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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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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0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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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2

DUMMY

"나다크."


네보의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에 나다크는 생글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네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어두운 금색 머리칼이 더 퇴색되어보일까. 만일 이번 대련으로 그가 추락하게 된다면……? 그런 가정을 한 순간 네보의 가슴이 진정되었다.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던 네보는 곧 답을 찾아냈다.

그럴리가 없어.

도저히 나다크가 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의 추측을 부숴버리는 믿음이 깨어났다. 네보는 라이가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영특했다. 그의 이론으로 다져진 정신은 혹시나 하는 사태가 아닌, 지금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결과를 종합했다.


"이기든 지든 넌 손해볼 거 없어."


네보의 말에 나다크가 괴고 있는 고갤 돌렸다. 그의 표정엔 어떤 걱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 그건……


"……너 제트랑 대련한단 건 알고 있어?"

"아."

"아아?"


이 무사태평한 도련님을 어찌해야할까. 네보는 머리가 썩어가는 기분에 관자놀이를 눌러댔다. 괜히 혼자 걱정하고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어느 새 네보는 나다크가 다음에 해야할 행동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제트와의 대련에서 너가 잃은 건 하나도 없어. 이기면 제트와의 라이벌이란 관계를 깨부수고 우위를 점할테고, 지거나 비겨도 제트가 먼저 시비걸었단 사실은 변함이 없어. 그래서 대련에서 제트가 이겨도 걔를 지지할만한 사람은 없을 거야."

"지지? 너 귀족 다 됐다?"


나다크가 피곤한 웃음을 보이며 농을 던졌다. 명백히 말하기도, 듣기도 귀찮단 의미! 그렇지만 네보는 꿋꿋하게 말하였다.


"여기서 나다크, 네가 할 일은 대련 준비에 힘쓰는 거야. 동시에 교관의 가르침에도 열의를 보인다면…… 후우…… 그냥 대련 준비에만 신경써줘."


가르침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늘어지는 얼굴을 보고, 네보는 말을 바꿨다. 그러자 나다크는 알았다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고, 네보는 속으로 깊게 한숨을 뱉었다.














검술 수업이 따로 진행되는 이후로, 모든 조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언제나 긍정적이던 2조는 피블론의 부재 후 침체된 분위기가 조금씩 밝아졌고, 4조는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험악해졌다. 그러나 1조만큼 삭막해진 조는 없었다. 3조장 나다크에게 뒤쳐졌단 생각보단, 검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걷어찬 제트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다. 고의적으로 검술 수업을 거부했단 사실은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었다. 당연히 1조 전원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몇 아이들은 일부러 왜곡하여 그가 나다크에게 뒤쳐졌단 소리를 하고 다녔다.

제트는 아이들의 헛소리를 무시했다.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굳이 해명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그의 안일한 대처는 오해를 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이때부터라도 조치를 했다면 괴랄한 소문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트는 안일하게 넘어갔고, 결국……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구나."


하스본의 말에 로이트는 눈을 꿈뻑거렸다. 아직 퇴원을 하려면 이틀 정도 남은 상황에서 그 말은 제법 곤란한 것이었다. 어쩌면 대련이 벌어지기도 전에 이곳을 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로이트는 자신의 계획을 떠올리며 팔로 배를 감쌌다. 하스본은 그걸 보며 눈썹을 움찔거렸다.


"배가 아픈 거냐?"

"네. 가끔 뱃속에서 통증이……"

"흐음."


하스본은 미심쩍은 눈으로 흘겨보았다가 고갤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입원 기간도 하루 남았으니 그때까지 쉬어라."


로이트는 꾹 감은 눈을 슬쩍 뜨고 눈치를 살폈다. 하스본은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무슨 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혀를 차며 돌아설 뿐이었다. 로이트는 그가 나갈 때까지 끙끙거리다가 다시 침대 주변에 새겨진 룬 문자로 시선을 돌렸다. 조각으로 새겨진 이 문자들은 만지면 시원한 게 있고, 따뜻한 게 있으며, 솜털처럼 보송보송한 것도 있었다. 몸의 회복력을 돕는 것 만큼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알면 알수록 마법이란 것이 신기했지만, 로이트가 주목한 건 역시 마법의 대처 방법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건 렐프가 로이트를 부려먹을 때 자주 쓰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과 로이트 둘중 한 명이 사라졌을 때를 대비한 일을 많이 시켰고, 그것은 곧 업무 과다를 불렀다. 아무튼 만약을 대비한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약간의 조심성이 생겼다. 그 덕분에 엘더 포레스트에서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조심성이 지금의 행동을 일으켰다.

독을 가라앉히는 마법의 힘이 가구에만 발휘되리란 법은 없다. 렘피룬트가 하루 종일 갑옷을 벗지 않는 이유가, 아카데미 내에서 떠도는 말인 기사도 정신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처럼 독을 쓰는 걸 염려하여 독을 없애거나 몸을 회복시키는 마법이 걸렸을 수도 있다.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생각조차 못할 변수였다. 로이트는 입술을 앙 물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의 갑옷에 마법이 걸려있다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눈으로 보고 만지는 게 전부인데, 기사의 물건은 오직 종기사만이 건드릴 수 있었다. 그외의 사람이 건드리는 건 기사의 허락이 있지 않는 한 모독으로 간주하여 결투를 신청할 수 있는 게 기사도이다. 렘피룬트가 미치지 않고서야 로이트에게 갑옷을 맡길 리도 없고, 한 번 보자는 걸 허락해줄 리도 없다. 독 만들기는 둘째 문제다. 가장 큰 장애물인 이것부터 해결하지 않는 이상 렘피룬트를 이길 수 없다.


"음……"


이런 로이트의 고민은 새로운 환자 덕분에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당분간 같이 지내라."


로이트가 있는 방엔 침대가 셋 더 있었는데, 당연히 이 침대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헌데 맞은편 침대에 하스본과 같이 온 파랗게 질린 아이가 누우면서 이제 이 공간은 더 이상 로이트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어쩌다가."

"너처럼 못 먹을 거 분간 못하고 온 건 아니니 걱정마라."


하스본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좀 삐딱했다 생각했는지 아이를 눕히고선 그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지는 이제부터 알아야지.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것이면 신관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마법으로도 치료 못하는 독이 있나요……?"


하스본은 면박을 주려다, 상대가 아이인데다가 마법의 효과를 보고 신봉하는 것이라 여기며 답해주었다.


"넌 모르겠지만 마법이 최고는 아냐. 오히려 독에 관해선 연금술사가 최고지. 마법은 단순히 몇 가지의 독성을 막아줄 뿐이지만, 연금술사는 수천 가지를 대비할 수 있거든. 너도 다행인줄 알거라. 메실리아 독의 해독 공식은 흔하지만 잘 쓰지 않아서 없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혹시 이걸로 독을 미리 막을 순 없나요……?"

"룬 마법으로?"


순간 하스본은 로이트의 상상력이 제법 좋다고 여겼다. 기사 지망생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평면적이어서 치료되고 마는구나, 하고 끝이다. 간혹 몇 머리 좋은 이들은 독을 어디까지 막을 수 있는지만 생각하지, 이걸로 미리 방비한단 생각은 하지 못한다. 왜? 그들은 판금 갑옷이란 값비싼 물건을 손에 쥘 생각도 못할 뿐더러, 룬 마법이란 사치까지 부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귀족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상상. 하스본은 괜히 뿌듯해졌지만, 말은 더할나위 없이 날카롭게 뱉어냈다.


"아까도 말했지만 마법이 최고가 아냐. 물론 어느 정도 대비할 순 있겠지만, 델브라에 있는 독이 얼마나 많은 줄 모르고 하는 소리지. 아마 모든 독을 막으려면 갑옷엔 물론 온몸 뿐만 아니라, 몸 속에도 룬을 새겨야할 걸?"


이런 빛나는 문자를 전신에 새긴단 상상을 한 로이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튼, 마법은 신비한 힘이다. 보통의 방법으론 할 수 없는 모든 걸 할 수 있지. 그렇다고 최고는 아니다. 얼마든지 마법을 대처하고, 뛰어넘을 수단은 넘쳐나니까."


보통 자신의 직책과 관련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하스본은 철저히 분석적으로 자신의 직업을 보았다. 이 부분만 본다면 그가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로이트의 정신은 오직 마법과 독의 관계성에 팔려있었다.


"그러니 너도 조심해라. 룬 갑옷을 입고 설치다가 이렇게 쓰러질 수도 있으니까."

"설치다뇨…… 그놈은 진짜 이상한……"

"뭘 잘했다고 말대답이냐? 1급 학생으로서 4급 학생 앞에서 쓰러진 게 창피하지도 않아? 이 병실은 어지간히 멍청하지 않고서야 안 온단 건 알지?"

"알아요! 안다구요!"


1급 학생 엘키스가 짜증을 부리면서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 했는데 그 이유는 준귀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계급에서 자유로운 곳이라지만, 언제 이 수련 마법사가 선배 기사의 보조 마법사가 될 지 모를 일이고, 놀라운 연구로 더 높은 직위가 되어 짓누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거 참, 실력도 안 좋은게 성질만 드러워서……"

"어떻게 수련마법사님은 용병보다 입이 거칠어요? 그리고 저도 할 말 있다구요! 설마 거기서 만드라고라의 꽃이 있을 줄은……"

"독은 정말 하수 중의 하수가 쓰는 거야. 그건 즉, 독이 무능하고 치졸한 수법이란 소리가 아니라 아주 기본이란 소리지. 너, 돈 주고 급수 올렸지?"


이 말에 엘키스는 찔끔해서 괜히 시선만 옆으로 돌렸다.


"그래도 1급은 제 스스로 올라왔다구요."

"그래서 안되는 거야. 차라리 1급을 돈주고 올라왔으면 모르겠는데, 기초부터 그렇게 돈을 발랐으니 더 클 수가 없는 거야."

"아이씨! 제가 돈주고 오르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하스본은 클클 웃으며 고갤 저었다.


"상관없지. 너희가 돈주고 졸업하든, 뭘 배워 나가든, 그리고 지들끼리 치고박든 나완 상관없는 일이지."

"쳇……"

"아무튼 쉬어라. 교관한텐 내가 말해두지."

"예……"

"그리고 괜히 니 후배 괴롭히지 말고. 불쌍한 놈이니까."


로이트는 코앞에서 자신을 비하했음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이 헐뜯기 위함이 아님을 눈치챘고, 또 그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엘키스가 고갤 옆으로 쭉 빼서 하스본 뒤에 누워있는 로이트를 보았다. 그의 표정엔 위화감이 돌았다. 그건…… 익숙함이었다. 엘키스는 냉큼 제자리에 앉았고, 하스본만 이상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쉬면 나아지겠지, 라며 중얼거린 하스본이 병실을 나갔고, 그때서야 로이트가 엘키스와 제대로 눈을 마주쳤다.


"……어?"


엘키스는 멋쩍은 얼굴로 고갤 돌렸고, 로이트는 멍청한 얼굴로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브렘비는 식은땀을 흘리다 못해 물에 빠지기라도 한듯 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눈앞의 1급 교관은 자신보다 연배도 높고, 기사로서의 명망도 있었기에 그에게 한 번 찍히면 평생 아카데미에서 썩게 되버린다. 침을 꼴깍 삼킨 브렘비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말하였다.


"그…… 대련 준비 때문에 잠깐, 아주 잠깐만 선배께서 졸업식 준비를 맡아주시……"


고갤 슬쩍 든 브렘비는 냉큼 머릴 다시 숙여버렸다. 시뻘개진 얼굴의 선배 기사를 보니 담이 작은 브렘비로선 간이 쪼그라드는 기분에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1급 교관 루컨은 간만에 느끼는 모멸감에 손을 검손잡이 위에서 꼼지락거렸다.


"넌 내가 뒤치다꺼리나 하는 종기사로 보이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루컨의 성난 목소리에 브렘비가 어깨를 움츠리며 간산히 말을 토해냈다.


"그, 그것이 제트와 나다크가 대공가와 백작가이고…… 게다가 렘피룬트께서도……"

"렘피룬트? 끙……"


분노를 쏟아내려던 루컨은 별종 선배의 이름을 듣고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도대체 왜 자처해서 아랫 급수의 교관으로 일하는 건지…… 1급, 2급 교관들로선 아주 고역이었다. 그나마 1급 교관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는 올덤이 있었기에 렘피룬트의 별난 짓거릴 막을 수 있었지, 만일 그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루컨은 헛기침과 함께 분노를 최대한 수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지만 파견 수업을 갔던 1급 학생 중 하나가 부상을 당했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일단 경과는 지켜봐야 해서 그 일을 내가 대신해야해."

"그럼 다른 분께선……"

"글쎄? 근데 웬만하면 렘피룬트 선배의 이름을 팔지 마라. 난 몰라도 다른 녀석들은 대놓고 불쾌해할테니까."

"끙……"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드는 자가 있었다. 듬직한 체격의 이 중년 사내는 겉모습처럼 패도적인 것인지, 등엔 자신의 덩치만한 검을 검집없이 메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위압감에 눌리곤 했다. 루컨과 브렘비는 곧장 굳어져선 머릴 살짝 숙였다.


"무슨 일인가, 루컨?"

"아닙니다 올덤."

"아니긴."


올덤은 루컨을 제치고 브렘비의 앞에 섰다. 성인 남자도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큰 올덤이 바로 앞에 있으니, 브렘비의 소심함이 더욱 빛을 발했다.


"4급 교관이 어찌 우릴 찾아왔지? 또 렘피룬트가 뭘 시키던가?"

"그, 그것이……"


브렘비는 침을 꼴깍 꼴깍 삼켜대며 루컨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올덤은 그 말을 듣고 조금도 기색이 바뀌지 않고 말하였다.


"그 놈은 2급, 3급 교관들을 놔두고…… 우리 1급이 가장 한가해보였나 보군."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기초를 다지며 그때 그때 다른 교육법을 시행해야 하는 4급이 제일 힘들다. 3급과 2급은 교육의 틀이 있기에 비교적 덜 힘들고, 1급부턴 자율적인 수행이 대부분이었기에 가장 일손이 남는다. 아무리 부패한 아카데미라지만 기본적으로 해야하는 일이 있었고, 그 일 대부분을 4급 교관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땅을 다지고 씨앗을 심는 일을 도맡아 해서 그런지 4급 교관은 아카데미 내에서 모두가 기피하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대부분 서열이 낮은 기사들이 도맡아 했다. 그렇기에 올덤과 비슷한 서열의 렘피룬트가 별종이란 소릴 듣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지긋이 바라보는 올덤의 눈빛에, 브렘비는 잔뜩 기가 죽었다. 그래서 자신이 잊고 있던 비장의 한 수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위기 속에서 발휘된 임기응변은 정말 효과적이었다.


"밀레트 도련님이……"

"밀레…… 뭐?"


올덤이 말을 더듬자, 브렘비가 기회를 붙들기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그 대련…… 밀레트 도련님께서 후원하신다고…… 그러니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브렘비는 올덤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워낙 맺고 끊음이 확실한 사람이기에 어정쩡하게 끄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렇게 고민한단 건 고려하고 있단 소리다. 만일 브렘비가 조금이라도 말을 엇나가게 했다면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사적이지 않단 걸 말해주는 '도련님'이란 호칭과 '후원'이란 말이 올덤을 건드렸다.


"그런가?"

"예…… 사실 저희도 어떻게든 하려 했지만…… 라르카 백작 각하가 생각보다 지원금을 많이 주시는 바람에 졸업식 계획이 꼬여버렸습니다……"

"음……!"


올덤은 라르카 백작이 거금을 투자했단 걸 떠올렸다. 아카데미에서 공금 횡령은 흔한 것이었기에 졸업식을 전담한 4급 교관들이 살판이 났단 건 그 윗급 교관들의 부러움을 샀다. 물론 그들에게서 회식이나 선물 같은 것으로 상납금을 받기도 했지만, 직접 돈을 만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올덤이 입맛을 다시자, 브렘비가 냉큼 한 마디 했다.


"그러니 졸업식 진행을 맡아주시는 동안 벌어진 건 전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어차피 저희도 자주 실수를 하니 부담없이 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약삭 빠른 브렘비의 말 속엔 다양한 말이 숨어있었다. 루컨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올덤은 눈치채고 턱을 문지르다 고민하는 체 하더니 고갤 주억거렸다.


"루컨."

"예."

"넌 그대로 하던 걸 해라. 코비드에게 졸업식 준비를 잠깐 맡아달라 하고."

"알겠습니다."

"졸업식이 3일 남았던가? 엘키스 그놈은 왜 졸업식 파티를 앞두고……"

"하하…… 어차피 곧 갈 아이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올덤은 브렘비를 보며 말하였다.


"그럼 이 일은 맡도록 하지. 밀레트 도련님껜 잘 말씀드려라."

"예……"










엘키스는 허약한 외모 만큼이나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약골이었다. 귀족가도 아닌, 기사 출신임에도 그를 인정해주는 아이는 극소수였다. 그리고 그 극소수의 아이 중에 로이트가 있었다. 로이트는 지금의 피블론처럼 살갑게 구는 아이었고, 엘키스는 쉽게 마음을 열었다. 때때로 로이트와 웃고 떠들기도 하고, 함께 다른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딱 그 일이 터진 것이다.

밀레트의 무차별적인 학대.

아이들은 자기도 휘둘릴까봐 로이트에게서 멀어졌고, 엘키스도 그중 하나였다. 같은 4급 학생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1급이 되었고, 둘은 그렇게 사이가 벌어졌다. 아니, 일방적으로 엘키스가 밀쳐낸 것이다. 로이트는 노예 학생이 되기 직전부터 꾸준히 엘키스나 다른 아이에게 말을 걸고 도움을 청했지만 모두가 무시하고 도망쳤다. 심한 경우 몰매를 맞거나 조롱을 당하였다. 결국 로이트는 혼자가 되었고, 같은 기수의 학생들은 서서히 급수가 올라가서 결국 눈이 마주칠 일도 없어지게 됐다.

그런데 하필, 병실에서 단 둘이 만나게 될 줄이야! 엘키스는 그 이후로 무던히 노력했지만 체력적 한계 때문에 뒷돈을 주어 시험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3급이 되고 얼마 안있어서 효과를 봤고, 힘에선 손꼽히는 칸쟈나 에빌러를 상대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기쁨을 만끽하고 1급으로 올라가는 시험은 뒷돈 하나 챙겨주지 않고 도전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당당히 통과해보였다. 루컨 교관의 칭찬에 엘키스는 더 노력했고, 1급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실력파가 될 수 있었다.


"끙."


정말 불안했다. 아이들처럼 손찌검을 하거나 욕하진 않았지만 친하게 지내다 곧장 외면해버린 건 그보다 더한 배신 행위가 될 수 있다. 그걸 잘 아는 소심한 엘키스로선 로이트가 무슨 짓…… 아니, 말만으로도 불편함에 몸서리 칠 것 같았다. 그렇게 눈치를 살펴대기를 얼마, 고민에서 깨어난 로이트가 엘키스를 바로 보았다.


"읏……"

"아."


로이트의 반응도 엘키스와 비슷했다. 그렇게 달갑지도 않고, 불쾌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반응에 엘키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안녕, 로이트."

"엘키스……?"


로이트가 기억하는 엘키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은 그를 당황시키기 충분했다. 비실비실해보이는 겉모습이 어느 새 잘 단련된 몸으로 거듭났고, 음푹 패인 볼은 탄력있게 솟아났으며 힘없는 머리칼은 기름을 발라 넘겨 생기가 있어 보였다. 그야말로 알을 깨고 나온 새나 다름 없었다. 새로 태어난 엘키스를 보는 로이트의 표정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래, 나야……"

"……으응"


어색한 분위기에 엘키스는 머리가 아파왔다. 처음으로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보다 더 난감해서, 입만 우물거리다 한 마디……


"잘 지냈…… 으음……"


잘 지냈을리가 없다. 노예 학생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하크의 예를 들 수 있었다. 그는 아카데미 전 구역을 청소하기 때문에 간혹 상급 학생들과도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학대를 당했다. 그것만으로도 노예 학생에 대한 취급이 어떤지 알 수 있었기에, 방금 그 질문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자책해야 했다.


"잘 지냈어."


그리고 로이트의 담담한 대답은 엘키스의 양심을 찢어놓았다. 그가 소심한 이유는 생각이 많아서이다. 오죽하면 그를 가르쳤던 4급 교관 렘피룬트, 3급 교관 렌디엄, 2급 교관 펜콕스 전부 마음부터 단련시켰겠는가. 만일 그가 의지를 갖고 개인적인 시간에 체력 훈련을 하지 않았다면 1급으로 오르는 데도 돈을 썼을 것이다. 아무튼, 그 많은 생각으로 소심해졌고 동시에 배려심도 있었다. 로이트의 한 마디에 담긴 건 그 어떤 감정도 아닌 배척이었다. 조금도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단 뜻. 엘키스는 입맛만 쩝쩝 다시면서 앉아서 고갤 수그리고 있는 로이트를 보았다. ……눈도 안 마주치는 건가.


"……어쩔 수 없었어."


로이트는 대답이 없었고, 엘키스는 계속 말하였다.


"내가 소심했단 건 알잖아……? 다른 곳도 아니고 라르카 백작가였어…… 나처럼 힘없는 기사 가문이"

"그럼 난?"


첫 대꾸에 엘키스의 정신이 멈춰버렸다.


"뭐……?"

"난? 기사 가문도 아닌 일개 농노 집안인 내가 받은 핍박은?"


입이 몇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다면 모를까, 친하게 지내다 갑자기 마음을 돌린단 건 일종의…… 배신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엘키스였고, 당연히 3급으로 오를 때까지 죄책감으로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이것 때문에 체력 단련이 더 힘들어진 건 물론이다. 그러나 고된 노동과 학대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걸 알 수 없던 로이트로선 엘키스의 변명 아닌 변명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일 로이트가 하크나 고르든과 만난 게 아니었다면 저 말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였겠지만, 이미 철저하게 망가지고 고립되어서 그에게 조금도 문을 열지 않았다.


"너가 뭣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밀레트 그 새끼한테 괴롭힘을 받고 모두에게 외면받을 때 너라도 날 받아줘야 했어. 아니, 최소한 사과라도 했어야지."


엘키스는 로이트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누군가에게 욕설을 내뱉을만큼 극단적이지도 않았고, 목소리에 힘을 줄 만큼 강압적이지도 않았으며 단호하게 찍어내리는 말을 할 만큼 명령적이지도 않았다.

착한 아이.

그것이 로이트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충격을 받은 엘키스로선 이 변화를 알아채기는 커녕, 소심한 머리로 오해를 풀 수 있는 해답을 찾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저 말을 하고서 로이트가 고갤 돌려버렸으니, 엘키스 역시 생각에 잠겨서 병실은 조용해졌다.

엘키스를 다그친 로이트는 그 즉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에겐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독을 만들 재료를 구하는 것과 그 다음으론 렘피룬트에게 독에 대처할 방책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련의 날 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될 터, 그때를 노리면 되겠지만 렘피룬트의 갑옷이나 물품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교관의 숙소는 학생의 숙소와 달리 보안이 철저했고, 병동과의 거리도 멀었다. 독의 재료를 구하고, 렘피룬트에 대한 걸 확인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성공 확률이 가장 높은 것을 선택해야 했기에 로이트로선 후자의 것을 확인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급급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종기사의 역할. 1급 혹은 2급의 학생들은 종기사로서 역할을 수행하거나 그에 대한 걸 배운다. 그래서인지 가끔 교관 중 몇몇이 학생을 데려가 종기사로 부려먹기도 했는데, 기사로 가는 발판이란 거짓에 속은 아이들은 모진 일도 마다하지 않았고 종기사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눈앞의 엘키스에게 의문이 들었다.

그도 종기사인가? 아니면 종기사인 아이와 아는가?


"엘키스."

"어, 어?"


로이트는 이미 엘키스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신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교관님의 갑옷이 어떤 지 알고 있어?"

"갑옷?"


엘키스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로이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그가 아는 모든 정보를 끌어모았고, 대답을 찾아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나올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그로선 로이트의 뒤틀린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종기사들이 잘 알 거야. 혹시 갑옷을 입는 법이 궁금하다면……"

"아니, 그건 됐고."


로이트는 어떻게 말을 돌릴까 생각했다가, 그냥 직설적으로 물었다.


"다른 교관님의 갑옷이 어떤지 궁금해서. 혹시 이 침대처럼 갑옷에도 마법을 썼을까……?"

"마법? 룬…… 마법을 말하는 거야?"

"응."


엘키스는 고민하였고, 로이트는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로이트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졸업식까지 3일, 로이트의 퇴원은 2일, 제트와 나다크의 대련은 1일이 남았을 때였다.


작가의말

조금만 더 지나면 과거 편은 끝납니다! ... 아마도?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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