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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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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8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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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쪽

15 (수정)

DUMMY

그가 시킨대로 시간 끌기는 끝이었다. 삐걱대는 나무 의자를 궁둥이로 비비며 어떻게든 편하게 앉아보려 한다. 하지만 뭘 해도 이 낡아빠진 의자는 제 기능도 못하고 부숴져버릴 것처럼 위태로운 소릴 냈다.


괴인은 과거를 찬찬히 밟아갔다. 지금으로부터 작전을 시행하기 일주일 전, 제국 곳곳을 습격한 몇 년 전, 그와의 첫 대면을 한 20여 년 전…… 그렇게 돌아간 시간 속에서 괴인은 속을 졸이기도 하고, 경쾌하게 웃기도 한 사건들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나다크……"




지금은 리호데 백작의 뒤를 이어 '선구자'란 별칭으로 불리며 수많은 기사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드윙나이츠를 통솔하는 커맨드 나이트가 되어 전장을 누볐다.




"제트……"




위기에 빠진 비하크마 대공을 훌륭하게 보필하며 후계자 위치를 자리매김 한다. 하지만 그 비뚤어져버린 성정이 그를 어떻게 할 지……




"밀레트……"




…… 말이 필요 없다. 그야말로 정말 최고의 말이었으니까. 괴인은 히죽 웃었다.


밀레트는 정말 훌륭할 정도로 로이트를 키워주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렘피룬트를 죽일 궁리를 하겠는가. 독기를 품은 악마는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스스로 커나갔다. 굳이 귀찮게 손을 쓰지 않아도 되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을까!


더군다나 가장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이제껏 훼방꾼인줄 알았던 녀석이 최고의 양분을 던져주었다. 나다크의 그 어리석은 시도는 괴인에겐 두고두고 좋은 술안주가 되었다.


그는 알까.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으며, 렘피룬트의 시신을 훼손하여 추적을 방지하고, 이 모든 걸 계산에 두어 여기까지 이끌었단 사실을! 그걸 알게 된다면 아마 가장 먼저 죽일 것이다. 그것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말이다! 하지만 괴인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나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고, 자신은 자멸하는 로이트를 보며 침묵할테니까.




"큭."




계속 해서 들려오는 폭발음이 노래라도 되는 마냥, 눈을 감고 음미했다. 괴인은 만약에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이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란 상상을 하며 남은 시간을 만끽했다.




























"진짜……?"




보통 이런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발광하거나 진실인지 의심부터 하고 본다. 하지만 로이트의 반응은 이미 알고 있거나, 아니면 추측하고 있던 걸 확신받은 것처럼 그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나다크는 전신이 노곤해지는 걸 느끼며 이마를 덮었다. 너무 빨랐다. 차라리 울며불며 난동을 부리는 쪽이 나았다. 큰 충격으로 찢어진 마음은 다른 생각을 못하게 하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성장하게 해준다. 그런데 로이트는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아픔을 가져오란 듯 담담하게, 아니, 고통을 억누르고 있었다.


위험하다.




"그래."




굳이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기보단 이 사실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곱씹게 해주어야한다. 로이트는 검 닦는 손을 멈췄다. 피는 이미 검에 흥건히 묻었으니 렐프의 난동은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구나."




안 된다. 이래선 안 됐다. 차라리 어머니에 대한 소식부터 얘기했어야 했나? 아니면 이 말을 아예 꺼내지 말았어야 했을가? 그것도 아니면 네보와 상의 했어야……?


앞머리를 헝클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던 나다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이트는 검을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머리쓰는 건 내 취향이 아니야. 나다크가 로이트의 어깨를 두드려주더니 자리를 떠버렸다. 괜히 어정쩡하게 말을 붙이다간 손도 못 댈 정도로 망가져버릴 수도 있었다. 네보나 엘번을 찾아가야 한다. 그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편, 로이트는 차분한 겉모습과는 달리 머릿 속은 난장판이었다.


노예 학생으로서의 3년, 아이들의 괴롭힘, 외로움, 엘더 포레스트에서의 며칠,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카나르, 렘피룬트의 비리, 아버지의 부고


로이트의 두 눈은 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다크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그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다. 귀족은 늘 똑같았고, 그 밑에서 손바닥 비비는 것들 역시 변하지 않았다. 노예 학생으로 산 그 몇 년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회개의 씨앗을 터뜨려버렸다.


로이트는 서서히 타락해갔다.
































정신 시험을 보기까지 몇 달이 남았다. 졸업식과 맞물려서 그런지 조용해야할 수업 시간임에도 아카데미는 어수선했고, 아이들 기분 역시 들떠있었다. 졸업식이 시작되면 아카데미는 문을 열고, 아이들은 그날만큼은 자유롭게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야말로 아카데미를 다니는 보람이 드는 시기라 할 수 있었다.


렘피룬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 시켰다. 그리곤 헛기침 섞인 말과 함께 수업을 시작했다.




"검이란 무엇인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고,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이 단순한 문제에 곧장 자기들이 휘두르는 쇠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몇몇만 제외하고.




"그것은 철과 같은 금속을 가공하여 만든 날붙이의 통칭입니다!"




펠빅이 두꺼운 팔을 들어 자신있게 소리쳤다. 그리고선 네보도 대답을 뜸들였던 걸 답했다며 혼자 좋아라했다. 네보는 고갤 돌려 맛없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표정을 그렸고, 나다크는 그 옆에서 멀뚱히 앞을 보고 있었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검이란……"




렘피룬트가 제트를 가리켰다. 제트는 눈을 끔뻑이다가 답하였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입니다."




렘피룬트가 고갤 끄덕이자, 모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펠빅이 답한 거랑 뭐가 다른가. 그 의문은 렘피룬트의 다음 지목 상대가 답해졌다.


아드였다.




"아드. 넌 고블린과 상대해봤고, 그 위험성까지 겪어봤다. 너에게 있어서 검이란 무엇이냐?"




아드는 홀린 듯이 대답했다.




"제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키는…… 지킬 수 있는…… 힘입니다."


"좋다."




떠듬거리는 말에도 불구하고, 렘피룬트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드는 한숨을 내쉬었고, 펠빅은 콧김을 쉭쉭 뿜었다.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몇 사람들은 눈치챈 것 같지만 아둔한 펠빅은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계속 된 지목에 용기를 얻은 아이들이 하나둘 답을 내놓았고, 비슷하지만 다른 답변이 계속 되면서 펠빅의 인내심은 폭발해버렸다.




"교관님! 제가 말한 답이 다른 놈들이 말한 거랑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생각이야 펠빅과 같은 생각없는 귀족 자제들 모두가 하고 있었다. 다만, 제트나 나다크같은 고위 귀족의 핏줄이 있는 데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던 것인데 생각 없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펠빅이 저질러 준 것이다.


렘피룬트는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펠빅을 바라보며 허리춤에 매여진 검을 손가락으로 톡톡 쳐보였다. 이 단순한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얼추 알아챈 아이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기사가 자신의 검을 건드리는 모습을 보인단 건 상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만큼 얕잡아 본단 소리기도 했다. 고차원적인 도발을 알아들을리 없는 펠빅은 멍청한 얼굴로 렘피룬트를 바라보았고, 그는 한숨 섞인 답을 내주었다.




"네 주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이쯤 되면 대충이라도 눈치채야 하건만, 살이 쪄서 둔감해진 것인지 펠빅의 머리는 둔하기 짝이 없었다.




"네가 말한 건 모두가 아는 뜻이자, 기준점이 되는 지극히 식상한 말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알고 있는 걸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 그건 검술을 찾지 못해서 버둥거리는 기사나 다름없으니까."




명석한 네보는 이 말로 뜻을 알아챘고, 펠빅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르게 태어나듯이, 검도 같은 장인이 만들어도 미세한 차이가 있고 그 검을 휘두르면서 생기는 검로 또한 제각기 다르다. 그 검로를 수 십, 수 백, 수 천 가지를 짜깁기한 검술은 어떨까. 가문에서 전해져오는 검술이라 하더라도 어느 누구는 훌륭하게 선보이고, 어느 누구는 발 끝만도 못한 실력을 보인다."




렘피룬트가 다시 한 번 허리춤에 달린 검의 손잡이를 쳐보였다.




"모든 검술이 만능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검술이라 해도 오점은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한테 맞는 검술이 있다. 가벼운 검, 무거운 검, 빠른 검, 느린 검, 공격적인 검, 수비적인 검, 어지러운 검, 정직한 검…… 하나로 단정짓기엔 많은 사람만큼이나 많은 검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개성이자 자아이기도 하다. 너희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어느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을 꿰뚫어보지 않는 이상, 모두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 그 생각은 아직 어린 그들에게도 깊게 박혀있었다. 아직까지도 옆집 친구가 왜 자신한테 화를 냈는지 모르고, 어째서 그 여자는 자기보다 못난 놈에게 갔는지 몰랐다.




"검술을 배우기 전에 자기 자신을 뚜렷하게 잡아라. 검을 놓친 것만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너희는 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겠나! 그러지도 못할 거면 검술에 대해 이야기 하지 말고 당장 짐을 꾸려라. 그놈은 부엌칼조차 잡을 자격없는 잡배에 불과한 놈이니까!"




혹독하게 다룬 적이 많지만 이런 폭언까지 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렘피룬트의 충격적인 사고 전환 탓에, 그의 변화를 인지하기에 앞서 벅찬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난 내가 가진 검에, 내가 휘두르게 될 검에, 내가 품고 있는 검에 자부심을 느낀다. 부디 너희도 진정한 기사가 되어 이 제국을 빛내주길 바란다. 이상."




환호와 우렁찬 기합이 섞인 인사를 받고 떠나가는 렘피룬트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꿈을 일깨워주고 길을 잡아주는 선지자이자, 뛰어난 교육자였다. 하나같이, 더 빛날 수 없을만큼 맑은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단 한 명…… 로이트를 제외하곤.
































"날이 갈수록 말씀이 유창해지시는 거 같습니다."




삐딱하게 기대어있는 밀레트가 렘피룬트를 반겨주었다. 한창 바빠야할 졸업식의 주인공이 왜 여기에 있을까. 의문스러워하는 렘피룬트에게 밀레트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저희야 돈이나 대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해주니, 되려 우리가 한가하더라구요."


​"흠."




​이곳의 교관인만큼 썩어빠진 실상을 알고있는 렘피룬트가 수긍의 뜻을 보였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특히나 거부 중의 거부인 라르카 백작의 자제이니 뜯어먹을게 많아 보였나보다. 물론 그걸 대놓고 드러내는 멍청이는 없겠지.


렘피룬트가 숨을 탁 내쉬면서 그를 지나쳐갔다. 밀레트는 그의 뒤를 자연스럽게 뒤따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요즘 들어 제 실력이 많이 무뎌진 거 같아요. 교관님도 말하셨잖아요? 검은 틈틈이 닦아주고 날을 갈아주지 않으면 쇠몽둥이가 되버린다고."


"스스로 닦는 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하! 괜히 어정쩡한 솜씨로 그런 짓을 했다가 실수라도 하는 날엔…… 상상도 하기 싫네요."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두 방향으로 놀랄 것이다. 하나는 이 아카데미의 사람들. 어째서 앞날이 창창한 가문의 후계자가 한낱 교관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표하다니. 두 사람의 입지가 바뀐게 아닐까, 하는 몹시 이질적인 상황이었다.


다른 하나는 밀레트를 잘 아는 사람들. 라이가스나 헤스타였다. 그가 여자 이외에 이렇게 능글맞게 굴며 들러붙다니?


렘피룬트가 어떻게 나오건 제 말만 해대는 모습이, 마치 허공에 대고 구애를 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웠다. 렘피룬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옮겨오더니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 검술이 너에게 맞는단 보장이 없다. 오히려 삐걱거리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어."




밀레트는 그저 사람좋게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어차피 졸업하고 검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잡지 못하게 되는 거, 알잖아요? 아버지께서 상단을 물려주고 수업까지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검술이 그리워질 거에요."




원없이. 즐기다 가고 싶단 뜻이었다.


렘피룬트는 근 몇 년 동안 그를 가르치면서 밀레트에게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의 검술이 밀레트에게 맞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그에겐 재능이 없었다. 조금의, 아주 약간의 가능성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부적으로 기사가 못될 몸이었지만, 렘피룬트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계속 돌려서 말해주었다. 당연히 밀레트는 개의치 않고 개인적인 가르침을 청하였고, 그의 배경이 조금 두려워 검술을 가르쳐주던 렘피룬트가 점점 그에게 감화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더 이상 고위귀족의 자제로 대하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밀레트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깊게 박힐 때쯤, 렘피룬트가 그의 상태를 눈치챘다. 자신이 뭔가 하려드니 그가 막다니. 수업 시간엔 여자와 농땡이를 치면서, 정작 쉬어야할 시간에 노력을 기울이는 그 모습에 감명받던 그가 되려 절망을 느꼈다.


​처음으로 편견을 내려놓은 제자. 이 썩어 문드러진 곳에서 발견한 원석이 고작 돌멩이에 불과했다니! 하지만 렘피룬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검술 뿐만 아니라 같은 교관들의 검술을 갖다 붙이면서 그에게 맞는 걸 찾아다녔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오죽하면 지금 입학한 아이들 중 아무나 데려와도 밀레트보다 뛰어날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을까. 이런 시도가 빈번해지다보니, 밀레트도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했고, 이 불편한 관계는 1년을 더 지속하게 되었다.


렘피룬트는 혹시, 하는 일말의 희망 때문에…… 밀레트는 이제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게 될 검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었기에 시간이 날 때마다 이 비밀 수업이 시작되었다.




"후……"




렘피룬트가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밀레트와 함께 아카데미에서도 사람이 잘 찾질 않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밀레트가 밤마다 즐겨 쓰는 곳이기도 했다.




"이번 검술식은 솔턴 남작이 즐겨쓰는 것으로, 특이하게 검면을 주로 이용하는……"


































'가식적인 새끼.'




아이들을 뒤로 하고 연무장을 나선 렘피룬트의 등을, 로이트의 따가운 시선이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정말 살벌하게 그지 없었다. 시선만으로도 난도질할 것 같은 눈으로, 로이트는 끝없이 적개심을 키우고 있었다.




'사기꾼. 넌 모두를 속인 사기꾼이야. 심지어 자신이 들고있는 검마저 속여 더럽히는 추잡한 새끼. 낭설로 우리를 속이고 얻는게 뭐지? 대체 넌 뭘 위해 우리를 멍청이로 만드는 거지?"




그의 물음은 렘피룬트가 사라지고도 계속 되었다.




'악마. 살인마. 쓰레기. 넌 존재해선 안 돼. 아무 이유없이 날 핍박하고,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 나의 가족을…… 내 모든 것을 앗아갔어. 넌 기사가 아니야. 넌 가짜야. 결코 우리 아버지가 원하던 기사가 아니야. 근데 왜 모두가 환호하는거야!'




이를 악문 로이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는 모습에, 나다크와 제트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그때 알아봐줄 걸 그랬나, 하는 제트의 여유로운 생각과는 달리 나다크는 인상을 구기며 네보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 엉?"


"내가 실수를 한 거 같은데 말이야."




훗날 '조언자'라 불리게 될 네보의 첫 행보는 나다크의 상담으로 시작되었다.


네보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나다크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이트란 특이한 노예 학생을 눈여겨 봤다는 점. 엘더 포레스트에서 나갈 때 그가 보이지 않아 자신의 가문의 기사단을 시켜 그를 찾게한 점, 그리고 제트와의 다툼을 우연히 엿듣고 그의 가족을 수소문해본 점…… 모든 걸 털어놓았다.


이건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남작가의 자제라지만, 네보는 아직 장남일 뿐 후계자로서 정식으로 지목받지 않았다. 운이 없으면 양자가 그의 자리를 뺏을 수도 있는 일이었고, 그 말은 즉, 탄탄한 길이 보장된 나다크와는 달리 네보는 평민이 될 수도 있는 불안한 위치였다. 헌데 나다크는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지 기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자신의 정보를 숨김없이 드러냈고, 네보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였다.


그 진심이 통한 것일까, 네보는 나다크의 마지막 실수를 눈치채고 거리낌 없이 지적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리는게 맞는 거 같아. 솔직히 로이트가 어떤 정신으로 이곳에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일반 평민의 수준과는 확연히 다를 거야. 그야말로 좋은 걸 기대하고 로박스(상자로 하는 도박 게임)를 열어보는 거랑 똑같아. 내용물이 어떤지, 이걸 열었을 때 어떤 손해가 오는지 철저히 계산하고 움직였어도 모자랐는데…… 너무 경솔했어."




네보의 말에 나다크의 눈이 흔들림 없이 허공을 보았다. 네보는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정보를 듣고도 침착하게,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적어도 걔가 이상한 생각을 갖지 않길 바라야지. 최고의 수는 로이트 그 애가 복수심은 커녕, 아무런 감정없이 지내는 것. 그 다음으로 좋은 수는 복수는 생각하되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는 것. 마지막 수는 아무리 발악하여도 머리도 몸도 뒷받침해주지 않아서, 복수를 하지 못하는 거야."




나다크는 그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파악했다.




"최악의 수는?"




그것마저 가정한 걸 눈치챈 나다크의 물음에, 네보는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정말 만약에…… 만약이지만…… 걔가 복수를 생각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하게 준비하여 성공하는 거야."




그 대목에서 나다크는 잠깐 소름이 끼쳤다. 준비된 기사조차 살아남기 힘든 엘더 포레스트에서 홀로 빠져나온 녀석인데……? 네보의 말에 혹시나 싶었던 마음이, 설마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조금씩 변하는 나다크의 표정을 보고서, 네보가 조심스레 물었다.




"왜……? 가능성이 있어……?"




나다크는 고민했다. 짧은 세월이지만 몬스터와 싸우면서 얻어낸 자신의 감을 믿을 것인지, 또 그걸 네보에게 얘기해야할지 생각했다. 설마. 나다크의 깊은 생각은 조금씩 희미해져갔고, 결국 네보에게 고갤 저어보였다.


만일 이때 나다크가 한 번만 더 생각하여 네보에게 말했더라면, 그리고 그에게서 약간의 도움이라도 구했더라면……

























"굉장하지 않아?"




눈을 빛내며 묻는 보에르를 보며, 피블론은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얼추 머리가 자란 피블론이 듣기에도 그럴싸한 말이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심지어 라인조차 들뜬 기세를 감추기 위해 표정을 굳히고 있었으니, 사실을 얘기해줄까 고민하던 피블론이 그저 고갤 끄덕이며 수긍해주었다.




"​그러네. 기사들은 전부 목이 뻣뻣할줄 알았는데 말이야."




제법 깊이 있는 말이지만 그걸 알아들을 아이는 별로 없었기에, 그저 ​긍정해주었단 사실만 이해하고 저들끼리 재잘거렸다.




'그냥 자기가 책임지지 않겠단 말이나 다름없는데 말이지.'




그 생각을 속으로 삼킨 피블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과 같이 표정이 그렇게 좋지 않은 아이는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소수의 아이 중 로이트가 있단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저 애가 그렇게 생각이 깊었나? 하지만 그 생각은 노예 학생이란 그의 위치 때문에 금방 잊혀졌다. 아마 이 비슷한 얘기를 여러 번 듣고, 그 허점을 찾아냈거나 렘피룬트란 사람에 대한 악의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피블론은 슬쩍 자신이 눈여겨 본 아이 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저번에 엘더 포레스트에서 펠빅의 횡포를 경험한 토르크였다. 애초에 강직한 성정인 그지만, 돈과 작위의 힘에 굴복할줄 아는 현실적인 그였기에 세상을 꿈으로 젖어서 보지만은 않았다. 그랬기에 렘피룬트의 말에 역설을 눈치채고 표정을 굳힌 것이다.


예상대로 토르크는 피블론의 말에 애매하게 동조를 했고, 그걸 눈치챈 피블론은 다음 아이들을 보다가 포기하였다. 둘은 고위귀족가의 자제요, 다른 하나는 고르든이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높은 신분의 조장 제트가 있는 1조여서 숨죽이고 있을 뿐이지, 뒷골목 출신의 아이들이 얼마나 사나운지는 평민 아이들이 더 잘 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족보다 눈 앞의 불량배가 훨씬 무서운 법이니까!


​​​​고르든은 은은하게 미소를 피우며 피블론을 보았다. 그의 시선을 진즉에 알아챈 것이다. 피블론은 애써 웃어보이며 고갤 돌렸고, 더 이상 이 자리에 제정신인 아이가 없단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놈이네.'




아카데미에 들어설 때부터 그는 잠자코 있었다. 마치 자신은 뒷골목 출신이 아니고, 설사 그게 들통나더라도 조용히 기사의 작위를 위해 왔다는 모습을 보이려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그에 대해 모두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몇 평민 아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지레 겁을 먹어 소문이 돌았을 뿐이다.


그는 계속 지켜보았다. 좀 힘들지만 악과 깡으로 뭉쳐진 그에게 아카데미의 단련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하루 네 번의 식사는 물론, 따뜻한 잠자리와 충분한 입을 것들은 이곳이 지상 낙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엘더 포레스트에서 고블린과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하품이 나올만큼, 아르마란 녀석은 덜덜 떨면서 난쟁이 괴물을 상대로 고전하였다. 지루한 싸움을 지켜보며 고르든의 기분은 점점 느긋해졌고, 결국 그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이 생길 정도로 빈틈이 많아졌다.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길거리에서 자신에게 찍 소리도 못할 것들이 말을 걸고, 친한 척 해도 고르든은 소문이 가짜라고 말하듯 친절하게 답을 해주었다.


지루하다. 심심하다. 치고받고 하는 일상을 지내온 고르든에겐 사고를 치지 않으면 심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저지를까? 아냐, 분명 '대가리'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아카데미에 다녀오라고 했었어. 여기서 사고를 쳐서 노예학생이 되거나 쫓겨났다간 립키스처럼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할 거야. 그러고보니 빵집 아줌마랑 루던 아저씨도 뼈가 박살났었지?


고르든은 단조로운 생각을 하며 로이트를 지켜보다 피블론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자신을 지켜본 이유도 궁금하거니와, 왜 '저런 부류'가 이곳에 들어왔는지 알아야 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으며 건들건들, 고르든은 피블론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렘피룬트의 연설 섞인 교육이 끝나고 그 자리에 있던 학생들이 저마다의 꿈을 품고 흩어졌다. 누구는 그의 말을 수긍하며 자신의 검을 찾으려 했고, 누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철저하게 부정했다. 또 누구는 그럴싸한 말이라고 생각하며 거짓이라 믿었고, 누구는 아무 생각없이 자리를 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렘피룬트가 51기부터 현 기수인 64기까지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최초로 돌발상황이라 할 수 있는 교육 외의 말을 던졌고, 이 일로 인하여 아카데미는 물론 포스티어 제국이 흔들리는 진원이 되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렘피룬트도 아니요, 도망치고 있는 알카드마도 아니고, 귀족들도, 하늘에 떠있는 핏빛 카나르도 아니었으니…….




"불길하구나."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몇 개 없는 이를 덜덜 떨고 있는 초로의 노인 옆엔 밤하늘과 비슷한 검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앉아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할머니?"


"아무래도 불길해. 포스티어가 전쟁을 벌이기 전 날에도, 왕국의 마법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전 날에도 카나르는 붉었다."


"예. 델브라에 전하는 신의 경고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방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데……"


"아냐."




노인은 병에 걸린 것마냥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소녀는 그제야 무엇이 문제인지 알아챘다. 카나르가 너무 긴 시간 동안 붉게 물들어 있던 것이다.




"그게 아니야…… 이건 너무 심해…… 넌 보이지 않느냐, 샤드야? 카나르에 머무른 저 미친 마나의 빛이!!"




정신병에 걸린 것처럼 외쳐대는 노인의 모습이건만, 샤드라고 불린 소녀는 침착했다. 왜냐하면 노인은 치매에 걸릴만큼 정신력이 약하지도 않거니와, 드리온 가(家)에서도 결코 함부로 하지 못할 장로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옳다하면 옳은 것이고, 그르다 하면 그른 것이다. 그만큼 장로 마법사…… '세이지'의 자리는 컸다.


노인은 샤드가 눈에 힘을 주고 카나르를 보지만 전혀 이상함을 못 느꼈단 걸 알고서 연이어 말하였다.




"아아……! 샤드야, 넌 알아두거라. 카나르는 결코 다섯 날 이상 붉은 빛을 뿌리지 않는단다. 그 지독한 통일전쟁이란 포스티어의 만행도 세 날밖에 비추지 않았어! 헌데 보거라 샤드야. 저 미친 마나에 물든, 실성한 카나르가 얼마나 많은 빛을 뿌리는지! 아아아……! 도망쳐야 한다 샤드야. 델브라에 저주가 내린 것이다. 이건 절대 적은 피가 아니야. 대륙을 잠기게 하려고 하는 게야!!"




노인의 발작같은 말이 심해지자, 샤드는 근처의 어른들을 불러왔다. 그중엔 샤드의 아버지도 있었고, 그의 호위기사도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머님? 대체 무슨 일이기에……"




샤드는 귓속말로 카나르에 대한 설명을 했고, 샤드의 아버지 미트리온은 심각한 표정으로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저 붉은빛은 날이 갈수록 색이 농염해지고 있었다. 마치 이 대륙을 유혹하기라도 하듯, 음험한 색을 흩뿌리고 있었다.




"피가 짙어졌어…… 카나르가 피에 물들었다……! 리온아, 사람들을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가거라! 저 빛은 우리에게도 미친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빛이야……! 조금이라도 적은 피를 흘려야 한다…… 리온아, 샤드와 함께 저 멀리 달아나거라!!"




노인의 광적인 외침은 계속 되었고, 미트리온은 진중한 눈빛으로 고갤 끄덕였다. 그녀의 예언이 왕국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미신이라며 대처하지 않았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걸었다. 이미 한 차례 실수를 한 미트리온은 두 번의 실수를 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님은……?"




분명 그녀는 자신을 언급하지 않았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말이란 황금과도 같은 것. 하지 않은 것과 못한 것은 차이가 있었다.


노인은 미트리온의 눈썰미에 쉰소리를 냈다.




"난 여기서 더 지켜보겠다. 저 피에 젖은 달이 누굴 비추는지, 어디에 빛을 뿌릴지 지켜보겠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막아내겠다!"




남겠단 소리다. 미트리온은 눈을 감았고, 샤드는 울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미트리온은 샤드의 작은 어깨를 두들겨주며 그녀와 함께 돌아섰다.




"예…… 그럼 리어센 경과 포브리어 경을 두고 가겠습니다. 몸조심하시길……"




그렇게 사람들과 물러나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노인 샤크노바가 달을 올려다보았다.




"부디 저 빛이 우리를 비추질 않기를……"


작가의말

끝부분을 조금 손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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