야. '죽이는 방법'을 배웠잖아."

"……뭐?"


고르든이 히죽거리며 팔꿈치로 로이트의 옆구리를 비벼댔다.


"어디서 응큼하게 모르는 척이야? 방금 배운 거 써먹어야지. 언제라도 쉽게, 적은 힘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 크…… 그거 너한테 딱 필요한 거 아냐?"


로이트가 들고있던 자루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재미없어 그 소리."

"뭐?"

"불가능한 걸 해보라며 시시덕거리는 그런 거, 재미없다고."


로이트의 눈빛을 본 고르든은 할말을 잃었다.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이 참으로 괴이하단 생각을 하며, 고르든 역시 싸늘하게 식은 웃음으로 받아쳤다.


"농담같아?"

"아니라고?"


렘피룬트는 강하다. 체격 차이도 있고 그 나이까지 쌓아온 경험도 무시할 수 없으며, 또한 기사 후보생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검술까지 갖고 있다. 그에 비해 로이트는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으며 변변한 검 한 자루도 없고, 검술은 꿈도 못 꾼다. 이 차이는 어른과 아이란 비교조차 아까울 정도로 까마득했다. 로이트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고르든의 부추김은 그저 놀림이라 생각했다.


"너, 내가 놀린다고 생각하냐?"


고르든은 그의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르든이 밑바닥에서 산다지만, 부모를 잃은 아이가 복수를 못해 절망하는 걸로 놀릴만큼 한심하지 않았다. 되려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간섭하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날 주워다 키운 인간들이 있었어. 틈만 나면 두들겨 패고, 음식이나 돈을 구걸해오게 시켰지. 그래봤자 나한테 돌아오는 건 익지도 않은 감자 몇 알이 전부였어. 발이 터지도록 뛰어다녀서 지들 배를 채우게 해준 대가가 고작 그거라고."


고르든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래서 대항했지. 이 주먹의 반도 안되는 손으로 자기보다 몇 배는 큰 어른에게 달려든 거야. 어떻게 됐을까?"


고르든이 반대쪽 손을 쫙 펼치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쩍 때렸다.


"신나게 두들겨 맞았어. 코가 부러지고 피가 터지고, 이빨이 깨졌지. 심지어 밤새 꼼짝도 못하고 끙끙 앓았어."


그 말을 하며, 한쪽 입가를 옆으로 쭉 찢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어금니가 있었어야할 빈 자리였다. 말을 할 때도 몰랐을 정도로 깊은 곳의 이가 빠진 것이다.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더 힘들게 일했어. 그래서 깨달았지. 아, 건드리지 말고 하던 걸 해야 내가 덜 괴롭겠구나."


뭔가 로이트는 이 말을 들으면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있는 착각이 든 것이다. 고르든도 그걸 의도했는지, 아니면 그저 과거에 젖어있을 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계속 되는 옛 이야기는 로이트의 사상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 일이 있는 뒤로 한 사내가 찾아왔지. 엄청나게 덩치가 큰 아저씨였어. 생긴 건 쥐새끼를 닮았는데 말이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곰의 몸뚱이를 지닌 쥐새끼라니!"


그 말을 하면서 고르든은 킬킬 웃어댔다. 만일 고르든이 말한 쥐새끼가 귀족들조차 꺼려하는 깡패들의 왕, 코일런이란 걸 안다면 그의 수하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잡배들이 기절했을 것이다.


"녀석이 찾아와 말했어. 나를 따라갈 생각 없냐고. 그래서 난 말했지. 좆같은 소리 말라고."


고르든은 적나라한 욕설을 뱉고도, 답답해하며 가슴을 긁었다. 그 갑갑한 마음을 풀어줄 욕 치곤 너무 약했나보다. 로이트가 듣기엔 심했지만 …… .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냐고 하더군. 아니, 죽이고 싶냔 물음이 먼저였어. 그래서 난 솔직하게 대답했지. 날 데려간 그 새끼들을 너무 죽이고 싶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그 쥐새끼가 뭐라는줄 알아?"


고르든이 주먹을 들어보였다.


"자고 있을 때, 놈들이 마신 술병으로 대가리를 한 번 찍어보라더군. 두 번, 세 번, 병이 박살나고도 일곱 번은 찍으라고 말이야."


순간, 로이트는 고르든의 눈빛에서 섬뜩한 기운을 읽어냈다.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다. 그저, '잔혹함'을 감지하고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한 듯 했다. 실제로 고르든의 눈빛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눈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살기가 담겨있었다.


"처음 녀석은 피가 튀기고, 윽윽거리다 잠잠해지더군. 병이 깨질 일은 없었어. 그 다음 녀석 머리를 세 번 내리쳤을 때 깨졌지. 그리고 마지막 녀석은 멍한 눈으로 날 보다가 내가 다른 병으로 내리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어. 믿겨지겠어? 돈 대신 벌어오던 호구새끼가 갑자기 친구 둘을 죽이고 자기도 죽이려한단 사실이 말이야. 그래도 녀석은 상황 판단을 잘 하더군. 곧바로 날 깔아뭉개고 목을 졸라댔으니까."


마지막 말을 들어보면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고르든은 여기에 있는 걸까. 그 답은 나왔다.


"바닥을 더듬다가 잡히는 걸 닥치는 대로 던지고, 휘둘렀어. 아마 유리 조각이었을걸? 팔뚝을 베이고 비명을 지르길래, 내가 달려들어서 올라탔지. 그리고 목을 졸랐어. 아까랑 반대 상황이지. 물론 녀석도 저항을 했고, 난 어쩔까 하다가…… 그냥 대가리로 찍었어. 내 머리로 그 놈 머리를 말이야."


고르든은 자기 이마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놈이 죽었는진 모르겠다. 듣자 하니, 그 인간이 뒤처리를 해줬다고도 하니 그 셋을 죽이지 않았을 수도 있어. 단지 기절만 시킨 걸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죽었든 죽지 않았든 그 상황은 내가 만들어낸 거야. 죽도록 처맞던 꼬마가 어른 셋을 때려죽였다고."


로이트의 불안한 눈을 보던 고르든은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그렇게 밖으로 나왔을 때, 아까 말한 쥐새끼가 기다리고 있었어. 나더러 이렇게 말하더라. 내가 널 구해준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법을 일러주었고, 넌 그걸 써서 벗어났으니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 은원을 확실히 하는 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다. 그래서 내가 뭐라 했을까?"


로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눈 가득, 궁금함이 담겨있었다.


"존나게 고맙네."

















"그냥 술이나 마시자고 부른 건 아니잖아요?"


병이 반쯤 비워지고, 밀레트가 새로 잔을 채울 때 헤스타가 말했다. 밀레트는 분홍빛이 감도는 얼굴로 헤스타를 보다가 코웃음을 치며 어깰 으쓱였다. 기품을 추구하는 그가 하는 짓이라곤 믿기지 않는 싸구려 반응이었다.


"만약 너라면 이제껏 만만했던 애들이 기어오른다면 어쩌겠어?"


그 말에 헤스타는 블루 크리스털에 다니던 시절에 봤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릭시버 자작가의 영애, 미샤. 귀엽게 생긴 얼굴과는 달리 성질은 괴팍했다. 뒤에서 중얼거리지 않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직선적인 성격이라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아이었다.

록크롬 자작가의 영애, 유느. 전에 만났던 웰피쉬의 누나로, 성격도 고분고분하고 얼굴도 빠지지 않지만 성벽이 남달라서 사교계에서 오르내리곤 했다. 그 동생의 그 누나 아니랄까봐, 갑자기 하크를 괴롭히던 웰피쉬의 모습이 떠올라 인상이 구겨졌다.

마지막으로 솔턴 남작가의 유일한 자식인 가니아. 이 애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미샤처럼 귀여운 맛도 있고, 유느처럼 성격도 괜찮았다. 남을 위해줄줄 알고, 머리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 인상이 깊지 못했고, 아이들은 그녀를 따돌렸다. 머리만 좋고 마법이 뒤처져서? 그것도 아니면 망해가는 남작가의 자식이라서?

아니다. 헤스타는 그 이유가 '그냥'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동족을 따돌리는 무리에 있었단 사실을 떠올리니, 헤스타는 술기운 때문이 아니더라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하지만 겉으론 별 동요없이 찰나 간에 떠올렸던 생각을 그대로, 밀레트에게 말해주었다.


"기선제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선제압?"


헤스타가 은은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어떻게 라이가스를 꺾었는지 아시나요?"

"걔가 들으면 펄쩍 뛸 얘기를 시작하겠구만."


밀레트는 그렇게 답하며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정신을 제압했기 때문이에요."

"흑마술?"


헤스타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밀레트가 두 손을 내저었다.


"그건 일종의 압박감이에요. 전 이곳에 오기 전에 아버님과 검을 겨뤘답니다. 아시다시피 공작 각하의 검은 매섭고, 잔혹하죠. 그게 하나뿐인 딸이라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요."


밀레트는 고풍스럽게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인이 광기에 물들어 검을 휘두르는 상상을 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지만, 제국의 2인자의 검술이 그렇게 나약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강자가 직접 가르쳤다면, 라이가스의 패배도 납득이 갔다.


"음, 얘기가 조금 샜네요. 그래서 당시 제 실력은 몰랐지만, 또래에게 뒤처질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여자라고 방심할 정도로 녹록치 않은데, 라이가스 역시 마음을 놓아버리고 말았죠."


헤스타는 술 한 모금으로 입을 축였다.


"자존심이 강한 라이가스에게 고정관념이 깨진단 건 큰일이에요. 정신의 벽이 허물어지거든요. 그건 곧 자괴감이나 절망으로 이어져요. 생각해보세요. 만일 밀레트가 누군가와 싸웠는데 힘이나 기술에 밀리면 어떻겠어요? 그것도 만만하게 봤던 자가 그런다면 말이에요."


라이가스와 헤스타의 상황을, 자신과 로이트로 빗댄 순간 소름이 끼쳤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 말도 안되는 추락은 있어선 안됐다. 새삼 라이가스의 정신력이 대단하다 느껴져서, 나중에 그를 휘하로 두면 잘 해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기세가 중요한 거에요. 전쟁에서도 병사들의 사기가 승패를 가르고, 외교에선 얼마나 높은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느냐가 정해져요. 그 어떤 강자도 약자한테 기가 죽지 않죠. 반면에 약자는 강자한테 반드시 기가 죽어요. 그래서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없는 것이구요."

"그럼 약자가 강자의 기세를 꺾는다면 …… ?"


잔을 깨끗이 비운 헤스타가 곧바로 답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


"이길 가능성이 생겨요."

"엉? 이길 가능성이 생긴다고? 반드시 이기는 게 아니라?"


밀레트가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묻자, 헤스타가 빈 잔을 바라보다 즉각 답해주었다.


"기세란 승리의 요소 중 하나일 뿐이에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싸움에서 우위를 하나 점했다고 정해진 답이 나오는 건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실수 한 번 했다고 얕봤던 상대한테 무참히 패한다면 강자의 입장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헤스타는 그 말을 하고 다시 옅은 웃음을 보였다.


"강자는 강자로서의 이유가 있는 거에요. 남다른 힘이든, 뛰어난 검술이든 말이에요.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말아요. 강자와 약자의 구도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을 뿐더러, 그 차이는 쉽게 메울 수 없으니까요."


'물론 그 구도가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요.'


밀레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리는 걸 보고서 헤스타는 뒷말을 더 하지 않기로 생각했다.















고르든과의 대화 후, 로이트는 밤에 잠에 들지 않고 홀린 듯이 창고로 들어섰다. 끙끙거리는 카나르의 머리를 쓸어주며, 로이트는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갔다. 그의 말로 한 가지 의문이 든 것이다.

내가 렘피룬트를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비례하여 그도 강해질 것이다. 경험은 어디서 쌓아야하는가? 무기는? 모든 차이를 뒤엎을만한 것이 없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이려 해도 인맥이 없고, 자금을 쏟아부으려 해도 돈이 없었다. 그렇다고 검술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으니…… 굳이 있다면 '변수'와 '철저한 계획' 뿐이었다. 그 순간, 로이트의 머릿 속을 스쳐지나가는 게 있었다.

독. 그리고……


"메실리아 꽃."


로이트는 엘더 포레스트에서 빠져나올 때 꺾어왔던 꽃 한 송이를 기억해냈다. 지금은 잔뜩 시들어버렸지만 이 꽃은 산을 타는 아이라면 얼마든지 구해올 수 있었다. 좋은 예로, 하크가 메실리아의 씨를 먹고 목소리를 잃지 않았던가(물론 로이트는 이 사실을 모른다). 그만큼 흔하면서도 위험한 물건이지만, 이것에 대한 주의는 거의 없었다. 이따금 메실리아의 열매가 잘 발려져서 식사로 나오기도 하니 말이다.

고블린의 독. 렘피룬트가 이 아카데미에서 엘더 포레스트로 갈 때마다 고블린과 상대했었지만, 그 독에 중독된 걸 본 적은 없었다. 몇 년 간의 반복 학습과 약간의 여유가 있을 때 읽었던 책에 따르자면 독을 먹고 내성을 키우는 이들은 칼릭소 공작의 기사단 키메라헌터에서나 하는 짓이다. 나머지 기사단은 그에 상응하는 해약을 상비하고 다닌다고 하는데, 그가 알기로 렘피룬트는 이제까지 어떤 약품도 갖고 다닌 걸 보지 못했다.

추측할 수 있는 결과는 두 가지. 이미 독에 내성이 있거나, 아니면 중독되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높은 확률로 후자, 굳이 전자더라도 로이트처럼 몇 번 중독된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는 고블린의 독에 대해 큰 내성이 없다. 그렇게 판단한 로이트는 머릿 속에서 떠오른 꽃이 열매로 바뀌는 걸 보았다.

메실리아의 열매. 둥글둥글하고 녹색의 껍질에 과육은 맛이 좋지 않으나, 성장이 매우 빠르고 보관도 간편하여서 평민들의 주된 간식거리였다. 씨는 직접 씹어삼키지 않는 이상 큰 해로움도 없었고, 추운 데건 따뜻한 데건 잘 자라기 때문에 누구든 쉽게,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다. 이곳 아카데미에서도 구하기는 매우 쉬웠다.

문제는 독의 조합.

엘더 포레스트의 식생은 매우 단순했다. 왜냐하면 숲의 기이한 힘을 견뎌낼 수 있는 식물은 한정되어 있으니, 잡초처럼 생명이 질긴 메실리아나 류타드, 시로즌 같은 식물만이 살아갈 수 있었다. 그 중 류타드는 꽃을 피우고 일주일도 못 가고 조금이라도 춥거나 습기가 찬다면 살아가지 못하니 제외. 남은 건 메실리아와 시로즌 둘인데, 시로즌의 꽃은 매우 작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반면에 메실리아의 꽃은 크고 퍼져있다. 이 명확한 특성 때문에 고블린 부락 근처에서 봤던 꽃들이 전부 메실리아임을 기억해냈다.

꽃은 냄새가 역하다. 하지만 열매는 그럭저럭 맛이 있고, 씨는 독을 품고 있다. 줄기나 잎은 모르겠다. 분명 한 건 고블린들이 이 메실리아란 식물을 조합하여 인체에 치명적인 독을 만든단 것이다.


"어떻게…… 만드는 걸까……?"


렘피룬트를 죽이겠단 목표를 가지고 만드려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죽일만큼 미워도, 고르든의 말이 심성을 조금씩 바꿔놓아도 하나의 생물이 동족을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독을 만드는 짓이 하등 쓸모 없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이란 소리다. 그런데도 로이트는 다른 사람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독의 제조법에 대해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건 일반적인 기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독을 쓰는 건 암살자나 하는 짓이라며 경멸하는데다가, 정면 승부에서도 독을 쓰는 건 '비겁한 짓'이었다. 그런데 로이트는 생각일 뿐이지만, 독을 쓰는 것에 주저가 없었다. 되려 몬스터가 쓰는 독을 연구하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라.

고르든의 가르침(?)을 떠올린 로이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옆에서 끙끙거리며 밥을 재촉하는 카나르도 외면할만큼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 고민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계속 되었다. 덕분에 렐프한테도 얻어맞기도 하고, 고르든한테 욕까지 먹었지만 그의 생각을 끊어낼 수 없었다. 참다 못한 고르든이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른 덕분에, 로이트는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독?"


로이트에게 사정을 전해들은 고르든이 파 웃음을 터뜨렸다.


"너 독을 아주 우습게 여기나 본 데, 그거 연금술사들도 쉽게 밝혀내지 못하는 것이야. 재료도 재료지만, 그 조합이 얼마나 어려운데? 어떤 건 지들끼리 서로 돕기도 하는 반면, 지들끼리 부딪치기도 한다고. 그러니까…… 그래, 여러 조원을 한 사람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만큼이나 힘들단 소리지."

"만들어 본 거야?"


고르든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안 해봤겠어? 아무리 내가 어린 나이에 어른을 때려죽였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고 있을 때 도구를 써서 그런거지. 그런 상황에서 낯선 곳에 이끌려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자고 있을 때 기습? 어림도 없는 소리. 애들 귀가 밝아서 조금만 몰래 다가가도 두들겨 맞는다고."


로이트가 못 알아먹고, 멀뚱히 바라보자 고르든이 괜히 성질을 부리며 손을 흔들었다.


"하여튼, 그래서 나도 생각해본게 '독'이야. 근데 그거 알아? 독의 재료가 어마어마하게 많단 거 말이야.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싸지르는 똥이 될 수도 있고, 너의 피가, 몬스터의 일부가 될 수도 있어. 하여간 무지 많단 말이지. 근데 그중에 너가 원하는 효과를 내는 건 드물어. 죽이려고 시도했는데 그냥 배탈만 나고 끝나기도 하고, 기절시키려고 했는데 사타구니 사이에 웬 불몽둥이가 솟아나기도 하지. 그야말로 '도박'이란 소리야. 너라면 목숨이 오가는 도박을 할래, 아니면 안전하게 갈래?"


그 말에 로이트는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뭐, 아주 간혹 가다 우연히 찾아내는 경우도 있긴하지만 어떻게 알아낼래? 직접 먹어보면서 알아낼 것도 아니고…… 그거 아주 위험한 짓이야. 알지, 키메라헌터란 기사단? 용병들도 안하는 짓으로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운다고."

"그래……? 근데 그게 꼭 먹어야만 내성이 생기는 거야?"

"어? 아닐 걸? 내가 알기론 몇 독을 많이 맞은 용병들이 내성을 가진다곤 하는데…… 아, 똥 푸는 녀석이 똥독에 안오르는 걸 보면 그냥 중독되어도 내성이 생기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구나."


로이트의 머리가 생각이란 것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한 가지 명제가 성립되어야 했다. 그건 바로……


"혹시 고블린의 독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엉? 야, 너…… 푸흐흐…… 되도 않는 소리 좀 하지 마라. 그거 얼마나 힘든 일인진 알고나 있어? 하다 못해 암살자들의 독을 어떻게 만드냐고 묻질 않고……"

"그냥 궁금해서……"


고르든의 반응을 보니 그가 아는 것 같아 희망을 가졌지만, 그 마음은 처참하게 부숴졌다. 연금술사들의 난제들 중 하나가 바로 고블린의 독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졌느냔 것이었다. 심지어 터널, 그라운드 고블린들도 독을 쓰는데 가장 흔한 포레스트 고블린이 쓰는 독도 못 알아내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불가능이란 소리였다.

로이트의 계획은 고르든의 답변으로 차츰 수정되었고, 또 세세해졌다. 그리고 그의 머릿 속에서 계획이 서서히 조합되었을 때, 바로 지금……

졸업식이 일 주일을 앞두고 있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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