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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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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5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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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23

DUMMY

종기사 베린.

2급 학생으로, 로널드 교관을 보조하고 있다. 보통 그의 검이나 갑옷을 손질하거나 그를 대신하여 일지를 기록하는 잡일이 대부분이다. 그런 그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 찾아왔다.


"이봐, 베린."


로널드의 부름에 그가 간 곳은 교관의 숙소였다. 학생의 숙소와는 달리 건물이 좀 더 깨끗했고, 시설도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할 새도 없이 어느 교관의 방에 들어서게 됐다.


"왔습니다, 선배."

"음?"


그곳에 있는 건 베린도 거쳐왔던 교관 중 하나였던 렘피룬트였다. 아카데미 생활을 하면서 렘피룬트가 갑옷을 벗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얇은 셔츠와 간편한 바지만을 입은 모습이라니, 4급 학생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얼빠져있는 베린의 등을, 로널드가 힘차게 후려치더니 렘피룬트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얘가 갑옷 손질 하나는 끝내주니, 정비를 맡기면 될 겁니다."

"……대장장이를 시키면 될 일을."


로널드가 발 옆으로 툭툭, 발등을 치자 정신을 차린 베린이 두 팔을 가지런히 세우며 말했다.


"단순히 벌어지기만 한 것이라면 제가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닦는 것도 자신 있습니다."


렘피룬트의 덤덤한 눈빛이 베린을 훑었다. 그가 우선적으로 본 건 골격. 그 다음으로 뼈에 걸맞는 체격을 가졌는지 확인하였고, 마지막으로 상처투성이인 손바닥을 보고 고갤 돌렸다.


"부탁하지."

"네!"


로널드는 끝나면 찾아오라고 말하였고, 렘피룬트는 앉은 자세로 바닥을 보고만 있었다. 베린은 그를 곁눈질 하며 마네킹에 걸린 갑옷에서 손상된 부분을 찾아냈다. 우측 견갑과 흉갑, 즉 어깨와 가슴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살짝 들려 있었다. 가만히 서있는다면 모를까, 검을 움직이는 도중이라면 틈이 그대로 노출될 부분이었다. 베린은 전투로 벌어지기엔 비상식적인 손상에 의문을 품기보단 렘피룬트가 무엇을 하는 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퉁퉁, 나무 망치로 조심히 들려진 부분을 두드리며 조금씩 원래 모습을 만드는 동안, 렘피룬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렘피룬트는 바닥을 보는 자세로 가만히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인내심에 베린은 감탄했다.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신도 엉덩이가 배기고 몸이 근질근질한데……. 그리고 어느 정도 펴졌다 생각됐을 땐, 마른 헝겊으로 갑옷의 상의부터 구석구석을 닦기 시작했다.


"응……?"


쇠부분의 광택이 끝나고, 갑옷 내부를 청소하려던 베린은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로널드 교관의 갑옷 안쪽엔 가죽이 최고급일 뿐만 아니라 빛을 내는 글자가 잔뜩 있었다. 그 기이한 글자 때문인진 몰라도 갑옷 안쪽에 손을 넣었을 땐 피부에 닿는 공기가 매우 쾌적했다. 그런데 렘피룬트의 갑옷엔 그런 게 없었다. 완충 역할을 해주는 가죽은 잔뜩 해졌고, 어떤 글자도 쓰여있지 않았다.


"이상한가?"


렘피룬트의 첫 마디였다. 베린은 멍청히 있다가 고갤 끄덕였다.


"모든 기사들은 갑옷에 룬 문자를 새겨넣는다. 몸을 쾌적하게 해주고, 독을 막아주며, 상처가 빨리 낫게 하고, 더 견고해지지. 무게도 더 가벼워지고 조금이지만 힘도 강해진다. 값이 조금 비싸지만 누구라도 더 좋은 걸 택하지."


그가 일어났다. 베린은 나무 의자에 앉아서가 아니라, 정말 그의 덩치가 크다고 생각했다. 흉터가 사라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팔뚝과 떡 벌어진 어깨, 셔츠가 살짝 들릴 정도로 단련된 가슴, 힘이 축적되어 있는 듯한 허벅지와 종아리…… 그에게서 약한 부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흠을 꼽자면 굳게 다문 입으로 만들어진 표정, 그것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눈이었다. 감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눈빛은 렘피룬트 같은 강자가 가져선 안될 눈이었다.


"충분한 돈이 있음에도 그런 개조는 물론 녹슨 그대로 두는 사람도 있지. 검소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실력있는 대장장이를 알선받지 못한 것도 아냐. 검은 항상 빛이 나게 닦고, 이가 빠지지 않으니까. 그러면 왜 그들은 낡은 갑옷에 전전할까?"


렘피룬트의 교육은 아주 특이했다. 그에게서 배움을 받았던 모든 상급 학생의 얘기가 일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단 걸로 설명이 되지 않을까. 어떤 때는 과묵하게, 어떤 때는 틀에 박힌 가르침으로, 또 어떤 때는 누구보다 구체적이게 어느 때는 정말 희미하게 말한다. 그야말로 들쑥날쑥, 그리고 다행히 베린은 렘피룬트에게서 선문답을 듣고, 스스로 파헤치는 교육을 들어보았기에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다.


"신념 때문입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고, 베린이 자신의 추측을 이어나갔다.


"제가 알기론 룬 마법이 성행한 것이 백 년도 안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검의 역사만큼이나 긴 마법의 역사치곤 짧은 편이죠. 그리고 마법으로 물질에 특이성을 부여하는 건 훨씬 더 짧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몇 기사들의 시점에선…… 갑옷을 강하게 만드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라 여길 거 같습니다."

"그래."


렘피룬트는 만족하는 건지 희미하게 웃었다.


"옛 의지의 계승이라고 거창하게 떠들지만, 그냥 늙은이들의 외고집일 뿐이지."


베린으로선 참으로 낯선 경험이었다. 밖에선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선 기사의 표본이라 불리는 그의 입에서 이런 회의적인 말이 나올 줄이야. 어떤 때도 갑옷을 벗지 않던 그의 몸을 보고, 갑옷의 비밀까지 알고…… 하루 동안 자랑거리가 몇 개나 나왔을까. 베린은 이 날 있었던 이야기를 동급생들 중 친한 몇몇에게 떠벌렸고, 1급 학생이 된 지금도 적은 이들에게 렘피룬트의 일화를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그 학생 중 한 명이 엘키스였고, 그는 이 일화를 예로 갑옷에 마법을 거는 경우를 설명해주었다.


'됐어.'


로이트는 원하는 걸 들은 뒤로 엘키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렘피룬트 역시 외고집이다. 1년이란 기간 동안 그가 갑옷을 바꾸진 않았으리라. 이 아카데미에 갇힌 그날부터 지금까지, 그의 갑옷의 외견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렇단 건 지금도 마법이 걸려있지 않단 것!

두 난제 중 하나가 풀렸다. 이제 남은 건 어떻게든 독을 완성시키는 것! 그렇게 되면 렘피룬트를 죽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회의감이 들었다. 분명 그가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죽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원수나 다름없는 놈인데…… 내가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요 근래 보이지 않았던 심성이 깨어났다.

살인.

발작적으로 일어났던 그의 광기가 잠깐이나마 잠들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머리가 식은 로이트가 주절주절 떠드는 엘키스를 바라보았다.


"엘키스."

"응?"


이번에도 말이 끊겼지만 엘키스는 전혀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다른 애들은…… 잘 있어……?"

"아."


엘키스의 머릿 속에서 떠오른 건 몇몇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누가 가장 로이트의 관심을 끌까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짚이는 아이가 없어서 생각나는대로 말하였다.


"너처럼 밀밭 출신인 에빌러는 1급 진급에 실패해서 재심사 준비 중이야. 콘소드는 도중에 다른 귀족이 채용해갔고, 칸쟈나 볼리도 나처럼 1급 학생으로 지금은 파견 수업 중이야. 나야 멍청하게 실수를 해서 돌아왔지만……"

"파견 수업이라면…… 어디로?"

"리스톨스 평원. 북동쪽에 있다고만 들었어."

"엘더 포레스트와 반대 방향이네. ……넌 어디로 갔었어?"


엘키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하였다.


"엘더 포레스트."













"괜찮으냐."


나다크는 수정구에서 피어오르는 목소리에 괜찮다고 대답하였다. 제국의 모두가 기사 중의 기사인 리호데 백작이 엄격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정하다. 주기적으로 연락을 넣기 위해 제 2기사단장과 몇 기사들을 차출보내고, 정식 마법사까지 붙여주었다. 물론 나다크는 그들을 연락망으로만 쓰지 않고, 개인적인 이유로 부렸고 그들도 가만히 있는 것이 좀이 쑤셔서 흔쾌히 받아들였다.


"예. 그보다 엔소닉 경 외의 다른 기사들을 파견하셨습니까?"


잠시 후 그의 음성이 울렸다.


"소드윙 나이츠 2단의 일부만 보냈다. 그 외의 더 보낸 기사는 없다."

"그렇습니까. 혹시나 해서 여쭤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잘 계십니까?"

"그래. 헌데 틈만 나면 네가 보고 싶다고 보채니, 내 검보다 내 몸이 먼저 녹이 슬겠더구나."

"하하……"


개인적인 얘기가 오고 간 뒤, 마법이 끊어졌다. 나다크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더 하실 말이라도 있었습니까?"


엘번이 푸른 로브를 여미며 물었고, 나다크는 고갤 저었다.


"엔소닉 경."

"예."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갈로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고갤 숙였다.


"분명 인장이 없는 기사라 하였지?"

"예."

"…… 지금 여유가 있는 기사가 누가 있지?"

"케플리쉬와 아르단테, 리스톤입니다."


나다크가 잠시 고민하였다.


"리안 경과 플리언 경은 대기하고, 디엘러 경이 그 수상한 기사를 감시하라 전하라. 무슨 일이 생기면 대기 중인 나머지 둘에게 말하고, 수상한 움직임이 보여도 마찬가지다. 결코 단독 행동은 하지 말라고 당부하라."

"네."


갈로스는 곧장 밖으로 나왔고, 엘번은 잠시 기다렸다가 물었다.


"다른 귀족 자제가 데리고 있는 기사일 겁니다. 너무 신경쓰지 마시지요."

"아닙니다, 엘번. 저도 반란군들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죠."

"흠……"

"어차피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어도 큰 피해는 없을 겁니다. 그가 다크나이트나 어쎄신이 아닌 이상 소드윙 나이츠를 전면에서 꺾을 수 있는 기사는 없습니다."


나다크의 자신감은 수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다. 결코 측정하지도 못하는 자만심도 아니요, 스스로가 훌륭하다 생각해서 나온다는 오만함도 아니었다. 그걸 한눈에 알아본 엘번은 절로 고개가 숙여질 뻔했다. 리호데 백작에게 등용된지 수십 년, 그의 광활한 포용력과 이해심에 진심으로 굴복하였다. 그런데 나다크는 아직 어린 데도 아비의 모습을 품고 있었다.

그는 멀지 않은 미래에 나다크가 '지도자'가 되리라 여겼고, 자신의 제자에게 그를 일찍 섬기라고 충고하리라 마음먹었다.











"검술 수업은 어때?"


검을 휘두르고 있는 보에르 옆에서, 라인이 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네보는 옆에서 책을 읽다 말고 들어온 질문에 고갤 꺾었다.


"난 안 배워."

"엉?"


네보의 말에 보에르와 라인이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 기껏 따낸 검술 수업의 기회인데, 배움을 좋아하는 네보가 안 배운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네보가 답을 주었다.


"나중에 나다크가 가르쳐주기로 했어. 교관님의 검술은 나랑 안맞는대."

"검술이 맞고 안맞고도 있어?"

"……나다크가 그랬다니 그러지 않을까."


라인의 말에 보에르가 말하였고, 네보는 고갤 저었다.


"사람이 저마다 다르잖아. 그런 만큼 검술도 다양해. 예를 들어…… 음, 보에르 넌 어떤 검술을 배우고 싶어?"

"난, 음…… 내 몸을 지킬만한 검술……"

"흥, 그래서 넌 안되는 거야. 난 적을 한 번에 쓰러뜨릴만큼 강한 검술을 원해!"


네보는 두 사람의 말에 입을 우물거리며 자기가 할 말을 정리했다.


"보에르가 원하는 검술은 방어를 주로 하는 것이고, 라인이 원하는 건 공격적인 성향이 짙어. 자, 봐. 같은 마을 친구인데도 원하는 성격이 다르지? 그리고 그만큼 검술도 다양해. 저번에 렘피룬트 교관님이 말하셨잖아? 자기한테 맞는 검술이 있다고."


그 말에 보에르는 고민하다 손뼉을 쳤고, 라인은 멍청한 표정으로 얼이 나갔다.


"끙…… 아무튼 누구나 자기한테 맞는 검술이 있다고 말하셨어. 나다크는 내 몸을 보곤 다소 유연한 검술이 필요하다 했는데, 사실 나도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어. 아, 혹시 너희 둘에게도 조언해주지 않을까? 알아들을진 모르겠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낫잖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다크가 나타났고, 네보는 방금 일을 설명해주었다. 나다크는 보에르를 위아래로 훑어보여 말했다.


"방어적인 검술…… 좋은 선택이야.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 있지."


보에르가 눈을 깜빡였다.


"막는 것보단 피하는 게 좋고, 피하는 것보단 반격하는 게 좋지. 이해하기 힘들게 말했는데, 보에르 넌 라인에 비해서 힘이 약해. 대신 꾸준한 단련으로 몸이 날렵하지. 자."


나다크가 보에르의 턱 밑으로 주먹을 내뻗었다. 라인은 뒤늦게 놀라서 입을 벌렸고, 네보 역시 한 발 늦게 반응했다. 나다크는 반댓손으로 보에르의 턱과 손을 가리켰다.


"라인이랑 네보보다 너의 반응이 훨씬 빨라. 거기다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뻗으려 했지? 마을에서 자주 괴롭힘 당했었나봐?"


마지막 말에 라인이 목에 힘줄을 뽑았고, 보에르는 그저 웃어보였다.


"아무튼 넌 이걸 잘 살려야 해. 물론 힘도 중요하지만, 지금 너에게 절실한 건 기술이야. 방금 막기보단 피하기, 피하기보단 반격이랬지? 막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중 힘이 대부분이야. 피하기는 힘보단 기술이 많이 차지하지. 그리고 반격은 이 둘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뤄야해. 가령……"


나다크가 네보의 이마를 주먹으로 툭 때렸다. 네보가 끙끙 거렸지만 아랑곳 않고 그의 머릴 잡고 주먹을 갖다대며 말했다.


"맞기 직전에 힘을 주며, 좀 더 앞으로 나아가면 그 피해가 훨씬 줄어들어. 물론 어정쩡하게 힘을 주면 더 큰 피해를 입으니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단 거야. 상대의 힘을 압도할만큼 강한 힘이 있다면 그걸 무시해도 되지만……. 비슷한 경우로 방패를 이용한 방어가 있어. 내가 아까 말한 방법대로 하면 상대는 공격하려던 힘을 일부 돌려받아서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약간의 피해를 받지."


그러다 손을 쥐었다 펴며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목검이 있으면 설명하기 쉬운데, 아무튼 이렇게 바로 앞에서 부딪치며 막는 게 기본 방어야. 피하는 건 말 그대로 보고 피하면 되지. 반격은 방어 혹은 회피 이후에 이어지는 공격이야. 이건 보에르같은 기술에 치중된 기사가 같은 부류를 상대할 때 반드시 숙달해야 해. 라인같은 무식한…… 힘있는 기사의 경우 공격을 이어나가기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기술에 치중된 기사는 아냐. 한 번 공격을 점하면 십수 가지의 상황에도 대처하도록 단련되어 있어서 방어든 회피든 계속 공격해나갈 수 있어."

"어려워……"

"뭐, 일단 그렇게만 알아두면 돼. 그 셋 중 전부 혹은 하나만 완성해도 넌 충분히 강해질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되도록 기술을 위주로 연마하란 소리지. 나뭇가지 하나로 검을 든 도적을 상대로 이긴 예를 알고 있어?"


그 말에 보에르와 라인이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네보가 설명해주었다.


"비커드 자작이 벌였던 일화야. 2년 전 그는 솔턴 남작가의 가신이었는데, 이웃 영지를 여행하다 도적떼의 습격을 받은 거야. 두목이 검을 들고 있었고, 나머진 돌팔매나 돌도끼 같은 걸 들고 있었지. 하필 그때가 비커드 자작이 기사로서 영주에게 검을 하사받기 전이었고, 혼자 다니길 좋아해서 수행 인원도 없어서 검이 없었지. 그때 비커드 남작이 주워들은 건 조금 굵은 나뭇가지였어."


라인은 대번에 상황을 이해했다.


"나머진 다 쓰러뜨렸는데 검에 나뭇가지가 잘려서 주먹으로 때려눕혔지?"

"아니."

"에이씨……"

"그 두목만 쓰러뜨렸어."


보에르가 주먹을 쥐고 눈을 빛냈다. 그 순수한 눈망울 때문에 네보는 뜸을 들이지 못했다.


"돌팔매도, 도끼질도, 전부 피해냈어. 대여섯 명 뿐이었지만 그들의 공세를 피해 파고 들어서 두목과 검을 겨뤘지."

"말이 돼? 어떻게 나뭇가지로 검을 이겨! 그 사람 마법사라도 돼?"

"당연히 나뭇가지로 검을 이기지 못하지. 룬 마법이 걸려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날붙이를 상대하겠어?"


네보의 당연한 말에 라인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맞부딪치지 않았어. 비커드 자작님은 도적들의 공격을 피해내고, 마지막 두목의 공격은 피함과 동시에 반격을 벌였어. 물론 검과 부딪치지 않고 검을 든 손을 때린 거야."

"아!"

"단련된 기사라면 그런 어설픈 공격에도 검을 놓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런 이름없는 도적이, 숙련된 기사의 회초리질을 버텼을까? 당연히 검을 놓치고 무방비 상태가 되지. 그러면 나뭇가지를 든 비커드 자작님이 더 유리해지겠지?"


나다크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고 여기고 말을 채갔다.


"보에르는 무슨 말인지 알테고…… 라인은 뭐라 했지? 강한 검술?"

"엉! 강한 검술!"

"아쉽게도 그런 건 없어."


단호한 그의 말에 라인이 눈에 띄게 실망하였다.


"강한 기사는 있어도 강한 검술은 없어. 하나의 검술이 만능은 아냐. 당연히 최고, 최강의 자리에 오른 검술은 없지. 오히려 그렇게 유명한 검술은 알려진 만큼 파훼되기 쉬워. 강한 검술을 찾을 바엔 차라리 몸을 더 단련해서 검술 없이 싸우는 게 더 나을 정도로 한심한 짓이야."

"그, 그럼 검술이 필요 없단 소리야?"

"그럴리가."


나다크의 말에 라인의 머리는 이미 과부하에 걸렸다. 시뻘개져서 용을 쓰는 모습에 나다크는 그의 생각을 대신 정리해주었다.


"강한 검술을 찾는 건 최악의 수야. 몸의 단련은 그 다음이고, 알맞은 검술을 배우거나 개발해내는게 최고의 수지."

"음…… 그럼 나다크는 어느 쪽이야?"


갑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자, 나다크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네보가 그를 변호해주려 했으나, 나다크가 한 발 빨랐다.


"배웠어."

"아버지 검술을 배운 거겠지?"

"응. 아무래도 다른 가문의 검술이 더 나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라인은 백작가의 검술이 나다크에게 맞는단 소린 듣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가 별말 하지 않았기에 마냥 그렇다고 여기고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부럽다, 우리 아버지도 검술을 배웠으면…… 등의 말을 중얼거렸다. 라인이 태평한 말을 하다 네보가 계속 나다크의 눈치를 보자,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뭐 실수 했어……?"

"어? 아…… 아냐……"

"실수는 무슨. 궁금할 수도 있는 건데."


나다크의 말에 라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히죽 웃었다.


"네보가 자꾸 니 눈치보길래. 하하! 아니면 됐어."

"그래도 이런 건 부러워하지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면 얼마나 골치 아픈데."

"무슨 소리야? 우리 아버지가 검술을 가르쳐주셨으면 한 거지, 귀족 가문이었으면 좋겠단 소린 아냐."


라인의 말에 나다크가 얼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빠가 지은 집 봤어? 지금까지 벽돌집 말곤 나무로 지은 집 중에서 우리 아빠보다 더 잘 지은 건 못 봤어. 게다가 내가 아카데미로 오기 몇 년 전엔 테이블 다리도 고쳐주시고, 자경단원의 부러진 창도 수리해줬는 걸? 대단하지! 아무리 귀족이 대단해도 이런 건 못할 걸?"


나다크는 물론, 네보도 당혹스런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그 고민이 채 해결되기도 전에 라인은 보에르까지 끌어들였다.


"더 대단한 건 보에르네 아빠라고."

"어? 야……"

"보에르네 아버진 기사 출신이셨대!"

"진짜?"


라인의 짙은 갈색 눈이 예쁘게 빛났고, 두 주먹은 흥분에 못 이겨 꽉 쥐어졌다. 아주 대단한 비밀을 밝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과장된 말에 네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뼉을 쳤다. 나다크는 평소처럼 무심한 얼굴로 있었고, 라인은 네보의 반응에 더 좋아라 하며 보에르네 아버지의 무용담을 펼쳤다. 그건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몇몇 가지는 나다크도 해낸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네보는 그걸 진심으로 받아주었고, 나다크는 새삼 그가 대단하다고 느끼며 마음 속으로 그를 등용할 것을 굳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본래 지금 시간은 축제 준비 때문에 자유로이 쓰게 되어있으나, 지금은 4급 학생들이 연무장을 꽉 채웠다. 몇몇 3급 이상의 학생들도 그 사이에서 머릴 내밀었고, 심지어 고급 교관들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낯선 상황을 만들어낸 건 브렘비와 그 앞에 서있는 두 명의 소년 때문이었다. 둘은 덤덤한 얼굴이었고, 오직 브렘비만 긴장하여 땀을 삐질거렸다.

시선이 몰리자, 브렘비는 숨을 탁 뱉으며 긴장으로 굳은 마음을 풀기 위해 수염을 매만지며 말을 입 안에서 굴려댔다.


"제트, 나다크 앞으로."


차분히 들어서는 제트와, 엉기적거리며 걸어오는 나다크. 두 사람이 나란히 브렘비의 앞에 섰고, 브렘비는 목소리를 풀며 말하였다.


"나다크는 제트가 명예를 훼손할 행위를 하였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결투를 신청하였다. 맞나?"

"……예."


굼뜬 대답에 네보가 복장이 터지려 했고, 브렘비는 당황하지 않고 다음 말로 이어갔다.


"제트는 나다크의 결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겠는가?"

"예."


브렘비는 숨을 훅 들이키고, 아까보다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 결투의 정당성은 성사되었다. 아직 기사 신분이 아님을 고려하여, 진검 대신 목검으로 승부를 낼 것이며, 상대가 패배를 시인 혹은 결투를 지속할만한 상태가 아니게 될 경우 그 즉시 검을 거두어야 한다. 또한 이번 일을 끝으로 서로에게 보복은 없으며, 다른 문제로 끌어오는 건 금지한다. 이의나 불만은 기각한다. 동의하는가!"

"예."

"예에."

"그럼 결투를 시작하라!"


브렘비는 이 말을 외치고 뒤로 물러났고, 관중들은 조금씩 거리를 벌리며 그들만의 원형 경기장을 만들어주었다. 둘은 즉시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고, 나다크는 나른한 눈으로, 제트는 불만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긴장감이 없군."

"긴장할 필요가 없으니까."


홧김에 건 시비로 벌인 결투여서 찜찜해하던 제트가 히죽 웃으며 그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굳게 쥔 목검을 허리 춤에 비스듬하게 늘어뜨리더니, 반댓손으로 손잡이를 톡톡 두드렸다. 포스티어 제국이 통일하기 이전부터 내려온 기사의 도발, 그것의 뜻을 알고 있는 나다크는 눈썹만 찡그릴 뿐 큰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주었다.

검을 들어봐라.

기사에게 있어서 완벽한 도발로, 누가 먼저 창안했는진 알려지지 않았다. 허나 이 동작만큼은 대대로 전해져, 다른 나라에서 장갑을 던지거나 결투장을 보낼 때 포스티어 제국만큼은 손잡이를 두들기며 상대를 도발하고 결투를 벌였다.

그 전통이 이 자리에서 다시 펼쳐졌고, 이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긴장된 분위기만을 느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들어와."

"내가? 큰일날텐데."


나다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양하지 않고 제트에게 달려들어 목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같은 시각, 하크가 카나르를 위해 고기를 구해오는 쓰레기장…… 그곳에 누군가 들어섰다.


작가의말

이제 슬슬 과거 편이 끝나갑니다. 지루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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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검(非劍)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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