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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2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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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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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1

DUMMY

라이가스는 타고난 무골이었다. 또래에 비해 훌륭한 골격, 월등한 성장 속도 덕에 신체능력을 타고났고, 자연스레 기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애당초 하이크라 가문이 대대로 방패의 가문이란 이름에 걸맞게 왕실을 수호해 온 곳이라지만 라이가스만큼 이들의 가문에 걸맞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장남이자 황실 친위대의 기사로 복무 중인 에너스터 역시 그 나잇대에 라이가스와 같은 성취를 보이지 못 했다.


너무 완벽한 차남.


그것이 고민이었다. 아마 이대로면 라이가스는 에너스터가 세운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우고 떠오르는 샛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의 시기도 아니고, 그저 반란의 우려만 있는 잠정기. 이 시대에 하이크라와 같은 난사람은 정통성을 지키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장남에게 우선적으로 가문을 계승시켜야 한다. 이것은 귀족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자 제국에서 공표한 법도였다. 단 한 가지, 제국의 법에 걸리는 점이 있었으니 바로 무능한 장자를 대신하여 차남 혹은 그 밖의 방계에게도 계승권을 쥐어줄 수 있단 것이다. 이미 에너스터는 자기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다만, 라이가스가 좀 더 뛰어날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많은 이들이 라이가스를 지지하거나, 혹은 그가 계승권을 갖지 못한 데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렇게 빚어진 혼돈을 피해야만 했다.


그래서 현 가주인 하이크라 후작, 람피아는 한 가지 대책을 내렸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거라."




원체 강골한 라이가스였기에 람피아도 이 제안을 조심스럽게 했다. 에너스터는 가문의 후계자로서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을 받아 기사가 되었고, 지금은 자작의 작위에 있었다. 얼마든지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곳은 황제의 친명이 내려진 곳이긴 하나 그가 직접 작위를 내려주는게 아니었고, 졸업한 기사들 중 어느 누구도 정식 귀족이 되거나 후계자로서 당당히 자리에 오른 이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는 '재활용'을 위해 가는 곳이었으니까. 머리도 제법 비상한 라이가스가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람피아의 우려는 그의 형제애를 보지 못 해서이기도 했다.




"가겠습니다."




람피아는 그가 주저없이 받아들여 흡족해하였고, 형인 에너스터는 좋지 못한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때와 장소를 잘못 골라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로크(전설에서 나오는 거대한 새). 하지만 그 자신의 위치를 위해서라도 감히 라이가스에게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라이가스는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들어간 아카데미에서 만난 건 라르카 백작가의 장남이었다. 그는 왜 이곳에 온 것일까? 그 잠깐의 의문은 람피아에게서 들은 한 가지 대업 덕분에 풀렸다. 원체 입이 무거운 라이가스이고, 가문의 계승을 피하게 하기 위해 아카데미에 보낸다는 것을 감추려고 한 가지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것은 밀레트에게로 전해졌다. 그의 절망으로 물든 표정을 보았을 때, 왜 그러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가 첫 체력 시험을 끝내고 나와 눈물을 쏟았을 때…… 그의 진심을 보았다.


기사가 되고 싶었으나 상인의 운명을 타고난 남자.


원치 않은 삶을 살게 된 그를 보며 라이가스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몹시 놀랐다. 그의 손은 어느 누구보다 단단했다. 돈을 만지며 책상놀음을 해야할 그가, 단련이고 뭐고 여자들과 놀기 바빴던 방탕한 그가…… 기사의 손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라이가스는 목표를 바꿨다. 황실 친위대장이 되어 하이크라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에서, 이 사람을 위해 자신의 혼을 바치는 것으로.


























"이리와……"




그날 이후로, 카나르는 로이트를 경계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할 정도로. 실상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만한 짓을 당했는데 어떤 생명체가 선뜻 다가갈까. 그래서 로이트를 보고서도 꼬리를 세우고 이를 드러내며 울음 소릴 내고 있었다.




"이리와줘……"




눈에 띄게 기가 죽은 목소리. 하지만 녀석은 오지 않았다. 로이트의 발걸음이 무겁게 돌아섰다. 그리고 더 이상 즐겁게 창고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하크는 손수건에 아로 새겨진 문양을 보았다. 방패 위에 두 자루의 검이 교차되어있는 황금 수실. 그것은 분명 검의 귀족, 칼릭소 공작의 표식이었다. 단숨에 그녀가 칼릭소 공작의 유일한 핏줄이자, 아카데미에 방대한 소문을 몰고온 헤스타가 분명했다.


뛰어난 배경, 압도적인 재능, 출중한 미모, 유려한 성격…… 무엇하나 빼놓을 수 없는 그녀였기에 조금 더 다가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흘렸던 손수건을 아직도 품에 간직하며, 하크는 첫사랑이자 청춘의 시작점이 될 여인을 가슴에 간직하고서 오늘도 창고를 찾아갔다.


헌데 라호드 노인이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해가 조금 기울었거니와, 지금 식사를 할 시간은 한참 지났으니 엄연히 업무태만이었다. 또 걸리면 호되게 혼날텐데…… 그런 걱정을 하며 안으로 들어선 하크는 진한 핏내에 코를 막았다. 뭐지? 순간 불안한 기분에 안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피곤죽이 되어있는 카나르와 그 옆에서 울부짖고 있는 로이트. 하크는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아찔해졌다. 분명 이상하긴 했으나 하크 역시 카나르를 좋아했고, 지금 일어난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단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조금씩 꿈틀거리며 낮은 숨을 쉬는 모습은 너무도 생생히 다가왔다.


로이트의 어깨를 잡고 흔드니, 하크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순간 무슨 일인가 싶어 손등에 아무리 손가락 글씨를 써보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쏟고, 오열할 뿐이었다. 어찌도 이렇게 서럽게 울까. 등을 토닥여주며, 이전에 느꼈던 그의 슬픔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란 걸 알았다. 하긴, 자신이 아끼던 동물이 이렇게 되었으니 상심이 얼마나 클까. 일단 로이트를 진정시키고 카나르부터 돌봐줘야겠단 생각에 피를 닦아내고, 상처가 난 부분을 살폈다. 다행히 뭔가에 베이거나 찢겨서 난 흔적은 없었지만, 이 방대한 피가 녀석의 몸에서 나왔단 건 내부가 심하게 손상되었단 소리였다. 우선 카나르를 편히 눕혀주고 가져온 고기를 최대한 손으로 으깨어 입에 넘겨주었다. 어찌나 몸이 상한 건지 먹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이대로라면 녀석이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로이트와 함께 온 힘을 들여 녀석을 치료했다. 숨구멍이 막히지 않게 막대를 대주는가 하면, 음식을 직접 씹어서 흘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어떻게든,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니 녀석도 점점 나아졌다.




"크릉……"




불행이라면, 녀석이 움직일 수 있을 때 쯤 녀석은 로이트를 경계했다. 그리고 손을 내뻗으면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이빨을 세웠다. 하크는 뭔가 눈치를 채고 그를 채근했고, 결국 진실을 들었다. ……말도 안 돼. 이 유약한 로이트가 힘없는 동물을 두들겨팼다고? 다시 한 번 물어봤지만 자신이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그런 것인데 죄책감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생각해봤지만 로이트의 증언은 생생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나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로이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단 며칠만에 몸을 회복한 카나르를 보며, 의심이 피어올랐다. 불구나 안되면 다행인 몸으로 이렇게 빠르게 낫다니. 저번에 보았던 모습이 꿈이 아님을 거의 확정짓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트의 급격한 변화까지 더하여 이 두 가지를 파헤쳐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로이트를 달래주는 하크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일이 있던 뒤론 로이트의 기세가 급격하게 죽어버렸다. 모두가 그가 이번 체력시험에서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고있는 이들이라면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아는 건 하크 뿐이지만.




"저거 또 저 지랄이구만."




펠빅이 잘려진 고기를 한 입 가득 우겨넣으며 말하였다. 그 옆에서 알랑방귀나 끼고 있던 리든과 4조원 몇 명이 고갤 돌렸다. 식어버린 수프와 딱딱해진 빵덩어리를 눈앞에 두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로이트가 보였다. 입맛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최근에 그가 음식에 손을 댄 걸 본 지 꽤 되었다. 관심이 없어서 그렇기도하지만, 실제로 그가 뭔가를 먹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부모가 왔다가 쫓겨나서 그런 걸거야. 으이구, 하층민들이란…… 그냥 돈 몇 푼 쥐어주면 만나게 해주는 것을……"


"엉? 무슨 소리야?"




리든 옆에서 펠빅이 싫어하는 과일을 받아먹던 4조원, 에건의 물음에 펠빅이 코를 후비며 말했다.




"몰랐냐? 전에 엘더 포레스트로 갔을 때 쯤에…… 저놈 애비가 찾아왔었어. 근데 교관님이 그냥 내쫓아버렸대. 아마 그 말 듣고……"




펠빅이 말을 멈췄다. 그의 두 눈이 푸르르 떨렸다. 리든과 4조원의 시선도 그의 눈을 따라 옮겨졌다. 그 순간, 소름이 끼쳤다. 흐트러진 앞머리칼로 드리워진 그늘, 그 밑으로 살벌하게 빛을 내고 있는 로이트의 두 눈이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들과 로이트와의 거리는 테이블 두세 개 정도, 시끌거리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정말 귀가 좋지 않은 이상 그가 말한 걸 들을 리가 없었다. 헌데 로이트는 마치 펠빅의 말을 듣기라도 한듯, 부릅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




펠빅을 포함한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묘한 공포를 느꼈다. 고블린 부락에서 포위가 되었을 때도, 렘피룬트가 성난 얼굴로 다그칠 때도 이런 느낌은 없었다.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는 상황, 로이트가 다가왔다.




"다시 말해줘……"


"어……?"


"우리 아빠가…… 여기 왔었어……?"


"어, 어…… 모, 몰랐냐? 우리가 숲으로 갔을 때 찾아왔다는데……"




로이트가 시체같은 표정으로 펠빅의 두툼한 팔뚝을 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런 소릴 듣지 못했는데……?"


"그…… 그걸 왜 나한테 묻…… 아악!!"




그의 팔을 잡은 로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무지막지한 노동을 하고도 훈련을 꿋꿋이 견뎌냈다. 며칠 굶었다 해서 다져진 근력이 어디로 가지 않았다. 무심코 힘을 들인 덕에 펠빅이 괴로움에 소릴 질렀고,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평민에게 그런 민망한 소릴 내다니! 펠빅은 물론, 로이트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눈물을 찔끔 흘린 펠빅이 로이트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 평민 새끼가!"




그러더니 짤막한 다리로 힘차게 로이트의 몸을 짓밟아댔다. 마구잡이로 밟아댄 덕에 안그래도 성하지 않던 로이트의 몸이 점점 망가져갔다. 거칠게 콧김을 뿜어대며 성질을 부리던 펠빅이 온갖 욕설을 내뱉다가 그의 몸뚱이에 침을 탁 뱉었다. 멀뚱히 웅크려 있던 로이트가 덜덜 떨며 일어났다.




"아빠가……?"




그 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서는 로이트의 뒤를 보며 모두가 수근거렸다. 워낙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비굴하던 그가, 귀족가의 자식을 건드리고 침울한 표정이라니. 모두가 로이트의 변화에 대해 얘기하였고, 그 중엔 피블론과 보에르도 있었다.




"웬 일이라지……? 체력 시험을 본 게 충격적이었나?"


"그런 거 같아……. 아무래도 또 낙제해버릴 수도 있을테니까……"


"흠."




피블론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납득이 가지 않는 추측을 해놓고서 심드렁한 얼굴로 보에르를 보았다.





"알아볼까."


"또?"




어째선지 그와 함께 할 때마다 작은 모험을 하는 것 같아, 보에르의 표정에 불편함이 드러났다. 피블론은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는지 그의 어깨에 팔을 둘러메며 속삭였다.




"물론 귀족한테, 그것도 제국을 주름잡는 거물한테 찍힐 수도 있어서 무섭겠지. 하지만 말이야…… 도전이란게 나쁜 건 아니잖아? 무엇보다 뭔가 이 아카데미와 연관되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카데미랑?"




뭔가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에 발을 빼려던 보에르는 피블론의 계속 되는 회유에 망설였다.


대체 그는 왜 라르카 백작의 아들에게 찍힌 걸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아카데미에 계속 남아서 4급 학생의 삶을 살고 있을까? 이런 심각한 의문에서부터 어쩌다 아카데미로 오게 되었는지, 녀석이 그렇게 힘든 훈련을 견뎌내는 비결이 무엇인지 등 자잘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금단.


로이트란 금단의 선을 넘기 일 보 직전, 라인이 나타났다.




"무슨 일 있었어? 엄청 소란스럽던데……"




그의 말에 보에르가 뒤늦게 주변 상황을 알아채고 고갤 숙였다. 체력 시험 이후로 라인은 새롭게 떠오른 샛별이 되었다. 괴물같은 힘도 힘이지만, 겸손(?)할줄 아는 그의 모습에 하나둘씩 그에게 빠져든 것이다. 누군가는 나다크의 뛰어난 지도력의 증거라고도 하지만, 대부분은 라인의 순수한 실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가문에서 이도저도 아닌 골칫덩이거나 평민, 상인 등 희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이들이었다.


대리만족. 그들에게 있어서 라인은 자신의 꿈이자 실패자들의 희망이었다. 헌데 본인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아직까지 자신의 부끄러운 성과(!)를 수근대는 거 같아서 낯을 붉혔다. 안그래도 보에르만큼이나 소심한 시골 평민이 수많은 시선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선 쳐다보지 말고, 자기처럼 되기 싫으면 수련이나 열심히 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배짱이 없었다. 그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보에르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순수하다 못해 멍청하기까지 한 그가 그의 눈빛을 읽어낼리 없었다.




"아, 그게……"




로이트가 펠빅의 팔을 붙잡았단 말에 라인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게 뭐라고 다들 수근거리고 있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 말을 들은 모두가 '과연'이란 말을 내뱉으며 담대한 라인의 위세를 논했다. 단순한 라인은 보에르와 피블론처럼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답을 한 것이었지만, 강한 자의 여유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피블론은 좀 더 깊게 설명해주었고, 그제야 라인이 손뼉을 치며 수긍했다.




"근데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뭐 때문에 그런 걸까."




라인의 물음에 피블론이 아카데미에 비밀이 있고, 뒤를 캐보잔 말을 하려는 순간 라인이 먼저 선수를 쳤다.




"뭘 고민하고 있어? 그냥 가서 물어보면 되지."


"어?"




보에르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 피블론은 한쪽 입가를 뒤틀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듯 손뼉을 치며 일어나 그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보에르가 찜찜한 표정을 지을 새도 없이, 피블론은 그와 라인을 데리고 식당 밖으로 가버린 리든과 아이들을 찾아나섰다.


























로이트의 아버지는 아주 평범한 소작농이었다. 당연한 소리다. 가난한 평민의 핏줄이 귀족일리 없으니까. 아주 흔치 않게 권력에서 밀려난 몰락귀족이나 망국의 왕족이 있긴 하지만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았다. 소작농처럼 땅에서 벌어먹지 않고 오로지 돈으로 돈을 버는 법을 알았기에 그렇게 형편이 나쁘진 않았다. 물론 대부분이 과거를 잊지 못해 불평하기 마련이지만, 평민 층이 보기엔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이 애비는 가족 모두가 배불리 먹을 만큼만 벌고 싶다."




초췌한 얼굴의 아버지는 언제나 농기구와 함께였다. 그것도 녹이 잔뜩 슬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쟁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난 짚모자와 땀에 절은 회색 천을 목에 두르며 말이다. 굵직한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아버지는 단맛이 나는 풀을 씹었다.




"헌데 세상이 날 돕지 않는구나."




그 말을 하며, 아버지는 아직 어린 로이트에게 씩 웃어주었다.




"로이트. 왜 우리에게 성이 없는 줄 아느냐?"




손가락을 오물거리면서 아버지 입에서 씹히는 풀을 보던 로이트가, 맑고 큰 눈으로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그야 우린 평민이니까요."


"맞다."




품을 뒤적이며 대충 깎아만든듯한 못난 파이프를 빼들고 입에 물었다. 부싯돌을 힘껏 치자 불똥이 튀기며 파이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뻐끔거리며 연기를 피워낸 아버지가 탁한 숨결을 내뱉었다.




"성이 있는 모든 것이 고귀하다. 귀족, 왕가, 돈 많은 상인, 기사…… 그 모든 것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람들 뿐이다. 하지만 난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럼 로이트야, 기사란 무엇이냐?"

"예?"




아직 어린 로이트에겐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니, 쉽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내기엔 너무 어렸다.




"……검을 든 사람이요."


"그래."




아버지가 껄껄 웃으면서 잔흉터가 가득한 투박한 손으로 로이트의 부드러운 뺨을 쓸었다. 까슬한 감촉에 놀란 로이트가 얼굴을 슥 뒤로 빼지만, 그것도 잠시 거친 아버지의 손길에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는 한 손으로 파이프 담배를 고쳐물며 말했다.




"기사란 남다른 긍지와 신념으로 무장한 인간이다. 그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의지,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하는 마음가짐, 불의를 꺾고자 하는 목적 의식, 강인한 체력과 부러뜨릴 수 없는 검, 그걸 가진 것이 기사다."


"아……"




아버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로이트의 등을 쳐주었다.




"말을 좀 어렵게 했구나. 이거 원…… 친구 녀석이 주절대는 걸 주워듣다보니 나도 녀석을 닮아가는 거 같구나."




잔뜩 깨진 손톱으로 번들거리는 광대를 긁다가,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던 아버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검을 든 사람이 맞을지도 모르겠구나."


"예?"


"그래 맞아. 네 말이 맞다. 기사는 검을 든 사람이야. 하지만 그 검을 무엇 때문에 드느냐가 다른 것이지. 누군가는 힘과 우월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또 누군가는 막대한 부를 갖기 위해 검을 든다. 하지만 그런 이들만 있는게 아니다. 나라의 부흥을 위해 한 몸 바치려는 기사도 있고, 약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든 기사도 있다. 아직 네가 많이 어려서 모를테지. 하지만 너도 이 애비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거다."




담배 연기를 훅 내뱉는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아카데미로 가렴 로이트야. 돈은 충분히 모아놨으니 거기서 기사가 되어라. 그리고……"
































너만의 검을 들거라.


아버지 생각에 비척거리던 로이트가 고갤 들었다. 키라스(해)의 화창함이 눈과 얼굴을 때렸다.


언제 아버지가 다녀간 것일까. 그것보단…… 왜 찾아오신걸까. 자기가 아카데미에서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건지 알고 그런걸까? 그럴리 없다. 아버지께 연락을 할만한 수단이라곤 편지나 파발이 전부인데 글이라곤 제대로 읽기도 힘든 수준인데다 종이와 잉크같이 비싼 건 살 수 없었다. 파발꾼? 턱도 없는 소리다.


그러다 생각난 건 졸업식이었다. 로이트가 이곳에 있은 지 꼭 4년째 되는 날. 곧 있으면 졸업을 하는게 맞았고, 아버지가 그 기간을 알고서 찾아온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큰일이라도……?


그럴 리 없다.


고갤 털며 걸어가던 로이트의 두 눈에 한 아이가 비쳤다. 돋보기 안경을 쓰고서 공터 한 구석에서 책을 읽고있는 아이, 네보였다. 뭔가를 골똘히 보고있는 그를 보던 로이트가 성큼 다가갔다. 왜 그랬는진 모른다. 그저 네보에게 '이끌렸다'란 말이 맞을 것이다. 안그래도 혼란스러운 그의 이성은 제대로 유지하기도 힘들었기에 흐린 생각으로만 움직였고, 곧이어 네보의 머리 위로 그늘이 질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네보는 체력 시험이 끝난 후, 모두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을 만끽하였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이 책과 함께였다. 방에서도, 식사를 할 때도, 심지어 밖에서 쉬는 지금조차 책과 꼭 붙어있었다. 그렇게 활자 중독에 가까운 증세를 보이던 네보가 이질감을 느꼈다. 그가 앉은 자리는 적당한 볕과 마른 땅 덕에 책을 읽기 더할나위 없는 자리였는데 갑자기 그늘이 탁 진 것이다. 고개를 들었다가…… 안경을 떨어뜨릴 뻔했다.




"로…… 로이트……?"




네보의 말에 로이트가 멀뚱히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은 하나 없는 빽빽한 글자가 머릴 아프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해주겠는데…… 거칠게 머리를 턴 로이트가 말없이 네보를 바라보았다. 원체 겁이 많은 네보인지라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다리를 접으며 발끝을 톡톡 부딪쳤다. 그러다 뭔가를 봤는지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나, 나다크! 여기야!"




특유의 졸음에 빠져있는 눈과 귀찮음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나다크가 흐느적거리며 다가왔다. 그러다 로이트에게 시선을 굳히고 네보의 옆으로 와 물었다.




"뭔 일이야?"


분명 네보에게 묻는 것 같지만, 나다크의 눈은 로이트를 향해 있었다. 네보는 떠듬거리면서 괜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 나름 조리있게 말하지만 나다크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모든 감각은 로이트를 향해 있었다.


로이트 역시 나다크를 보았다. 그도 밀레트와 같은 귀족 출신의 자식. 공교롭게도 작위도 같은 백작가의 아들이다. 거기다 옅은 노랑빛을 띄는 머리색 또한…… 밀레트와 비슷했다. 갑자기 구역질이 치민 로이트가 입술을 오므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함을 억누르기 위한 행동이었건만, 나다크의 눈엔 다르게 보였나보다.


마치 자신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 대뜸, 그것도 면식도 없는 자신에게 이러는 로이트를 보며 나다크도 좀 불쾌했는지 고운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왜?"




나다크의 말에서 느껴지는 고압적인 분위기에 로이트가 고갤 돌렸다. 펠빅이나 웰피쉬같은 놈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서 홱 돌아섰다. 마음 같아선 아카데미를 도망치고 싶었지만, 괜한 충동으로 아버지의 부탁이자 자신의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가버린 로이트의 뒷모습을 보며 나다크가 머리를 느릿하게 헝클어뜨렸다.




"난 친해지는 재주가 없나보다."


"……무슨 소리야?"


"있어."




나다크의 말에 네보가 멀뚱히 그를 보았다. 뜬금없는 소릴 하던 나다크가 식당 쪽을 가리켰다.




"배고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어……? 식당 여는 시간은 진즉에 끝났어! 지금 해가 기운지 오래라고!"


"……어. 그러네."




뒷목을 긁어대며 가버리는 나다크를 보며, 네보가 황급히 뒤를 쫓았다. 한참 재밌는 부분을 읽고있었는데…… 그렇게 투덜거리며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떠올리다 나다크와 할만한 얘기를 꺼내며 재잘거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둘의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밀레트와 라이가스.


나다크가 늘어져라 하품을 하면서 힐긋 그들을 보았다. 자신과 네보처럼, 밀레트가 라이가스에게 말하고 그가 답해주고 있었다. 그걸 본 나다크가 쩝쩝 입맛을 다시며 네보 쪽으로 고갤 돌리며,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던 그의 말에 답해주었다. 간만에 해주는 대꾸에 네보가 신이 나서 떠들었고, 두 일행은 그렇게 서로를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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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검(非劍)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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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 16.01.10 195 2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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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1 15.09.02 279 1 26쪽
21 20 15.08.04 279 3 24쪽
20 19 15.07.25 281 7 29쪽
19 18 15.06.23 321 7 26쪽
18 17 15.06.13 166 1 25쪽
17 16 15.05.05 308 4 25쪽
16 15 (수정) 15.04.28 332 2 27쪽
15 14 15.04.06 141 1 27쪽
14 13 15.03.28 266 5 27쪽
13 12 15.01.03 375 9 25쪽
» 11 14.12.23 383 7 23쪽
11 10 14.12.02 383 3 26쪽
10 9 14.11.15 290 5 27쪽
9 8 +2 14.10.15 385 4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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