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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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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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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20

DUMMY

"베는 형태는 무수히 많다."


렘피룬트가 검을 세우며 이렇게 말하자, 그 자리에서 수업을 듣는 3조 전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1조를 제치고 검술 수업을 받게된단 걸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 자리에 와있었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렘피룬트의 말에 머리가 꼬여가고 있었다.

베는 형태가 무수히 많다니? 고작해야 휘두르는게 끝인 게 검이 아닌가? 렘피룬트는 그들의 고뇌를 이해라도 한듯, 말을 고쳐주었다.


"다시 말하지. 베는 형태는 무수히 많다. 달리 말하자면 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단 뜻이기도 하다."


렘피룬트는 학생들을 향해 검을 수평으로 들어보였다.


"검은 단순히 따지고 봤을 때 손잡이와 검의 몸(검신)으로 나뉜다. 하지만 이거도 상세히 파고들면 여러 종류로 나뉜다. 그리고 각 부위마다 이름이 존재하니, 이를 간과해선 안된다. 자, 그럼 내가 왜 이 점을 파고 들었을까."

"그 부분을 통해 검술이 발휘됨을 말씀하시려는게 아닌가요?"


다행히 만물박사 네보는 3조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의 질문에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았다.


"맞다. 검술이란 것이 아주 특이해서 비슷한 건 있을지 언정, 모든 사람이 전부 같은 검술을 쓰지 않는단 것이다. 이는 검술의 수많은 탄생을 부르고, 그것은 곧 기사로서 상대할 검사 역시 아주 다양하단 뜻이기도 하지. 하지만 검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검술을 추측하여 상대한다면 적어도 반은 이기고 들어갈 수 있다. 설사 그게 처음 보는 검술이라도 말이야."


렘피룬트는 아직까지 어벙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향해 예시를 내놓았다.


"그럼 묻지. 여기서 길거리에서 싸워본 적 있는 사람이 있나?"


그 말에 쭈뼛거리며 몇몇이 손을 들었고, 그중 체구가 듬직하여 4급 학생 중 릭트 다음으로 큰 레간을 지목하였다.


"네가 싸웠던 상대는 누구였고, 어땠지?"

"음…… 에돈이란 애였는데, 덩치가 작아서 그런지 꽤 날렵했어요. 주먹은 약해서 제가 때려눕혔지만요."

"그랬군. 넌 그 애가 '날렵할 거라' 예상 했나?"

"네. 그야 작은 애들은 큰 애들보다 빠르니……"


이 대화로 아이들 대부분이 깨달음을 얻기에 충분했다.


"무거운 검으로 빠름을 추구하는 자, 짧은 검으로 거리를 벌리는 자, 싸우기 직전의 상황에서도 검을 뽑지 않는 자…… 이런 사람은 드물다. 모든 것은 보이는 그대로 나타난다. 무겁고 한쪽에 날이 서있는 커틀러스나 팔시온은 보이는 그대로 힘으로 찍어눌러 베는 목적이고 대부분 기교가 적고 힘이 있는 사람이 사용한다. 검폭이 짧고 다른 검들에 비해 가벼운 레이피어는 속도를 위주로 한 찌르기가 주를 이루기에 몸이 가볍고 날렵한 자들이 이용한다. 플랑베르주나 투핸드소드는 보통 검보다 거리를 두어 사용할 수 있기에 힘은 있으나 느린 자들이 사용한다. 소드브레이커나 대거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거나 암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기사로서 사용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참고로만 알아두어라."


이 말로 아이들은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졌고, 이를 알아듣는 귀족가 자제나 네보, 나다크만이 고갤 끄덕거렸다.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대륙은 확신할 수 없는 세상이다. 때때로 고블린들이 오거를 사냥하기도 하고, 와이번이 투석기에 얻어맞기도 한다. 반드시 검의 특성과 사용자의 검술이 이어진단 보장도 없다. 기사임에도 기습이나 금기를 서슴지 않는 자들도 있다. 꼭 기사하고만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때때로 수많은 병사를 지휘하며 싸우기도 한다. 즉, '기본'이 '변수'에 얼마든지 꺾일 수 있단 소리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기본 학습은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무거운 검이라 느릴줄 알았더니 힘껏 내리 벰으로서 굉장한 빠르기를 보이고, 짧은 검으로 거리를 벌리자마자 그걸 던져서 목에 꽂을 수도 있으며, 코앞까지 들이닥치고나서야 검을 뽑아들어 반격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기본을 추구하는지…… 궁금할테지?"


렘피룬트는 잠깐 뜸을 들여 주의를 집중시킨 뒤에 말하였다.


"오히려 변수에 약한 기본이, 강해지면 거꾸로 변수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앞에 제시한 세 가지 조건 중, 짧은 검으로 거리를 벌린다는 건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단 뜻이므로 이건 예측되지 않는, 하지만 예측할 수 있는 변수를 낳는단 소리다."

"무슨 소리지……?"

"글쎄……"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그의 모순적인 말을 풀어보려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 그 변수가 강할까. 기형적인 검, 예측하지 못한 공격 방식, 의외의 선택, 왼손잡이, 해독법이 알려지지 않은 독, 함정 등 이것들이 갖는 강점이 무엇인가."

"겪기 직전엔 모르며, 그것을 겪기엔 아주 드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나다크가 무심하게 대답을 툭 던졌고, 렘피룬트는 고갤 끄덕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변수의 힘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함'에서부터 시작한다. 변수의 힘이 10중 10, 탄탄한 기본은 10중 7이나 8의 위력을 가지는 게 보통이다. 근데 여기서 변수의 은밀함이 5나 6을 차지한다. 거의 절반은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지. 헌데 이것이 깎여나가면 변수는 절반의 힘으로 기본과 싸워야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기본이 이깁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었으나, 실전 경험이 있는 나다크 말고는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가령…… 레간. 만일 에돈이 모래를 뿌리려 한다면 어떡할 것이지?"

"음…… 그러면 손에 뭔가를 쥐고 있거나, 발코를 땅에 찍고 있을테니…… 그때 눈치챌 거 같은데요."


레간은 예시로서 훌륭한 표본이 되어주었다. 그 증거로 아이들 대부분이 아까처럼 이해하고서 고갤 주억거리고 있었다.


"물론 얘기가 조금 다르지만, 기본에 충실하다면 어느 정도 눈썰미가 생기고, 본능적으로 알아채게 된다. 그렇다면 변수는 기본을 꺾을 수 없게 되지. 여기서 또 한 가지. 왜 하필 '검'을 기본으로 잡았을까. 이것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자가 있나?"


이 부분은 네보도 망설였다. 뭔가를 아는 듯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렘피룬트는 잠깐 아이들을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눈을 반쯤 감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기사이기 때문이다."


3조 전체가 아무말도 못했다. 왠지 모르게 묵직해진 분위기가 그들을 엄숙하게 만들었다.


"기사는 결코 검 이외의 다른 무기를 잡지 않는다. 물론 키메라헌터나 다른 특수직책의 기사들을 무시하는 발언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검이란 일전에 설명했던 그 검과 일맥상통하다. 자신의 긍지, 의지를 다루는 것이다. 그것이 보편적인 '검'이라는 무구에 깃들게 되었을 뿐, '기사의 검'이란 다른 것에도 깃들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사들은 검을 택한다. 왜인지 아는가?"

"……기사이기 때문입니까?"


왠지 말장난을 쳐버린 거 같아, 렘피룬트도 스스로가 우스워 슬쩍 웃음을 만들었다.


"그래. 분명 '검'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음에도 그들은 검을 택했다. 나 역시 그랬고 말이지. 언제부터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검이야말로 기사의 덕목이자 그들을 대표하는 무기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검은 일반 병졸들도 사용합니다. 그것이 기사의 의지를 대표할 수 있는지 의문인데요."

"물론 그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채택한 건 옛날부터 그래왔기에 나 역시 구체적인 이유는 모른다. 그저 수많은 무기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렘피룬트는 네보의 당돌한 지적을 인정했다. 그리고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그럼 또 다른 질문을 하지. 병졸에겐 없고, 기사에게 있는 게 두 가지 있다. 뭔지 맞춰보겠나?"

"하나는 검술이고, 다른 하나는……"


네보는 말문이 막혔고, 렘피룬트는 다음 주자를 찾았다. 하지만 만물박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자연스레 나머지 조원도 기가 죽어 입을 떼지 못했다.


"마음가짐이다."


렘피룬트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병졸들은 살기 위해서라면, 지휘부의 통제 아래에 무슨 짓이든 벌인다. 땅을 구르든, 잡히는대로 무기를 휘갈기든, 욕설을 내뱉든, 비겁한 짓을 하든…… 하지만 기사는 그렇지 않다. 기사는 준귀족이기 때문에 귀족의 직위에 발을 걸쳐놓았고, 그렇기에 그들은 위엄을 지킨다. 절대 결투 중에 땅바닥에 구르지 않고, 아무 무기나 마구잡이로 쓰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비겁한 짓은 꿈도 꾸지 못한다. 기사의 명예가 훼손된다는 건 그가 모시는 귀족과, 귀족 계층 전부를 모욕한다는 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기도 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놓거나, 살기 위해 악다구니를 지르지 않고, 검이 부러진다면 패배를 택한다. 어찌보면…… 참으로 미련한 존재지."


방금 잘못 들은건가? 아이들은 마지막에 들렸던 비판같은 말에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기사인 그가 기사를 비난하다니? 이는 사교계 뿐만 아니라 귀족 모두의 입에 오르내릴만한 사건이었다. 다행히 그들이 이 점을 인지하기도 전에 렘피룬트가 말로서 상념을 끊어버렸다.


"아무튼 너희가 기사가 된다면 이제껏 평민으로서 해왔던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될 것이다. 물론 내게서 검술을 완벽히 익히고 졸업을 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말이야!"


렘피룬트가 이제까지 가로로 들고있던 검을 수납하였다.


"자, 그럼 이론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검의 각 부분마다 어떤 이름으로 부르는 지……"















"이게 무슨 소리야!"


한 아이의 외침과 더불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열기에 휩싸였다. 단 한 명, 이 모든 분노를 받고있는 제트만이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술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다고? 제정신이야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전부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대공의 직계혈족이란 어마어마한 위치 때문에 얘기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럼 이렇게 떠들어대는 이 아이는 누구인가? 그 역시 귀족가의 자제다. 풀링턴이란 자작가의 차남으로, 대찬 성질머리 때문에 이곳에 보내졌다. 풀링턴 자작이 그렇게 위세가 대단하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는 이 사실을 무시해버렸다.

제트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강자, 혹은 위층계급의 위엄. 그것을 마주하니 아이들은 대부분이 고갤 숙였다. 풀링턴 자작가의 차남, 로비던만 빼고.


"너랑 달리 우리는 검술에 목숨을 걸어야 해. 말이야 번지르르하지, 어떻게 홀로 검술을 만들거나 익힌단 말이야! 그게 불가능한 이상 그의 가르침이 필요한데 너가 걷어차버려!? 너에게 필요가 없다 해서 우리에게 필요없는 건 아니잖아!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결정을 혼자서 한 거야!"


어찌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여기 1조에 속하게 된 이유도 대부분이 검술을 얻기 위해서였지, 제트의 인품에 반해서 온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신랄한 비난에도 모두가 심하단 생각을 하지 못했고, 제트만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무 이유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아냐. 너희가 아는 대로, 검술은 익히기도 어렵고 배우기도 어려워. 근데 그걸 아무한테나 가르칠까? 그것도 이곳에서 교관 일만 해온 사람이? 매년 아카데미에서 들어오는 학생은 많지만, 정식으로 졸업하는 건 손에 꼽아. 그럼 만일 한 조에게 검술을 가르쳤는데 그중 졸업자가 몇 명 뿐이야. 그럼 나머지는 그 검술을 기반으로 밖에서 병사 일을 할테지. 그리고 때에 따라서 자신이 배운 걸 가르쳐주는 사람도 생겨날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제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른 기사들에 비해 '그의 검술'이 비교적 많이 알려지게 되고, 그에 따라 대처법도 생겨. 그러면 교관의 입지는 그만큼 줄어들겠지. 왜? 검술의 약점을 찾았단 건 그를 상대하기 훨씬 수월하단 소리니까. 그런데 그가 아무 생각없이 검술을 가르쳐줄까?"


그의 물음에 로비던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조건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졸업을 하면 기사가 된다고 하였지만, 검술이나 교양까지 쉽게 알려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말의 희망으로, 검술을 받는 한 조가 되는 꿈을 꾸긴 하였다. 그런데 제트가 보란듯이 박살을 내놓고 강제로 진실을 알게 끌어대니, 답답해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아무리 나라도 너희가 반쪽짜리 검술을 배우는 걸 놔두기 싫었어. 그렇게 배우는 건 차라리 안배우느니만 못하니까 말이야. 정말, 아주 우연히 검술을 가르쳐줄 사람이 나타나도 교정된 몸은 고치기 매우 힘들어. 특히 10년, 20년이 지난 뒤라면 그 상태가 굳어졌다고 봐야하지. 이래도 교관한테서 검술을 배우고 싶어?"


그 말에 아무도 동의하는 자는 없었다. 그렇지만 알고있던 것과 다른, 허망한 진실을 알아버리니 괜히 다른 곳으로 분노가 솟구쳤다. 가령……


"말은 저렇게 해도, 나다크한테 밀려서 그런 거 아냐……?"


그 말로 인해 수긍하던 분위기는 한 번에 뒤집어져버렸다. 제트는 볼을 움찔거렸고, 성질머리 나쁜 로비던조차 지금 이 상황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내가 교관님이면 1조와 3조 중 저울질을 했겠지."

"그래도 대공의 자제인데 그걸 무시하고 결정하진 않았을 거 아냐?"

"두 분 다 똑같은 개국공신이니까, 조건은 같다고 봐야지."

"아냐. 그건 계급 체계를 무시하는……"


잠깐의 의심은 불화로 바뀌었고, 1조는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듯 파벌을 나누기 시작했다. 제트는 그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를 뿌득갈며 소리쳤다.


"모두 조용!!"


제트의 눈에서 불똥이 터졌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자신이 한 말을 믿고 따라줄 것이라고 여겼는데, 로비던의 딴죽을 시작으로 무책임한 결정을 내린다거나 다른 조장에 비해 달린다는 말이 나왔다. 분명 다른 조 역시 이런 잡음은 일어나겠지만, 제트가 느끼기엔 이런 일은 있어선 안되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조에서 반발이라니? 이건 엄연히 항명이었고, 범죄다(……?). 그렇게 생각한 제트는 목에 힘을 주며 말하였다.


"더 이상의 잡소리는 듣지 않겠어! 나도 생각해서 결정한 것이고, 너희가 조장으로 뽑았으니까 더 이상 반발은 하지마!"


원래 알아듣기 쉽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려 했지만 처음부터 그 의도가 빗나가니 그의 말투도 삐딱해져버렸다. 당연히 1조 전체의 반응도 차가웠다. 제트는 뭔가 어긋나는 걸 느꼈지만, 괜히 말을 돌리고 싶지 않았기에 인상만 구기며 그 자리를 떠났다.














"하크……?"


솔직히 로이트로선 정말 의외의 상황이었다. 하크가 직접 병문안을 와줄줄 몰랐던 것이다. 옆에 고르든이 있단 게 마음에 걸리지만…… 하크는 눈망울을 흠뻑 적시며 로이트를 보고 있었다.


[걱정했어.]


냉큼 손을 잡고 손가락질을 하는 하크를 보며, 로이트는 괜히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처음엔 자신과 같은 처지 때문에 끌렸다고 생각했다. 옹졸한 마음은 자신과 같이, 버려진 하크를 이용하라고 외쳤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생각이 싹 가셔버렸다. 필요에 의해 다가간 자신과는 달리, 하크는 정말 순수하게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로이트는 괜히 뜨끔하여서 웃는 얼굴로 고맙다고 말하였다.


"난 보이지도 않나봐?"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는게 탐탁치 않았는지, 고르든이 얼굴을 한껏 구기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하크와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불편했다며 투정을 부렸고, 피블론과 싸우러 온줄 알았다며 병동 관리자가 계속 제지한 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짜증 가득한 그의 말도 며칠 간 혼자 있다보니 그리워서, 그랬냐고 웃으며 답해주었다. 왠지 여유가 있는 그의 모습에 고르든은 더 뭐라 하지 못하고 툴툴거렸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 되자, 하크가 로이트의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어쩌다 메실리아 씨를 먹게된 거야. 그거 엄청 위험하다고.]


하크의 나무라는 눈빛을 보니, 차마 독을 시험해보겠다고 먹은 걸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저 너무 배가 고파서 실수를 했다고 어물쩡 넘겼다. 의심스런 눈빛을 보니 사실을 얘기할까 하다가 괜히 교관을 독살하려한단 낭설이 돌면 곤란해지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크가 벙어리가 된 이유.

하마터면 그처럼 목소리를 잃을 뻔한 것이다. 새삼 흔하디 흔한 열매의 독성이 얼마나 강한지 느꼈고,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단 소리까지 들었을 땐……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 스스로도 놀란 게, 자신의 목숨인데도 '까짓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고르든이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런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라 그의 안에서부터 뭔가 조금씩…… 변화하는게 느껴졌다. 이걸 뭐라 해야할까. 누군가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게 뻔했기에 속으로 삭였다.

로이트가 이런 고민을 할 때, 고르든은 그간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었다. 창고 관리인 렐프가 펄펄 날뛰고 있단 것과, 졸업식 파티를 위해 라르카 백작이 어마어마한 돈을 내놓았단 것, 마구간지기 프롭이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난 것, 그리고……


"3조가……?"

"엉. 이런 저런 말이 돌고 있는데, 내가 봤을 때 1조가 3조한테 밀린 거 같아."


고르든의 추측에 로이트는 고갤 저었다. 반쪽짜리 검술을 준다는 건 그간 아카데미에서 썩어온 로이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애당초 그처럼 오래, 그것도 4급 학생의 신분으로 이곳에 머무른 학생이 없었기에 그렇기도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렇다면 제트나 나다크같은 고위 귀족, 그것도 포스티어 통일제국의 개국공신들의 후계자들이라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을 것이다. 자식들이 검술을 배우는 걸 원하든 원치않든 어정쩡한 가짜를 배우게 두지 않았을테고, 렘피룬트가 가르치는 걸 막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제트는 그걸 정중히 거절했을테고, 나다크는 성격 상 오는 걸 쳐내지 않을테니 검술 수업을 받고……

여기까지 생각했던 로이트는 속으로 웃었다. 고작 반년도 겪어보지 못한 애들에 대해 분석하고, 추측하다니. 지금 당장 밀레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게 무슨 뻘짓거리란 말인가. 로이트는 생각을 감춰두고 고르든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그는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솔직히 그 새끼 마음에 안들었어. 뭐만 하면 자기가 잘난 것 마냥 내려다보고 말이야(고르든이 훨씬 작다). 그 여유있는 웃음도 싫어. 마치 꼬마들 싸움에 끼어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어른을 보는 기분이라고! 으으, 기분 나빠……"


처음에 말을 걸어주어 호감이 일었다가, 간곡한 부탁을 거절당한 적이 있었기에 로이트는 고르든의 험담을 반박하지 않았다. 계속 제트를 욕하던 고르든은 제 풀에 지쳐서 다시 다른 얘기로 넘어갔고, 그의 재빠른 화제 전환에 하크는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는듯 했다.


"렐프가 술을 사줬는데, 프롭 그 양반이 상한 열매를 먹고 탈이 났다나봐."

"그 사람도 메실리아 열매를 잘못 먹은 거 아냐?"

"그런 멍청이가 너 말고 또 있을라고. 그냥 오래 되서 이상해진 과일을 먹은거지. 나 원, 듣자하니 배가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나? 크흐흐…… 오죽하면 독을 먹었다고 착각했겠어."

"하하하, 과장도 심하네. 그래봤자 그냥 상한 음식인데……"


로이트는 하하 웃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고, 하크만이 이상함을 느끼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르든은 프롭의 뒷얘기를 하다 이번엔 라르카 백작이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지적하고 나섰다. 이렇게 보니 문병을 온 건지, 그냥 수다를 떨러 온 건지…… 하크 역시 그걸 느꼈는지 고르든의 손등에 뭐라고 적었지만, 역시나 알아듣지 못하고 역으로 화를 냈다.


"이게 내가 글 모른다고 무시하냐!"


고르든은 소란을 일으킨 죄로 병동관리자에게 끌려나갔고, 하크는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고서 그를 따라 나섰다. 로이트는 한참, 그들이 나간 쪽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상한 거라……"












"젠장."


불쾌한 기분. 입 안에서 감도는 씁쓸한 맛이 그의 기분을 더 망쳐놓았다. 제트의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는 건 1조에 대한 믿음이 부숴졌단 사실과, 자신이 나다크와 비교당하고 있단 것이었다. 분명 그가 생각하기에도 나다크의 지휘력은 무서웠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강한 힘으로 강하게 보여야하는 자신과는 달리, 그는 드러내지 않아도 특유의 중압감이 아이들을 휩쓸었다. 그에 반해서 자신은……? 갑작스레 솟구치는 원인모를 열등감이 제트를 괴롭혔다. 분명 그의 능력을 인정하였고, 길이 다르단 걸 인지하고 있는데…… 가슴은 정말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 열기는 1조에 대한 울화로 이어졌다.

처세, 오로지 처세만이 살 길인 아랫 계급의 인간들이 자신에게 모욕을 가하다니! 그것도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서까지 깎아내리려 들다니! 문득 로이트의 당돌한 부탁도 떠올랐고, 이건 자연스레 아까의 생각과 이어져 그들이 제트 본인과 같은 위치의 사람이라 착각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거슬린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제트 본인도 모르고 있던 귀족의 우월 의식이 피어났다. 그러나 이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오히려 나다크나 네보 같은 경우가 특이했다. 이제껏 아카데미에서 진상이라고 여겼던 귀족의 자제들은, 그야말로 귀족의 표본이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고, 같은 귀족들도 표출하는 방식이 다를 뿐 평민 이하의 계층은 깔보기 마련이다.


'쓰레기 새끼들'


이제껏 털털한 성격인줄 알았다. 땀내나는 남자아이와 어울리고, 여자아이의 고백을 차분히 거절하는 식의 일에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숨어있던 귀족적 성향이 있었나보다. 어쩌면 스스로 자애롭다고 여기며 자기만족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생각이 많아지자 제트의 심성이 조금씩 비틀어져갔다. 어린 나이에 견뎌내기엔 너무 큰 자극이었던걸까? 아니면 그저 자제심이 사라진걸까. 무엇이 됐든 제트의 지금 기분을 낫게 해줄만한게 없단 건 확실했다.


"어?"

"응?"


그런 와중에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아, 제트."


네보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나다크는 심드렁하게 그를 보았다. 저 여유로움…… 왠지 불쾌했다. 괜히 뭉개버리고 싶었고, 이런 추악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정말 꼴보기 싫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여서 극단적인 선택을 만들었다.


"같은 개국공신의 자제께서 남작님의 자제분과 뭘 하시나?"


제트의 그 말은 눈치 빠른 네보에게 꽂혔다. 노골적으로 계급의 상하 관계를 언급하였고, 나다크는 잠이 덜 깬 듯한 눈으로 제트를 보았다. 그의 두 눈에 담겨있는 건 황당함도, 당혹스러움도 아니고 경멸도, 수긍도, 의아함도 아니었다. 도대체 생각을 알 수 없는 그 눈빛을 보니, 제트도 방금의 실수를 깨치고 하하 웃으면서 사과하……


"그것도 몰라?"


……

…… ……?

도발?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질문? 제트는 순간 벙쪄서 나다크를 보았고, 네보는 그의 의도를 대충 눈치챘는지 안절부절 못하였다. 말뜻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한숨 섞인 그 한 마디로 의중은 얼추 알았다.

조롱.

돌이켜 생각해보니 눈빛에 담긴 감정도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 역시 비슷했다.

비웃음.

그의 삐딱하게 변한 머리가 점점 꼬이면서 이성을 옥죄었다. 나다크는 제트가 아무 말도 안하자 네보에게 가자고 한 마디 툭 하고 그를 지나쳤다. 네보는 땀을 삐질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랐고……


"아아."


둘 다 제트의 말소리에 멈췄다.


"애인이랑 데이트라도 하고 있었나봐."


그 말이 아카데미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으로 이어졌다.


작가의말

월 1회 연재란 이름의 자유연재. 핑곗거리에 불과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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