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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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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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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DUMMY

라호드는 특유의 인자한 웃음으로 로이트의 손을 잡아주었다. 로이트는 어리둥절해하며 까슬한 손을 맞잡고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또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그의 걱정에 로이트의 가슴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라호드가 이곳을 방문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항상 창고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쩔 때는 그곳에 앉아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가 자리를 뜨는 경우는 딱 3가지.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잠자리가 불편할 때뿐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등장은 의외였다.

라호드는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넘겨주었다. 그건 녹색의 액체가 담긴 작은 병과 주머니였다.


“받거라. 내일이 축제인데 계속 아프면 안되잖니······”


녹색 액체는 점성이 있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주머니 안에는······ 말라 비틀어진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손의 형태를 했단 걸 알았을 땐 로이트는 속으로 경악했다.


‘고블린의 손······ 그럼 이건······ 고블린의 피?’


라호드가 이따금 몬스터 고기를 구해서 먹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마주하니 떨떠름했다. 로이트는 자신이 뜯어먹었던 고블린 고기 맛을 떠올렸다. 쓰레기를 입안 가득 채운 것과는 다른 역함! 괜히 헛구역질이 올라온 로이트는 최대한 침착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이건······?”


로이트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다른 용도로 쓰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라호드의 대답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고블린의 손이란다. 그걸 잘 빻아서 고블린의 피와 섞어서 먹으면 몸에 좋단다.”

“그래······ 요······?”

“조금 먹기 힘들면 고블린 손만 뜯어먹어보련?”

“아, 괘, 괜찮아요.”

“사양말구.”


라호드가 손가락 끝을 툭 뜯어서 내밀었다. 어찌나 바짝 말렸는지 그 질긴 근육의 손가락이 라호드의 손에 뜯겨졌다. 로이트는 코앞에 디밀어지는 손가락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씹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역한 맛이 감돌자 몇 번 씹지 않고 꿀떡 삼켰다.


“맛있지?”

“네, 네······ 남은 건 나중에 먹을게요······”

“그래, 그래······”


라호드는 그렇게 말하며 병실을 나섰다. 로이트는 입을 닦으며 어떻게든 냄새를 지우려고 애썼다.


‘피라니······’


로이트는 인상을 구기며 병에 담긴 피를 보았다. 불쾌한 녹색. 분명 엘더 포레스트에서 뜯어먹었던 고블린도 피가 이상한 작용을 했었다. 아무래도 독을 다루는 녀석들이니 피에도 미약하게 독성이 있는 건······


‘응?’


로이트는 이상하다 생각했다. 독을 자주 만진다고 해서 그것이 피에 스며들까. 혹시나 싶어서 로이트는 병을 열고 피 한 방울을 맛보았다. 비릿한 쇳내와 함께 혀가 저릿해지는 느낌. 확실하다. 독은 있었다. 하지만 메실리아의 독에 비하면 한참이나 약했다. 어쩌면 로이트가 면역력이 생겨서 독성이 약하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많이 약한 편이었다.


‘달라.’


로이트가 생각한 건 자신이 고블린이었을 때 어떻게 독을 만드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에 자기가 당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일전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고블린은 메실리아 꽃가루에 면역이 없는 듯 했다. 그렇다면 독을 일부러 먹어서 항체를 키우거나 하진 않는단 것!

갑자기 로이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우연히, 지속적으로 독이 몸에 스며드는 경우. 자신이 독을 만들고 보관하던 방법을 떠올렸다.


‘입으로······’


로이트는 멍하니 자신이 만들었던 독과 고블린의 피를 번갈아보았다.

혹시? 잠깐 든 의심. 하지만 그것만으로 독을 망칠 수는 없었다. 지금 갖고 있는 용기는 2개. 뭐가 됐든 둘 중 하나는 비워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독과 독을 섞는다고 더 위험해지거나 하진 않아. 그냥 쓰레기가 될 수도 있어.’


이미 여러 도박을 해온 로이트였지만 지금은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이 무난한 독으로 승부에 나서느냐, 아니면 좀 더 강한 독을 추구해서 승기를 다 잡느냐.

어쩌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산될 수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1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려야할지 몰랐다. 그때까지 아무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자신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노예 학생이고, 렘피룬트는 아카데미 외에는 밖으로 다니지 않는 자였다. 무엇보다 지금처럼 아카데미 내부의 상황을 이해하고 활동하기 적기인 경우는 없었다.

단 한 번의 기회. 그걸 날리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하는 승부인가.

······ ······ ······.

로이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몸이 나을지 안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미 한 번 무모한 행동으로 작전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만들자!’


로이트는 품속에 고이 간직해둔 깨진 약병을 꺼냈다. 그리고 고블린의 피에 섞었다. 로이트 표 메실리아의 독과 고블린의 피가 서서히 뒤섞였다. 맛보지도 않았는 데도 벌써부터 불쾌함이 몰려왔다. 로이트는 병을 흔들어 액체를 완전히 섞었다.


‘냄새가 안나?’


로이트는 병에 코를 갖다댔지만 특유의 악취는 나지 않았다. 고블린의 피로서도, 메실리아의 독으로서도 그 냄새는 사라져 있었다.

실패했나? 로이트가 입을 가져다대려던 순간······ 불길함이 엄습했다. 이런 걸 느꼈을 때는 몇 번뿐이었다. 렐프가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나, 엘더 포레스트에서 혼자 놓였을 때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독이 든 약병에서 그걸······?

로이트는 독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전 로이트가 만든 메실리아 독은 시험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시험할 대상이 없었다. 설사 효과가 좋다 해도 문제였다. 지금 경계심을 높여 버렸는데 독살까지 일어난다면 축제가 취소될지도 몰랐다. 그러면 모든 계획이 꼬이게 된다.

자신이나 카나르에게 시험하는 건? 그것 역시 위험했다. 만일 그걸로 죽는다면 끝. 설사 죽지 않는다 해도 문제였다. 이래저래 문제투성이의 상황에 갇혀버렸다. 로이트는 약병을 쥐고 고민에 빠졌다.


‘대체······’


한숨 한 번. 기껏 새로운 것을 찾았나 싶었더니 난관에 부딪쳤다. 역시 도박을 하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박스에 한 번 손을 댔다가 전재산을 날렸다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않던가!


‘아니······’


로이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주 조금이라면······’


로이트는 새끼 손가락에 독을 묻혔다. 피부가 저릿거리는 느낌은 들었지만 아직 신용할 수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병을 품에 잘 넣어두고······


‘제발······’


로이트는 그대로 손가락을 물었다.






하스본은 심각한 표정으로 병동을 나섰다. 펠빅이 먹은 건 메실리아의 독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주방장 제리가 착하다 해도 메실리아 열매를 통째로 주진 않을 것이다. 잔반 역시 이 아카데미의 소유이기에 그것도 함부로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범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귀족가의 자제가 독살을 당할 뻔했단 사실. 그리고 그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독으로 위협을 당한 것이다. 이건 애들 장난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것이었다. 어쩌면 나아가 귀족 체제의 전복을 노리는 이들의 소행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아가던 하스본은 우뚝 멈췄다.


‘굳이?’


하스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펠빅이라면 메실리아의 열매를 구할만한 자본이 있었다. 그가 실수를 해서 먹었다는 가설은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려해볼만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지금이 졸업식 기간이어서였다.

불미스러운 일을 최소한으로 해야 했다. 괜히 어설프게 일을 벌였다가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었다.


‘그건 안 돼.’


그렇다고 해서 이 일을 묻어버릴 수도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하위 귀족에다 눈밖에 둔 자식이라지만 일단은 귀족이었다. 하스본은 결국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수밖에 없다.’


하스본이 몸을 돌려 다시 병동으로 돌아갔다. 하르겐은 펠빅을 데려온 덕분에 바쁜 일을 피할 수 있어서 안심했다가,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 같아 불안해했다. 그런 와중에 하스본이 굳은 얼굴로 나갔다 들어오는 걸 보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래도 조리 과정에 실수가 있던 모양이야. 누군가 이 녀석이 먹은 것에 메실리아의 씨 조각을 흘린 게지.”

“그런······ 제리 주방장님이 계시는데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이보게.”


하스본은 혼수상태인 펠빅을 잠깐 쳐다보다 말했다.


“지금 시기에 일이 터지면 어떻게 되겠나? 문책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나? 아무리 귀족과 평민이 자유로운 공간이라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일 뿐이네. 그걸 자네가 모를 리 없잖나.”

“그, 그렇습죠······”

“그러니 이 사실은 알려져선 안 돼. 딱 한 명. 딱 한 명이 책임지면 될 거야.”

“이 꼬마에게 떠넘기면······”

“이런 오만방자한 꼬맹이가 뭐라고 하겠나? 분명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시치미 뗄 거야. 그러면 문책을 받게 될 거고, 당연히 우리에게 화살이 돌아오겠지. 굳이 일을 터뜨릴 거, 미리 선수를 치자는 걸세.”


하르겐은 갈등했다. 지금 그의 말대로라면 누군가는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한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고의든 아니든 귀족 암살 미수는 큰 범죄였다. 하르겐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하스본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말게.”

“저, 정······ 정말······ 정말인가요?”

“어차피 이대로면 자네도 나도 죽어. 아니, 나는 죽지 않겠지. 위험한 건 자네와 식구들이네. 가족만이 아니라 주방의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어.”

“그런······!”

“그러니 잘 선택하게. 어쩌겠나?”

“저, 저는······”







그렇게 하스본과 하르겐의 주도 하에 펠빅의 배탈 사건은 일개 해프닝으로 끝났다. 다행히 이번 일에 대해선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라르카 백작의 후원으로 탄탄해진 졸업식에 모두의 신경이 쏠린 탓이었다. 오히려 펠빅이 자처해서 입을 닫고 있기까지 했다. 덕분에 하르겐은 벌금형으로 끝이 났고, 하스본이 그 돈을 지원해주었다. 그렇게 일이 원만하게 끝나는 동안 졸업식 시작이 마무리 되어갔다.


“빠짐없이 준비해! 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우린 그냥 좆되는 거야!”

“알고 있다고!”


그렇게 61기의 졸업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졸업식!

총교관 멜베스크가 직접 연단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역사에서부터 지금껏 배출한 기사들이 어떤 활약을 하는 지, 어찌 보면 고리타분한 말들이었다. 당연히 몇 명은 표정에서부터 지루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곳에는 1급 학생부터 4급 학생까지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1급 학생들은 이 대열의 가장 앞에 서있었고, 밀레트는 그 중 단독으로 서있었다. 키가 비교적 큰 라인은 이걸 볼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아드나 보에르는 까치발을 들어서야 밀레트의 금발 머리를 볼 수 있었다.


“그럼 1급 학생 대표, 밀레트 데리반 드 라르카 앞으로 나오게.”


밀레트는 단정한 걸음으로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그가 내민 검을 받아들고 가슴 앞에 세워보였다.


“그대는 아카데미에서 모든 학업 과정을 수료했으며, 통일제국 포스티어에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에 동의하나?”

“동의합니다.”

“좋다. 그대는 이제부터 포스티어의 기사다. 그리고 현 시간 부로 졸업하는 모든 1급 학생을 대표하여 기사가 되었음을 선포하라.”


밀레트는 반 바퀴 빙글 돌더니 한 손으로 검을 들어 천장을 겨누었다.


“통일제국 포스티어! 만세!”

“만세!”


그 휘황찬란한 모습에 보에르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나도······ 언젠가······’






졸업식 파티는 3일에 걸쳐 계속 되었다. 첫 날은 엄격한 졸업식의 기분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대부분이 술에 흥청망청 취했다. 두 번째 날은 첫 째 날의 반동을 대비하는 것이자, 축제의 흥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날은 귀족들과의 만남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사는 귀족과 함께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족보도 없는 방랑기사로 찍혀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졸업식 마지막 날에 찾아와 눈에 뜨니느 사람을 스카웃해간다. 졸업생들에게는 검이 수여되니, 아직 젊어보이는데 검을 차고 있다면 그는 졸업생이었으니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일 때문에 졸업식은 사실 기사로서의 마지막 시험이란 말도 있었다. 끝가지 기품을 잃지 않고 귀족들을 상대하며, 자신의 강인함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자기광고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때 간택 받지 못한 기사들은 저마다 다른 길을 떠나갔다. 유명한 기사단에 들거나, 아니면 수준을 낮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기사단에 들거나.

어찌 됐든 첫 째 날은 해방의 날. 아카데미에서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는 축제인만큼 모두가 술과 음식에 빠져 있었다. 더군다나 라르카 백작의 후원 덕분에 거리 곳곳에서는 볼거리가 가득했다. 불을 뿜어대는 광대며, 신기한 손재주를 보이는 마술사나 길거리 공연도 있었다. 이날만큼은 꽝이 없는 로박스가 곳곳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축제! 아카데미 내부의 사람들에게도 술과 고기가 돌아갈 정도의 엄청난 축제였다. 거기다 자정에는 무도회까지 벌어진다고 했으니 모두의 기대가 컸다.


“오시지 않을 모양이군요.”

“괜히 기대하지 말라니까. 교관님 버릇 몇 번이고 말해줬잖아.”


교관들에게도 따로 자리가 마련되었다. 몇 년에 한 번 입에 댈까말까한 고급 술들이 즐비했고, 그에 걸맞는 음식들도 널려 있었다. 에너텔은 이 좋은 자리에서도 인상을 필 수 없었다.


“그래도······”

“누가 죽기라도 했나?‘


그때 누군가 들어섰다. 에너텔은 그 목소리에 활짝 웃으며 돌아보았다.


“교관님!”

“밀레트가 따로 보자고 하는 바람에 늦었군. 미안하다.”

“아닙니다! 술 준비해뒀습니다!”


에너텔이 방긋 웃으며 잔을 건넸다. 브렘비는 활기찬 느낌에 빙긋 웃었다. 이번 졸업식은 그야말로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브렘비도 둘의 술자리에 끼어들었다.







“정말 화려하게 하나 보네. 여기까지 악단의 소리가 들리다니 말이야.”


피블론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고르든, 그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피블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 않아도 되겠어? 이만한 축제는 평생에 걸쳐 겪을 수 없는 거라고.”

“나야 네게 볼일이 있으니까.”


고르든은 대뜸 다가와 피블론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뭔지 알아? 심부름 때문이야. 근데 그 심부름의 실마리가 눈앞에 있는데 자꾸 깝쭉거리잖아. 그러면 화가 나겠어, 안 나겠어? 일이 끝나면 난 바로 가버리면 되는데 말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이게 진짜!”


고르든이 욕을 몇 번 중얼거리다 말했다.


“좋아. 그럼 질문을 바꾸지. 쥐꼬리에 뭘 적었는진 묻지 않지. 그럼 그걸 보낸 건 누구야. 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이런 개-”

“왜 어디로 보냈냐고 묻지 않지?”


피블론의 질문에 고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왜 그걸 물어야 하는데?”

“내부 스파이를 잡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아야 하잖아. 물론 그건 스파이를 잡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네 심부름은 뭔가 어설퍼.”

“내가 하는 게 어설프다고? 웃기지마! 난 그냥 도와주기만 하면 돼! 그걸 위해서 누굴 도와야 하는지 알아야 될 뿐이야!”


그의 대답에 피블론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너······ 스파이를 색출하러 온 게 아니야?”

“엉? 내가 왜? 이 빌어처먹을 나라의 앞잡이도 아니고······ 너 설마 스파이를 잡으러 온 이중 스파이, 뭐 그런 거야? 안되겠네 이 새끼······ 그냥 죽여놔야······”

“잠깐, 잠깐!”


피블론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널 보낸 사람이 다른 말은 안했어? 이 말을 하면 될 거다, 이런 식으로······”

“어······”


그 말에 고르든이 곰곰이 생각했다. 코일런이 했던 수많은 말 중에 뭐가 있던가.


“돈으로 매수하라······ 아니, 아니지. 뭔가 되게 의미심장하게 말한 게 있었는데······”


그리고 고민 끝에 고르든이 답을 내놓았다.


“맞아. 생각났다.”

“뭐였어?”

“올 때 아일레 백작의 소설을 좀 사오라고······”

“그건 절대 아닐 거야!”

“아이,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어쩌라고!”

“후우······”


피블론은 머리를 감싸며 말했다.


“드래곤.”

“어······ 어······ 아······ 아! 맞아!”


고르든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드래곤의 날개를 꺾어라!”







보에르는 축제의 열기 속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의외로 라인은 술이 들어가고 나서부터 주변 사람들과 친해져 있었다. 그의 친화력에 감탄하던 보에르는 옆에 다가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네보······ 나다크는?”

“시끄럽다고 먼저 갔어.”

“······나다크답네.”


네보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축제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활기차지?”

“응.”

“나도 이렇게 시끌벅적한 건 처음 봐. 우리 영지에서는 안 이랬거든.”

“우리 영지······?”


보에르는 그의 어휘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난 촌구석에만 살아서 그런지 이런 장소가 낯설어. 그래서 라인처럼 술에 취해서 돌아다니거나 하는 건 못하겠어.”

“그건 나도 그래. 쟤는 붙임성이 되게 좋네. 평소엔 다른 애들이랑 티격태격 하지 않았어······?”

“어이- 둘이서 뭘 그리 수군대고 있어.”


얼근하게 취한 릭트가 아드와 어깨동무를 하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아직 술이 가득 남은 술잔이 들려 있었다.


“축제에서 즐기지 않다니. 렘피룬트 교관님이 보시면 뭐라고 하겠어. 응? 게다가 곧 있으면 무도회도 있다잖아. 끅-”


릭트가 딸꾹질을 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아드는 한심하단 얼굴로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보에르 너는 술 안 마셨구나. 네보 너도?”


아드의 질문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드는 묘한 얼굴로 두 사람을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하긴. 술에 취해 있다가 잘못하다간 정조의 위험이 생길지도 모르지. 둘 다 너무 곱상하게 생겼잖아.”


그 말에 보에르가 발끈해서 말했다.


“곱상하다니! 봐······! 나도 잘 단련됐단 말이야!”


보에르가 소매를 걷고 팔뚝을 보여주었다. 허여멀건 팔에 울룩불룩한 선이 보였다. 그런데도 강하다기보단 예쁘단 생각이 먼저 든 건 왜일까······!


“으, 응······ 그러네. 열심히 해······.”

“뭐야 그 반응은······!”

“하하······ 그러는 아드야말로 술 안마시지 않았어?”

“나도 정조의 위험이 있으니까~ 그치 릭트?”

“알게 뭐야······ 여자애도 아니면서······”

“그러고 보니 우리 기수에는 여자가 한 명도 없구나?”


보에르의 말에 아드가 묘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네보는 그걸 놓치지 않고 보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고 보에르의 말에 대답해주었다.


“아무래도 여자들은 블루 크리스털 쪽으로 가니까. 여자가 견디기엔 수련이 너무 어렵기도 하고······ 헤스타 님처럼 특별한 경우는 드물지.”

“그렇구나······”

“그래도 보에르 같은 아이도 있는데 여자라고 못할까. 안 그래, 릭트?”

“어어어······”

“······아무래도 얘는 숙소에 데려다줘야겠다.”

“내가 도와줄까······?”

“아냐, 괜찮아. 나도 조금 질리기도 했고······ 어차피 같은 방 쓰니 괜찮아.”


아드는 릭트를 부축하고 길을 떠나려다 뭔가 생각나서 물었다.


“혹시 렘피룬트 교관님 봤어?”

“응? 아니?”

“이상하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건가······ 알았어, 축제 재밌게 즐겨.”


그렇게 그들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 마디 하고 떠나갔다. 그 말에 보에르는 갸우뚱거리며 네보를 쳐다봤다.


“혹시 같이 나오셨나······?”

“그럴 리가. 교관님들에게는 따로 자리가 마련됐다고 들었어. 그보다······ 참 예쁜 달이네.”

“아.”


그 말에 보에르도 하늘을 보았다. 어둑해진 밤, 옅은 붉은 기운이 퍼져있는 달이 보였다. 여지껏 피처럼 불쾌한 빛이었는데, 지금은 수줍은 많은 처녀처럼 예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기, 네보. 아무래도 우리도 조금 즐겨야 하지 않을까.”

“사실 술을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도 기왕 축제인데 즐겨야겠지?”

“응! 라인이 있는 데로 가자.”


보에르가 네보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리고 라인에게 가려는데 누군가 골목 사이로 보였다.


‘교관님?’


순간 보에르는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렘피룬트는 사석에서도 갑옷을 벗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본 사람은 정말 최소한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잘못 본 거겠지······?’


보에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인에게 달려갔다. 라인은 어느 샌가 자기 몸뚱이만한 잔을 들고 한 번에 술을 마시는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었다. 네보는 그걸 보고 경악했고, 보에르는 크게 웃다가 술이 엎질러지는 걸 보고 라인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너무 즐겼어.’


렘피룬트는 거리를 걸었다. 곳곳에 촛불을 피운 가로등과 폭죽이 보였다. 하지만 렘피룬트는 그런 밝은 곳을 가지 않았다. 대부분이 집을 비운 민가의 골목. 그곳을 걷고 있었다. 지금 그는 흉갑과 검을 제외한 어떤 무장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복장으로 아카데미를 나온 것이다.

이례적인 일. 하지만 렘피룬트는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자신을 해방했다. 언제 어디서 검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걸 안고 살아갔다. 그건 전장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였다. 렘피룬트에겐 삶이 전장이었다. 귀족들의 압박과 기사가 되지 못한 자들의 원망. 그건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렘피룬트를 심약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의 마음을 흔드는 일이 있었다.


‘편해지고 싶다.’


싸움과 교육. 그것만을 반복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모질지 못한 성정은 자살조차 하지 못했다.


‘조만간 은퇴를 고려해봐야겠어.’


렘피룬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덜컥 멈춰섰다. 하늘로 솟구치는 폭죽이 터지며 자신의 앞에 누군가를 비춰주었다. 이를 드러내고 있는 은색의 강아지.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로이트.

둘의 조합은 아주 이상했다. 렘피룬트의 기억 상 보통 개의 체형과는 달랐다. 그것이 밀레트가 분실했다던 실버팽이란 걸 알았을 때······ 어떻게 녀석을 길들였나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버팽은 몬스터다. 그것도 무리를 지으면 오거까지 잡아먹는 야수! 그런데 지금 로이트 옆에 있는 강아지는 이도 났고 덩치도 충분한데 옆에 있는 로이트를 공격하지 않았다.


‘대체······.’


그리고 로이트.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그의 표정은 그야말로 살기등등했다. 지금까지 몇 명이 자신에게 원한을 가졌던가. 하지만······ 이 정도의 살심이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슨 일이지?”

“교관님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로이트는 렘피룬트를 향해 무언가를 겨누었다. 그건······ 검이었다! 렘피룬트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과 비슷한 제국 기본 양식의 철검.


“왜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요?”


작가의말

연재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많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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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검(非劍)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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