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마음만은 하얗게 되고 싶은 까만늑대의 책방

비검(非劍)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Blackwolf
작품등록일 :
2013.02.18 22:47
최근연재일 :
2018.06.19 06:38
연재수 :
27 회
조회수 :
8,997
추천수 :
122
글자수 :
313,295

작성
15.05.05 15:53
조회
308
추천
4
글자
25쪽

16

DUMMY

"아, 가기 싫은데요."




보라색이 막 피어난 푸른 머리칼의 소년이,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의 이런 반응은 지켜보는 사람들이 경악할만 했다. 아이란 무릇 버르장머리 없이 굴어도 되건만, 그들은 조마조마하며 아이의 상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선…… 선이 굵다. 창백한 피부와 새빨간 입술과는 달리 몸과 얼굴이 몹시 강건했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자면…… 그래, 거대한 시궁쥐. 햇빛을 피해 달아난 커다란 쥐새끼같았다. 거기다 삐죽삐죽 솟아난 검녹색 머리칼은 지저분한 시궁창에 머리를 감은 것처럼 역겨웠다.


맹독니 코일런.


길거리의 깡패 중에서도 귀족들조차 꺼리는 불량의 대명사였다. 그의 악명은 그 도시 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에도 퍼져 있었으니, 일개 잡배가 어찌 그렇게 유명하냐고 묻는다면…… 베일러 남작을 예로 들 수 있다.


귀족 이외의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귀족들에게 있어서, 더 하등한 것이 노예와 거리의 무뢰배들이었다. 그리고 베일러 남작은 그런 귀족들 중에서도 '결벽증'이 가장 심했다. 하층민들이 듣는 코일런의 명성(?)을 그가 모를까. 널리 알려진 그의 극악함에 베일러 남작은 손수 기사 셋과 병사 스물을 이끌고 퇴치에 나섰다.


결과는? 지금 코일런이 살아있단 것으로 답하겠다. 병사 다섯이 어디가 잘못 부러져 불구가 되었고, 셋은 지금도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같은 수만큼 중상을 입었다. 기사 하나는 검이 부러지는 치욕을 맛보았고, 베일러 남작은 몸소 나섰음에도 일을 실패했다는 오명을 안았다. 그리고 그는 사교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했다.


코일런은 손속이 잔혹하기도 했지만, 귀족의 전술을 말아버릴만큼 잔머리도 뛰어났다. 그렇다고 싸움에 약하냐? 동시에 다섯과 싸워서 살아나기도 했고, 주먹 깨나 쓴다는 건달이 건 싸움을 피한 적이 없었다. 덤벼든 녀석들을 전부 뭉개놓음으로서 주변에서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들었다.


구구절절 말이 길었으나, 코일런은 뒷골목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그를 알고 있었고, 다 큰 어른들조차 그에겐 조심히 대한다. 근데 눈앞에 꼬마는 갓 태어난 피붙이가 포식자를 모르듯 대들고 있는게 아닌가.


코일런의 가느다란 눈썹이 좁혀진 순간, 주먹패들 중 하나인 더분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대, 대장. 고르든이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고……"


"쉿."




코일런이 조용하란 신호를 보내자, 수근거리던 주먹패들 수십이 입을 꽉 다물었다. 오로지 고르든만이 콧김을 쉭쉭 뿜으며 코일런을 노려보았다.




"아니, 그러니까 최소한 설명이라도 해줘야죠. 무작정 거길 들어가라하면 제가 아이고 그러겠습니다 대장님, 이럽니까? 제가 여기에 붙인 정이 얼만데, 4년을 거기에서 썩으라고요? 못해요! 아니, 안해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앙탈이었지만, 코일런은 물론 그 자리의 모두가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과격한 표현일뿐 이 아이가 이 뒷골목에 얼마나 마음을 두었는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이 세계에서 항명은 그야말로 뭇매를 맞기 좋은 거리였다.




"내가 널 들이기 전에 뭐라고 했지?"




코일런의 잔잔한 물음에 고르든이 씩씩거리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한 번 맞으면 두 번 때려라, 요?"


"그거 말고."


"싸움이든 음식이든 가려먹는 순간 약해진다……?"


"음……"




너무 많은 걸 가르쳤나 싶어서 코일런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은원을 확실히 해라."


"아."




고르든이 그제야 반응을 보이자 코일런이 이어서 말하였다.




"은혜를 갚아야할 남자가 있다."




그 말을 하곤 고르든을 바라보더니,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너가 도와줘야 한다."




되려 설득이 안되는 모호한 말이었고, 고르든은 고갤 털어댔다.




"에이씨…… 좋아요. 할게요. 하여간, 나 착한 건 알아가지고……"




그 어쭙잖은 농담에 주먹패들이 킬킬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코일런은 고르든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헝클어주더니, 둘만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건네준 건 싸구려 포도주. 그것도 잔이 아닌 병째로 주었다. 그리고 고르든이 술을 꼴깍거리며 삼켜댈 때, 그의 부탁 아닌 부탁이 코일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포스티어 제국이 델브라를 하나로 만든 것이 약 20여 년 전이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는 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유서깊은 곳으로, 황제 폐하께선 이 아카데미를 통해 여전히 소란스러운 망국의 후예들을 거두기 위해……"




포스티어란 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것 역시 기사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익혀야할 소양이라 하였다. 지켜야 될 나라인데, 그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게 말이 되냐는 소리에 설득 된 아이들은 지루하지만 졸린 눈을 비벼가며 렘피룬트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공터나 연무장이 아닌, 실내에서 조잡한 나무 의자에 앉아 뙤약볕을 피하고 편히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인지 그들의 집중력은 최저를 달리고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렘피룬트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곧 검술을 배울 수 있다지만, 막상 그 기대감보단 눈앞에 보이는 실망감이 큰 법이다. 그래서 교육에 집중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를 거친 학생만 수 백이요, 가르친 학생만 그 배에 이른다. 그래서 학생들이 왜 이러는지, 뭘 원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보단, 거친 학생과 가르친 학생의 차이가 왜 이렇게 나냐면, 하크와 같이 도중에 장애를 가진 걸 들켜 쫓겨나거나 로이트처럼 노예학생으로 전락하는 경우 때문이다.


각설하고, 렘피룬트는 기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란 말을 한 번 더 강조하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기사 양성에 힘을 씀으로서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은 서서히 잦아들었고, 그 결과 현 델브라의 발전도는 제국이 통일하기보다 약 다섯 배는 증가하여……"




보에르는 하품을 살짝 하다, 입을 가리고 끅끅거리며 졸음을 삼켰다. 파란 머리칼만큼이나 푸른 눈이 반쯤 감길듯, 말듯 하다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고 퍼뜩 떠졌다.




'피블론?'


























퍽-!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쥐새끼처럼 야금야금 눈길을 보낸 이유가 뭐냐니까."




고르든의 발밑엔 엉망으로 짓밟힌 피블론의 머리가 끼어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신발바닥으로 짓누르며, 고르든은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빼고 이마를 긁어댔다.




"그리고 쥐꼬리에다 뭘 매달아 논 거야? 엉? 그것만 말해주면 돼. 그럼 나도 너 안때리고, 안괴롭히고 좋잖아?"




피블론은 여전히 굳게 입을 다물었다. 고르든이 되려 속이 터져 가슴을 팡팡 치다가 머리를 뻥 후려찼다. 볼품없이 나뒹군 피블론이 구석 벽에 처박히고, 답답한 기침을 토해냈다.




"아무도 모를줄 알았지? 네놈이 그짓거리 하는 거, 아무도 못볼 줄 알았지? 자, 말해. 거기에 뭘 써서 보냈고, 아카데미에 왜 왔는지."


"말 못하겠는데."




히죽 웃는 피블론이 바닥을 더듬어댔다. 그리고 자신의 팔의 반도 안되는 부러진 나무 토막을 집어들었다. 고르든은 얼빠진 얼굴로 그를 보다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너, 그거 진심이냐?"


"어어."


"그럼 뒤져야지."




한 발, 고르든은 발을 내디딘 순간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상체가 쓰러질듯이 기울면서 피블론에게 날아든 고르든이 검지와 중지를 돌출시킨 주먹을 내질렀다. 피블론은 쥐어터지면서 부푼 한쪽 눈을 감고, 하나 남은 눈으로 가만히 그를 보다가, 휘청거리며 나무 토막을 내질렀다.


아무리 아이의 몽둥이질이라지만, 그간 단련된 체력은 제법 위험한 둔기로 탈바꿈시키기에 충분했고, 고르든은 쇄골과 함께 어깨와 목 사이를 찍히며 아픈 소릴 냈다. 그렇다고 승부가 뒤집어지지 않았다. 되려 고르든의 주먹은 더욱 매섭게 날아 피블론의 배꼽 옆에 찍혔고, 피해가 누적된 피블론은 그 한 방으로 숨이 턱 막혀 주저앉았다.




"어휴, 씨발……"




고르든은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매만지며 피블론을 내려다보았다. 오른발을 뒤로 빼고 고민하다가, 툭, 발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넘겼다. 힘없이 허물어진 피블론이 벽에 등이 닿았고, 그 뒤론 움직임이 없었다.


고르든의 눈이 가라앉았다. 기절한 피블론을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엔 미묘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오지게 아프네 진짜."




물론 이 일은 크게 터졌다. 학생끼리 싸움이 일어난 건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일이 터진 건 손에 꼽았다. 한 번은 귀족 자제가 평민을 죽도록 패놔서 불구로 만들었고, 또 한 번은 상인 출신의 학생 하나가 이성 학생 여럿에게 붙들려 겁간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고르든이 피블론을 수 개월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두들겨놓은 일 역시 아카데미의 어두운 역사에 오르게 되었다.


고르든은 자신이 피블론을 그렇게 만든 걸 순순히 인정했다. 그의 뻔뻔한 태도에 학생들은 표정 관리를 못했고, 교관들은 자수할 경우 벌을 줄여준단 조항을 무시하고 약 한 달 가량 고르든에게 아카데미 봉사 활동을 지시하였다.


말이 봉사 활동이지, 교관들 사이에선 노예 학생 계약이란 말이 떠돌만큼 그 일은 험난했다. 오죽하면 평민 학생조차 돈을 긁어모아 뇌물을 먹여 벌을 줄였겠는가. 화장실 청소나 마굿간 똥 치우는 건 기본이요, 어쩌면 정말 노예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랬기에 다들 고르든이 받게 될 벌을 잘 되었다며 수근거리는 한편, 그 처사가 너무 심하다고 떠들어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 말을 한 아이들은 2조원 전원의 따가운 눈빛을 받아야했다.


어쨌거나 이 충격적인 일이 있은 후로, 바뀐게 있다면 렘피룬트가 교육 시간 때 아군을 공격했을 때 어떤 벌을 내리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단 것과 임시로 2조장을 선출하였단게 끝이었다.




"나…… 나 진짜 못 하겠어……"




라인의 소매를 잡고 후들거리는 보에르를 보며, 2조원 대부분이 실실 웃어댔다. 이름만큼이나 귀엽기 그지 없는 아이지만, 피블론도 인정한 노력파에 끈질김을 갖춘 남자 중의 남자였다. 무엇보다 체력 시험 이후로 힘자랑 깨나 하던 아이들도 라인의 무시무시한 명성 앞에 입을 다물게 되었다. 비공식적으로 아이들 중 최고의 힘을 가진 라인! 그런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오우거 주니어였으니, 그저 이 별명이 못생겼단 뜻으로 지어진줄 알고 라인이 난동을 부렸고, 그 흉포함(?) 덕분에 별명은 굳혀져버렸다.


반면, 보에르는 그런 험하고 무식한 라인과는 달리 여리여리한 모습과 소극적인 모습으로 학생들 사이에선 제법 인기가 있었다. 왠지 모르게 챙겨주고 싶고, 성격 또한 아이들이 절로 가슴이 따뜻해질만큼 온화하였으니…… 피블론이 적극적으로 친구를 만든다면, 보에르는 타고난 매력으로 친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모습과는 달리 검을 잡았을 때의 힘과 의지가 대단했으니, 전설에나 나오는 엘프란 종족과 비슷하단 말이 나돌았다(출처는 네보).


오우거 주니어와 엘프.


이 반대된 성향과 별명을 가진 둘을 보며, 2조원 중 한 명인 나무꾼 출신의 릭트가 히죽 웃으며 나섰다.




"하지만 우리 중에 할만한 아이가 없는데? 정 뭣하면 내가 해줄 수도 있지!"


"너가 할 바엔 내가 나서고 말지."




릭트의 말에 아드가 냉큼 나서서 한 마디 했다. 릭트는 눈을 도끼날처럼 뜨며 바닥을 쿵쿵 굴렀다.




"이게 고블린 따위한테 쪼는 주제에!"


"그러는 넌, 그 고블린 따위랑 상대나 해봤어?!"


"기회가 안 와서 그렇지, 내가 상대했으면 그 놈은 진즉 끝났어!"


"허세!"


"아니거든!"




둘의 말싸움이 심화되자, 보에르가 조심스럽게 나섰다.




"그, 그러니까…… 내가 한다 해도 피블론처럼 잘 할 자신이 없는데……"




라인은 얼굴이 점점 벌개지면서 말을 더듬는 보에르를 보며,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자기랑 몇 사람 앞에선 그렇게 말을 잘 하더니, 사람 수만 많아지만 심하게 긴장을 했다. 특히나 조장이란 큰 직책(?)이 언급되고 있었기에, 보에르의 소심함은 극도로 치솟았다.


이 모습에 답답해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결코 보에르가 조장을 맡는 것에 불만을 갖지 않았다. 릭트와 아드를 선두로 모두가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잠깐만 맡아주면 되잖아. 잠깐만. 피블론이 다 낫고 돌아올 때까지 만이라도 너가 맡아주면 되는 거야. 안 그래 얘들아?"




라인의 말에 2조원 전부가 고갤 끄덕였고, 보에르는 쭈뼛거리면서 아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수많은 눈빛 속에서 보에르는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그들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죽도록 싫지만 이 일을 맡는가. 꼴깍. 침을 삼키더니 라인의 소맷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럼…… 피, 피블론이 다 나을 때까지만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걔보다 잘 할……"




자신이 없다. 이 말이 나오기도 전에 2조원 전부가 환호하며 보에르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들의 물결에 휩싸인 보에르가 라인을 놓치고 그대로 번쩍 들어올려져 허공으로 던져졌다. 보에르가 버둥대다가 세 차례의 헹가래를 받고 축 늘어져서 라인에게 돌아왔다.




"축하한다. 임시 2조장."


"어으응……"


























-그건 왜?-




손바닥에 그려지는 하크의 물음에, 로이트는 입을 꾸물거리며 대답을 미적거렸다.




"생각해보니 나도 무심하다, 싶어서. 나 말고도 나와 같은 처지에 있거나, 나보다 심한 처지의 아이들도 많은데…… 관심도 안 가지고……"




그 말에 하크는 다리에 들러붙으며 애교를 부리는 카나르를 안아들고, 녀석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리곤 골똘히 생각하다가 로이트에게 카나르를 넘겨주고, 그의 손등에다 대답을 그렸다.




-아무래도 너랑 나처럼 끝까지 남은 경우는 드물어. 소리를 못 들었던 $&&#는 마구간지기를 하다 지쳐서 나갔고, 절름발이였던 #!$%는 짐을 나르다가 깔려서 그대로 쫓겨났어. 아마 이 아카데미에서 진급도 못하고 계속 남아있거나, 그냥 일만 하는 애는 너랑 내가 전부일거야.-




안그래도 글을 정확히 깨우치지 않아서인지, 이름을 쓸 때는 뭔가 휘갈겨 써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로이트는 그런 얼버무리는 형식의 말을 전부 이해하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하고 있었다.




-아, 그리고 체벌 형식으로 봉사 활동을 시키는 경우가 있어. 그러고보니 최근…… 너랑 같이 교육받는 4급 학생 중 하나가 봉사 명령을 받았대. 이름이…… 음…… 코븐……? 고른……? 도브른…… 아무튼 그래.-




로이트는 알겠다며, 카나르를 꼭 안아주곤 바닥에 내려놓았다. 머리를 털며, 생각을 고친 로이트가 하크와 함께 창고를 나섰다.




-아, 혹시 헤스타란 애 알아?-


"헤스타? 맞아?"




이번에도 틀리게 썼나 싶어서 되물어보니, 하크가 끄덕거렸다. 로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하다가, 밀레트나 라이가스와 함께 종종 언급되던 이름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귀족의 아이란 것도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걔는 왜?"




로이트의 가라앉은 표정에서, 묘한 느낌을 받은 하크는 손가락을 움찔 떨었다. 뭐지? 가끔 발작 비슷하게 그의 감정이 터지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렇게 은근히 흘러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런 소름끼치는 기분이라니. 땀 한 방울이 맺혀 흘렀다.




-저번에 두들겨 맞다가 도움을 받았어. 그래서 고맙다고 하려고-




로이트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아쉽게도 아직 경험도 없고 어린 로이트에게, 서툰 하크의 감정을 읽어낼만한 연륜이 없었다. 그저,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손을 내민 걸 고마워한단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그러다 제법 위세가 높은 귀족가의 자식이 왜 하크를 도왔는지 궁금해했다.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도우며 우월감을 느끼는 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우연히 그를 도왔을 수도 있었다. 결코 귀족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은 로이트는 입술을 꼭 물며 하크를 돌아보지 않고 말하였다.




"그런 걸로 고마워하지마. 귀족이란 것들이 조금만 신경썼더라면 네가 처한 상황도 오지 않았어."




하크는 얼떨결에 고갤 끄덕였지만,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정말 로이트의 말이 맞을까란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왜 그가 저런 말을 하는지였다.


























"결국 이 조인가."




한숨 섞인 말과 함께 렘피룬트의 곁에 있던 두 명의 교관 중, 가장 젊은 에너텔이 말했다.




"하지만 그대로 결정한다면 귀족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됩니다. 안 그래요, 브렘비 교관님?"




그 말에 머릿 속에서 밀레트에게 받게 될 돈을 계산하던 브렘비가 수염을 파르르 떨며 답했다.




"그, 그럼! 체면 뿐이겠나. 따지고 드는 애들도 있을테지. 그러지말고 1조에게 검술을 가르쳐준다고 하세, 어차피 제트 그 아이만 하더라도 그럴 자격은 충분하지. 암, 그렇고 말고."


"렘피룬트 교관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둘의 말에 렘피룬트의 이마가 짜그라졌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일이 결정되었다. 한 학급의 학생들 중에서 우수한 몇만 뽑아내어 가르치던 걸, 조로 나누고 해당 조 전원을 가르치는 것으로 바꿔봤지만 결국 기준은 귀족이었다.


물론 렘피룬트도 그들의 말을 부정하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인재를 버리기엔 교관으로서의 삶도, 어른으로서의 삶도 길었다. 거기다 아카데미의 일에 조금씩 회의를 갖던 중에 밀레트가 불을 붙여버렸다. 그들의 결정에 불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후우, 그럼 1조로 결정하면 되겠나?"




그의 대답에 에너텔과 브렘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럼 멜베스크 총교관 님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가면서 졸업식 얘기도 제가 하겠습니다. 괜찮겠죠?"




렘피룬트와 브렘비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에너텔은 히죽 웃으면서 이번 일을 보고하기 위해 자리를 나섰다. 교관실을 벗어나자마자 보인 건 큰 덩치에 무식하게 생긴 렐프였다. 성난 얼굴로 씩씩대던 렐프가 에너텔을 보자마자 표정을 싹 고치곤 어깨를 좁히며 다가왔다.




"아이고, 에너텔 교관님. 요즘 업무 때문에 많이 힘드시다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에너텔은 별로 좋지 못한 기분을 표정으로 대놓고 드러냈다. 이 오크같은게 왜 이러지? 아니나 다를까, 렐프가 머릴 긁적이면서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그…… 있지 않습니까. 마구간 청소하는 신뺑. 요즘 로이트 그놈이 시원치가 않아서, 무기창고 정리하는데 여간 애를 먹는게 아닙니다."




조금 이상한 말투. 척 들어도 배우지 못한 천한 것이란 느낌이 확 들었기에, 에너텔은 귀를 후비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학생들을 체벌하고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건 엘도슨 지도교관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한테 말해봐야 별 소용 없는데?"




안그래도 젊은 놈이 말을 놓는 것도 마음에 안드는데, 가시가 잔뜩 돋친 상태로 말하니 렐프도 구겨진 인상을 피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카데미에서든, 밖에서든 그가 자기보다 훨씬 위엣 사람이고 자기는 아랫 것에 불과한 것을.




"아휴,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부탁하는거 아닙니까? 저같은 놈이 그분한테까지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찾아간다 해도 제 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교관님 정도는 되어야 말이 가고,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렐프가 계속 해서 낮은 자세로 나오니, 에너텔도 불쾌함이 수그러들어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으음…… 그렇다고 함부로 빼가면 거기 담당하는 고용인도 날 찾아와서 자네와 똑같은 말을 하지 않겠나? 그럼 어떻게 될 지 뻔하지. 내 스스로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네."


"그러니 몰래 해달란 말입죠, 몰래…… 제가 어디 그냥 해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2실번짜리 은화 두 닢을 내밀었다. 평민들에겐 눈이 번쩍 뜨일 금액이었지만, 아쉽게도 이곳의 교관에겐 그렇게 입맛이 도는 돈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뇌물을 거절하고 공짜돈을 싫어할만큼 에너텔의 성품이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큼. 말은 해보겠네만……"


"알지요, 알지요. 그냥 맛좋은 술로 입가심하시라고 드리는 거니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요."


"그럼……"




에너텔은 돈을 챙겨들고 그 자리를 떴다. 렐프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누런 침을 탁 뱉고 콧김을 쉭쉭 뿌리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고개 뻣뻣한 것들은 다 알아줘야한다니까. 더러워서 참…… 크람 그 새끼랑 술이나 마셔야지."






























하크도 처음부터 벙어리는 아니었다. 작지만 한 마을의 촌장인 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우며 살았고, 끼니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돈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머리가 검다는 것이다. 포스티어 통일 전쟁 당시, 그들을 가장 애먹인 건 바로 튜나 왕국이었으니, 그곳에서 고스트 나이츠라는 희대의 악마들이 포스티어의 수많은 병사를 학살했다.


그리고 고스트 나이츠는 전원, 새까만 갑옷에 검은 검을 들고, 피부조차 까맣게 물들였으며…… 전원 머리칼이 검은빛이었다. 그래서 포스티어 제국이 통일하고 난 뒤, 검은색은 불길한 색이 되었고 이 인식은 제국의 수뇌부와 함께 정보국이 전력을 다해 사상화에 성공하고나선 '악마의 색'이 되어버렸다. 그 덕분에 애꿎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은 돌을 맞거나 집에서 쫓겨났고, 때때로 불에 태워죽이는 극악의 방법으로 마을에 온 액을 쫓아내기도 했다.


다행히 하크가 살던 곳은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들이 없었지만, 적어도 고운 시선을 받진 못했다.




"이 괴물아~"




특히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그저 하크가 악마의 색을 가졌단 이유만으로 돌을 던졌다. 이따금 돌팔매에 머리가 찢겨져도 하크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촌장의 아들이라지만 여기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간 쫓겨날게 분명했다.


사실 하크의 아버지가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아이의 부모님들에게 한 마디씩 했고,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쌓이는 화를 하크에게 푸는 것이다. 이 끝없는 되풀이는 한 사건으로 끝이 났다.




"커헉! 컥!"




메실리아 꽃의 열매는 지독한 독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맛있어 보이는 외형에 속아 한 입 먹으면 어른도 사나흘은 앓아 누울 정도다. 그런데 하크가 이걸 먹은 것이다. 뒤늦게 열매를 토해내게 하고 약을 처방하였지만, 독은 면역력이 약한 하크의 몸에 치고 들어가 크나큰 부작용을 남겼다.


바로 목소리를 뺏은 것이다.


아이들은 먹지 말라고 했다고, 그런데도 하크가 먹었다고하지만 길가에 난데없이 메실리아의 열매가 나겠는가? 아이들은 하크가 말을 하지 못하기에 안심하고 있었지만, 글을 써서 얘기할줄은 몰랐기에 부모님의 뭇매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절망했고, 마지막 희망으로 아카데미에 하크를 입학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바로, 벙어리란 장애가 문제였다. 포스티어 제국은 물론, 그 이전의 모든 나라도 장애인에 대한 대우는 좋지 않았다. 하물며 귀족들이 다니는 아카데미야 오죽할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그가 무슨 큰 일을 당할지 몰랐다. 그렇게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지만…… 결국 벙어리인게 들켜버렸다. 그리고…… 노예 학생이 되었다.


하크는 지난 날을 되새겼다. 그리고 이제껏 자신을 곱게 봐주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마을의 아이들, 그 부모님들,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교관들…… 모두가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도 않고 혐오스런 표정만 지었다.


그래서…… 로이트의 시선이 너무 좋았다. 아무런 편견없이 봐주는 그의 순수한 눈이 좋았다. 그런데 요즘, 그의 눈빛이 많이 변했다. 지독히 쓸쓸한…… 어딘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눈빛이 하크를 두렵게 만들었다. 왜일까.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하크는 영원히 못 잊을 한 사람을 만났다.




[헤스타]




입을 뻐끔거려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연무장에 서서 조금씩 떠오르는 붉은 달을 바라보는 그녀에게 멍하니 다가갔다. 그리고 헤스타도 그를 인지하였는지 고갤 돌렸다. 동그랗게 떠진 두 눈이 하크를 담았다. 그리고 하크의 칙칙한 두 눈도 그녀를 담았다.


한 편, 이 둘의 만남처럼 서로의 삶에 지극히 영향을 끼치는 만남이 이뤄지고 있었다.




"넌……?"




로이트는 창고 앞에서 라호드 노인을 퉁명스럽게 쳐다보는 아이를 보고 있었다. 곳곳에 보랏빛이 번져가는 푸른 머리칼의 소년이 로이트를 보더니 히죽 웃었다.




"안녕?"


"어어……?"


"앞으로 너랑 같이 일하게 됐다. 잘 가르쳐줘."




고르든과 로이트의 첫 만남이었다.


작가의말

딱히 께이 전선을 노리진 않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검(非劍)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다시 써보려합니다. 17.09.16 25 0 -
27 26 18.06.19 27 1 24쪽
26 25 17.09.30 36 1 23쪽
25 24 16.01.10 195 2 24쪽
24 23 15.10.15 178 1 23쪽
23 22 15.10.02 228 1 24쪽
22 21 15.09.02 279 1 26쪽
21 20 15.08.04 279 3 24쪽
20 19 15.07.25 281 7 29쪽
19 18 15.06.23 321 7 26쪽
18 17 15.06.13 167 1 25쪽
» 16 15.05.05 309 4 25쪽
16 15 (수정) 15.04.28 333 2 27쪽
15 14 15.04.06 142 1 27쪽
14 13 15.03.28 266 5 27쪽
13 12 15.01.03 375 9 25쪽
12 11 14.12.23 383 7 23쪽
11 10 14.12.02 383 3 26쪽
10 9 14.11.15 291 5 27쪽
9 8 +2 14.10.15 385 4 3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